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김구한(81학번)
프롤로그
느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평화의 상징인 기차 비둘기호가 사라졌다. 비둘기호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들의 낭만 하나가 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빠르고 편한 기차들이 질주하는 시대는 낭만이 거세된 시대이다. '빠름'을 희구하는 세상에서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곳은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다. 마치 비둘기호가 그랬듯이 우리들이 함께 숨 쉬었던 ‘무거동 산29번지’란 공간도 충분히 낭만적인 곳이다. 추억을 간직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앙드레지드는 인생의 절반은 즐기고 나머지 절반은 회상하며 산다고 했다. 아! 이제부터 회상하며 살 나이인가?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버린 지금, 나도 내 나이에 대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의 20대는 손 내밀면 바로 곁에 있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 몸을 감싸고 있듯이 그렇게 내 곁에 있다. 살다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나는 항상 헷갈린다. 실상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마치 긴 터널을 지나 맞이하는 밝은 햇살처럼 나의 20대는 항상 그렇게 내 곁에 있다.
코스모스가 줄지어 핀 학교 뒷산을 한없이 거닐다보면 어느새 고추잠자리가 긴 동심원을 그리며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로 이끌림을 당한다. 스무살 피끓는 청춘의 세계로 이끌림...................
이 이야기는 나의 역사이자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풍경 하나 : 입학 그리고 81년의 의미
1980년을 관통했던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1981년을 맞이했다. 81학번! 사연도 많고 한도 많은 학번이다. 그리고 이 학번은 전두환 시대의 유물인 졸업정원제 학번이기도 하다. 대학의 모든 기능은 정치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1970년대가 경제세대로 대표된다면 1980년대는 확실히 광주민주화항쟁의 트라우마를 가진 정치세대라 규정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아이콘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곧 광주와 6월 항쟁으로 대표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적 숙명 속에서 우리들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는 ‘울산공과대학교 인문사회계열’ 소속이다. 이 당시 인문계열은 18조, 19조, 20조로 불리었다. 무슨 군대 편제도 아니고 나에게는 20조라는 낯선 명찰이 붙었다.
아시다시피 공대 속의 인문계란 것은 별종 중의 별종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데 총 여학생 수 140여명 그 중 약 100여명이 인문계열 소속이다. 체육시간만 되면 운동장 계단에는 관중으로 들썩였다. 그때 대운동장은 지금 본관 뒤 잔디밭이다. 하얀색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운동장을 뛰고 체조를 하고 하니까 공대 남학생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하여튼 체육시간에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었다.
개나리가 온 교정을 노랗게 물들이고 진달래가 산천을 붉게 물들일 때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막걸리를 들고 산으로 향한다. 때론 술이 과하여 자체 휴강을 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자연히 성적은 시들시들....... 실체 없는 낭만을 붙잡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것 같다.
5월은 축제의 기간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체육대회다. 이때는 인문사회계열 체육대회였기 때문에 인문계열 대표와 사회계열 대표가 맞붙는 형식이다. 그 중 축구는 매우 치열한 종목 중의 하나였다. 사회계열 대표로 나온 선수가 그 유명한 테니스 선수 김봉수와 유진선이었다. 유진선은 경영학과 81학번이다. 나중에 86년 아시안 게임에서 테니스 4관왕의 위업을 이룬 선수다. 중요한 것은 이 축구시합에서 인문계열이 이겼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축구가 아니라 격투기였다. 우리는 그 날도 흰 막걸리통 들고 막걸리 동산에서 코가 비뚤어 지도록 마셨다.
5월이 다 지나갈 즈음에 인문계열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반구대 암각화 탁본을 하러 갔다. 선생님 대 여섯 분과 학생 대 여섯 명이 한 팀이 되어 1박2일로 반구대로 향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다 새벽 즈음에 암각화 탁본 작업을 시작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것은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작업을 일찍 끝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 전체 탁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 탁본을 가지고 있는 학교는 몇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학교 박물관에 걸려있는 탁본이 그때의 탁본이다.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여 간혹 교내 집회가 있기도 하였지만 울산대학교는 큰 동요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1981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나에게도 어김없이 군대를 오라는 기별이 왔다. 세상에 미련이 남아있는 일들이 별로 없어 군에 가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기 전에 뭔가 한 가지 남기고 가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몇 친구들과 ‘무속’을 주제로 대학신문에 기고를 하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무가’를 전공하게 된 것도 무슨 업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1981년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듬해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에 가기 전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어떤 후배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다.
