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바콜로드를 다녀와서 / 이호규
얼마 전, 필리핀 중부 도시 ‘바콜로드’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매년 해외 봉사활동 지역으로 중앙아시아를 택했는데, 이번에는 섬나라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게 되었다.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직항이 없어 김해공항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 공항에 새벽에 내렸다. 공항 환승 대기장에서 장시간 기다렸다가 국내선으로 갈아탔다. 바콜로드 공항 도착 후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호텔로 이동했다. 가는 길목엔 사탕수수밭이 지천으로 늘려있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바콜로드는 인구 60만 명의 중소도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국내선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중부지역 네그로스섬의 가장 큰 도시이다. 도시
규모는 적지만 교육 도시로 각종 어학원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어학연수를 많이 가는 곳이다. 관광도시 세부와 보라카이의 중간쯤 위치로 이해하면 쉽다. 우리가 방문하는 시기에 그 지역의 유명한 축제인 ‘마스카라’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봉사대원은 7명으로 단출했다. 해안 갯벌에서 염생식물인 ‘맹글로브’ 묘목을 심는 것으로 봉사활동은 시작되었다. 지역 고아원(Bacolod Boy’s Home)을 방문하여 운동화와 학용품을 전달하였다. 우리나라 목사님이 빈민촌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사업인 녹녹아카데미를 펼치는 현장을 방문하여 교육 기자재를 전달했다. 교육사업 현장으로 들어가는 양쪽은 허름한 쪽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도 인상적인 행사는 ‘만달라간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교실에 설치할 TV 여러 대를 기증하는 순서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한국-필리핀협회에서는 여러 차례 방문했던 학교였다.
만달라간 초등학교는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에 골목을 몇 개 돌아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승합차에서 내리는 순간 뜻밖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운동장에는 교복을 입은 전교생이 양쪽 스탠드에 줄지어 앉아 있고 앞쪽 무대에는 봉사단이 기증할 대형 TV가 현지 한인회 간부들의 협조로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학교에서는 큰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에는 공연을 준비한 듯 어린 학생들이 전통 복장으로 얼굴에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축하 행사는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봉사대원 소개와 양쪽 대표의 인사, TV 기증식에 이어 학교에서 준비한 여러 팀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뒤쪽에서는 흥에 겨워 날렵한 동작으로 춤을 추는 어린 친구가 보였다. 카메라를 학생들 얼굴 쪽으로 향하면 금방 환호성들이 터져 나왔다. 학교 졸업생인 듯한 청년 가수도 초대되어 노래 몇 곡으로 흥을 돋우었다. 우리와 함께 갔던 한국인 어학연수생 몇 명이 답가라도 해야 할 분위기라 무대에 올라갔다. 즉석에서 준비한 K-팝 몇 곡을 부르니 행사장은 완전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현지 언론사에서도 취재차 방문하여 촬영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자 싸인 무대가 펼쳐졌다. K-팝을 마무리하니 한국 K-팝 가수가 왔는 양 젊은 대학생들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함께 촬영한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천진난만한 어린 학생들이 어디서 준비했는지 메모지를 가지고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사인을 부탁하고 다녔다. 이동하는 우리에게도 메모지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메모지가 없는 아이는 손바닥에 사인해달라고까지 했다. 대학생들도 잠시 연예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고 우리도 생전 처음 사인을 해주었다.
학교 시설은 우리의 60년대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었다. 천정이 있는 무대와 작은 운동장에 설치된 스탠드를 제외한 전반적인 시설은 낡은 편이었다. 습기가 많은 지역인지 초라한 시설을 다양한 식물들이 보완해주고 있는 듯했다. 참관한 교실의 뒷줄 의자는 앉기가 불편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어떤 교실은 태풍으로 비가 새고 있었지만 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에 있는 화장실도 예전 시골 초등학교의 오픈 식으로 냄새가 많이 났다. 학교 전체 지형도 반듯한 곳이 아니라 경사진 곳에는 물이 고여 질퍽하였다.
열악한 시설에 비해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한 점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때 그 시절에는 아무 불편을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교실이 모자라 이부제 수업을 하고, 첫 입학 때는 책상이 없어서 맨바닥에서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떤 때는 수업을 미루고 냇가로 가서 모래와 자갈을 책보자기에 담아 학교로 가져왔었지만 왜 하는지조차 모르고 했었다. 이들을 보며 수십 년 전, 어깨에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십리 길을 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7,6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필리핀,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 수준을 누렸던 나라가 일부 위정자들의 부패로 후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 전란 전까지만 하여도 파병으로 우리를 도왔던 그들이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마약 범죄가 심하여 가는 곳마다 입구에는 총으로 무장한 경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고,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큰 도심의 도로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빈민촌이 있고, 우리나라 60년대 도시 외곽의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그들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아리게 했다.
필리핀을 여러 번 다녀와도 그들의 깊숙한 생활 현장은 보지 못했다. 맹글로브 묘목을 심기 위해 지나쳤던 해안가 마을, 도심 속의 빈민촌, 낡은 시설의 초등학교 등을 둘러보니 한 나라의 정치를 하는 위정자들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졌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이념 정쟁이 끊이지 않고,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도 포퓰리즘 정책으로 0%대 경제 성장 늪에 빠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만달라간 학교를 떠나올 때 낡은 교실 창가로 손을 흔들며 해맑은 미소를 보내던 아름다운 얼굴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