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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체험”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영향
- 성령과의 교통(交通)과 상담관계를 중심으로…….
김홍근
한세대학교, 영성과 심리치료
- 국문 초록 -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만물들과의 관계, 예술과의 관계 등에서 신비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신비를 추구하며 경험한다. 엄마-유아 사이는 전언어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완벽하게 교통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서로 자신 속에서 대상을 포용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세 위격들이 하나로 일체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설명하는 용어는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이다. 이 용어는 상호내재, 상호순환, 상호침투를 의미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여 하나 되어서 상호순환과 상호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당연히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품고 있다.
성령과의 교통은 신비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 정, 의를 가지신 온전한 인격자이다. 인격자와의 만남은 변형과 성장을 초래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진정으로 자신을 알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 때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그 때 치료적 변형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령과의 교제 이전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맞닥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듣는 것이며, 쌍방적 통행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분과의 교통한다는 것은 이미 신비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엄마-유아가 무의식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듯이 상담자-내담자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치료적 관계는 담는 것과 담기는 것, 안아주는 환경, 공감, 레브리 상태, 되기, 상호주관적인 관계여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하나로 합일된 신비적 관계이다.
본 논문의 요지는 하나님-인간, 엄마-유아 관계에 신비가 가득하듯이 상담자-내담자의 관계도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관계의 신비가 드러날 때 치료적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령과의 교통과 치료적 관계 속에서의 신비체험에 관하여 논하려 한다.
Ⅰ. 들어가는 말
현대인이 사용하는 스마트 폰은 문명의 혜택을 겪게 해주는 대표적인 과학의 소산물이다. 손 안에 든 작은 기기는 엄청난 과학적 신비 세계로 인도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정신건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비를 체험하는 일이 어렵다는 데 있다. 연구자는 어린 시절, 8월 한가위 보름달 속에 옥토기 두 마리가 방아를 찧는다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후에 달을 본 적이 있다. 신비롭게도 달 속에는 옥토끼 두 마리가 방아 찧고 있었다. 그 시절의 모든 자연만물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신비로 달을 보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규명된 달을 쳐다 볼 뿐이다. 과학은 인류에게 안락함을 주었지만 신비를 빼앗아갔다.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고 하나님의 신비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신비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자연만물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으로 대할 때 신비는 다가온다.
한 개인의 자기(self)가 계란의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얇은 막처럼 응집되지 못할 때 병리적 정신구조를 갖게 되고, 병리적인 반복을 하게 된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자기는 자기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삶을 꽃 피울 수가 없으며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한다. 자기대상이란 자기의 응집력, 생명력,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대상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품고 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신비를 추구하며 경험한다. 엄마-유아 사이는 전언어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완벽하게 교통한다. 엄마-유아의 관계는 신비로운 공생적 융합상태에 있다. 엄마-유아의 관계가 신비한 공생적 융합 속에 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도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여 하나의 상호순환과 상호내재하시는 관계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서로가 자신 속에서 대상을 포용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세 위격들은 일체성으로 만난다.
성령과의 교통은 신비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 정, 의를 가지신 온전한 인격자이다. 인격자와의 만남은 변형과 성장을 초래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진정으로 자신을 알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 때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그 때 치료적 변형과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령과의 교제 이전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맞닥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듣는 것이며, 쌍방적 통행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분과의 교통한다는 것은 이미 신비로 이루어진 것이다. 기도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한 사랑에서 출발하며 교제에 대한 그분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엄마-유아가 무의식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듯이 상담자-내담자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치료적인 상담관계는 담는 것과 담기는 것, 안아주는 환경, 공감, 레브리 상태, 되기, 상호주관적인 관계여야 한다. 이러한 관계는 융합과 하나 됨이 이루어진 신비적 합일의 관계이다.
본 논문의 논지는 하나님-인간, 엄마-유아 관계가 신비로 이루어 져 있듯이 상담자-내담자의 관계도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신비체험이 일어날 때 치료적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령과의 교통과 치료적 상담관계 속에서의 신비체험에 관하여 논하려 한다.
