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유년기
나는 1961년 더운 여름날 오빠 둘과 언니가 있는 가정의 넷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대구의 엄청난 무더위가 계속되는 음력 6월에만 세 명의 자녀를 낳았다. 산후조리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으면, 죄송한 마음에 절로 고개 숙이게 된다. 우리 집은 서문시장 인근이었다. 가게에 방이 두 개가 딸려있어서, 살림도 할 수 있었다. 오빠 두 명은 단칸방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터울 언니가 태어나면서 가정형편이 나아져서, 집을 넓혀 이사한 것이었다. 대구의 한복판에서 상인의 아이로 태어났으니, 안정된 정서를 기대할 순 없었다.
이 글을 쓰게 되면서 ‘나의 뿌리“에 대해 늦게나마 알고 이해하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별로 들은 것도 없고, 아는 바가 없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검색을 통해서 그분의 인생을 겨우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걸어오신 발자취를 읽어내려가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독립투사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60이 넘은 손녀가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쳐 싸워오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어찌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의 뿌리’인 할아버지는 해방 후 일본에서 고향 성주로 돌아왔다. 병든 몸을 안고 술로 쓸쓸함을 달래며, 외로운 만년을 보내셨다. 늦게나마 손녀로서 측은지심과 존경을 담을 수 있게 된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할아버지는 1888년생 야성 송씨이며, 성주가 고향이다.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에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고향 성주에서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과 3.1 운동의 후원에 참여하셨다. 가족들보다는 나라를 더 생각하셨기에 일곱 식구는 입에 풀칠하기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1930년생으로 3남 3녀 중 다섯째고 막내아들이다. 일찌감치 가난을 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란 걸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도 할아버지의 훌륭하심에 대해 전혀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가족들을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슴속에 한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로 이사한 후 삼 형제는 둘째 큰아버지가 일본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힘을 모아 자그마한 ‘바늘 공장’을 차렸다. 전쟁 후 물자가 부족한 시대 상황과 운에 맞물려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졌다. 식솔들이 더는 배곯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아버지는 8척 장신의 기골이 장대했던 할아버지보다는 유약하고 예민한 할머니 성품과 외모를 닮았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유흥을 즐겼다. 매일같이 우리가 잠들고 난 뒤 귀가해서 아침에만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딸들보다 아들들에겐 엄하고, 가부장적이었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자녀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어머니는 1932년생 창녕 조씨로 육 남매 중 여섯째고 외동딸이다. 외할아버지는 영리한 두 명의 외삼촌은 대학교육까지 지원했지만, 여자는 초등교육 정도만 받게 하고 시집을 잘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23살에 아버지와 선도 보지 않고 친척의 주선으로 혼례를 올렸다. 가난한 시댁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 옹색하기 그지없는 신접살림이었다.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장마철엔 방에 물이 들곤 하는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아들 두 명을 낳고 ‘도저히 이렇게 살 순 없다.’라며 가난을 벗어날 방도를 궁리했다. 유흥을 즐기던 아버지께 의존하지 않고, 당신 힘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는 바늘 판매소를 차리겠다고 나섰다. 이윽고 방 두 개가 딸린 작은 가게를 얻었다. 여장부 기질을 타고났던 엄마는 사업수완도 남달랐다. 대구에서 섬유산업이 부흥하면서, 바늘종류도 수백 종으로 늘어났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탯줄이 가늘어서 영양공급을 받기가 힘들었는지, 깡마르고 유독 손과 발만 큰 모습으로 태어났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고양이를 연상케 해서, ‘쥐 포수’란 별명을 얻었다. 여느 아기들과 달리 젖도 먹지 않은 채 하루 이상을 자곤 했다. 병원 진료를 받았으나, 별 탈은 없었다. 잘 먹지 않지만, 잠을 많이 자서인지 그래도 조금씩 튼튼해져 갔다. 오빠와 언니의 영향으로 또래보다 말이 빨랐고, 호기심이 많아 질문이 잦았다. 자녀 양육에다 가게까지 돌보느라 바쁜 어머니께 재잘재잘 끊임없는 질문을 해대며 귀찮게 했다.
대구의 중심가 대로변엔 아이들의 놀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집 근처엔 골목길 놀이터조차 없다. 심심하면 가게에 나와 길을 자주 바라봤다. 마부 아저씨가 집 앞 전봇대에 노새를 매어 놓고 가면, 살며시 옆으로 가서 말을 걸곤 했다. 노새는 다리도 아프고 수레에 실린 짐이 무거워서인지 잔뜩 화나 있다.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그만 여자애구나 싶으면, 냅다 발길질하거나 똥을 뿌드득 싸서 쫓아내려 했다. “엄마야!”를 외치며 도망갔다가도 이내 돌아와선 노새에게 말을 자꾸만 걸었다. 타고나게 동물을 좋아해서 “엄마! 우리도 개 키우자!”라며 끊임없이 졸라댔다. 부모님도 개나 고양이를 좋아했기에 “마당 있는 집에 가면 사줄게”라는 약속을 했다.
