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2장 20-33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두고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은 단지 그의 죽음만을 기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리시기 위해 죽은 자조차 살리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이심으로 자신을 참되게 믿는 모든 자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내다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합니다. 죽음만 있어서는 안 되고 부활도 하셔야 합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전가 받아 대신하여 죽어야 하고, 자신의 의를 자기 백성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부활 하셔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호산나’ 외치면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들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일차적으로는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는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식에 있어서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다른데, 왜냐하면 저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름을 무엇으로 나타내 보이고 계시는가? 어린 나귀를 타시는 것을 통해 보이고 계신 겁니다.
특히 저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게 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깨닫고 그를 믿는 자로서 환영했다기보다는 이적 자체가 주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병이어 이적 이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부류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임금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로 당시 로마의 세력을 몰라내고 유대인의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더욱 뚜렷하게 알리시는데, 20절과 21절을 보시면 명절에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청하게 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일단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 모두가 예루살렘 혹은 그 근방에 사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던 성도들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신, 그리고 그 상징으로 언약궤가 있는 성전에 나와 예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공적 규례였습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성취가 되면서 폐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도덕법으로서 제4계명이 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로서의 안식일도 폐지되고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는 것도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7일 가운데 한 날을 주님의 날로 여기라는 것이고 그 날 공적인 예배로 모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예루살렘으로까지 나아와 예배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예루살렘으로까지 나아와 예배하는 일이 있었다면, 이런 열심 자체는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 중에 헬라인 몇이 있다는 것도 말씀합니다. 지금 이들이 예수님을 뵙고자 한 것인데, 이들은 누군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지금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지만 그에 앞서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들이 유대 땅을 정복하고서 유대인들을 헬라 지역들로 끌고 가는 일이 있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헬라인이 그들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들을 ‘헬라파 유대인들’로 칭하기도 하는데, 유대인이지만 헬라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헬라인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절기입니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재앙으로 모든 처음 난 자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집은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모든 처음 난 자가 죽을 때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념하도록 하는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그러나 그 유월절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만, 유대인들만 지키도록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7절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는 말씀 이후 4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반드시 이스라엘 사람만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타국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은 이후라면, 믿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라는 확인을 받은 자라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헬라인 몇이라고 할 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헬라파 유대인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칼빈은 당시 로마법이 자기 지방의 예배를 떠나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고, 그런 것이 발견되면 총독에 의해 엄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아시아와 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바다를 건너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헬라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파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게 칼빈의 입장입니다. 반면에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는 것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고 제시하기도 합니다(행8:27).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7장에서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에 대한 언급도 볼 수 있다고 하면서(행17:4), 이 때 ‘경건한’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헬라인 무리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헬라인인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도 요한이 이방인으로서 헬라인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 모두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견해 중 어떤 것을 취하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들이 명절에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는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길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누구에게 가서 청하는가?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합니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님께 바로 가지 않고 빌립을 통해, 또 빌립은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께 여쭙고 있는가? 여기 헬라인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께 곧바로 나아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빌립과 안드레는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마태복음 4장 1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는 지역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과 가까운 갈릴리 뱃세다 출신의 빌립에게 청한 것이고, 빌립은 안드레에게 청해 예수님께 여쭈었던 것입니다. 혹 헬라파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헬라 지역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예수님께 가는 것보다는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통해 만나 뵙기를 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오늘 본문은 헬라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원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말 자체만 보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세상 임금 삼으려고 했던 자들, 또한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했던 자들이 좋아할 법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으로 자신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리는 그런 역사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32절에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는 말씀으로 설명하시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 그러나 이때 ‘모든’은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한 된 의미에서의 ‘모든’, 그러나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한 ‘모든’, 좀 더 간단히 말하면 택자 ‘모든’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죽음이 갖는 복된 소식과 그 죽음의 결과까지 내다본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농사를 지을 때 밭에 밀알을 뿌리는데, 그 밀알이 싹이 나고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땅 속에 들어가 죽어서 자신의 형체를 잃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2절의 결과,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죄인의 죄짐을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죽으신 다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을 다시금 살리시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금 부활하신다는 것을 누누이 알리셨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십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야 합니다. 그의 부활 없이는 어떤 열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라면 예수 그리스도보다 앞서 부활한 나사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시간적으로만 이해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나사로의 부활이 앞섭니다. 구약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이 없었는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구약의 경우는 나사로의 부활보다 훨씬 앞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앞설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구약 백성의 죄 사함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 다시 말해 죽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은 신약에 와서야 성취됩니다. 구약에서는 성취에 대한 약속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 구약 백성들은 약속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가? 코케이우스라는 인물은 로마서 3장 25절을 근거로 구약 백성의 죄 사함은 못 본체 간과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 성취는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취하기 전에조차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내다보게 하심으로 성취 이후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것이 적용되도록 하셨습니다. 즉 구약 백성의 죄 사함과 신약 백성의 죄 사함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에서 약속된 것처럼 죽음만 아니라 부활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이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뒤 사흘 뒤에 성취되겠지만 약속하신 바에 대한 확실함 때문에, 그리고 그 확실함은 한번 정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적용이 먼저 된 것이 구약에서의 부활이요 나사로의 부활인 것입니다. 때문에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그것이 첫 열매가 아니라, 그런 열매의 모든 원인이 누구로부터 시작되는가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해서 더 이상 죽지 않는 부활체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분명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살아난 이후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도 죽어 하나님의 품에 들어가 있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더 이상 죽지 않는 몸을 입은 상태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예수님께서 알리시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부터 알리신 것처럼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도 바로 이 일을 위해서인 겁니다. 