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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학이란 준비된 일차의료의사를 양성하는 전문과목이다. 가정의학 전문의로서 당연한 관심사가 일차의료이다보니까 일차의료에서 하나의 완벽한 기형이라고 할 수 있는 쿠바 일차의료에 대한 위의 책을 읽게 되었다. 미국의 대학교수 2인이 집필한 책을 하바드 보건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 4인이 번역한 책이다.
아름답고도 부조리한 나라,
쿠바 사회는 모순 덩어리 그 자체이며 천국도 지옥도 아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은 섬나라라고 하는데-
쿠바의 일차의료 모델이 성공한 이유는 성별, 인종, 나이, 그리고 지역들 사이의 불평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점, 지역사회 기반의 예방의료를 실현하는 데 꼭 값비싼 의학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사회 내 모순과 갈등은 불가피하고 일차의료 시행에서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점 등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일차의료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의료서비스를 국민 모두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정부가 개인들의 선택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쿠바의 보석'이라고 하는 지역사회 기반 일차의료서비스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건강은 인권'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정부의 지원아래 현실에 맞는 제도를 실행해 가면서 필요에 따라 모순을, 어려움을 극복해 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59년 카스트로에 의한 혁명 성공 후의 일차의료 1단계는 종합진료소(일반의, 간호사, 산부인과와 소아과 의사,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함께 일하며 직장보건, 소아건강관리, 가족건강관리, 지역보건 담당)시기이었으며, 초기의 많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반의 한 평가에서 종합진료소 기반의 체제가 여러 전문 진료과목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데 실패했으며, 전문과목별로 각각 따로 일한다는 점이 종합진료소 모델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또 하나의 한계는 의사들이 예방프로그램보다 치료의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종합진료소 모델은 의료인과 환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74년에 등장한 것이 지역사회 기반 의료 모델이며 일차의료 2단계라고 할 수 있다. 예방활동에만 집중하던 일차의료에서 탈피하여 종합진료소의 역할에 노인층과 만성질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추가하여 의료 서비스의 질 개선을 도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합진료소의 교육연구 기능을 강화하고 지속적인 의료서비스, 체계적인 건강위험 평가 등의 개선책을 내어 놓은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정부가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자
1984년 3단계에 해당하는 가족주치의 모델이 도입되었다. 가족 주치의 모델은 이전 모델들에 대한 평가결과를 바탕으로 태어났다. 지역사회 변화에 적극 나서고,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개선에 비중을 두며, 건강한 생활습관을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제도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약 120에서 150가구 단위로 묶여진 구획을 가족주치의 한 명이 담당하는 새로운 지역구분 방법이며 오전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오후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상담, 교육,진료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쿠바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주목할 만하다. 자신들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 정보에 입각하여 새로운 모델로 수정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결국 접근성, 형평성, 그리고 서비스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개선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책 중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아래와 같다.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의 한 진료소를 찾은
캐나다인 의사의 질문: 진료소 환자 가운데 몇 명이 고혈압 환자입니까?
진료소 의사: 약 30%입니다.
캐나다인 의사: 그 가운데 몇 퍼센트가 혈압 약을 복용 중입니까?
진료소 의사: 거의 없습니다.
의료 물자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쿠바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주로 운동과 식이요법을 권하고 있으며 심한 경우가 아니면 약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식이조절과 운동요법을 통한 혈압 조절에 매우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어떤 의사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혈압 조절에서 환자의 생활태도 변화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하였던가?현실적으로 비약물적 생활태도 변화로 혈압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는 있는가?
어제 한겨레에 흥미있는(?) 기사 하나가 떴다. <화씨 9.11>의 감독 마이클 무어가, '치료'를 위해 '적성국'인 쿠바로 9.11의 '영웅'들인 구조대원들 10여명을 '무단'으로 데려갔다는 거다. 무어는 그들이 쿠바에서 9.11 구조현장에서 얻은 병을 치료받는 과정을 다큐 영화 <시코>에 담았다고 한다.
노발대발하는 미국의 반응을 요약하면 '근데 왜 하필 쿠바인가?'다. 왜 미국 정부와 언론들은 이들의 쿠바 행에 발끈하는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잔해철거 작업을 했다는 노동자는 왜 "나는 쿠바에 가느니 미국에서 죽겠다"며 격하게 반응했을까? 9.11의 영웅들과 무어가 단순히 미국의 '적성국교역법'을 위반해서?
