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로그 용으로 맹근 개인적인
군생활 추억 여행을
호국의 달에 맞아,
逸泉 어르신의
6.25 때의 회상 사진을 보고
' 소생도!' 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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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도 좋거니와 우리 산하의 여행은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 지난 삶의 자국이 있는 자리를
찾아가는 추억여행은 더 좋지 않겠어요?
소생은 1969년 양평 용문산 자락에서
첫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년 전부터 양평 용문산 산행을 하면,
그때의 병영을
한 번 찾아 보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에 용문산을 오르는 길에 행복하게도
이 꿈이 이뤄졌습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간 저에게
'군번과 성명' 확인 만으로
초면식인 대학 후배 학훈장교
김동균 중위가 큰 은헤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어설픈 글과 빛바랜 사진들이
뒤섞인 이 자료 속에
여러분들의 소시적 빛나는 추억을 '오버랲' 시키시어
우리 젊은 좋았던 40년전의
추억 여행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제 초로에 접어든 우리들 대부분은
그때 그 시절,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명제 앞에
찍,짹 소리없이
우리 젊은 좋은 날들을 군에서 보냈습니다,
그 빛나는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용기를 내어 올립니다.
먼지 쌓인 40년 전의 군생활 앨범을
들춰 봤습니다.
알파포대 사격지휘소 (FDC) 계산병들.
포병장교는 진급을 위해서는 필히 경력을
쌓아야 하는 사격지휘장교(FDO)는
육사 출신들만 맡는데
학훈 출신 소생한테 ....
주우욱 대대 사격지휘까지 하다,
군복을 벗었네,,,,
전방 간첩 침투 시 5분대기조 군장.
(장교 개인 화기가 6.25 때 카빈소총)
한 기수 선배 김 왕소위
소집 해제(전역)되던 날!
(중위로 진급 못한 학훈 장교를 그리 불러 예우했다.)
후반은 닉슨 독트린으로 전방에서
미 2 사단이 귀국하며
울 부대가 철원 지경리로,,,
진지 구축하고 다음 날 전방 GP에 올라
의식이 트이고는
건너편의 북한군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뭐야! 우리 하고 똑같잖아,?????'
동기 다섯 중위들 ,,,,다들 70줄이다.
어디서 무엇하며 숨들 쉬고 있는지.
서울 외출나와서 개폼잡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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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같은 세월을 40년 되돌려 군생활
추억 밟기를 하려니 감무량이 아닐수 있시랴!
이제 그 시절에서 백투 더 휴쳐혀서
첫 부임지 양평으로 갑니다!
일박 하기로 작정코 양평에
도착했습니다.
동이 트는 양평역 앞 모텔에서..
기상청에서는 추위가 풀린다고
했으나 추웠습니다.
1969년 여름 무덥던 어느 날 .
수송장교 인솔하에 바로
이 역 광장에 도열해 있던
군 트럭에 질서정연 하게 승차했었습니다.
'하나 차 승차 끝!'
'둘 차 승차 끝!'
사단 군악대의 우렁찬 군가연주를
뒤로 하고
트럭이 하나,둘 빠져 나가자
도로는 흙먼지를 푸울~풀 날리고
금새 얼굴에 뿌옇게 먼지가 쌓였더랬습니다.
그런데
40년 세월을 건넌 위 사진이 그런 궁한 때는
없었다고 딱 잡아뗍니다. 그려!
육이오 때 최대 전투 중 하나가
'용문산 전투'여서,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기는 군인들이 많습니다.
소생의 첫 부임지였던 포병대대
정문 초소입니다.
길은 아스팔트로, 초소와 병영 건물의
자재는 적벽돌로 바뀐 것 말고는
익숙하고 반가운 그때, 그대로의
정경이었습니다.
소생에게는 애환이 짙게 벤
대대 정문 초소입니다.
주둔 부대가 옛 부대일 리 없건만,
아스라히 먼 세월 너머로
같이 일했던 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그랬었지요.
열심히 훈련한 후 꽁초까지
나눠 피던 연기 맛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지구상에서 몰아낼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연초가..
그때는 위로였고, 청량제였으며
군사기 진작에 적잖이
기여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병영에서도 금연 장려책으로
담배를 사서 피워야 한다고
김 중위가 말하네요.