성격은 지나치리만큼 밝고, 명랑했다. 무뚝뚝하고 표현이 없는 아버지께 일방적인 애교를 부렸다. 엄하지만 막내딸의 뽀뽀 공세가 그리 싫진 않은 눈치였다. 딸들에겐 매를 대지 않고 말로만 근엄하게 대했다. 주식인 밥보다는 과자를 더 좋아해서 “엄마, 일원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꾸 조르면 돈을 준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1원을 받으면 신이 나서 구멍가게로 달려가 과자를 사 먹었다. 구멍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단 과자로 인해 이가 남아나지 않았다. 사진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앞니 빠진 갈가지 형상을 하곤 활짝 웃고 있다.
행동도 지나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심심한 걸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다. 호기심이 많고 배우고 싶은 열정이 컸다. 언니 오빠 덕분에 글을 빨리 익혔다. 6살 즈음엔 언니 교과서를 펼쳐놓고 방바닥에 배를 갈고 더듬거리며 한자씩 읽어내려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또래 동네 친구가 별로 없었던 터라 늘 싸웠지만 두 살 터울 언니가 단짝 친구였다. 우리는 시멘트 바닥에 낙서하며 놀았다. 손님이 없으면 가게 의자에 고무줄을 묶어 단둘이 놀아도 재미있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풍부한 정서를 가진 시골 아이들보다 메마르고 추억거리가 별로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아름답고 소중한 소년기
초등학교 시절은 내 인생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했던 때이다. 평생지기 책과 동물, 나무와 자전거를 만났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안락한 한옥에서 책을 얼굴에 덮고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취해 평안히 누워있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 세상 행복을 다 가진 소녀가 바로 나였을 것만 같다.
내가 8살 때 부모님은 돈을 모아 작은 마당과 사랑채가 있는 ㄱ자형 한옥으로 이사했다. 대들보가 굵고 대청마루가 있는 오래된 한옥이다. 마당에는 어른 허리만큼 흙을 쌓아 올린 땅보다 높던 둥근 정원도 있다. 가을엔 모과나무 가지에 달린 모과를 딸 수 있고, 봄에는 라일락 향기가 가득하다. 또 여름엔 나무가 푸르고 싱그러움으로 행복감을 준다. 이렇게 정원은 계절마다 선물을 주며 즐겁게 했다.
몇 그루의 오래된 나무가 가족에게 주는 기쁨은 크다. 남동생은 모과나무에 줄을 달아 웃통을 벗은 채 밀림의 왕자 ‘타잔’의 흉내를 냈다. “아 아 아!”라고 외칠 땐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목젖까지 훤히 들여다보이게 웃는다. 모과도 많이 열려 엄마는 모과 청을 담갔다. 모과는 환절기에 가족들의 기관지를 보호해 주고, 방향제 역할도 했다. 무화과가 달콤하게 익으면 하나씩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화장실 앞에는 꽃과 나무를 좋아하던 엄마의 취미생활 공간이자 우리의 놀이터인 온실이 있다. 친구들과 숨바꼭질할 때마다 여기로 숨는다. 어떤 때는 숨을 죽이고 좁은 온실에 숨어 있다가, 엉덩이와 허벅지가 선인장 가시에 찔리기도 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시가 살에 박히면 노랗게 곪기 일쑤다. 엄마는 가시가 많고 볼품없는 선인장을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 없애버리자고 불평하며 졸라댔다. 엄마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화려한 꽃을 피우는 선인장의 강인함과 억척스러움이 당신의 인생을 닮아서 좋아하셨으리라.
아버지는 마당이 생기면 동물을 키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포인터 종인 사냥개 ‘베스’는 이미 성견이었다. 눈이 크고 성격이 예민해서 처음엔 곁을 잘 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가족의 손길을 허락했다. 베스는 몸통이 길어, 한꺼번에 12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강아지들은 다 예쁘지만, 특히 포인터 강아지는 귀가 길고 볼이 늘어져서 더욱 귀엽다. 몸에는 진갈색 무늬가 듬성듬성 있고, 흰 바탕의 얼굴에 양 눈은 밤색으로 눈망울이 깊어 보인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12마리의 새끼 중에 10마리는 친척이나 이웃분들께 분양했다. 겨우 두 마리‘쨈’과 ‘쨤’만 남았다. 귀가가 늦은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찍 잠든 어느 밤이다. 아버지 친구분이 코트 주머니에 강아지 두 마리를 넣어 갔다. 나는 아침 눈뜨자마자 베스 집으로 갔다. 강아지가 둘 다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이 떠나가라 큰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학교도 가지 않겠다며 주저앉아 발을 버둥대며 마구 생떼를 썼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학교 갔다 올 때쯤엔 찾아다 놓겠다고 약속했다. 두근거리는 맘으로 학교에서 돌아오니, 귀염둥이들이 와 있었다. 반가움에 부둥켜안고 좋아하며 정신없이 뽀뽀해댔다.
한옥은 바람이 잘 통해 여름에도 무척 시원하다. 책을 읽을 때는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는 라일락의 달콤함과 모과의 상큼한 냄새가 난다. 책 읽는 재미와 라일락의 향기는 ‘책이란 사람을 참 기분 좋게 한다.’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후로 떨어지기 싫어서 어딜 가나 책부터 챙기고 보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들과 활발하게 노는 것도 물론 즐겁지만, 책이랑 보내는 시간은 그 이상이었다. 세계 명작동화를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이 끝난 듯 펑펑 울다가도 이내 깔깔대며 웃는 변덕쟁이가 따로 없다.
