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늘 어렵다
살아가다 보면 난감한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들이다. 매순간 신경을 쓴다고는 하나 결과가 늘 의도된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변수들이 언제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당혹감은 여실히 드러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벗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벗이 내일의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이 서로 등지게 되는 일은 의외로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마디, 별생각 없이 행한 행동 하나가 사람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1년여간 서로 말도 하지 않는 성도 두 분이 계셨다. 두 분 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처음엔 서로를 잘 챙기시며 얼마나 잘 지내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친 말이 오가더니 옆에 서 있는 것조차 싫어하시게 되었다. 두 분을 어르고 달래며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나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대화조차,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하시게 되었다. 이제 목사의 권면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목사로서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도 다 아는 바라 두 분이 계실 때면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긴장상태였다. 그러다가 이번 주 주일예배를 마치고 노년부 모임이 진행될 때 기적이 일어났다. 노년부 교사를 맡고 계신 집사님의 노력과 다른 원로 권사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마침내 두 분이 서로 손을 잡고 화해하게 되었다. 사람의 관계가 적에서 벗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집사님께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두 분께 잘하셨다 등을 토닥여주었다. 집사님과 원로 권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두 분은 잘 지내겠다고 하시면서도 말미에는 서로에 대한 그간의 부정적 감정들을 내비치셨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 한 순간에 바뀌겠는가! 어린 아이같은 할머니들이신지라 화해를 하면서도 지금까지 이렇게 된 데에는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뭔가 계기가 생기게 되면 이 부정적 마음은 확 불타오르게 될텐데... 미완의 화해인 셈이다. 인간관계는 늘 이렇게 어렵다.
사랑을 배우고 말하며 실천하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적 고백과 삶의 불일치는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언제나 이해와 오해, 사랑과 미움, 진실과 가식이 공존한다. 교회라고 다르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우린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노라 고백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또한 자신이 신앙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은 삶이 증명한다. 우리의 고백과 삶의 불일치는 우리가 죽기까지 그 간격을 좁혀 가야 하는 과제로 남아 있다.
나라고 다를까? 나만큼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난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괴롭다. 난 할 수만 있다면 하루빨리 이 가면을 벗고 싶다. 그러나 내가 목사로 사는 한 이 가면은 쉽게 벗겨질 것 같지 않다.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모호함
난 여전히 목회가 뭔지 모르겠다.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거늘, 웬걸... 도무지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 좋은 세상을 향한 꿈을 한시도 저버린 적은 없으나, 그렇게 노력도 해보았으나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대로인 것만 같다.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내 모습이 실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같이 느껴진다. 왜 이토록 인생은 허무한 걸까? 미성숙한 나의 모습이 여실히 느껴져 맥없이 가만히 허공을 주시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인생은 참으로 모호하다. 뭔가 확실한 듯 해 보여도 그건 현실에서 온전치 못하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의 한계일까? 특히나 목사라는 실존은 나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 사람들 앞에 서야 하며 하늘의 뜻이랍시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존재.. 이 사실이 나에겐 참으로 버겁다. 단순히 허무주의를 칭송하는 것은 아니다. 내 실존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면서도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이 있다. 목사랍시고 빈틈없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는 비단 목회자 자신의 시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할 수만 있으면 이 갑갑한 옷을 빨리 벗고 싶다.
올해 나의 신앙적 멘토였던 김기석 목사님(청파교회)과 구자경 목사님(창천교회)이 은퇴하셨다. 가끼이서 때론 멀리서 그분들의 삶과 메시지를 거울 삼아 나 자신을 비추곤 했다. 은퇴를 하셨다고 해서 나에게 있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분들은 여전히 나의 인생의 선배로서, 길 안내자로서 변함없이 서 계신다.
김기석 목사님은 은퇴에 맞춰 그간의 목회여정을 걸어오시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험한 깊은사색과 묵상이 담긴 책을 출간하셨다. 고맙게도 청파교회에서 책을 보내주셨다.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 – 고백의 언어들>
이 책은 나를 한없이 위로해주었다. 흔들리고 나자빠진 나의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다. 나의 흔들림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그 흔들림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은은한 사랑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노라고 속삭여주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은 저마다 흔들리는 존재였다. 하나님은 그 흔들림을 당신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재료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한 실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여 순종한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이 흔들림이 불편했고, 난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이 들곤 했으나 이젠 흔들림을 긍정하기로 했다. 난 그동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를 향한 그들의 기대치에 미치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내 허무함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흔들리는 실존에 대한 자각이 나를 전혀 새롭게 변화시킬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난 여전히 흔들릴 것이며 고민하며 한숨 쉬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며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애써 떨쳐내려 했던 흔들리는 실존에 대한 불안감을 나의 본래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을 위로했던 단어들이다.
‘흔들림’, ‘방황’, ‘모호함’, ‘머뭇거림’, ‘낯섦’, ‘틈’...
그리고 ‘하나님’
이 단어들은 훗날 내 삶을 돌아보며 내 인생을 설명하는 고백의 언어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