“선배님! 낭만이 뭐죠?”
“ ……낭 만?……”
“응, 글쎄 나도 몰라”
그리고 돌아 온 후배의 충격적인 한마디가 내 가슴의 한 부분을 깊숙이 찔렀다.
“X도 모르고 군에 간다”고.
그 말 때문에 나는 군 생활 내내 그 놈의 '낭만'과 싸워야 했다.
풍경 둘 : 복학 그리고 우리들의 삶
1984년 8월초, 28개월하고도 15일 더한 후 제대를 했다. 엄혹한 시절 교련의 혜택으로 무려 45일을 앞 당겨 민간인이 되었다. 고참보다 먼저 제대를 한다고 악다구니 쓰는 고참을 보며 기분 좋게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서화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노가다(?) 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복학을 했다.
복학 후 바뀐 것은 내가 정말 ‘국문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열로 들어와 소속도 모른 체 뛰어 다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꼈다. 계열이 아닌 학과 단위로 모집한다는 것과 남자선배에 대한 호칭이 남녀 모두 ‘형’으로 통일 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또한 여학생들이 술을 엄청 마시고 힘이 세다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풍경이었다. 한동안 적응이 안 되어 도서관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5월은 국문인의 달, 우리들 세상~~~~”. 복학 후 내가 다닌 3년 동안 5월은 ‘국문인의 달’이었다. 체육대회는 감히 다른 과에서는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 정말 우리 여인네들은 무쇠팔, 무쇠다리였다. 발야구, 팔씨름, 줄다리기, 계주 등 당기는 것, 차는 것, 뛰는 것 등 지금 말로하면 만능인(멀티플레이어)이었다. 그야말로 못말리는 몸빼부대(?)였다. 남자들은 축구 우승을 3년 동안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 이 또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 흔적은 지금 유일하게 자료실에 트로피가 남아 있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승 기념 자축연은 항상 막걸리 동산에서 거창하게 행해졌다. 이때는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참여해 그야말로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막걸리 동산은 지금 옥현 주공 3단지 쪽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들의 우정과 사랑을 노래하고 때론 우리들의 분노를 하늘을 향해 쏟아 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막걸리 동산은 우리들의 욕망의 분출구였다.
요즘은 봄에 학술답사를 떠나지만 그때는 봄에는 졸업 여행을, 가을에는 학술답사를 갔다. 학술답사는 학창시절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이다. 여행이 쉽지 않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2박3일 내지는 3박4일을 함께 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 많은 것을 얻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가끔 삶이 무료해질 때 그때의 추억들을 떠올려 보면 삶에 생기가 돋는다.
학술답사 버스가 울산을 출발하면 벌써 차 안은 술잔이 겁나게(?) 빠르게 돈다. 먼저 첫잔을 돌리는 것은 선생님들의 몫이다. 선생님이 한 명 한 명 술잔을 건내면 못 마시는 사람도 첫잔은 무조건 다 마셔야하는 암묵적 룰이 존재했다. 우리들의 학술답사는 모든 열정을 술잔에 쏟아 부어 엄청나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잔의 밑바닥까지 핥았다. 그야말로 학"술(酒)"답사였다. 어떻게 분위기 있게 한잔하느냐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한 해는 다산초당 천일각을 갔는데 아뿔사! 술을 챙기지 못했다. 우리들은 선발대를 보내 버스에 가서 술을 가져오게 했다. 무려 30분을 기다려 천일각에서 술 한 잔하고 하산을 했다. 술을 다 마시는데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5분의 분위기를 위하여 30분을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마치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그래서 우리 국문인들은 만족지연지수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은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은 선운사 동백꽃과 동백산장 앞 동동주 집이다. 선운사하면 왠지 모르게 설렌다. 선운사에 가면 떠오르는 사람과 노래가 있다. 갑자기 송창식의 저음을 띤 목소리가 은은히 귓가에 맴돈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눈물처럼 떨어지는 동백꽃이라고 했을까? 그 이후 동백꽃은 나에게 눈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오늘도 나의 가슴 속에는 동백꽃이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 눈물처럼 떨어지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동백산장 앞 동동주 집에서 목이 쉰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안주삼아 잔을 부딪쳤던 우리들의 20대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국어국문학과에서는 82년부터 울산지역 구비문학자료를 조사하고 있었다. 나는 85년부터 87년 무가자료조사까지 참여하였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85년도 조사다. 그때는 조사도 조사였지만 조사가 끝나고 난 뒤의 뒤풀이가 우리를 설레게 했다. 우리들은 조사가 끝나는 마지막날 대운산 입구에서 모였다. 그날 비가 엄청 오는데도 불구하고 비를 맞으며 내원암을 거쳐 대운산 계곡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선생님들과 학생 모두 비에 흠뻑 젖었다. 술인지 비인지 구분도 못하고 우리는 마셨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별로 기억이 없다. 