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4월 (1597년 4월)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獄門-초고본에는 圓門)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 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비변사 낭청6품)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武毅公 李純信,유도방호대장留都防護大將)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 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 (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 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 (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4월 2일 [양력 5월 17일]<임술> 종일 비가 내렸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方業)이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 왔다.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서애 류성룡)과 밤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
<400년 만에 찾은 사돈>
위는 난중일기 1597(정유년) 4.1 사헌부 옥문을 나서는 날과 그 이튿날을 기록한 부분이다.다른 모든 인명들은 검색을 하면 여러자료들을 볼 수 있고 누군지 알수 있는 인물들이다.그런데 위 이순지(李純智) 를 검색하면 자료가 거의 없다.이순지는 난중일기에 딱한번 등장한다.
그런데 몇일동안 여러자료를 추적해보니 바로 무의공 이순신의 4째형이다. 입부 이순신의 5형제는 仁義禮智信을 차레대로 따서 지었는 4德과 5상(五常)의 개념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직전 족친이며 통신사 정사인 황윤길의 군관으로 왜국(倭國)에 다녀왔고,임진왜란때는 동복현감으로서 웅치와 이치대첩을 이루어낸 영웅이고, 그 다음해 '이치대첩'의 공으로 충청병사로 임명된 직후 후퇴하는 왜적을 추격하며 남하한 후 최경회,김천일,고종후 등과 2차 진주성전투때 전몰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1550~1593) 장군과는 사돈으로 확인되었다.양녕대군파 족보에서는 무후(無後)로 나온다.
2017.4.1 -전 흥양 현감 배흥립(명량해전과 노량해전까지는 종사관으로 활약한다)과 전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이 사돈관계인 것을 확인하였다.전 공조판서 배흥립의 둘째따님이 무의공 이순신의 제2子인 이숙(李琡)과 혼인을 하였다.작년에 배흥립 후손을 만났을 때 후손으로 부터 전해듣지 못하여 안타까웠다.오후에 무의공 이순신현양회장님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다.
2017.4.6 -필자를 만나기위해 영주로 내려오신 이승구(무의공 이순신 현창사업을 다년간 하신 분이고, 해군의 잠수함 이순신함을 명명하는데 활약을 하신 분이다)님에게 난중일기에서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등장 장면을 알려주며 백의종군 부분을 읽어주는데 이순지(李純智)가 이순신의 4째형이라고 하신다.천둥과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림.
-이순지(李純智)를 검색하다가 장수황씨 황진장군과 사돈관계인 것을 확인하였다.밤늦게 이승구님의 아우님인 이승래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다.
2017.4.7 -황진장군 후손을 찾기위해 전화 통화를 5名과 10번을 통화시도를 하였으나 잘아시는 분과 연결하지 못했다.
2017.4.8 -다시 몇번의 통화 끝에 후손한분과 통화가 되었다.
2017.4.9(일요일)- 아침 일찍 통화를 하다가 마침 황진장군을 모시는 정충사에서 향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렌트카를 빌려서 08:30 출발하여 남원 만인의총 관리소에서 백의종군 부분을 20장 복사하였다,->12:00 남원 정충사에 들렀고 점심을 들면서 참가하신 남원의 향교 유림분들께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일자를 해설해 드렸다.->근처에 있는 황진장군 기념관을 찾아봤다->근처에 있는 대곡리 암각화를 답사하였고 ->오후 6시(18:00) 대둔산 고갯마루 정상의 무민공 황진 장군의 이치대첩비를 답사한 후 예천으로 돌아왔다.이승래 교수님으로부터 양녕대군파 족보를 확인하였지만 무의공 이순신의 4분의 형님들이 모두 무후(無後)로 나온다고 한다.
황진 장군가의 후손분들도 사돈인 이순지(李純智)에 대해서는 잘모르고 있다.또한 양녕대군파 족보에 기록되어있는 무의공 이순신의 형제분들도 후손이 없고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 못하다 .두 집안의 연결된 고리는 400여년만에 찾은 것이다.400년만에 두집안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고 번창해지길 빌어본다.