'영웅'이 쿠바 행을 택한 또 하나의 유명한 사례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는 마약 및 심폐질환 치료, 그리고 요양을 위해 쿠바에 장기간 머무른 적이 있다. 지금도 쿠바를 종종 찾는다. 마라도나는 왜 첨단의술의 나라 미국이 아닌, '고립된 섬' 쿠바를 택했을까?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어서? 카스트로가 마라도나 팬이라서? 아르헨티나 출신 체게바라가 혁명을 완성한 곳이라서?
이 사건으로 미국 주류들은 크게 상처 받은 것 같다. 그들이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던 구조대원들이, 최첨단 기술대국일 뿐 아니라 최고의 '인권'국이자 '민주'국가이라 자찬하던 자기 나라를 놔두고, 딴 데도 아니고, '후진국'이자 '적성국'인 쿠바로 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치료 때문이라니! 쿠바가 어떤 나라인가? '인권'도 '민주주의'도 없고 더구나, 세계 주류 국가의 의사협회들로부터 "우리는 그들이 의사인지 알 수 없다"면서 '불법의료행위'와 '무능력'으로 규탄 받고 있는 그런 나라 아니던가!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주류 의사들은 쿠바의 의사자격증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쿠바 의사들은 과연 돌팔이인가? 주류 의사들이 쿠바 의사들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사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새삼스레 쿠바의 의료체계가 주목받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무료 의료시스템과 수준 높은 의료기술 때문에, 쿠바는 소위 '의료 관광객(medical tourist)'들로 붐빈다고 한다. 양질의 의료혜택을 누리기 위해 외국에서 해마다 5,000명 이상이 찾아온다고 한다. 왜 그런가?
먼저 표를 보자. 보통 한 나라의 의료수준을 평가하는 기준은 기대수명과 영아사망률이라고 한다. 근데 세계보건기구가 조사한 아래 표를 보면 미국과 쿠바가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의사 1인당 국민 수에서는 쿠바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구분 |
기대수명 |
영아사망률 |
의사 1인당 국민수 |
남 |
여 |
쿠바 |
75 |
80 |
6.0 |
160 |
미국 |
75 |
80 |
6.0 |
390 |
한국 |
73 |
80 |
5.0 |
630 |
정부차원에서 국민 1인당 의료정책에 쏟아 붓는 금액이 미국은 연간 2,550불 수준인 반면 쿠바가 270 달러에 불과함에도 위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쿠바가 기초적인 의약품과 의료장비 수입조차 막아버린 미국의 경제봉쇄를 40년 이상 겪고 있으며, 1959년의 혁명으로 약 3천명의 의사가 미국으로 탈출하여 한동안 의료 인력의 씨가 마른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런 쿠바가 몇 년 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루이지애나 등에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 대규모 의료봉사단 파견을 제의했다. 쿠바는 그 이전에도 전 세계 재해지역에 수만 명의 의사들을 파견한 바 있으니 쿠바로서는 당연한 제의였겠으나, 미국이 이유도 불분명하게 거절했다 하니, 이게 미국과 부시의 그릇이다. 미국은 정말로 쿠바의사들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믿은 것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적성국'이라서?
쿠바의 의료시스템은 확실히 미국과는 다르다. 쿠바의 가정의(家庭醫) 시스템에서 의사들은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주민들의 실상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가족은 몇 명인지, 어디에서 자고, 어떤 소득원을 가지고 있는지 등, 일종의 요즘 유행하는 라이프 플래너 역할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쿠바는 예방의학을 지향한다. 전 국민의 99%를 포괄한다는 가정의를 중심으로 한 예방의학, 이게 쿠바 의료혁명의 핵심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의사들과 주민들(예비환자들)의 소통과 교감이 중시된다. 미국에서 환자들이 종종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쿠바의사들은 미국의 경제 봉쇄가 극에 달했을 때, 기초 의약품 구입이 어려워지자, 민간요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응용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성공해냈다 한다.
그래서 다음 비유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미국의 의학은 첨단 치료법을 개발해, 죽어가는 돈 많은 사람을 곧잘 살리지만, 살릴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죽인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일인당 의료비 지출액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쿠바 국민들의 기대수명이 같은 이유다.