Ⅱ. 신비체험과 심리치료의 상관관계
신비체험의 중요성
신비(神秘)란 단어를 한자로 풀이하면 “하나님의 비밀”이다. 헬라어 미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은 “비밀”, “신비”, “감춰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브리태니카 사전에서는 신비란 “감춰진 진리나 지혜를 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신 또는 초월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라고 한다. 신비의 근본적인 특질은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이라는 절대자와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으로 모든 대상관계 안에서 합일을 체험하는 데 있다. 본 논문에서 신비라는 용어는 성령과의 교제를 통한 합일과 엄마-유아가 무의식적 교통으로 하나 됨과 같이 상담관계에서의 신비적 교류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칼뱅(John Calvin)은 신비적 합일의 두 가지 차원을 주장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적 합일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비적 합일이다. 전자는 신비적 합일의 수직적이고 개별적 차원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신비적 합일의 수평적이며 공동체적 차원에 관한 것이다. 신비적 합일의 수평적이며, 공동체적 차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공동체가 서로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가르친다. 그리고 칼뱅은 믿는 자들 사이의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를 통하여 신비적으로 하나가 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동시에 주장한 것이다. 신자들 간의 교제가 신비적 합일로 한 몸을 이루듯이, 상담자-내담자간의 치료적인 관계를 통해서도 신비로운 합일로 나아갈 수 있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신비체험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존재의 의미는 사랑에 있고 오직 지각(知覺)은 사랑과 사랑받는 대상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스 발타사르(Hans Balthasar)에 따르면, “생애 초기 유아가 엄마의 미소를 마주하면서 감지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원초적 직관체험이다. 어머니의 미소를 느끼는 순간에 아기는 ‘나’가 된다. ‘나’에 대한 체험과 동시에 세상과 ‘너’에 대한 체험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최초의 말은 사랑이다. 이 사랑의 만남에서 자신과 엄마는 하나가 된다. 비록 엄마-유아, 두 인격은 서로 마주 보고 있을 지라도 하나이다.” 발달심리학자 마가렛 말러는 이러한 관계를 생후 열 달 동안 일어나는 공생적인 융합단계라고 하였다. 유아는 공생적 융합상태에서 이렇게 느낀다. “이 사랑은 좋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좋다. 이 사랑은 참되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참되다. 이 사랑은 기쁨을 준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와의 관계는 아름답다는 사랑의 신비체험을 한다.” 엄마와의 공생적 융합상태에 놓인 유아의 존재는 사랑이며, 그 사랑은 하나 됨이고 진·선·미임을 감지한다. 생애 초기에 체험하는 사랑은 이후 유아에게 무한한 사랑의 가능성의 지표가 된다. 그리고 유아는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좌절들을 겪음과 동시에 어머니의 사랑이 유한하다는 것을 발견하지만 사랑의 원초적인 체험은 영속된다. 이렇게 엄마와 유아의 관계에서 시작된 사랑의 신비는 다른 피조물들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세상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사랑의 경이로움은 모든 것 위에 있고, 동시에 모든 참된 존재의 무한하고 자유로운 근거가 된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표현은 사랑의 기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성령과의 교제관계는 신비가 주는 황홀을 수반하며, 그 신비는 모든 만물을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언어로 대하게 한다. 인격자이신 성령 하나님과의 교제는 한 개인의 정신적 병리를 변형과 치유의 길로 인도한다.
2.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Incarnation) 사건에서의 신비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잘 설명하는 용어는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ϛ) 이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에 의하여 이 용어가 사용되어졌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 간에 일어나는 상호내재(mutual indwelling), 상호순환(mutual circulation), 상호침투(interpenetration)를 의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서로가 자신 안에서 다른 위격들을 포용하신다.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세 위격들이 하나의 일체성을 띄고 있음을 가르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여 하나 되어서 상호순환하시며 상호간에 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의 본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역시 하나님의 신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대상과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상호내재, 상호순환, 상호침투가 가능한 존재이다. 이에 대한 유비로서 엄마-유아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엄마-유아는 언어가 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몰입된 가운데 무의식적인 의사소통으로 완벽한 소통을 나누는 관계이다.
신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육화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성례전이 된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인간의 믿음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가시적인 표징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감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몸 없이 순전히 영으로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이기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들이 필요하다. 인간은 특정한 장소에 머물 수 있고, 물리적인 접촉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셨기에 자신을 잘 아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셨으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오시었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은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지만 그의 성육신의 신비는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스스로 인간으로 화육되기로 선택했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시었다. 성육신은 인간 편에서 보면, 말없는 신에 대한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낸다.