경북 예천에서 박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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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 산7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무신 황진 등을 배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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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 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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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1550~1593)을 주벽에 모시고 있으며 그의 묘와 신도비가 함께 있다. 남원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고득뢰(高得賚), 안영(安瑛)도 함께 모셔져 있다. 또한, 고려 때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양주운(梁朱雲)과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양대박(梁大撲 1543~1592) 등의 위패도 봉안되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옛 건물이 있던 자리에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황진의 묘와 신도비 등도 함께 있다. 사우(祠宇)는 정면 3칸·측면 2.5칸 규모이고, 사우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재실(齋室)은 정면 5칸·측면 3.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12일에 제사를 지낸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충사 [旌忠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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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정충사 향사에는 모든 제물을 익힌 것이 아니고 생물(生物)을 쓴다고 한다.늦게가서 아쉽게도 향사지내는 모습은 사진에 담지를 못했다.다음에 언제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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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1550~1593) 장군의 묘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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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공 황진 기념관과 부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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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장수황씨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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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공 황진 장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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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공의 장남인 황정직(黃廷稷)의 셋째부인이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딸(姪女)이며 이순지의 딸이다.황정직이 본부인을 셋이나 둔 이유는 전 부인들로부터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 이유인 것 같다.황정욱의 자료(분재기-별급문기)에 보면 아래와 같은 자료가 보인다.
무민공 황진의 장남 황정직이 1574년생인데 내내 아들이 없다가 47세인 1620 년에야 아들을 얻고 소과에 합격하자 기쁨을 감추지 않고 재산을 상속해주는 별급문서를 작성한다.(자료출처=황진 장군가문의 고문서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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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독산(獨山)의 정상부분에 대곡리 암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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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대둔산이 보입니다.표시된 부분 아래에 이치대첩비가 있다.이치는 한글로는 배티재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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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순국무명사백의병비와 이치전적지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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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1550~1593) 장군 이치대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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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산하(山河)를 누비는 여행객들도 425년전 임진왜란 때 선혈이 낭자하게 피의 전쟁터였던 이치(배티재)전투를 알까?역사에 관심있을까?아래는 이치대첩의 네이버 백과사전 설명문이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침입해왔고, 이에 광주목사 권율은 이치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물리쳤다. 이 전적지는 전라장병 1,500명을 지휘하여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서전을 장식한 대전승지의 하나이다.
전투는 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어 해가 질 무렵까지 치른 치열한 격전이었다. 아군보다 우세한 적을 대항하여 승리로 이끈 바탕에는 장령들의 성실한 진두지휘에 힘입어 불굴한 투지에 있었다. 또한 천험의 이(利)를 얻어 미리 목책(木柵)을 쌓았고, 거마(拒馬)·녹암(鹿岩)·함정·철질려(鐵疾藜:마름쇠) 등을 요소에 마련하였으며, 화살과 소마석(小磨石) 등을 충분히 예비하여 군자보급에 차질이 없었던 데 있었다.
이치싸움은 같은 날 벌어진 웅치싸움과 더불어 왜적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라도 땅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하여 전주성이 안전하게 되어 정유재란 때까지 7년 동안 군량보급과 병력보충에 크게 공헌하였고, 전라감사 이광이 지휘한 용인패전(龍仁敗戰)으로 침체한 사기를 회복하였다. 권율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세를 몰아 전라장병 8,000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행주대첩의 주력이 되었다.
이치싸움은 웅치싸움과 더불어 행주대첩을 가져온 바탕인 동시에, 전라장병들 자체로 향토를 방어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고, 임진왜란 3대 전첩의 하나로 손꼽힌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치 전적지 [梨峙戰蹟地] (두산백과)
첫댓글 追記.
난중일기에 황진 장군은 딱한번 등장한다.字인 명보를 써서 황명보(黃明甫)로 등장한다.
1593.6.29(음력) 진주성이 함락당하는 날의 일기이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공감합니다.
하하...아무도 모르던 내용인데 인제 동자갑선님과 저만 아는 것입니다.
쉿~!
정탁님..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를 잘 하셨군요,
헉!관찰사님도 알게 되셨군요.ㅎ
쉿~!
@약포 정탁 ㅎㅎㅎㅎㅎ
저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주생면인데, 앞으로 정신 바짝 차려 공부해야겠습니다.
소중한 글을 접하게 해서 이렇게 일깨워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ㅎ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이순신과 함께 하신 분들'이 진정한 영웅들이고 현창해야할 인물임에 틀림없다.참고로 말씀 드리면 명량대첩축제 재단에 관계하는 공무원들이나 주민들이 명량해전에 참전한 제장들 이름을 한두명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그러니까 이순신에 대해서 한개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몇억,몇십억을 들여서 축제를 하고 있다.작년에 전남도지사께서는 명량해전에 참전한 적이 없는 진린 장군 후손과 호텔에서 식사를 했고 사진을 찍었죠.순천왜교성전투나 노량해전에 관한 행사에는 진린 장군 후손이 초대되어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