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
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
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혼란스러움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수수
께끼 같은 경험들을 이해하기 위한 왕도라고 생각한다.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
는 어떻게 되는 걸까?
31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
했다. ...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48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
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
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움 무음에는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60
“사람들은 가끔 정말 두려워하는 어떤 것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에 두려움을 갖기도
하지요.”
68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자신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
룰까.
137
글을 쓰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깨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
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더욱 알지 못하고.
152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은 자신
이 인식하지 못한 그 완전함의 퍼즐 한 조각이라는 사실에서 생기를 얻기 때문이
다. 이 완전함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인식이 우리를 엄습하면 우리는 완전함
을 경험할 수 없는 이 시간을 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갑자기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죽을병에 걸린 내 환자들이 진단 이후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이상하고도 충격적인 경험을 겪
는 이유다.
287
사람들을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스스로를 견디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테
니까.
299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말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
려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
는 정신적 위로이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정신적인 위로....
기대를 줄임으로서 더 현실적이 되고, 단단하고 신뢰할 만한 본질만 남아 실망의
고통에 맞서는 저항력을 지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대한 기대를 금지하고, 버스가 빨리 올지와 같은 무의미한 기대만이 존재하는 삶
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314
어떤 일을 표현한다 함은, 그 일이 지닌 힘은 보존하고 두려움은 제거하는 것이리
라.
358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
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 - 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 - 은 생각
만 해도 가슴이 떨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전히 무기력하고 자
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
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찾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
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
381
내가 아빠의 상상에 대해 아는 게 있었던가? 왜 우리는 부모의 상상에 대해 이다지
도 모를까? 어떤 사람이 상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388
이 아버지와 아들은 고대 드라마에 등장하는 적들처럼 한 도시에서 마주 바라보는
언덕에 살면서 서로 두려워하는 마음과 표현할 수 없는 애정으로 묶여 있었다. 그
들은 서로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은 침묵에사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한쪽의 침묵이 다른 쪽의 침묵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408
현재를 사다는 것, 이 말은 옳고 훌륭하게 들린다. 그러나 내가 원하면 원할수록 그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418
숨어 있는 실존감, 반대되는 가면을 쓴 채 내 인생을 결정한 부모의 실존감이 나에
게도 있었을까?
436
‘경멸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모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
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459
“걸인은? 존엄한 걸인이 있을까?”
에사가 물었다.
“그의 인생에서 진실로 불가피한 일,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면 아마 가능할
듯싶군요.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편에 서 있다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면 말
입니다.”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도 존엄에 속한다. 그래야 갈릴레오나 루터처럼 공개적인 혹
평을 품위 있게 극복할 수 있다. 그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부정하려는 유혹과
맞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512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
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
한 것이 흔들릴까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572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이란 없고, 읽힐 뿐이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
된 눈빛’이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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