제임스 그롯슈타인(James S. Grotstein)은 초월적 자리의 획득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으로의 회귀를 말한다. 즉, 심리치료 임상의 장에서 내담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잃어버린 자신의 정서를 되찾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이상으로 그는 그의 무한하고 영원한 신적 자기로부터 오는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통해 유한한 자기가 무한한 자기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성육신이라는 주제는 심리치료와 종교 모두의 영역에서 중심적인 주제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로 육화되어야만 내담자와 공감적 환경가운데서 내담자의 내적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3. 인간존재와 “나와 너”의 관계에서의 신비
한 개인은 평생 동안 관계 안에서 사는 존재이다. 관계의 힘은 개방성, 자기 창조,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개방성은 세계와의 관계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려는 본래의 힘을 가리키며 모든 관계의 시작을 위한 필수요건이다. 자신이 하나님과 타자와 자연만물과의 온전한 교제를 원한다면 열려있는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 한다. 영성은 수동적이지만 인간 편에의 능동적 태도를 가지기를 촉구한다. 자기 창조의 능력은 확장된 관념들, 느낌들, 영향력들, 경험들을 내재화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과 정서와 결정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칼 융(Carl Jung)은 이를 가리켜 자기됨이라고 하였다. 융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자기의 특질은 정신의 그 어떤 역동성에서도 저해 받지 않고 하나의 유형, 균형, 질서를 나타내는 것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와 대상과의 관계성을 통하여 평생 동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됨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인간의 육체적 구조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영적, 도덕적 본성에 대한 표현이며,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의미한다. 나아가서는 인간은 전인적인 존재, 즉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전인성은 자기됨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창조본래의 복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두 가지 형태의 관계성에 관하여 말했다. 그것은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나는 대상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같은 대상에게도 시공간에 따라서 다르게 관계하기 때문에 모든 순간적인 관계는 고유성을 지닌 신비가 된다. 그러므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과 관계하는 “나”이다. 한 개인은 대상에게 지향하는 강도와 형태에 따라서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나와 그것”의 관계로 맺을 수도 있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의 “나”는 대상과 정서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전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저 대상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는 너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친밀하게 돌보며, 활기를 주고받는 “나”이다. 나는 대상을 나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융합된 대상이고, 대상의 자율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나이다. 부버는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나와 너”라는 기본어와 “나와 그것”이라는 기본어 안에 있는 나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대상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드러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으로써 모든 대상들과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음으로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그러할 때 모든 관계는 신비한 빛으로 변하고 이 작은 빛들을 “영원한 너”인 창조주 하나님에게로 인도한다.
“나와 너”의 만남은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와 너”의 관계에는 사랑의 신비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모든 수단이 다 장애가 될 뿐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수단이 사라져야 비로소 “나와 너”의 관계가 실현될 수 있다.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즉 관계 안에 있다. 사랑은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자유롭고 유일한 존재로 보면서 나의 실존을 느끼게 해준다. 사랑은 너의 좋고 나쁨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대상을 전체성으로 보게 한다. 사랑은 대상 안에 있는 참된 가치를 발견하게 하고 대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선·미를 누리게 한다.
자연은 개발하여 나의 이익을 창출케 하는 수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둠으로써 나는 자연만물과 “나와 너”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술 작품도 물질적 가치로 보는 한 그 작품 속에 깃들여 있는 “나와 너”의 교감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을 너로서 마주대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나에게 자유로움으로 다가온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진실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진실한 나를 만나게 됨으로써 참된 교제가 일어난다. 기독교영성은 모든 대상(자기 자신, 타자, 자연만물, 예술작품들 그리고 하나님)을 그대로 두라고 한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의 깊게 듣는 것, 깨어 있기, 민감하게 관찰하기 등도 그대로 둠에 속하며, 그대로 둠으로써 “나와 너”의 관계로 나아가게 한다. 만물을 그대로 둘 때, 아주 작은 미물 속에서도 커다란 경이를 발견하고, 위대한 예술 작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면 신비가 되돌아 올 것이다. 그 신비는 곧 하나님이시다. “나와 너”의 만남은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상호주관적으로 대상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그대로 둘 때 일어난다.
Ⅲ. 성령과의 교통에서의 신비 체험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영향
상담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상담자-내담자의 관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여야 한다. 상담자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교통에 민감하게 될 때 권위와 지혜를 받을 수 있다. 상담자가 자신의 삶에서 성령과의 교통의 신비가 일어날 때 내담자도 하나님의 인격과 접촉하게 될 것이다. 성령은 인격자이시고 인격자이신 성령과의 교통은 신비를 초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세례와 기도와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과 교제함으로써 신비 체험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신비는 심리치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격자이신 성령과의 교통에서의 신비
영산 조용기 목사는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 이유는 성령은 영원하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면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며, 성령을 선배 동역자로 모시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섬기는 자세로 사역에 임한다.”라고 고백한다. 영산의 목회 사역에서 가장 잘 드러난 특징은 성령과의 인격적인 교통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옥주는 영산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의 특성은 “성령은 단순이 어떤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예수를 계시하고, 사람들이 예수에게 응답하게 하며, 그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가도록 도우실 뿐만 아니라 주의 사명자로서 이끌어 가시는 능동적인 인격이라는 관점으로 본 것”이라고 하였다.