12살 때 친구의 집 잔디밭에서 놀다가 또 다른 평생의 벗인 자전거를 만났다. 자전거 타기를 운동장에서 배웠더라면 더러 다칠 법도 하지만, 잔디가 포근하게 감싸주어 몇 시간 만에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엄마를 조르고 졸라 드디어 내 자전거도 갖게 되었다. 자전거는 움직이기 좋아하는 나와는 궁합이 잘 맞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시원한 바람이 뺨에 와 닿는다. 특히 여름엔 이마에 흐른 땀을 식혀주어 고맙다. 또 자전거는 훌륭한 이동수단이 되어, 영어 과외 하러 갈 때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 대신동에서 동인동까지는 일곱 정류장이 넘는 거리다. 가끔은 친구를 뒷자리에 태워주기도 한다. 친구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내 재잘대고 웃는다. 가깝지 않은 길이지만 힘든 것도 잊은 채 2년 이상 다녔다. 겨울엔 털외투를 입고 눈만 내어놓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바람을 갈랐다.
행동이 과해서, 실수도 잦은 편이었다. 부엌에 들어가면 그릇을 자주 깬다. 소풍이나 가족나들이가 있는 날엔 일하는 아저씨들까지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아침과 점심으로 먹으려면, 오십 줄이 넘는 김밥을 싸야 한다. 그땐 나도 한몫 거들 때다. 언니는 꼼꼼해서 김밥에 밥을 얇게 잘 펴지만, 나는 손놀림이 익숙하지 않아 그리 녹록하진 않다. 밥을 얇게 잘 펴야 김밥이 싱겁지 않은데, 두껍게 깐 내 김밥은 간이 맞지 않고 옆구리가 터지곤 한다. 몇 줄 실패하고 난 후 나는 그 자리를 슬슬 물러났다.
누구보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기에 궁금한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일단 한번 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심지어 담배 한 개를 몰래 빼내어 화장실에서 피워본 적도 있다. 담배는 한 모금만으로도 대단히 강렬했다. 담배를 보면 그때의 참을 수 없는 기침과 매캐한 냄새가 떠오른다. 앞으론 절대로 손도 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겨울엔 화롯불에 밤을 구워주시던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추억도 생생히 떠오른다. 생밤에 칼집을 넣는 작업은 꽤 성가시고 힘들게 보였다. 엄마는 바쁘지만 오로지 가족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리라. 풍로에 숯을 넣고, 콜록콜록 기침하며 부채질을 수없이 해야지만 불을 피울 수 있다. 밤이 익어가며 풍기는 구수한 내음과 탁탁 껍질 갈라지는 소리가 지금까지 코와 귀를 즐겁게 하는 듯하다. 잘 익은 군밤은 어찌 그리 고소하고 달콤하던지. 식구가 많아 배불리 먹을 수 없지만, 추운 겨울 기쁨을 주던 소중한 간식이었다.
소년기엔 수많은 실수가 쌓인 시절이지만, 내겐 더없이 아름답고 귀하다. 마음이 힘들거나 지쳐 있을 때, 소년기의 소중하고 애틋한 추억이 살며시 찾아와 위로해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꿈속에서나마 다시 찾곤 한다.
아쉬운 청소년기
매사에 실수가 잦고 자존감이 높지 않았다. 잘하는 것도 별로 없고, 외모에도 자신이 없다. 우유를 잘 마시고 편식이 줄어들면서, 키는 그대로인 채 살만 불었다. 부모님은 말괄량이 둘째 딸이 사춘기를 무난하게 보내고,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제법 차분해진 줄 아신다. 하지만 학교에선 여전히 재잘대기를 좋아했다. 급우들 앞에 서면 위축되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한다. 구들 장군과 같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은 미혼의 국어 선생님이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셔서 전교생의 인기를 독차지한다. 그 시절엔 ‘중학교 반 배치 고사’가 있었다. 나는 2등이었음에도 키가 커서인지 실장으로 임명되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볼살이 통통한 아이가 따지는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내가 1등인데 왜 네가 실장이고 내가 부실장이 된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했다. 나도 모르긴 마찬가지이니, 선생님께 여쭤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부담스러운 실장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말씀하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아이들이 다 보는 잔디밭으로 불러 전달사항을 말한다. 학교에서는 유일한 총각 선생님이어서인지 아이들의 관심이 쏟아진다. 창피하고 여러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에 발로 뭔가를 끄적인다. 선생님은 야무지고 의욕이 강한 아이를 실장으로 뽑으시지 않고, 주눅이 잘 드는 나를 뽑으신 건가는 원망하는 마음도 든다. 선생님도 실장이 흡족하지 않아서 “외모는 맏며느리처럼 의젓하게 생겨서는.”이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선생님은 공부를 더 하려고 2년 만에 교직을 그만두었다.