좋은 지난 시절이었지요.
그 시절 담배는 무상 배급이었으니까요.
소생에게 뜻 밖에 행운을 준
'정보장교님, 정보장교님,
우리 정보장교님' 입니다.
전날 저녁 늦게 옛기억을 더듬어
길 찼아 두려움을 누르며
어스름 덮힌 정문 초소를
무작정 처들어갔습니다.(?)
초병에게 '군번, 주민번호, 이름'을
눈감고 외우면(ㅎㅎ) 신병이
확실한 거 아니냐고..
실랑이를 하던차
구세주처럼 그 날 주번사관
김 중위가 강림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연찮게 아득한 대학 후배였고,
'알오티시'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지요.상부로 확인한 다음,
다음 날 부대 방문을 허락한다고,,,
담날 아침 !
기분 째지게 좋아 갖고
방문증 패찰을 달았지롸!
포차가 도열한 이 곳 대대
연병장에서 무면허로,
'제무시(GMC)' 트럭을 몰며
소생 처음 운전연습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참말로 정겹고 정겨웠습니다.
소생의 1(알파)포대 막사임다.
회색문이 행정반 출입문이었습니다.
한 참 한 세월이 바뀌었는데도
막사는 그대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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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40년전 그 해 겨울,
서울 명문대 출신 행정병이 막사
뒷산 무덤에 등을 뉘이고는
총구를 목에 댑니다.
이윽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그는 곧 제대할 병장이었고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지독히도 순진했던(?) 그는 여자를,
결혼을 교과서로만 알려고 했습니다.
'보좌관님! 거시기 털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 상상 성병 노이로제였습니다.-
40년 전 근무하던 소생입니다.
우하하~
매일 술시를 어기지 않고 양평옥에
갔었는데도 잉!
눈이 살아있습니다.
그러길래
우리 젊은 좋은 날이었나 봅니다.
아~ 그 자리 그대로네...
넘 생생하다보면
아득한 추억도 진한 감동으로
현재태로 소용돌이치나 봅니다.
김 중위 :
'지금, 그곳에는 병사들이
생활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병사들?
그렇지! 세월은 엄청 흘렀고,
무지 잘(?) 살게 되었습니다그려.
밥풀떼기 하나 달고
처음 3개월 동안 기거했던
신임 장교숙소(B.O.Q.) 건물임다.
김 중위에게 물었다,
'포사격장은?'
'용문산 지봉인 백운봉 사격장입니다.'
'타깃 이름 공알바위도 변치 않았남?'
'옙!'
순간,
나는 겨울이 지나는 1969년의
양평에 있었습니다.
낯 익어 정겨운
막사,
연병장,
초소,
신입 장교 숙소는
40년 전 모습 그대로 의구헌데
장비는 105미리(아래) 손계산자의
사격 제원 산출 똥포에서,
155미리 컴 계산 자주포(위)로 바뀌고
그 속에 인걸(?)도 변한 강산을 뒤로
4번 넘어 의구하게 바로
여기 서 있습니다.
김하사!
그가 타깃 포격 방향각
계산지(TAG)
작성 책임사병이었습니다.
잘못 떨어져 민가 피해가
간혹 있었습니다.
이젠 이름도 잊은 그!
참 군인이 되겠단 김 하사님!
아직 착하게 숨쉬고 계시지요?
부대에서 걸어 15분인 이곳 해장국집의
주모 할멈 .
소생더러
' 78년도에 문 열었을 때 술 팔며
색시 장사하는 집 딱 세 곳 있었지 ..
사장님이 나보다 10년 전
이곳 단골 고객였다고라?'
이 곳이 유명한 '양평 해장국의
40년 원조랍니다.
40년 세월이 덧없이 흐르진
않았나 봅니다.
단 두집-니나노집이 있던 이 곳이
해장국의 원조되어
경향에서 찾는 관광지로 ,
전원 펜션 주택지로 되었답니다.
위 해장국집 할머님 말쌈이
들려도 똑똑히 들릴
길 건너 이 집이
그 시절 니나노집 -
옥호야 흔했던 양평옥?