토레이(R. A. Torrey)박사는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네 가지 증거를 제시하였다. 첫째 증거는 인격만이 지닐 수 있는 특징과 특성들이 성령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령은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지신 온전한 인격자이시다. 성령은 인격의 특성인 지성, 감정, 의지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알고,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는 인격적 존재이다. 무엇인가는 인식하고 느끼고 결심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주체가 인격자임을 증명한다.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인격만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들이 성령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고(고전 2:10),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시고(롬 8:26), 인격만이 할 수 있는 가르치시는 분(요 14:26)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세 번째 증거는 성령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직무는 인격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다(요 14:16-17). 성령은 인격자로서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는 온전한 소통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삶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네 번째 증거는 성령의 속성으로 이해되는 반응은 인격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반역을 당하실 때 근심하시는 다는 표현(사 63:10)과, 성령이 욕되게 함, 즉 모욕을 당하는 존재로 표현된 것(히 10:29), 그리고 성령이 훼방을 당하시는 것(마 12:21, 32)은 모두 인격자에게서 나오는 감정의 표현이다. 김동수는 “대천덕의 성령론에 관한 가장 큰 공헌은 성령 사역을 신자와 관계하여 내적 사역과 외적 사역으로 나눈 것과 성령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을 코이노니아로 본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은 인격자이시기 때문이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아시는 분이시다. 중생 세례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사건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비이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엄마가 아기와 항상 함께 있어서 아기의 욕동과 불편을 금방 알아차리듯이 성령님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고통과 필요와 갈구를 아시고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격자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신비한 합일이다. 성령이 인격자이심을 알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 위해서이다. 성령님께서 인격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성령님께 예배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산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과 성령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가 된다고 가르친다.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지 아니하셨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끝없는 구속의 사역은 성령님에 의해서 완성되고 있다. 성령은 처음 보혜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즉 십자가 은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신다. 다른 보혜사란?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에 완전히 동일하지만 다른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겠다는 말씀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이고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 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했듯이, 성령도 또 예수와 똑 같은 다른 보혜사로서 오셨기 때문에 온전한 교통을 나눌 수 있다.
2. 성령과의 교통으로 나아가는 길
1) 성령 세례에서의 신비체험
성경은 성령 세례에 대해 일곱 차례나 언급하고 있다. 그 대부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baptised with the Holy Spirit)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히 번역하면,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baptised in the Holy Spirit)라고 해야 한다. 성령은 어떤 도구나 기운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격 안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세례에서 물은 항상 사람 밖에 있는 것이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령 세례는 인격적 존재인 성령 안에서 받는 세례이다. 그리고 성령 세례 시에는 신비체험이 동반된다.
성경에는 성령 세례가 성령을 받는 것(행 8:17),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행 10:45), 위로부터의 능력이 입혀지는 것(눅 24:49)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표현들은 중생 시의 성령의 역사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성도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성령 안에서 완전히 잠기는 체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생과 성령 세례는 동일한 체험이 아니다. 영산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로 방언을 말하거나, 강력하게 복음 전파에 사로잡히는 것, 마음의 큰 확신과 믿음을 갖는다고 가르친다. 물세례에도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히 임하지만, 성령 안에서 받는 성령 세례는 전인적으로 경험하는 신비 체험이고 새로운 능력을 입는 순간이다.
김수천은 “성령신비주의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를 통전적인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눅 4:18-19). 영산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통전적인 영성을 그의 사역에서 실천하였다. 성령 세례를 통한 신비경험은 21세기 과학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2) 말씀과 기도에서의 신비체험
말에는 말하는 자의 인격이 담겨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성경과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의 삶에서 말씀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과 접촉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너덜너덜해진 몸(grotesque body)에 참여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온 인류의 죄와 질병과 고통을 당신의 몸으로 받으시고, 당신의 몸에 그 흔적을 드러내시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온전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상하신 몸에 참여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과 탄압받는 자들, 죄에 빠져 방황하는 자들, 백성을 위한 자비의 마음을 풀을 때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굳어진 몸(imperviable body)이 되어서는 기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아픔이 더 이상 자신에게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해버린 상태에서는 타자를 위한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선성에서 출발된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교제를 열망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와 교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의 신성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의 말에는 항상 영적 권위가 실려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의 삶에서 체험하며 살며,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신비를 증언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를 원하는 자는 성령 충만을 갈망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임재에 전적으로 지배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기도자가 성령과 깊이 관계적으로 존재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기도자가 “아바 아버지”라로 부름으로써 기도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일어난다(갈 4:6).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기도 안에서 그분 스스로가 말함으로써 당신의 현존을 증명한다. 기도 가운데 성령이 현존한다는 것은 기도자에게 자신의 현존을 알린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자는 성령의 현존에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하는 것은 신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과 신비적 관계 안에서의 일어나기 때문이다.
