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영남사람들 .43] 안동 장씨 | |||||||||||||||||
교육과 애국 '女中君子' 題字 : 토민 전진원
7년 동안이나 지속된 임진왜란이 끝나기가 무섭게 북쪽에서는 또다시 여진족의 발호가 시작되어, 17세기 벽두는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남쪽 왜적의 침공에 대비하랴, 북쪽 오랑캐의 침략을 저지하랴, 수많은 무지렁이 농부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어 변방에 투입되었다. 안동 검재에 살던 한 젊은 농부도 군인으로 차출되었다. 살아 돌아올 기약 없는 험난한 여정을 앞에 두고 젊은 아내는 울부짖었고, 70세 노모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간신히 일어나 떠나는 아들의 다리 사위를 붙잡았다. 떠나는 이와 전송하는 이들로 온 마을이 떠들썩하던 그 무렵, 13세의 어린 소녀는 그 때의 슬픈 심정을 시로 담아냈다. '백발 늙은이 병들어 누웠는데/ 머나먼 변방으로 아들 떠나보내네/ 아들을 변방으로 떠나보내니/ 어느 날에나 돌아올 수 있으리.…/ 백발 늙은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났지만/ 일어섰다간 다시 넘어지네/ 지금도 이럴진대, 옷자락 끊고 아들 떠난다면 어찌 할 것인가.'-백발 늙은이(鶴髮詩) 어린 소녀 시인 안동 장씨(1598∼1680)는 노량해전을 대미로 7년간에 걸친 대전쟁,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아버지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검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 때문일까, 어린 소녀는 사랑방을 기웃거리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곁눈으로 배웠다. 아버지는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愼獨)' '항상 공경하는 자세(敬)'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총기 있던 소녀는 10여세의 어린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몸가짐을 조심하다(敬身吟)' '소소한 빗소리(蕭蕭吟)'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 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약포 정탁의 3子/초서의 대가)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녀는 나이 19세 되던 1617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재령 이씨 가문의 석계 이시명(李時明)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 김씨(임란 의병장 근시재 김해女)와 결혼해서 1남1녀를 둔 27세의 청장년이었다. 남편과는 8살 차이, 게다가 재취로 들어간 자리였으니 새색시가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새색시는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을 제 자식처럼 여겼다.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南慶薰) 선생 집으로 매일같이 업고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새 며느리의 처신을 지켜보던 시아버지 이함(李涵)은 그제야 "저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이라고 동리 이웃들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6남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완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루는 동네 잔치로 이웃들이 모두 모여 기생을 부르고 음악을 베푸는가 하면, 처용무를 펼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임신 중이던 그녀는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접한 친정아버지는 "너는 내게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구나"라며 탄복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택이었을까,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3녀를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 중에서도 둘째 존재 휘일(徽逸), 셋째 갈암 현일(玄逸), 넷째 숭일(崇逸)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손자 온(穩), 밀암 재(栽), 외현손 이상정(李象靖) 또한 문명이 높았다. 그녀는 친정에 계신 부모가 항상 걱정이 되었다. 시댁으로부터 200여 리 떨어진 친정에는 돌보아 드릴 자식 하나 없이 늙어 가는 부모가 계셨다. 외동딸을 멀리 영해로 시집 보낸 친정 부모의 적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부모님께 문안을 여쭙고자 한 해 한 번씩 친정 나들이를 했다. 아버지가 환갑이 되던 해인 1624년 한살 연상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차마 떨어질 수 없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 하에 친정에 2년을 더 머물면서 아버지를 모셨다. 계모를 맞아 친정의 대를 잇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633년 아버지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계모와 4남매를
그리고 아버지 살아 계실 제, 아들 상일·휘일·현일 삼형제를 외조부에게 보내어 학문을 익히도록 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배려로 슬하의 아들 7형제 모두가 문명으로 현달해, 안릉가 '7룡'으로 알려졌다. 특히 셋째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은 영남을 대표하는 사림으로 천거되어, 1692년(숙종 18)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창이던 현종∼숙종 연간(17세기 중·후반)에 남인의 영수로서 크게 활약한 바 있다. 이현일 대에 이르러 재령 이씨의 명성이 세상을 울리게 된 상황에서, 그녀는 자식들이 자만에 빠져 혹여 행신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 "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나는 귀중하게 생각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문득 기뻐하며 잊지 않고 있을 따름"이라며 늘 자식들의 방만과 나태를 경계했다. 그녀에게도 시련은 따랐다. 그녀가 39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청나라 기병의 기습 공격을 맞아 국왕 인조는 광주의 남한산성에 은거하면서 저항했다. 경상도를 비롯한 각지에서는 근왕병을 결성하고 남한산성으로 진격을 개시했지만, 인조는 그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미증유의 위난에 직면하여 아녀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리 이웃들에게 의병 창의를 역설했다. 남편 이시명도 의병에 가담했다. 그는 오랑캐로 여기던 만주 청나라에게 굴복당한 현실에 낙담하여 세상의 연을 끊고 살 것을 결심했다. 이후 그는 영양 석보에 은거하면서 숭정처사(崇禎處士)로서 한 평생을 보냈다. 출세와 영달을 포기하고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그녀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학문에 전념할 것과 제자 양성을 권하면서, 남편의 절의를 드러내고 양심에 따라 사는 학자의 아내로서 헌신했던 것이다. 7남3녀의 어머니로,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수재 자식들을 둔 어머니로 누구에게나 칭송을 받는 다복한 그녀였지만, 딸 둘과 막내 운일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평생을 근신과 공경으로 조용하게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칭송받던 장씨는 73세가 되던 해에 생애를 담담하게 되돌아 보면서 자신의 심사를 '드물고도 드무네(稀又詩)'라는 시에서 밝힌 바 있다. '세상에 나서 칠십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문 일인데(人生七十古來稀)/ 칠십하고도 세살을 더 사니 드물고도 드무네(七十加三稀又稀)/ 드물고도 드문 중에 자식들도 많으니(稀又稀中多男子)/ 드물고도 드문 중에 또 드물고도 드무네(稀又稀中稀又稀)' 장씨는 1680년 83세를 일기로 자식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영양 석보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 현일은 "내가 노둔하고 우매하여 지극한 가르침을 따라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평소 야비한 말과 버릇없이 구는 말을 내 입에 올려 말하거나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실로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금지하고 경계한 탓"이라고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에서 고마움을 회고했다. 장씨는 혼담이 오간 18세 이후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던 서화며 글씨들을 모두 버렸다. 10대 초반에 이미 상당한 문재를 드러냈지만, 결혼한 이후에는 붓을 잡은 적이 없었다. 손자 온과 재에게 학문을 권하는 시를 쓴 67세 때까지 그녀는 시를 쓰지 않았다. 남편 이시명도 그녀의 나이 46세가 되어서야 어린 시절의 시작 '성인을 읊다(聖人吟)'와 '소소한 빗소리' 등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작품에 감복한 남편은 시들을 모아 단아한 행서체로 '전가보첩(傳家寶帖)'이라 이름 붙였고, 둘째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일곱 아들을 상징하는 여덟 마리의 용을 그곳에 수놓았다. 가문에서 전승되는 '팔룡수첩(八龍繡帖)'이라는 서책이 이것이다. 13세 때 지은 '소소한 빗소리'는 다음과 같다. '창문 밖 솔솔 내리는 빗소리(窓外雨蕭蕭)/ 솔솔 내리는 빗소리 자연스럽기도 하네(蕭蕭聲自然)/자연스러운 소리 내 듣고 있으니(我聞自然聲)/ 내 마음도 빗소리처럼 자연스러워지네(我心亦自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