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는 글
이 책은 몽산스님의 법어를 중심으로 간화선의 지침서를 꾸민 것이다.
간화선이 본래 격외의 도리이고 불립문자라서 표현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니 도반님들께서 굽어서 살펴보아 주시기를 간곡히 원합니다.
중국 원나라 때의 몽산(蒙山)스님의 법어(法語)는 조선 세조(世祖) 때 번역되어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휴휴암주(休休庵主) 몽산 덕이(德異) 화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휴휴암 좌선문」의 저자이다.
몽산(蒙山)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셨다.
내 나이 스물에 이 공부가 있음을 알았다.
서른둘에 이르도록 열여덟 분의 장로를 찾아가 법문을 듣고 정진했다.
그러나 도무지 확실한 뜻을 알지 못했다.
그런 후에 환산(晥山) 장로를 뵈오니, ‘무(無)자’를 참구하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물 네 시간 동안 생생한 정신으로 정진하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고, 닭이 알을 품듯이 하여 끊임이 없이 하여라.
투철히 깨치지 못했으면 쥐가 나무 궤를 쏠듯이 결코 화두를 바꾸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밝혀 낼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참구하였다.
십팔일이 지나서 한번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심에 가섭(迦葉)이 미소 지은 도리를 깨치고 환희를 이기지 못했었다.
서너 명의 장로를 찾아 결택(決擇)을 구했으나, 아무도 말씀이 없었다.
그 중에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다만 해인삼매(海印三昧)로 일관하고 다른 것은 모두 상관하지 말라.’ 라고 하시기에, 이 말을 그대로 믿고 두 해를 정진하였다.
경정(景定) 오년 유월에 사천(四川) 중경(重慶)에서 극심한 이질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빠졌다.
아무 의지할 힘도 없고 해인삼매도 소용없었다.
종전에 좀 알았다는 것도 아무 쓸데가 없었다.
입도 딸싹할 수 없고, 손도 꼼짝할 수 없으니, 남은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업연(業緣)의 경계가 일시에 나타나 두렵고 떨려 갈팡질팡할 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온갖 고통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나는 그 때에 아직 출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어 가족들에게 후사(後事)를 말하고, 향로를 차려 놓고, 좌복을 높이 고이고, 간신히 일어나서 좌정하고 삼보(三寶)와 천신(天神)에게 빌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착하지 못한 짓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바라건대 이 몸이 이제 수명이 다하였거든 반야의 힘을 입어 바른 생각대로 태어나 일찍이 출가하여 지이다.
혹시 병이 낫게 되거든 곧, 출가 수행하여 크게 깨쳐서 널리 후학을 제도케 하여 지이다.’
이와 같이 하고 무(無)자를 들어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추고 있었다.
얼마 아니 하여 장부(臟腑)가 서너 번 꿈틀거렸다.
그대로 두었더니, 또 얼마 있다가는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으며, 또 얼마 있다가는 몸이 없는 듯 보이지 않고, 오직 화두만이 끊이지 않았다.
밤 늦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니, 병이 반은 물러 간 듯했다.
다시 앉아 삼경 사점에 이르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없어지고, 심신이 평안하여 아주 가볍게 되었다.
팔월에 강릉으로 가서 삭발하고 일년 동안 있다가 행각(行脚)에 나섰다.
도중에 밥을 짓다가 생각하기를, ‘공부는 모름지기 단숨에 해 마칠 것이지, 끊일락 이을락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황룡(黃龍)에 이르러 당(堂)으로 돌아갔다.
첫 번째 수마(睡魔)가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 앉은 채 정신을 바짝 차려 힘 안 들이고 물리쳤다.
다음에도 역시 그와 같이 하여 물리쳤다.
세 번째 수마가 심하게 닥쳐왔을 때는 자리에서 내려와 불전(佛前)에 예배하여 쫓아 버리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미 방법을 얻었으므로 그때그때 수마를 물리치며 정진했다.