3) 성만찬에서의 신비체험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의 사건이며, 하나님은 성만찬 속에서 역사하신다.”라고 했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사건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 속에서 행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실재적인 사건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성만찬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날드 롤하이저(Ronald Rolheiser)는 성만찬에 스며있는 신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신체적 포옹으로서의 성만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연합을 강화시키는 성만찬, 새로운 만나로서의 성만찬, 우리의 건강과 기쁨을 축하하고, 고통과 슬픔을 기념하는 식사로서의 성만찬, 희생으로서의 성만찬, 부활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성만찬, 화해로서의 성만찬, 성숙한 제자도로 나아가게 하는 성만찬, 정의로의 초대로서의 성만찬, 건강을 유지시키는 의식으로서의 성만찬,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성만찬,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기도로서의 성만찬을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처럼 우리를 안아주신다. 필요한 것은 신체적 포옹이다. 피부는 어루만져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성만찬을 주셨다.”라고 성만찬의 스며있는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밝힌다. 성만찬은 신비한 관계적 교제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한 개인의 심리적 변형과 치료를 위해 적합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Ⅳ. 상담관계에서의 신비체험이 심리치료에 미치는 영향
성령과의 교제 관계 안에는 사랑의 신비가 흘러넘치듯이 치료적인 상담관계서도 무의식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신비가 존재한다. 관계적 정신분석학은 치료적인 상담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개념으로 담는 것과 담기는 것, 안아주는 환경, 공감, 레브리 상태, 되기, 기억도 욕망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상호주관주의 정신분석학은 치유와 성숙이 시혜자의 일방적인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두 인격체가 만나는 상호주관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사건임을 가르친다.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나와 너”의 관계로 맺어질 때 신비적 연합을 체험하게 되고, 이로써 변형과 치료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치료적 상담관계에의 신비
성령은 상담자-내담자 관계에서 연합을 창조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한 조화이다. 성령은 이 과정에서 양자 모두의 정체성, 독특성, 순결성을 보존한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자들의 연합을 위한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과의 통일성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상담자는 한 몸 안에서 모든 이에게 세례를 주시는 성령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다.
1) 담는 것과 담기는 것(container and contained)에서의 신비적 경험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에 따르면, 유아는 매우 극단적이고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에 의해서 압도되어 불안할 때 그들의 얼굴표정과 울음으로 이러한 감정을 엄마에게 전달한다. 아이에게 몰입되어 있고 깊은 주의력을 가진 어머니는 아이의 이러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조절하고 변화시킨 후에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여 되돌려 준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경험된 유아는 어머니의 담는 기능이 내면화되어 자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심리치료에서 담아내는 것은 기술적인 전략이 아니라 진정한 개인적인 상호관계에서 일어난다. 상담자가 내담자의 말을 몰입하며 경청하는 것, 방해받지 않는 시간, 조절되고 관심을 보여 주는 반응은 담아내는 기능을 제공을 한다. 이러한 대상관계 경험은 신비적 연합과 일치를 이루게 되고, 치료적인 관계가 된다. 담기 개념은 유아의 정서적 상태들을 견뎌주고 흡수해주며, 그것들을 변형시켜주고, 유아에게 해석해주는 엄마에 대한 것이다.
담는 것과 담기기는 관계는 사랑 안에서 신비적으로 연합될 때 가능하다. 임신말기에 태아에 대한 엄마의 일차적 모성적 몰두(primary maternal preoccupation)는 장차 태어날 아기에 대한 몰두, 즉 담는 기능을 위한 모성의 신비한 능력을 보여준다. 상담자-내담자와의 관계에서도 담는 것과 담기는 관계, 서로를 향한 몰두가 일루어질 때 치료적 변형과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보듬어 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에서의 신비적 관계
위니캇은 보듬어 주는 환경 개념을 주장했다. 유아는 환경적으로 보듬어 주는 대상과 관련되어 존재한다. 보듬어 주는 환경을 제공하는 엄마는 유아에게 몰입되어 있어서 아이의 욕구를 직관적으로 읽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아이가 원하는 대상 세계를 시기적절하게 제공하며, 아이의 독립된 심리적 공간을 존중해 주면서 적절한 좌절을 줄 수 있는 엄마를 가리킨다. 엄마는 유아의 자율적인 발달을 촉진하는 데 몰두해 있는 배경적 대상으로서 기능한다.
아기에 대한 사랑이 엄마로 하여금 아기에게 몰입하게 하고 아이의 욕동을 정확하게 감지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대상 세계를 제공하듯이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내담자 의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으며, 정확한 공감을 주는 반영적 자기대상이 될 수 있다.
3) 공감적인(empathy) 관계에서의 신비
크리스토퍼 볼라스(Christopher Bollas)는 “내담자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있는 내담자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라고 했다. 상담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찾아온 내담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감이라는 관계적 신비가 일어나야 한다. 상담자는 공감적 침잠(empathic immersion)과 대리적 성찰(vicarious introspection)을 통하여 내담자가 하는 말에 대한 선입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론이나 종교적인 가치관도 내려놓고 내담자의 관점에서 그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침잠(沈潛)한다는 말은 물속에 깊이 가라않아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대상에게 깊이 몰입(沒入)되었음을 가리킨다. 대상에게 공감적으로 침잠하다는 말에는 몰입을 통하여 이미 신비적인 융합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과 공감적으로 침잠되어지는 관계는 담아주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리고 대리적인 성찰은 내담자가 되어서 그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의미들, 혹은 의미들의 중요성을 지각하게 해준다.