토요일 방과 후에 친구들과 죽이 맞아 우리 손이 닿는 곳에 달린 매실을 전부 다 땄다. ‘많은 공기’놀이를 하기 위해서다. 한참을 친구들과 재미있게 공기놀이를 했다. 월요일 아침에 학생주임 선생님이 부르셔서 의아해하며 교무실로 갔다. “너 왜 매실을 다 땄냐? 이건 정학을 줘도 모자랄 정도다.”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으셨다. 교무실을 쩌렁쩌렁 울리며 혼내시던 큰 목소리는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빈다. 선생님도 진짜 정학을 주려고 하신 건 아닌 듯하다. 얼마나 철이 없었으면 그 유익한 매실을 다 딴단 말인가.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행동부터 하고 본 거다. 매사에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는 철부지가 바로 나였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 온갖 실패를 거듭해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느끼는 아이였다.
교내 합창대회가 열리니, 먼저 지휘자와 반주자를 뽑아야 한다. 음악 선생님이 피아노 배워본 사람은 손을 들라 하신다. 배우던 중이어서 손을 들었다. 우리 반에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급우가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싫어서 손을 들었지만, 후회막심이다. 똘똘한 부실장은 지휘를 맡고, 어설프고 덜렁대는 내가 반주를 맡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피아노 교습시간에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를 수없이 연습했다. 하지만 박자감이 떨어져서, 음악 시간만 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반주가 자꾸 빨라지면 어떡해!” 음악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당황해서 박자는 더 들쑥날쑥해진다. 피아노를 배운 기간은 7년이 넘지만, 실력은 보잘것없다. 피아노를 좋아하고 재능을 보이는 언니를 따라만 다녀, 실력은 늘지 않고 세월만 흐른 것이다. 엄마는 언니만 시키는 게 마음에 걸려, 동생인 나도 같이 배우게 했다. 난 피아노 배우기가 싫다는 말을 차마 못 했을 뿐이다. 대회 날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되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불이 나던지 뭔가 큰일이라도 생겨 합창대회가 열리지 않기만을 바란다. 내 소원과 달리 합창대회 날은 오고야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난 박자를 잘 지키지 못했고, 우리 반이 입상하지 못한 이유가 다 나한테 있는 것만 같았다.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주의력이 부족해서인지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성적은 마치‘롤러코스트’를 탄 것 같이 들쑥날쑥했다. 아버지는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훌륭한 상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맞아!’ 초등학교 때도 6년 개근을 했으니, 중학교에서도 아파도 결석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꼭 개근해서 아버지께 칭찬받고 싶었다. 유일한 목표에 걸림돌인 ‘감기’가 발목을 잡으려 하지만, 세차게 뿌리쳤다. 무사히 고비를 잘 넘겨 중학교 졸업식 때 ‘3년 개근상’을 탔다. 예상과 달리 칭찬의 말은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학교와 집, 과외교습소를 매일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다녔다. 게다가 걸어 다녔던 초중 시절과 달리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도 멀었고, 버스도 제시간에 오지 않아, 매일같이 몇 분씩 지각했다. 삐걱거리는 목조 건물의 계단을 졸아드는 마음을 안고 살금살금 올라가면, 맨 위 칸에 두 발이 보인다. 불안하고 떨리는 시선을 들면, 선생님의 커다랗게 부릅뜬 눈과 마주친다. 담임선생님은 무서운 표정만 지으실 뿐 크게 혼내진 않았다. 행동이 느리다 보니 노력하는데도 잘 고쳐지지 않아 지각 대장을 도맡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인생의 단짝 친구를 만난다. 친구는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키는 커서, 내 뒤에 앉았다. 점심시간엔 앞뒤로 돌아앉아서 네 명이 같이 밥을 먹었다. 짝보다 이 친구가 더 좋았고 내 짝도 마찬가지로 뒤에 앉은 아이가 더 좋다고 한다. 우리는 의기 투합 해 담임선생님 수업시간만 빼고 자리를 바꿔 앉는 모험을 감행한다. 다행히 학년 마칠 때까지 담임선생님께 들키지 않았다. 우리의 수다 중에 친구와의 우정도 나날이 쌓여갔다.
여린 꽃봉오리 같은 고등학교 시절은 입시전쟁을 치르느라 집과 학교, 과외 공부한 기억밖에 별로 남지 않아 아쉽다. 그 시절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시집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더라면, 풍요로운 추억으로 가득 채웠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학업에 열중한 것도 아닌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참으로 아쉽고 아까운 시절이다.
준비되지 않은 출발
대학 전공은 식품영양학이다. “여자는 얌전히 있다가 결혼만 잘하면 된다.”라는 아버지 말씀을 너무 잘 따른 걸까? 과 친구 절반 정도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취직준비를 했지만, 난 취직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에 관심 둔 것도 아니다. 꿈도 목표도 없었다. B 학점만 받아도 국가유공자인 할아버지 덕분으로 원호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만, 성적에 힘을 기울이지 않아 학점은 늘 시들시들(C,D 학점)했다. 수업을 빼먹고, 친구와 학교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잘대는 시간에만 관심이 갔고, 이때가 제일 행복했다.
방과 후엔 집 근처에 사는 고향 친구의 연애 상담을 해주었다. 연애엔 문외한이지만, 들어주는 건 잘한다. 몇 시간이고 들어주며, ‘친구는 남자가 그렇게 좋은가?’라고 생각하며 연애는 골치 아픈 일처럼 생각한다. 고교 동창생들은 대부분 연애결혼보다는 중매결혼이 좋다고 한다. 나도 결혼을 한다면 중매로 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한다.
