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이모티콘이다.
이혜경 (제15회 작픔상)
보면 볼수록 웃기는 녀석이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엉덩이를 냅다 들이밀고 살랑살랑 흔들어 대는가 하면, 고맙다고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도 한다. 슬플 때는 닭똥 같은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존심은 어디에 팔아먹었는지 미안하다고 할 때는 손발이 없어지도록 비벼댄다. 건조하고 딱딱한 글자만으로는 세심하게 전달되지 않는 감정의 결을 오버액션으로 전달해 주는 이모티콘이야말로 문자 메시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약방의 감초다.
처음에는 방정을 떠는 이모티콘이라는 존재가 조금 낯설게 다가왔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문자를 보낼 때는 자칫 버릇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망설여지기도 했다. 자주 보면 정이 든다는 것은 사람에게만 한정된 말이 아니었다. 동호회 모임의 단체 대화방에서 이모티콘이 등장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눈에 익으면서 방정맞아 보이던 녀석들이 점점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흩어진 자음 모음을 찾아 더듬거릴 시간에 간편하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속하게 열 마디 말보다 훌륭하게 표현해 주니 편리하기까지 했다.
나는 평소에 빈말을 잘 하지 못한다. 마음에 없는 말을 일부러 꾸며서 하지 못하고 내 감정과 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면 스스로 거부감이 올라온다. 내가 가진 마음이나 생각을 조금 더 포장해서 전하면 서로 기분이 좋을 텐데 예쁘게 꾸며서 전달하는 재주가 없다. 애교가 한 톨도 없어서 콧소리를 섞거나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이 영 체질에 맞지 않다. 다른 사람이 애교를 부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괜히 닭살이 돋는 전형적인 경상도 스타일이다.
이렇게 무뚝뚝한 성격이다 보니 표현에도 인색한 편이다. 누구에게 신세를 지거나 도움을 받아도 “고맙다”는 단어 이상으로 내 마음을 대신할 말을 찾지 못한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표현은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버릴 때가 많아서 핀잔을 들을 때도 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세 마디만 적절하게 써도 인간관계에 반지르르 윤기가 흐른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내 입으로 매끄럽게 옮기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가 이모티콘을 앞세우면서부터 예전보다 감정 표현이 조금 수월해졌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림말이 보여주는 행동하나가 더 전달력이 큰 것 같다. 구구절절 감사하다는 글자를 쓰지 않아도 내 대신 고마워 죽겠다는 몸짓으로 애교를 떨어주니 얼마나 기특한 존재인가. 실수를 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민망하고 미안한 상황에서도 이모티콘이 앞장서서 고개를 조아리고 온몸을 배배 꼬아 대역죄인 행세를 하고나면 죄책감도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조금 더 부풀려서 전달하니 듣는 사람도, 나도 대화가 훨씬 따뜻해졌다.
반대로 내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도 이모티콘을 찾게 된다.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콕 집어서 표현하면 나 혼자 속 좁은 사람이 되고 마는 애매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모티콘 뒤에 숨어서 서운한 마음은 감추고 밝은 표정에 기대어 “안녕”, “알았다”등의 말로 감정의 마침표를 찍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조금 전의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한풀 사그라들었다. 이모티콘이 내 감정의 대리인인 줄 알았는데 가끔은 그를 통해 내 기분이나 행동이 바뀌기도 하니 희한하다.
나에게는 수필이 바로 마음을 드러내는 이모티콘이 아닐까싶다. 수필을 쓰다 보면 지나간 시간들을 소환해 곱씹어 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지나간 시간을 되감아 문장으로 옮기다 보면 재미있었던 순간, 눈물 나게 슬펐던 기억, 전하기 못한 미안한 마음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미처 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한발 늦게 담은 것이 나의 수필이다.
그렇다고 수필을 쓸 때마다 나에게 유리하고 좋은 기억만 꺼내어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덮어둔 채 지나가고 싶었던 부끄러운 과거나 내가 잘못한 일들을 수필을 통해 들추어냄으로써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구나 하고 반성하다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던 일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때 사과를 전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덮어버린 일을 문장으로 옮기면서 다시는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끔씩 여러 장르 중 왜 하필이면 수필에 콩깍지가 씌었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수필이라는 글은 원하든 원하지 않는 '나'를 뺄 수도, 지울 수도, 감출 수도 없는 분야다. 오래전, 일기장에 나 혼자만의 이야기를 적으면서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을 의식하며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수필을 쓰면서도 그 옛날 일기장을 적을 때처럼 누군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러다보니 낱말 하나를 고르면서도 무척 조심스럽다. 아무리 두터운 사유의 옷을 입혀 놓아도,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이라 해도 수필에서는 그 글을 쓴 작가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쓰면 쓸수록 수필이 더 어렵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미 눈이 맞았고 가슴이 통해 버렸으니 이제 와서 어쩌랴. 어차피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훨씬 이로울 것이다.
이모티콘의 팔색조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다 보니 수필과 이모티콘이 퍽 닮아 보인다. 한 조각의 사소한 감정을 가지고도 부품하게 만들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작은 웃음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울컥 솟아오르는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도 거칠게 풀어놓을 것이 아니라 이모티콘처럼 의뭉스럽게 넘길 수 있는 내공을 쌓고 싶다. 가슴이 보내는 소리에 충실하되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고 산뜻하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이모티콘처럼 한 장면으로 여러 감정을 보일 수 있는 수필을 쓰고 싶다.
첫댓글 수필집 『수필은 이모티콘이다』 중에서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이모티콘을 적절히 사용하면 도움이 되죠.
공감합니다~!
이모티콘... 저도 아직은 어색하지만 동감이 가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