낸시 멕윌리암스(Nancy McWilliams)는 “치료자가 유능하지 않을지라도 열심히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 내담자는, 수치감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받고자 하는 바람 때문에 상담을 중단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는 검은 색이지만 황금색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상담자는 내담자의 폐제되고 억압된 정신적 은신처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검은 색이지만, 공감적 침잠과 융합된 상태에서 내담자의 어두운 그림자를 맞닥뜨리기 때문에 오히려 신비로운 기쁨이 있다. 그래서 금빛 찬란한 황홀로 바뀐다.
낸시 멕윌리암스는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는 치료기법의 집합이 아니다. 치료자가 충분히 훈련받지 못했을지라도 뛰어난 직관력과 진실한 마음을 가졌다면 유능한 치료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도로 훈련되었더라도 공감 속에서 긍휼을 갖추지 못했다면 위험할 수 있다.”라고 했다. 상담자의 이론이나 기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 공감능력이 치료의 핵심이 된다.
4) 레브리(revrie) 상태에서의 신비적 관계
레브리란 용어는 비온의 개념으로써 꿈꾸는 상태를 뜻한다. 유아는 엄마에 의해서 자신의 원초적 감각들, 즉 베타 요소가 처리된다. 유아는 원초적 감각들을 엄마 안으로 투사한다. 유아에게 몰입되어 있는 엄마는 레브리 상태에서 자신의 알파 기능을 사용해서 아기가 투사한 내용물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베타 요소가 알파 요소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유아의 수용할 수 없는 정감적 경험을 엄마가 자신의 정신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유아의 수용 불가능한 정감적 경험을 엄마가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적절하게 처리하여 유아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유아에게 되돌려준다. 이러한 정신적 과정을 행할 때 엄마의 정신적 태도를 레브리 상태라고 한다. 좋은 엄마는 아기에게 몰두되어서 아기의 불편함이나 불안을 즉시 알아차리고 대상세계를 제공해 주거나 달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위해서는 엄마가 아기와 더불어 무의식적 의사소통 체계인 레브리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
임상 심리치료에서도 상담자 자신이 내담자의 베타 요소를 알파요소로 바뀌는 과정을 도와주는 레브리 중에 있는 엄마와 같은 상태에 놓여야 한다. 만약 레브리 상태에서 하나의 기억이 치료자의 정신 안으로 흘러들어온다면, 이 기억은 정신적 실재의 상징으로서 매우 타당성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의 상태이다. 상담자-내담자의 관계가 레브리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두 사람이 신비적 연합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유아의 생애 초기에 엄마에 의해서 유아의 베타 요소들을 알파 요소로 전환하여 개념화로 나아가게 하듯이 상담자가 레브리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것은 내담자에게 변형과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5) 되기(Becoming)를 통한 신비적 관계
한 개인이 음식물을 먹을 때 위에서 소화되고 장에서 흡수됨으로써 그 음식물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처럼 상담자는 내담자가 되어야 한다. 되기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신비적 관계 체험이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전달하는 정서적 경험을 소화하도록 동화되어야 하고 자신을 허용해야만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심으로 온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것을 체휼하였듯이 상담자도 그러해야 한다. 되기는 내담자를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되기의 개념은 유아의 발달과 임상에서 적용될 수 있다. 유아는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 진화할 때, 과제들 중의 하나는 욕동들을 포함해서 자신의 곤궁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육자가 유아의 곤궁이 되어 적절하게 조절하여 아기에게 되돌려 주고, 아기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상담자가 내담자의 정서를 느낌으로써 내담자의 정서를 온전히 경험함으로써 그를 돕고자 하는 임상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온전히 지각하기 위해서는 대상과의 유동적인 리듬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 리듬 안에서 상담자가 그 대상이 될 때 온전히 지각할 수 있다. 이는 융합이 아니다. 왜냐하면 융합은 자신의 자아 경계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통합 또는 지각하는 자기로서 기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동적인 리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경직되거나 포화된 상태가 아니라 부드러운 대지의 옥토처럼 수용적이고 불포화된 상태에 놓이는 것을 말한다. 되기는 자아 경계가 있으면서 자기와 대상의 합일이 있어난 것을 말한다. 신비는 대상에게 자기가 함몰되거나 혼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대상과 연합되는 것이다.
6) 기억도 욕망도 없는 상태(Without memory of desire)에서의 신비적 관계
레브리 상태에서 정신은 육감적 실재에서 정신적 실재로의 전환을 가장 잘 수행해 낸다. 육감적 실재에 대한 애착은 이러한 이행과 이해를 방해한다. 비온은 기억 자체가 이해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대한 애착이 이해를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심리치료자 스스로 기억에 대한 애착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상담자의 기억과 욕망이 내담자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치료에 방해가 되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온은 “기억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한다.