아니면 신내집(옥?) 아니겠습니까?
-저 집지붕을 초가로 얹어
69년 여름을 그려봅니다.-
탁베기에 얼큰해져 회가 동하면
수박 한 동이 들고
바로 옆 남한강으로 갔습니다.
전용 수영복이 될 법이나 한
시대였습니까!
사내는 군용 홑빤스면 댓길이고,
양평옥 시약시는 튀튀헌 브라자만
걸쳤어도..!꾸미지 않은
젊음이 받쳐 주는데야
요새 아긔덜 말로 색시도
왕 '쌕쉬헌' 그녀 였습니다.
(네 번 강산이 바뀐 위 사진으로야
분위기 여어~엉이지만,,,)
밤 늦어 사위는 흐르는 강물소리 말고는
조용하지요.
빛은 태고의 별빛 조명이지요...
아무 것도 두렵지 않고,
아무 것도 부럽지 않아,,
당당했고 젊디, 젊어서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첫댓글 一雲님: 군생활 회고록,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1969년, 신임 학군장교로 용문산 자락에서 군생활을 시작할 때의 앳띈 모습, 지경리 최전방에서의 고생하던 모습들..., 50년 세월에 낡고 변색한 사진과 메모장...,용하게도 잘 보관하고 계셨군요.
그리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0년, 같은 부대를 다시 찾았을 때의 감회 생생한 사진들도 잘 봤습니다. 105밀리 M2 가 155밀리 자주포로 바뀌고, 수동식 FDC가 컴퓨터식으로 바뀌었지만, 그 옛날의 20대의 우리를 보는 것과 같은 발랄하고 순박한 젊은 이들에 의해 충실히 개승되고 있는 것이 대견스러웠겠습니다.
"지경리"를 지도상에 찾아보니 바로 소생이 1952년 여름, 백마고지 전투의 몇주일 전, 통신 트럭을 몰고 30연대의 OP로 향하던 바로 그 길이 었군요. 건너편 고지를 넘어 날아오는 적의 포탄이 길 양측에 뜨문 뜨문 낙하하고 있는 속을 눈을 감고? 마구 질주하던 생각이 납니다. 영등포시장에서 현지 징집되었다는 40대 운전병의 겁에 질린 표정이 기억 납니다.
@ 그 때, 그 근처에는 9사단 소속의 105밀리 포변대대를 비롯하여 지원나온 미군의 155밀리 포대가 여기저기 포진 해 있엇는데, 적의 포탄이 낙하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대응사격을 하고 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70여년.., 철원도 지경리도 백마고지도 모두 바귀고 세상은 천지개벽한것 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은 이것을 마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이야기를 듯는 듯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무 것도 두렵지 않고,아무 것도 부럽지 않아...당당했고 젊디, 젊어서 좋았던시절이었습니다."...
끝에 남기신 이 한 구절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천 逸泉 어르신!
참으로 감명을 주는 댓글
고맙습니다.
남자들은 밤새워 얘기꽃을 피울 수 있고 대부분 여자들은 듣기 싫어 하는
화제가 군대 얘기 같은데요.
어르신께서 처음 말씀하신 바,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의 소통이 바로 남자들 대부분은 공통의 군경험이
있기에 말이 통하는 화제라고 생각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전쟁터에 뛰어든 찐 군생활이셨고, 소생이야 병역의무를
지키려 간 것이기 그 절실함에는 비교가 안 되겠지요.
그러나 소생은 나름 군대에서 젊은 또래들 군집생활은 사회성, 배려심 등을 기르는데 좋은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학에 흥미가 있었던 소생의 FDO 경험은 입시용 수학 습득이 아닌 생각하는, 그래서 정지된 수가 아닌 실제 포탄을 날아가게 하는,즉 세상은 수가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게 한 귀증한
세월이였지요. 어르신의 통신업무의 긴 동영상을 보고 컴퓨터로의 접근이 군생활이 모티브가 되었으리라 나름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50년 전 아득히 멀어진 젊은 때의 이바구를
공감하시며 어르신 옛세월을 되돌아 보는 좋은 시간 보냈댜고(소생도) 믿으며 ,,,,,,,,,
참으로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내내 강녕하시옵기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