처음에는 목침을 베고 잠깐 잤고, 뒤에는 팔을 베었고, 나중에는 아주 눕지를 않았다.
이렇게 이삼일이 지나니 밤이고 낮이고 심히 피곤했다.
한번은 발밑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둥둥 뜬 듯하였다.
홀연 눈앞의 검은 구름이 활짝 걷히는 듯하고, 마치 금방 목욕탕에서라도 나온 듯 심신이 상쾌하였다.
마음에는 화두에 대한 의단이 더욱 더 성하여 힘 들이지 않아도 순일하게 지속되었다.
모든 바깥 경계의 소리나 빛깔이나 오욕이 그쳤다.
청정하기가 마치 은쟁반 위에 흰 눈을 듬뿍 담은 듯하고, 청명한 가을 공기 같았다.
그 때 돌이켜 생각하니, 정진의 경지는 비록 좋으나, 결택할 길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승천(承天)의 고섬(孤蟾)화상에게 갔다.
다시 선실(禪室)에 돌아와 스스로 맹세하기를, ‘확연히 깨치지 못하면 내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랬더니, 달포 만에 다시 정진이 복구되었다.
그 당시 온몸에 부스럼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떼어 놓은 맹렬한 정진 끝에 힘을 얻었다.
재(齋)에 참례하려고 절에서 나와 화두를 들고 가다가, 재가(齋家)를 지나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다시 동중공부(動中工夫)를 쌓아 얻었다.
이 때의 경지는 마치 물에 비친 달과도 같아서 급한 여울이나 거센 물결 속에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으며, 놓아 지내도 또한 잊어지지 않는 활발한 경지였다.
삼월 초엿새 좌선 중에 바로 무(無)자를 들고 있었다.
어떤 수좌가 선실에 들어와 향을 사르다가 향합을 건드려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듣고 ‘왁!’ 하고 외마디 소리를 치니, 드디어 자기면목을 깨달아 마침내 조주를 깨뜨렸던 것이다.
이것은 조주 스님의 무자 화두를 깨쳤다는 뜻이다.
어느 듯 갈 길 다 하였네!
밟아 뒤집으니 파도가 곧 물이로다!
천하를 뛰어 넘는 늙은 조주여!
그대 면목 다만 이것뿐인가?
그 해 가을 임안(臨安)에서 설암(雪巖), 퇴경(退耕), 석범(石帆), 허주(虛舟) 등 여러 장로를 뵈었다.
허주 장로가 환산 장로께 가 뵙기를 권하시어, 환산 장로를 찾아뵈었다.
그때 장로가 묻기를, ‘광명이 고요히 비춰 온 법계에 두루 했네, 라고 한 게송은 어찌 장졸수재(張拙秀才)가 지은 것이 아니냐?’ 하셨다.
내가 대답하려 하자 벽력같은 ‘할!’(喝)로 쫓아 내셨다.
이때부터 앉으나 서나, 음식을 먹으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섯 달이 지난 다음 해 봄에 하루는 성 밖에서 돌아오는 길에 돌층계를 올라가다가 문득 가슴 속에 뭉쳤던 의심덩어리가 눈 녹듯 풀렸다.
이 몸이 길을 걷고 있는 줄도 알지 못했다.
곧 환산 장로를 다시 찾았다.
또 먼저 번 말을 하시는 것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상(禪床)을 들어 엎었다.
다시 종전부터 극히 까다로운 공안을 들이대시는 것을 거침없이 알았던 것이다.
참선은 모름지기 자세히 해야 한다.
산승(山僧)이 만약 중경에서 병들지 않았던들, 아마 평생을 헛되이 마쳤을 것이다.
참선에 요긴한 일을 말한다면, 먼저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조석(朝夕)으로 찾아가 심신을 결택하고, 쉬지 않고 간절히 이 일을 구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