기억은 진실이 한 때 머물렀지만 지금은 머물러 있지 않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기억에 머물지 않고 기억이 없는 상태에 놓일 때 비로소 대상과의 신비적 관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기억과 욕망은 관계를 방해한다. 참된 관계의 신비는 기억과 욕망이 제거될 때 일어나다.
상호주관성 이론에서의 관계적 신비
로버트 스톨로로우(Robert Stolorow)는 한 개인이 고립된 자기에 머무르지 않고 상호 영향력을 갖는 주관성들이 상호작용하는 공간을 창조한다는 관점을 강조함으로써 상호주관성 이론(intersubjectivity theory)을 제시하였다. 토마스 옥덴(Thomas Ogden)은 상호주관성이란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나누어진 무의식적 경험(shared experience)의 영역이라고 정의했다. 이 영역은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형성되는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탄생한 공간을 가리켜서 분석적 제 3의 영역(analytic third space)이라고 했다. 분석적 제 3의 영역이란 내담자의 전이인 제 1의 영역과 상담자의 역전이의 영역, 즉 제 2의 영역이 만나 형성되는 공통분모의 공간을 말한다. 스톨로로우는 상호주관성이란 용어를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는 상호적인 영향과 규정을 가리키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정신분석적 작업은 “마음의 모체(matrix of the mind)”인 심리적 공간을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두 사람의 무의식이 만나는 분석적 제 3의 영역은 심리적 공간이 확장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심리적 공간은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이 제각기 서로 다른 놀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상담자도 내담자들마다 상담의 공간을 다르게 창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아기가 자신의 서로 다른 측면을 끌어내도록 허용해 주는 것처럼, 상담자는 내담자가 현실과 환상 속에서 상담자를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어야 한다. 유아가 어머니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므로 똑같은 어머니를 가진 두 명의 유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상담자를 가진 두 명의 내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담자도 내담자에 따라서 상담의 장에서 다른 방식으로 회기를 경험하고 행동한다. 상호주관성 이론은 관계의 신비와 고유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한 개인은 굳이 엄마-유아, 상담자-내담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연만물, 예술품을 대하는 방식도 각각의 고유성을 갖고 관계를 맺는다. 고유한 관계 형성은 상호주관성이 작용하는 독특한 신비가 내재되어 있다.
상호주관성 이론에서 해석이 치료적인 효과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내담자의 정서적 상태와 발달적 갈망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즉, 해석이 내담자의 심리상태와 발달적 필요에 대한 상담자의 공감적 반응으로 이해될 때에 비로소 치료적 효과를 갖게 된다. 해석적 정교함이 치료적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공감적 관계를 통한 앎이 치료적이라는 것이다. 상담자는 기억도 욕망도 없는 상태에서 내담자의 그것과 무의식적으로 하나 되기, 무의식적 앎에서 나오는 해석이라야 치료적이다. 그러므로 상담의 장은 신비적 관계가 발생하는 곳이다.
엄마-유아의 관계처럼 아이가 울면, 엄마가 귀를 기울이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울면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가 슬퍼하면 위로하시고, 춤추고 노래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마찬가지로 상담자-내담자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공감적 관계가 창조되는 장이어야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과 치유의 장은 예수님의 긍휼과 인간의 고통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난다. 긍휼을 가리키는 헬라어 동사인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말은 스플랑크나(splangchna)에서 나왔는데 이는 뱃속, 창자를 의미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뱃속은 가장 친밀하고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분의 뱃속, 창자가 움직였다고 표현한 것은 관계의 신비를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혹은 동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 긍휼은 존재의 가장 여린 부분인 뱃속, 창자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서 여리고 성이 가까운 곳에서 소경이면서 가난한 거지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외쳤다(눅 18: 38-39). 그는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이 순간 예수님의 뱃속 창자에서 우러나오는 긍휼(스플랑크니조마이, splangchnizomai)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면서 주님께 긍휼(엘레에오, ejleevw)을 구하는 인간의 간절함이 만나는 제 3의 영역에서 기적과 치유가 일어났다. 즉, 상호주관성의 만남의 장인 제 3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계신 상호주관적인 장이요, 상호주관적인 공간이며, 상호주관적인 몸이 되셨다.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 이론은 상담자-내담자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신비하고 고유한 영역에서 치료가 일어남을 가르친다.