‘강변가요제’에 나간 경험을 가진 과에서 단짝인 친구는 노래와 춤에 뛰어났다. 그 친구와 같이 디스코장에도 더러 간다. 손톱을 길러 매니큐어를 발랐다. 아버지는“어디서 그런 못된 것만 배우고 다니냐?”라며 혼내신다. 그때 이후로 못생긴 손톱을 가리려고 꾸미기보다는 손톱을 짧게 자른다. 복장과 외모에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은 아버지는 청바지도 못 입게 하고 화장도 하지 못하게 했다. 난 청바지가 멋있고, 화장하는 게 좋으니 몰래 할 수밖에 없다.
스무 살 여름 초등학교 친구 두 명과 홍도로 여행을 떠났다. 친구들과 가는 여행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께 승낙을 받기보다는 5일 정도 출장 가신 틈을 이용하기로 맘먹는다. 우린 2박 3일 일정이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여자 세 명이 떠난 여행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홍도로 떠나는 배를 놓치게 되어 목포항에 있는 여관에 들었다. 수부에 있던 젊은 남자가 3층에 있는 방 열쇠를 주며 “놀러 갈게요!”라고 한다. 들떠 있던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은 후 과일을 깎아 먹고 있었다. 야무진 친구가 문단속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문손잡이가 덜컹거렸다. “누구세요?” 물으니, 그 청년이다. 친구 한 명도 같이 있다고 한다. 놀란 눈을 마주친 우리는 위험을 직감하고, 한 명은 과도를 들고 난 포크를 손에 쥔다. 창문 밖에 사람이 있으면 구조를 요청하려고 했으나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우리의 소심한 복수는 여관을 나오며, 그 청년을 째려보는 정도가 고작이다. 홍도로 가는 배에서도 무섭게 생긴 아저씨의 흘깃거리는 눈초리에 마음을 졸였다. 겨우 도착한 홍도는 물도 좋고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지금까지의 어려움을 다 씻어주었다. 나중에 꼭 다시 홍도에 와보리라 다짐했다. 잘 놀고 집에 돌아오니 이게 웬일인가! 아버지가 몸이 편찮아서 일정을 앞당겨 돌아와 계셨다. 또 한차례 세찬 꾸중을 듣고 펑펑 울었다.
대학 졸업 다음 해에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다웠다. 엄마만 아시고 우리 자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엄마와 난 여관에 머물렀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곧 해결하시리라 믿었다. 쉰 살이 넘은 아버지는 재기에 성공하지 못한다. 친척과 지인에게 엄마가 돈을 빌렸다. 부도가 엄마 잘못으로 돌려졌다. 엄마는 가정과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돌봤지만, 살림을 잘 못 산다는 주위의 질책과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을 계기로 오래전부터 바라던 종교를 가지게 된다. 신앙의 씨는 천주교 재단의 초등학교 시절 뿌려졌다. 예비자교리를 받으러 계산성당에 가니, 초등동창생들을 몇 명 만났다. 세례를 받고‘레지나’란 이름으로 하느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난다.
목적의식 없이 살던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준비하지 않고 응시한 임용고시는 낙방이다. 2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천주교 재단 학교와 사립 중학교에 이력서를 내어보지만, 준비되지 않은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중소기업에도 이력서를 내지만, 자신감이 없어 보여서인지, 면접에서 떨어진다. 미국에 살던 언니가 오라고 한다. 도서관에서 토플준비를 한답시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부모님 뵐 낯이 없어서,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엄마는 가세가 기울어진 후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을 원한다. 엄마를 모시고 죽전 성당 교리 반에 갔다. 그 반에 중매하는 사람이 있었다. 자꾸 엄마를 졸라 선을 보라 한다. 상대는 미국 유학생이며 방학 중에 결혼하려고 선보고 있으니, 한 번 만나보란다. 우리 집안 형편상 결혼은 무리다. 아버지께 키가 작아서 싫다는 핑계를 대려고 굽이 9센티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약속장소에 나갔다. 남자는 먼저 와 있다. 오래 자서 퉁퉁 부은 얼굴로 그의 앞에 앉으니, 이상하리만치 처음 본 사람 같지 않다. 3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편하고 솔직하단 느낌을 그에게서 받는다. 세 번 정도 만나니, 어른들은 결혼을 추진한다. 방학 중이고 시간이 많아 매일같이 만났다.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게 불안하지만, 수동적인 자세로 갈팡질팡한다. 친한 친구의 예측대로 우린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다.
유학생이라 살림살이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엄마의 계산은 빗나갔다. 결혼하고 보니, 시부모님의 결혼생활이 어떤 사건으로 이혼의 문턱에 다다라 있었다. 외동아들인 남편은 이혼의 위기에 처한 부모님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단다. 나에게 미안하다며 휴학계를 낸 후, 서울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직한다. 시어머님은 집안에 생긴 우환을 모두 다 며느리 탓으로 돌린다. 억울하다. 결혼 3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 지금 터진 건데, 어찌 내 탓이라 하는지 말문이 막혔다. 시어머니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사사건건 꾸짖어서 무섭기만 했다. 믿을 구석인 남편조차 떨어져 있어 외로웠다. 마음이 괴로워 친정에도 연락하지 않는다. 엄마는 친구를 앞세워 나를 불러낸다. 미국으로 가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는 친정에선 시댁에서 고의로 속인 줄 알고 노발대발한다. 엄마가 헤어지라 해서, “한 달밖에 살지 않고 헤어지긴 싫다.”라고 했다.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이 시댁엔 있었다. 아버진 “본인이 살겠다면 살아야지 어쩌겠냐.”고 했다.