그리고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만약 '낭만'이라는 단어가 정의하기 힘든 단어라면 이때의 분위기를 '낭만'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으리라. 이 사건은 아마 내 술 편력 중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일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조사한 자료를 전사하느라 교수연구동 지하 자료실에서 방학을 라면과 소주로 날밤을 지새웠다. 그때 발품팔며 돌아다닌 덕분에 지금 그것이 내 삶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다시 느낀 진리 하나, 세상 어떤 것이든 배워 놓으면 다 쓰임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일 또 한가지는 치술령 1집 발간이다. 이 일은 선생님들의 지원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산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역시 학회비를 받아서 학회를 운영해야 하기에 학회비를 잘 받는 학회장이 유능한 학회장으로 인정받을 때이다. 그리고 그 회비로는 학과의 기본 행사조차 하기 벅찼기 때문에 다른 행사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선생님들께서 일체의 경비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치술령 발간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우선 광고를 받기 위해 온 시내를 한 달 동안 돌아 다녔다. 무작정 다니다보니 선의로 돈을 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도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조금씩 도와준 덕분에 거의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편집위원들이 노력 봉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출판사에 가서 1박2일 출판사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꼬박 밤을 세워 작업한 결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맞추어 치술령 1집이 나오게 되었다. 그날 밤 밤새 본드 냄새를 맡으며 책 제본에 손이 부르튼 편집부장에게 다시 고마움을 전한다. 그렇게 치술령 1집이 세상에 나왔다. 마치 내가 자식을 낳은 것처럼 가슴 뭉클한 일이었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언컨대 공부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좋은 선생님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촌학교 학생으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우리는 선생님들께 학문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인생을 배웠다. 살아남으려고 무던히도 발버둥쳤던 것 같다. 일단 먼저 학회를 구성했다. 고전, 현대, 어학 그리고 영어강독반으로 나누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회는 꽤나 열심히 하여 나름대로 괜찮은 성과도 내었다. 아마 그때 뿌린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 지금의 학회가 아닌가 한다.
그 시절 나의 정신적 안식처는 학교 앞 최모군의 자취방이다. 집이 먼 관계로 한 잔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이 되었다. 우리는 밤세워 청춘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민주주의와 역사를 이야기하고, 더하여 그 울분을 또 술로 달래곤 하였다. 아마 85년이 다지나가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 스스로가 이 시대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라 규정했던 김정호란 가수가 죽었다. 우리는 이 날 노래를 주제로 밤세워 술을 마셨다. 양희은에서 김민기로, 다시 서유석으로, 또다시 김정호로, 다시 운동권 노래로.... 결국 이 날은 김정호 노래로 마무리 지었다. 고단한 시대, 우리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던 한 가수가 죽었다. 그 일로 우리는 우리의 청춘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서 냄비에다 커피를 끓여 커피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밤새 마신 술로 인해 나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속이 거북하여 중간에 내리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김정호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것은 '속쓰림'이었다.
나에게 대학 3학년은 새로운 도전으로 바쁜 시기였다. 학회장을 비롯하여 벌여놓은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있었다. 학회 모임을 통해 나는 또다른 세상과 이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항상 뭔가 아쉽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긁어도 긁어도 시원하지 않고 계속 가렵기만 한 한 곳을 긁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 마음을 뒤흔들 수가 있구나 하는 것도 그때 처음 느꼈다. 그 이후 그 여자는 나와 항상 밥을 같이 먹고 커피를 같이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나에게 '낭만'에 대해 고민을 안겨 준 후배를 만났다. 그 후배가 말하기를 "형님 요즘 같이 사는 사람이 옛날 늘 붙어 다니던 그 여자 맞아요?" 그 후배 말을 듣고 나니 거의 자석처럼 붙어 다녔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별로 해 준 것이 없는데 한 남자를 자기 나이에 걸맞게 살게 해 준 한 여자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국문학을 하는 인연으로 만났다는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요즘은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중늙은 처자의 외간 남자"가 되어 소젖보다 흰 막걸리 한잔에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즐기며 산다.
