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亂中日記)-69 갑오년(1594년) 8월
16일 신유.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배를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 돛을 달고, 사천선창(泗川船滄)에 이르니 기직남(奇直男)이 곤양 군수 이광악과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17일 임술. 흐리다가 저물녘에 비가 왔다. 원수 권률이 정오에 사천에 와서 군관을 보내 대화를 청하였기에 곤양의 말을 타고 원수가 머무르는 사천 현감 기직남의 처소로 갔다. 교서에 숙배한 뒤에 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서 함께 이야기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했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여덟 순을 들었는데, 원수가 몹시 취하여 자리를 파하였다. 파하고서 숙소로 돌아오니 박종남(朴宗男)과 윤담(尹潭)이 와서 만났다.
18일 계해. 흐리고 비는오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원수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 했다. 또 간단한 술상을 차렸는데 크게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원 수사는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누워 오자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 군수 이광악, 소비포 권관 이영남, 거제 현령 안위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 앞바다에 이르러 잤다.
19일 갑자. 맑음. 저녁에 잠깐 비가 왔다. 새벽에 사랑 뒤쪽에 이르니 원 수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칡 예순 동을 캐고 나니 원수가가 그제야 왔다. 늦게 출항하여 당포에 이르러 잤다.
20일 을축. 맑음. 새벽에 출발하여 진중에 이르렀다. 우수사와 정조방장이 와서 만났다. 정은 바로 돌아가고 우수사 및 장흥 부사, 사도 첨사, 가리포 첨사 ,충청 우후와 함께 활을 쏘았다.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는데 미안한 일이 많았다. 충청 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다고 하여 곧장 흥양으로 돌아갔다.
21일 병인. 맑음.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곤양 군수, 사도 첨사, 마량 첨사, 남도 만호, 영등포 만호, 회령포 만호, 소비포 권관이 함께 왔다. 양정언이 와서 만났다.
22일 정묘.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 우우후가 와서 만났다. 낙안 군수, 사도 첨사도 다녀갔다. 저녁에 곤양 군수, 거제 현령, 소비포 권관, 영등포 만호가 오서 이야기하고 밤이 깊어서 돌아갔다.
23일 무진. 맑음.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작성하였다. 식후에 활터 정자로 옮겨 앉아 공문을 작성하여 보내고는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사납게 불었다. 장흥 부사, 녹도 만호가 와서 함께 했다. 저물녘에 곤양 군수와 웅천 현감, 영등포 만호, 거제 현령 ,소비포 권관 등도 왔다가 초경에 에어져 돌아갔다.
24일 기사. 맑음. 각 고을에서 수군을 징발하는 일로 박언춘(朴彦春)과 김륜(金倫), 신경황을 보냈다. 정 조방장이 돌아왔다. 저물녘에 소비포 권관이 와서 만났다.
25일 경오. 맑음. 아침에 곤양 군수, 소비포 권관을 불러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다도 첨사가 휴가를 받아 가기에 9월 7일에 돌아오라고 했다. 현덕린(玄德麟)이 제 집으로 돌아가고 선천기(申天紀)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늦게 홍양 현감이 돌아왔다. 활터 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26일 신미. 맑음. 아침에 각 관청과 포구의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흥양 포작 막동(莫同)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배에 싣고 도만간 죄로 처형하여 효수했다. 늦게 활터 정자에 내려가 앉아서 활을 쏘았다. 충청 우후도 와서 함께 쏘았다.
27일 임신. 맑음. 우수사가 가리포 첨사, 임치 첨사, 우후 및 충청 우후와 함께 와서 활을 쏘는데 흥양 현감이 술을 내놓았다. 아침에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 보냈다.
진도 군수가 왔다.
28일 계유. 축시(丑時)부터 비가 조금 오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비는 묘시에 개었으나 바람은 종일 크게 불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들 회가 편히 잘 갔는지 몰라서 몹시 염려되었다. 진도 군수 김만수가 와서 만났다. 원수의 장계로 인해 문책하는 글이 내려왔는데 급히 올린 장계에 오해가 많았던 것이다. 해남 현감이 들어왔다.
29일 갑술.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마량 첨사, 소비포 권관이 와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옮겨 앉아 공문을 작성하여 보냈다. 도양(道陽)의 목자(牧子) 박돌이(朴乭伊)를 처벌했다. 도둑 세 명 중에 장손(長孫)은 곤장 백 대를 치고 얼굴에 도(盜)자를 새겨 넣었다. 해남 현감이 들어왔는데 의병장 성응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참으로 슬프다.
30일 을해. 맑고 바람도 없었다. 해남 현감 현증(玄楫)이 와서 만났다. 늦게 우수사 이억기 및 장흥 부사 황세득이 와서 만났다. 저물녘 충청 우후 원유남, 웅천현감 이운룡, 거제 현령 안위, 소비포 권관 이영남도 함께 오고 허정은(許廷誾)도 왔다. 이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다고 했다. 이미 생사가 결정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는 없으나 아들 셋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김양간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하는 뜻이 많이 담겨 있었다. 원 수사의 일은 매우 해괴하다 .내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다고 했더니, 이는 천년을 두고 한탄할 일이다. 곤양 군수가 병으로 돌아갔는데 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더욱 아쉬웠다. 이경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