남편과 4개월간 떨어져 지내다가 서울 잠실로 분가한다. 친정의 형편으론 집 얻는데 한 푼도 보탤 수 없다. 전세금을 고스란히 혼자 부담한 시어머닌 더욱 분개한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향집이라도 무서운 시어머니랑 같이 살지 않으니, 마냥 좋다.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했다. 고등어 한 마리가 500원 하던 시절이다. 우리 밥상엔 매일같이 고등어가 오른다. 다행히도 남편은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매일같이 요리책을 보며 연구해도, 내 요리는 맛이 없다. 시어머닌 “친정에서 뭘 배웠냐?”라며 면박을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댁에 내려가야 했고, 매번 꼬투리를 잡는 탓에 이유도 모른 채 용서를 빌었다. 시아버님은 2주에 한 번씩 서울로 출장 왔다. 아버님은 인자한 웃음으로 따스하게 감싸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어 잘해드리고 싶다.
고역인 건 시어머님의 전화와 결혼 후 이혼하고 친정에서 사는 손위 시누이의 막말이다. 어머님은 무엇인가에 화가 나면 전화해서 다짜고짜로 퍼붓는다. 이후 곧장 따라오는 시누이의 속사포 공격을 받으면 그날은 우울하기 이를 데 없다. 매일같이 시달리다 보니,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여러 해 동안 시달린다. 바깥에선 늘 웃고 다녀서, 동네 지인은 “새댁은 뭐가 그리 좋아서 맨날 웃고 다녀요?”라며 놀렸다.
결혼 8년 후 남편은 서울에서의 회사 생활을 접고, 전세금을 빼서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시댁에 들어가 살게 되면 무서운 시어머님과 시누이를 견뎌내야 한다. 눈앞이 캄캄하지만, 사업자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시댁에서 2년 사는 동안 심리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 많았다. 급한 시어머님에게 맞추려고 낮잠조차 맘 편히 자지 못했다. 내 딴엔 잘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감정 기복이 심한 시어머니 맘엔 들지 못한다. 공든 탑은 늘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린다. 이 상황에 차츰 지쳐갔다. 친정엄마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모시고 가면 “네 집엔 사람도 없냐?”라며 비아냥거린다. 시어머니가 한 말들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시어머닌 직설적이고 급한 성품이다. 난 느리고 마음에 담아 두는 형이어서 좀체 맞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비슷한 성격이고 다투어도 쉽게 풀어지는 며느리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A형이어서인지 날이 갈수록 소심함이 심해진다. 닫힌 마음의 문은 좀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으면 포기하고 결단을 내리면 되는데, 그것도 쉽진 않다. 딸과 아들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감정이 들쑥날쑥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아이들을 기르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내가 데려가기엔 경제적 능력이 없다. 난 언제까지 준비되지 않은 채 결정의 문턱에 서야 한단 말인가? 뒤늦은 후회가 또다시 밀려온다.
시련과 치유
꽃다워야 할 중년에 숱한 시련을 겪어내야 했다. 남편이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대구로 와서부터 집에서는 잠만 잔다.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면 딸과 아들은 자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는 건 순식간이다. 아빠와 나누는 추억이 별로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남편은 술자리에 있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 말하다가 어느새 코를 골면서 자버린다. 술버릇이다. 술이 어느 정도는 깬 상태에서 자니까 본인의 건강엔 좋을 것이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기차 소리처럼 시끄럽다. 이미 잠이 깬 상태라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설친다. 수면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 문을 열 때도 누워있다. “엄마, 또 아프네.” 아이들의 기운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 감은 채 힘든 내일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아도 모자랄 시간에 우리 부부는 대화가 부족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다. 생활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한 채 날이 갈수록 정신은 시들해져 간다.
술에 장수가 없다더니,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B형간염 보균자임에도 주의하지 않고 술을 매일같이 마시다가 급성 간염에 걸린다. 위험한 시기를 겨우 모면하고 나서도 끊지 못한다. 가까운 앞산에 올라가 민들레를 따와 즙을 짜서 먹이고, 뽕잎을 따와 차를 만들어 준다. 시어머닌 “너랑 결혼하면 아프다더니만, 너 때문에 귀한 내 아들이 병에 걸렸다.” 했다. 매일같이 억울한 소리를 듣는다. ‘어른에게 말대꾸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서인지 시어머니께 대드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시어머니 억지 말에 일일이 대답한다면, 아마도 우리 부부는 같이 살 수 없을 것이다. 말 못 하는 답답함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는 방법은 오직 침묵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잘 울고 고집 센 딸은 초등학교를 네 번이나 전학한 것에 불만이 많다. 친구를 사귈만하면 전학한다. 사춘기도 3년에 한 번씩은 겪는다. 특히 중학교 땐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신화’에 푹 빠진다. 신화 콘서트를 보려고 혼자 서울로 가겠단다. 불안해서 같이 갔다. 바깥에서 영하의 추위를 견디다 독감에 걸려 고생한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 미대 입시를 준비할 무렵이다. 우리나라 입시제도가 자신에게 맞지 않으니 일본에 가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겠다는 폭탄선언이다. 딸은 좋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지원한다. 진득함이 모자라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이다.