상호주관성 이론과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개념이 피터 포나기(Peter Fonagy)의 정신화(mentalization)이다. 정신화란 의도적 정신 상태와 연계된 것으로 행동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일이다. 정신화는 정신 상태가 인간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가정에 근거하며, 자신이나 타인의 정신 상태에 초점을 두는 것을 뜻한다. 정신화는 애착의 이론 중 심층적 인지, 즉 자녀를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좋은 엄마는 먼저 자신의 정서경험을 반복하여 성찰함으로써 자기감과 세계에 대한 지속적이고 안정감 있는 개념을 형성하는 엄마이다. 유아는 이러한 엄마의 정서적 안정감을 발판으로 하여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객관화하여 반복 성찰함으로써 자기감을 확립하게 된다. 좋은 엄마는 아이의 정신과 정서를 잘 파악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상호주관적으로 아이에게 되돌려 주는 엄마이다. 상담자 역시 자신의 정신 상태와 정서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안정감을 유지할 때 내담자는 자신의 불안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처와 맞닥뜨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이러한 일이 반복됨으로써 변형과 치료로 나아가게 된다.
Ⅴ. 나가는 말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만물들과의 관계, 예술과의 관계 등에서 신비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신비를 추구하며 경험한다. 엄마-유아 사이는 언어가 아직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본 논문의 내용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엄마와 유아 관계에 신비적 연합이 가득하듯이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도 그러해야 하며, 상담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무의식적 의사소통을 통하여 관계의 신비가 드러날 때 치료적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령과의 교통에 관하여 논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속에 숨겨진 신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존재 자체의 신비, 성령과의 교통에서 성령의 인격적 속성과 성령 세례 시 일어나는 신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과의 교제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 성만찬에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관하여 논하였다. 그리고 상담관계, 즉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의 무의식적이고 치료적인 관계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담는 것과 담기는 것으로서의 관계성, 공감적 관계, 충분히 좋은 어머니와 같은 관계, 보듬어 주는 관계, 되기의 관계, 레브리 상태의 관계성, 기억도 욕망도 없는 상태는 무의식적 연합의 관계이므로 매우 신비롭고 치료적이다. 그리고 상호주관성 이론에 근거한 상호주관성과 정신화로 나아가는 치료적 관계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몇 가지 제안의 말을 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씀처럼 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나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와 상담관계에서 서로가 대상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만 하지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공동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임상의 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정신분석적 치료적 관계성은 목회자가 목회적으로 성도들을 돌볼 때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관계적 모델이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무의식적이며, 공감적인 형태를 취할 때 이루어진다. 셋째는, 엄마-유아 관계에서 엄마의 모성적 몰입은 아기의 불안을 즉각적으로 감지해 내듯이 목회자 혹은 상담자는 대상을 향하여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공감적인 목회의 중요성이 자각되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들과 함께한 것처럼 성육신의 목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넷째, 목회자와 상담자는 자기 분석을 통하여 목회적 돌봄에서 자신의 병리와 불안에 의해서 병리적인 관계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하여 목회자, 상담자 자신의 정신화를 위한 성찰과 안정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신비이시다. 다른 보혜사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은 신비이시다. 목회자와 상담자는 이러한 신비를 믿음의 대상으로 관계를 맺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사역에서 임상현장에서 관계의 신비가 드러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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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ysterious Experience effects on Psycho Therapy
-Through Therapeutic Counseling Relationship and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Abstracts-
Kim, Hong Keun
The men could experience Mysterious things through relationship with GOD, other people, nature, arts, and so on. People get Mysterious Experience at birth and seek through one’s whole life. Although Basically mother communicates with baby by language, they communicate each other unconsciously. This is quite special.
The Trinity consists of three persons. But at the same time, they have a unity. To easy understanding for Trinity we need to learn about Geek word ‘περιχώρησιϛ’. This meaning contains mutual indwelling, mutual circulation, and interpenetration. Namely, The Trinity interpenetrates each other, then it has mutual circulation, and mutual circulation. Therefore, the Trinity is Mysterious. Human has image of GOD. So it also has Mysterious.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is Mysterious thing. Because we relationship with invisible GOD with personality. Holy Spirit is a man of good character which has wisdom, compassion, and justice. Meet with Holy Spirit cause transformation and progress. But by knowing oneself we may understand GOD. When we know about GOD, we can pray genuinely. It leads Therapeutic transformation and Therapeutic progress. Thus before meet with Holy Spirit, we should face with the truth of oneself. Pray fundamentally listening and mutual communication. Listening his voice is special experience by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It need to be done with love. Because GOD is love and he will be in place full of love.
Like mother and baby use unconscious communication, counselor and client also possible. The Therapeutic relationship consists of ‘container and contained’, holding environment, empathy, reverie state, becoming something, and intersubjective relation. These relations are special. Because of it contain integration and be the one thing.
The main point of this paper is, like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and unconscious communication between mother and baby are so mysterious, counselor and client relationship require uniqueness by unconscious communication for getting therapeutic transformation. To do this, I would like to research about ‘Mystery of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and therapeutic relationship’
- 주제어 -
신비 체험, 성령의 교통하심, 페리코레시스, 치료적 관계, 상호주관적 관계
Mysterious Experienc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περιχώρησιϛ,
Therapeutic Relationship, Intersubjective Relat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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