미국이 믿고자 하는 현실과는 다르게, 쿠바 의사들은 국가에서 엄격한 교육을 거쳐 양성되어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도덕적 자질(커뮤니티에서 '반듯한 청년'을 골라 추천한 자를 의사로 키운다.)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 의사들이 무료로 쿠바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미국만 모르고 있다. 아니, 알고서도 모른 체한다. 이것이 9.11의 영웅들과 마라도나가 쿠바를 찾은 이유인 것은 분명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이 글의 주제는 쿠바의 의료시스템에 대한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미국이 발끈한 이유? 정도가 되겠다.
쿠바의 의료시스템을 살펴보면, 앞서 '쿠바에 가느니 차라리 미국에서 죽겠다'고 일갈했던 노동자는 미국정부와 언론에 반쯤은 속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거창하게 보이는 인권이라는 것이 결국 생명을 대하는 자세 내지 태도를 의미할 텐데, 그렇다면 밤낮없이 '인권' '인권' 타령하던 미국의 수준이 결국 쿠바보다 못하다는 것인가?
보도에 따르면, 민간업체들의 힘에 좌우되는 미국 건강보험은 수가가 높아 전체인구의 20%는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의료보호 시스템은 치명적으로 망가진 상태'라고 한다. 무어는 9.11의 영웅들을 쿠바로 데려감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노렸을 것이 분명하다.
클린턴이 한 때 모든 미국 국민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한 바 있으나 어인일인지 건강보험 업계의 강력한 로비에 휘둘려 포기했다 한다. 콜롬바인 고교와 버어지이나텍 사건 이후 미국 총기협회 로비로 "총기소유 제한"하자는 말이 나오다 만 것하고 상황이 같다. 주사바늘이나 총기 모두 인간의 목숨, 즉 인권과 직결된 것이다. 부시류는 '개인의 저항권', '헌법 정신' 운운하며 오히려 총기소지를 부추기고, 미국 의사들은 환자를 '돈'으로 보고 있다. 결국 부시가 전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온 '인권'이라는 놈은, 장작 미국에서는, 진지한 고민 없이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적인 물건으로 간단히 환원된다.
9.11 영웅들이 쿠바로 향한 것은 무어의 진짜 의도와는 무관하게, 매우 상징적이다. 9.11의 악몽과 이라크전 실패 이후 미국이 분명 쇠퇴의 길로 확연히 들어섰다는 증거의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말로 자체 검증이 제대로 진행되는 사회라면, 미국 사람들은 부시를 다시 뽑지 말았어야 했다. 부시 본인 말대로 "한 번 속았으니 다시 속을 순 없"는 것인데, "한 번 더 속았으니, 그건 니네들 탓이다(테네시의 속담)" 이러한 잘못한 선택이 더욱 몰락을 자초한다는 뜻.
이제 <시코>가 개봉되면 미국 의료제도의 허점, 더 크게는 '인권'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판이다. 그래서 미국 고위층과 수구언론들이 발끈하다 보다. (하여튼 자신 없는 것들이 발끈 잘한다. 박모씨도 그러더만). 미국이 쿠바로 향한 9.11의 영웅들에 발끈한다고 해서 사태가 반전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미국의 초조함만이 더 묻어날 뿐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가 마이클 무어를 조사하기로 한 것은, 그가 적성국교역법(미국판 국가보안법인가?)을 위반해서가 아니라, 이 다큐가 개봉될시 미국의 부시류들이 그동안 쿠바의 실상에 대해 속여왔다는 것을 국민들이 눈치챌까봐 그런가? 미국 사람들이 진실을 확인하면, 9.11보다 더 근본적인 충격과 공포가 휩쓸 것 같아서? 미국은 지금 일개 다큐영화에 벌벌 떨고, 무어는 필름이 압수당할 것에 대비해 사본을 모처로 빼돌렸다 한다. 이게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코미디다.
(사족) 한국 사람이 쿠바 의사에게 물었다 한다. “(한국에서는 최근에 사람들의 의료 남용이 심각한데)...(쿠바에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무료라는 점을 악용해서 병원을 지나치게 많이 이용하지는 않나요?” 질문을 받은 쿠바 의사는 이 질문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충분히 참고할 만한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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