맏이에게 거는 기대가 커 실망도 말할 수 없다. 집에서 우두커니 지내는 딸을 달랜다. “넌 동물을 무척 좋아하니 애견을 예쁘게 꾸미는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했다. 예상과 같이 좋아하는 개를 다루며, 미용해주는 일에 식지 않는 흥미와 열정을 가진다. 자기 가게를 차리고 미용 사업에 전력을 기울인다. 이제는 “엄마, 고마워! 애견 미용 권해줘서.” 한다. 함께 인내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아들은 나를 닮아 주의력이 부족하고 행동이 넘쳐난다. 걷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 아니다. 시아버님은 “사내놈이 다 그렇지. 철들면 괜찮아지니 걱정하지 말라” 위로한다. 대안중학교를 보내고 싶지만, 기숙사 생활이 싫단다. 건물 2층이 남편 사무실이다. 남편은 아들 방과 후에 수학, 과학 학습 지도를 한다. 아들이 학원이나 가정교사의 가르침엔 집중치 못해 별 성과가 없다. 남편이 되풀이해서 가르쳐주는 건 그래도 따른다. 친한 친구가 지원하는 공업고등학교를 가려고 한다. 남편과 나의 반대로 억지로 인문계고등학교에 가게 된 아들은 불만이 많다. 공부보다는 컴퓨터 게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가 잠들고 난 후에 밤새껏 게임이다. 졸려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 아까운 3년의 세월을 흘려보낸 뒤, 대학에 가지 않겠단다. 겨우 설득해 보낸 전문대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휴학이다.
군대에 다녀온 뒤에도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게임이다. 아들의 닫힌 방문만 보아도 한숨부터 난다. ‘아들아! 세월이 언제까지 널 기다려줄 것 같니?’ 안타까움만 가득하다. 21살에 소개로 만난 여자친구를 꾸준히 사귈 수 있던 건 남편의 배려 덕분이다. 일하지 않는 아들에게 주급으로 용돈 5만 원씩을 꼬박꼬박 준다. 난 극심히 반대해 자주 다툰다. 그저 받는 돈에 익숙해지면 더더욱 일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아들은 23살부터는 시간만 낭비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낀다. 다행이다. 하루가 멀게 알바를 바꾸긴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많은 일을 거친 것이 지금의 직장생활을 꾸준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28세에 7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해 예쁜 딸을 낳는다. 철들면 나아질 거라는, 시아버님 말씀이 맞다. 자신의 핸디캡을 딛고 일어나 지금은 시간을 쪼개어 두세 가지 일을 한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모습에 흐뭇하다.
49세 무렵이다. 아이들이 다 자라 성년이 되어 홀가분한 나이에 허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3년 동안은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파, 서지도 앉지도 못해 누워지낸다. 허리 수술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되도록 수술은 하고 싶지 않다. 허리에 좋다는 치료를 이것저것 받아 본다. 완치되기엔 한계가 있다. 남편에게 수술을 반대할 면목이 서지 않는다. 서울로 이끌려 가 수술한다. 극심한 통증은 잡히지만, 생활 자세가 나쁘면 이내 또 아프다. 집에 키우는 동물이 많아 앞으로 숙이는 자세를 자주 해 곧 재발이다. 또 긴 시간 누워 지낸다.
그즈음 남편의 사업자금이 부족해 살던 집을 전세 놓고, 월셋집으로 이사한다. 종일 볕이 들지 않는 컴컴한 방에 누워있다. 앞집 2층 음악감상실 베란다엔 흡연하려고 나온 남자가 서 있다. 행여 누워있는 내가 보일까 봐 커튼을 단단히 친다. 가족을 이런 환경에 처하게 하고서도 습관처럼 술을 마시는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눈물이 흐른다. 남편은 가족을 이렇게 내몬 죄책감에 집을 쳐다보기도 싫어한다. 10개월 뒤 집주인이 원룸 건물을 짓는다고 이사해달라는 통보를 해온다. 2년 기한을 채우지 않아도 되어서 내심 기쁘다.
이번엔 무조건 햇볕이 잘 드는 집을 고르고 싶다. 동물이 많아 1층 독채만을 찾던 중, 운이 좋게도 햇볕이 환하게 드는 마음에 드는 집에 이사한다. 이제부턴 뭐라도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부실한 내 노동력에 맞는 일이 없을까? 다행히 편의점 알바를 구한다. 첫날에 어리바리하다가 사기를 당했다. 2만 원을 물어낸다. 비록 하루 일당을 날려도 세상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얻었다. 쉰이 넘도록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베짱이처럼 일하지 않고 살아온 내가 부끄럽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1년 동안 지속했다. 앞으론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늘려야겠다.
조금 더 일의 강도를 높여도 좋을 것 같아, 어린이집과 식당 일에 도전한다. 그곳에선 능숙한 사람을 원하지, 초보자가 익숙해지는 기간 동안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아직 허리 병이 완치되지 않은 난 느리고, 어설퍼 보일 것이다. 아파 보인다며 그만둘 것을 권유하지만, 굴하지 않는다. 분수를 알고 몸에 맞는 일을 찾아 1년 정도 하다 보니, 정신에도 활기가 채워진다. 가족은 여전히 반대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하다. 바닥을 치던 자존감도 서서히 되찾는다.
