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 부부가 나란히 쌍분
-1443~1468-남이 장군의 기상과 나라사랑 정신 (1459년 17세 무과 장원급제)
공적
① 1467.5.16(세조13년)-우대장으로 함경도 이시애난 평정 (적개공신 1등)
② 1467.9.24(세조13년)-여진족 본거지 정벌 1468년.8.23(세조14년) 27세에 병조판서
-세조13년 11월 2일-적개 1등공신 의산군에 봉해지면서 공조판서겸 오위도총관(지금의 참모총장)에 이듬해 8.23에 27세에 최연소 병조판서(오늘날의 국방부장관)에 임명
정국 정치권
-훈구파 한명회 대 귀성군 이준 남이의 신흥무인세력
-세조 사후 훈구세력의 견제 1468.9.7(세조14년) 병조판서에서 해임 한직 겸사복장으로
바로 이때 유자광의 무고
-1468년(예종원년) 10.24-10.27-예종의 친국 무자비한 국문 끝에 27세에 처형
-1801년(순조1년)-정범조의 <남장군 怡전>-여론환기
-1818년(순조18년) 3월 우의정 남공철에 의해 신설(伸雪)되어 복관작됨
-1910년(순종4년) 8.20-충무공 시호가 내려짐-350여년만에 억울함이 빛을 봄
-남씨 후손들에게 찔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남이의 옥사에 있어서 그를 무고한 자와 고문을 가한 자들은 모두 녹훈을 받아 그 후손들이 모두 이익을 얻었는데, 후손들 중에 남이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까지 그 억울함을 변명한 자가 없으니 슬픈 일이다(정범조 지적)---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 젊은 나이에 죽어 훗날 아무리 높은 관직이 주어지고 수십 개의 사당에 배향된다 한들 본인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다 부질없는 일 아닐까 싶은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이다(남이 장군 묘소에서-남수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