계속해서 25절로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에도 보면 이와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장차 고난이 있을 것이지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단지 생명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함으로 주를 부인하는 자들은 고난 가운데 생명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생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알리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나를 위하여’, 다시 말해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가 얻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지금 예수님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 미워하는 자로 있다고 알리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생명조차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까지 내 놓음으로 인해 너희들이 영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신이 그러한 자로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마태복음 10장과 같은 교훈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현세에 대한 지나친 정욕에 마음이 뺏겨 이 세상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코 자기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 생명까지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는 이 세상에서는 자기 생명이 죽음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을 영원토록 보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6계명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그러한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가? 물질이 방해가 된다면 물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명예가 방해가 된다면 명예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하지만 그 목숨까지 주를 위하여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4-27)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26절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입니다(마20:28). 그래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인성을 취하심으로 섬기시지만, 그리고 그 섬김의 극치는 자신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 해 두고 계십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은 곧 내가 너희를 섬기는 일이고, 그 결과는 너희로 하여금 생명을 얻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섬김의 목적은 생명을 얻은 자가 예수님 자신을 섬기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믿어 나를 섬긴다면 이제는 너희 마음대로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는 말씀도 언급했지만, 나를 따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를 따르게 되면 주께서 있는 곳에 주를 따르는 자도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주를 따르게 되면 주께서 가시는 곳에 주를 따르는 자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가 어디 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는 일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이 길입니다. 23절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고난이 없는 영광이 아닙니다. 죽음이 없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그러한 길을 간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나를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영광에 참여한 것처럼 너희도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지만,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알아서 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는 그 길만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때 주를 위한 고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저런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내가 처음 가는 길이 아닙니다. 혹 다른 사람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래서 내가 처음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를 뿐입니다. 고난 받는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그분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받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고난입니까? 자신이 받지 않아도 될 고난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고 받으신 고난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가 받는 고난은 비록 주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를 따르되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고난이라는 것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 길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여러분에게 영광의 자리는 없습니다. 주의 길을 따를 때 영광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영광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자리에게 이르게 될 것이지만 주를 따르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인성을 취하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은 어떤 면에서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셨고, 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보면서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나타내십니다. 이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런 연약함이 죄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또 그런 가운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와는 달리 죄는 없으십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연약함이 많은 부분 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의 생에서 죄를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셨습니다. 그 몸으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져야 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게 될 죽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겪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를 위한 만족한 죽음을 죽으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의 마음이 괴롭다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하여 받게 될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도 아무런 고통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고통을 그가 담당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그 고통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그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괴로움은 할 수만 있다면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해 이 때에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마치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과 다를 바 없는 내용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28절에서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비록 내 마음이 괴롭지만,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사 요청할 수밖에 없지만, 죽기 위해 왔고 그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기에 기꺼이 자신을 죽음에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예수님의 모든 행보는 아버지의 영광을 제1순위로 하고 계십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죽음까지도 내놓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28절을 다시 보시면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단지 주는 것을 받는 분으로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친히 자신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의 행보를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고 복음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성육신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의 생애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의 생애 가운데서 이적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실 것입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도 하실 것입니다. 승천하실 것이고, 때가 되면 재림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 때 양과 염소를 나누듯 택자와 유기자를 나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실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극치는 택자를 통해 드러납니다. 본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를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 바로 이 음성이 예수님께 들린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 음성이 날 때 예수님은 들었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은 듣지 못했습니다. 29절을 보시면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이 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들었는가? 듣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실 때 그때 불분명했던 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는데, 거기에 있던 무리들은 분명한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있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3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비록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천둥소리요 천사가 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유익을 주고자 하는 대상은 너희라고 알리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있게 되는데, 그 열매가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너희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시는데, 31절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는 심판인데, 여기서 세상의 임금은 로마의 왕이나 다른 나라들의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의미합니다(엡2:2).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단이 타락한 자들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지막 때 믿지 않는 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인 사단까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심으로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고 말씀합니다. 언제가 마지막 때인가?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부터가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가 마지막 때입니다. 구약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알리시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는 때가 마지막 때입니다. 너무나도 분명해서 더 나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이적도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임금인 사단이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32절, 33절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땅에서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미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가 광야의 뱀처럼 들릴 때, 다시 말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본래 사단의 종으로 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권세가 더 이상 그들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죽음이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방법으로 있는 겁니다. 죽음만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위한 것입니다.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내게로 온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셔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한 된 의미에서의 ‘모든’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만으로 제한 된 모든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로서 ‘모든’ 사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만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자 하셨던, 그만큼 큰 고통을 당하셔야 했던 십자가를 지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그의 섬김으로 그의 죽음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다면, 또한 그의 부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본래 주인은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모든 권세를 깨드리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의 결국은 영광입니다. 그러나 고난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은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영광을 위한 고난은 주를 따르는 길에 있는 것이지, 주와 다른 길을 가면서 고난 받는 것에 영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길을 따라가며 주님만을 쫓아가셔야 합니다. 그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버릴지라도 그만을 따라갈 때 영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