잃어버린 책과도 다시 만난다. 딸이 하려다가 시간이 안 맞아 인문학 프로그램을 양도해준다. 과제를 하던 첫날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기뻤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찾던 배움이!’ 책을 읽고 주어진 과제에 글을 쓰고, 걷기를 하면서 생각한다. 매일 만 보 이상 1년을 걸으니, 허리도 점차 아프지 않다. 잊고 있던 책을 되찾은 건 다행이다.
나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혼자 하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남편은 이 경치나 저 경치가 다 같은데 왜 멀리까지 가냐고 한다. 딸이 힘을 보태준다. 무서우면 ‘대구 시티투어’부터 시작하란다. 버스 여행은 내게 잘 맞다. 시티투어의 여러 코스를 매주 다닌다. ‘근교투어’로 확대해 경북의 여러 곳을 다니며, 추억을 쌓는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을 수 있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나만의 시간을 누린다. 자연과 함께하는 여행은 아름다운 추억도 되돌려준다. 어릴 적 식물을 좋아하던 엄마가 가꾸던 정원의 나무들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누리던 소중한 가족과 함께한 시간을 만난다. 자연을 접하며 시들하던 정신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어느 정도 혼자 여행에 자신감이 더해지던 중, 코로나로 인해 버스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답답해서 ‘마음이’란 12살 먹은 차를 산다. 주말마다 나만의 여행을 떠난다. 처음엔 겁도 없이 달을 보며 노지에서 차박한다. 겨울이 되고 나서야 창문을 가릴 필요성을 느낀다. 떠 오르는 동해의 태양을 보면 막힌 마음이 뚫리고 벅찬 희망이 샘솟는다. 차 안의 물이 어는 영하 8도의 혹한에도 차박을 즐긴다. 겨울이 될수록 차박지를 찾는 게 쉽지 않다. 묵을 곳을 찾느라 무섭고 설렌 여행 속에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결혼 전엔 아버지, 결혼 후엔 남편의 보호 속에서만 살았다. 온실 속에서 노지로 나와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게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하다. 매주 스스로 자축한다. 난 ‘길’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된다. 가보지 않은 길을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달린다. 하늘과 맞닿은 높은 곳에서 경치를 만끽한다. 그 외에 하는 건 별로 없다. 경치가 좋으면, 어디든 차를 멈추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끼니는 남편이 싸 준 김밥으로 해결한다. 김밥을 좋아해서 온종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특히 남편표 김밥은 내 입맛엔 최고로 잘 맞는다. 겨울엔 뜨거운 물에 밥을 말아 먹어도 꿀맛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찾는 모험이 재미있다. 경북지역을 벗어나 경남이나 전라도 쪽으로 가려면 적어도 2박 3일은 해야 한다. 열 마리의 동물을 3일이나 남편에게 맡기긴 미안하다. 리트리버 리치가 선물로 받은 택배 상자를 뜯었다. 강정 한 상자를 거의 다 먹어 치우고 온 집안을 끈적거리게 한 날 남편의 호출전화를 받는다. “2박 3일은 너무 길다. 1박만 해!” 아쉽지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남편은 퇴직 후 2년 쉬더니, 무의미하고 지루하다며 한숨을 쉰다. 벼룩시장을 통해 카드 배송 일을 찾아주었다. 우리 동네를 자전거 타고 한 바퀴 돌면서 카드를 돌리는 일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작은 성취감도 준다. 나이 들어 집에만 있으면, 살이 오른다. 이 일이 나이 든 내 노동력에 맞고, 몸을 움직이게 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다. 젊은 시절 베짱이처럼 살았다면, 눈 감는 날까지 개미가 되어 일할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까지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듯이 나도 그렇게 살다가 생명을 마치고 싶다.
50대, 10년 가까이나 아팠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의 시련을 통해 철부지가 육십을 넘은 노년이 되면서 이제야 인생에 대해 조금은 알고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여러 아픔을 겪게 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되찾게 해준다. 아버지는 일하지 말고 시집만 잘 가라 했지만, 그게 아니다. 남편도 집에서 아이들이나 잘 키우라 했지만, 내 맘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인생은 아무리 힘들어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환갑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어물쩍하다가 인생의 종점에 다다르지 않아 다행이고 감사하다. 남들이 뭐라 하던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갈 것이다. 일하고 배우며 마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황금기다. 몸의 노쇠함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더는 애달파하거나 허무한 삶을 살지 않으리라. 생기있는 정신을 부여잡고, 끝까지 가련다. 책 한 권 챙겨, 가보지 않은 길을 여행하면서.
글을 쓰면서 고여있던 감정의 어두움이 올라와 힘든 순간도 있었다. 이젠 가라앉아 있던 부유물이 다 올라온 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사람에 대한 어떤 미움이나 원망도 남아 있지 않다. 마음의 치유를 얻게 된 건 큰 행운이다. (31.4)
첫댓글
잘 정리했습니다.
송 선생님의 인생이 엿보입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