나는 아직도 청년기의 문화적 낙인이 남아 있다. 술과 문학, 그리고 노래들...... 그 낙인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산다. 추억은 좋은 추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 온 삶의 과정이 다 우리들의 역사이기에 소중하다.
그대! 혹시 '무거동 산29번지' 앞을 지날 때 한번쯤은 추억의 사진첩을 펼쳐보자. 과거가 총천연색으로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다 우리들의 추억은 흑백사진이 아닌 총천연색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 사진첩을 펼치는 일만 하면 된다. 사진첩을 보면, 그래서 늘 흐뭇해진다.
풍경 셋 : 다시 돌아온 곳, 2011년의 모습
우리 아버지 세대가 경제세대였다면 우리 세대는 정치세대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후배들은 어떤 세대일까? 이들은 서태지를 모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문화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자유분방함을 바탕으로 한 소비와 대중문화가 이들의 주된 화제이다. ‘우리’가 아닌 ‘나’에 천착한 세대이며, 자기의 고민으로 하여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세대이다. 문화 성취욕은 높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비용을 충당할 만한 여건이 안됨으로 인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광장'보다는 '동굴'로 회귀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문화세대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특징들이 우리 후배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조금 희망적인 것은 '국어국문학'을 한다는 것이다. 4년 동안 녹아든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평생의 자산이 되어 각자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이 누리는 학교생활을 잠깐 들여다보자.
MT를 통해서 희생과 공동체 문화를 배우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번뜩이는 지혜는 없더라도 지긋이 하는 순박함을 통해 끈기를 느꼈다. 요령 피우지 않고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밤새 술판을 벌인다든지 백일장으로 마무리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간월산 홍류폭포 기행도 중요한 MT일정 중의 하나이다. 이 역시 8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체육대회. 체육대회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지금에 와서야 어찌하리오. 몸빼(?) 입은 무쇠팔, 무쇠다리의 여인네 대신에 가녀린 문학소녀들만 남아 있기에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밖에 없음을.... 발야구도 승패에 관계없이 아주 예쁘게 하고 줄다리기도 품위있게 져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인도주의자들이다. 술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같이 부어라 마셔라가 아닌 품위와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아주 현명한 아이들이다. 그러니 80년대처럼 승부 근성에 불타는 것이 아닌 그저 놀이로 즐기는 경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국문학부는 운동보다는 선비의 근성을 살려 문화창출에 이바지하는 것이 마땅한 현실이 되었다.
학술답사는 또다른 삶을 경험하는 학습의 장이다. 학술답사를 함께하는 동안 그들의 생각과 미래의 꿈을 조금 엿보고 엿들을 수 있었다. 사람사는 세상이 다 그러하듯이 그 시절 우리가 지녔던 고민이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비역들과의 만남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현실이라는 벽에 맞닥뜨릴 때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답답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을 믿어야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지난한 삶의 과정을 통해 배웠다
우리 후배들도 그렇게 부딪히고 그렇게 상처받고 그러다 장가가서 아이낳고 살다 이맘때쯤의 우리가 되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 '서른즈음에'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며 지나간 청춘을 이야기하겠지. 삶이란 그러면서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라고. 때론 실패하기도 하고 때론 패기를 앞세워 당당하게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우리 후배들도 자신의 삶을 훌륭히 잘 가꾸어 가리라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50주년, 60주년, 그리고 100주년을 기다리는 의미이다.
에필로그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라면 고등학교 시절로는 죽어도 가기 싫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다시하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솟는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엇이 대학 생활로 이끌리게 만드는지.... 그때는 문학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더하여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시절 그 풍경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이제사 깨닫는다.
청년의 추억은 유토피아다.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의 온기와 따스함을 지니고 살아야한다. 세상은 삭막해도 우리가 가졌던 공동체를 향한 열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함께하는 삶, 그리하여 나누는 삶, 그것이 우리의 과거를 복원하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나는 국어국문이라는 울타리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나의 과거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또한 내가 해야할 일이다.
“겨레사랑 국어국문”의 '오래된 미래'를 꿈꾸며 이만 추억 여행을 접는다.
덧붙여 한마디 더 한다면, 이제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불러도 될 나이가 된 듯도 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낭만'에 대해서는 그 후배 말대로 "X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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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