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짐
장-끌라우드 뒤몽셀의 이 글(2009)은 사실 들뢰즈에 대한 개론서의 한 항목일 뿐이다. 그런데 잘 보면 이 책은 훨씬 이전의 글 “헤까떼의 상징”[le symbole d' hecate](1996)이란 책의 요목들이다. 또한 의미의 논리(1969) 해설서도 썼다는데, 언제 쓴 글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구글에서도 검색불가, 놀랍게도 그의 이름과 logique du sens을 함께 검색하면 의미있게 잡히는 것이 없다. 헤까떼가 들뢰즈에 대한 저술로는 그의 첫 책인데, 아직 저서도 없는 수학자에게 그 이전에 해설을 의뢰할 수가 있었을까?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
헤까떼의 상징은 벩송의 고깔도형을 진정 다양체로 다루면서, 들뢰즈와 더불어 프루스트의 실재성을 고찰한다. 상징이라,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벩송은 한국어로 ~성(性)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té로 끝나는 말보다, 매우 번역어스럽긴하지만 ~적인 것, ~스러운 것으로 번역되는 le/la 형용사 조합을 훨씬 더 선호한다. 그의 철학의 성격과 우선 관계가 있으나, 나는 그 시절 라틴어 작문수업에서 이렇게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배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여튼 그래서 이렇게 상징/기호로 칭하는 것이 적합한지 의문이긴 하지만, 이런 구조주의적 언어를 거침없이 들뢰즈와 벩송 철학에 도입하는 것이 뒤몽셀 용어론의 특징이기도 하다. 뒤몽셀이 수학철학에 몰입한 사람이라서 그러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그는 이 책에서 각 장 마다 고깔도형을 반복해서 선묘하면서 소설의 묘사들이 이 시간다양체의 어떤 양태를 어떻게 얼마만큼 다루는지 규명한다. 이 책, 헤까떼의 상징이 갖는 철학사적 가치는 벩송의 시간의식이 후설의 “시간의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바로 직관하게 한다는 것이다. (후설의 “시간의식”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고, 이에 대한 읽을만한 박사학위 논문도 있다) 그가 이 차이를 그 책에서 직접 거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몽셀은 마치 후설의 시간의식이 이차원 도표라면 벩송의 시간의식은 입체라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양체이다. 내가 번역한 이 연구 이전에 그의 사유가 이렇게 벩송을 다루는데에 이미 이르렀던 것이다. 벩송이 삽입한 고깔이 입체 도형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도 이를 다양체로서 적극 표명하지는 않았기에, 벩송의 multiplicité/multiple은 다수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더 많기에, 이것은 뒤몽셀의 연구 성과가 맞는다. 그래서 뒤몽셀을 따르면, 벩송의 시간의식은 회고적인 구조 안에서는 제대로 논구될 수 없다. 이는 어떤 실재 안에서 흐름으로서, 소설이라면 서사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뒤몽셀은 그 실재를 프루스트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예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장켈레비치가 바로 보았듯이, 하이데거도, 사르트르도 아닌 벩송일지도 모르겠다. 더불어서 뒤몽셀이 수학자이기 때문에 역시 수학을 전공했던 후설과는 상이한 흐름의 철학관이, 또 내가 알아볼 수는 없는, 수학관이 있다는 것이 일깨워지고 있다.
내가 지금, 여기서는 조금도 번역하지 않은 다른 책에 대한 서술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이유는 이 글에 대한 소감은 추후에 조금더 자세히 해볼 요량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양해해 주시기를.
뒤몽셀은 ‘단순한 것’(le simple)으로써 벩송, 들뢰즈, 플라톤, 보에티우스, 플라톤의 연관에 대한 매우 매우 매우 깊은 통찰력을 이 글에서 발표하고 있다. 더한 찬사가 필요할까, 이 글은 영원회귀할 수 있는 글이다.
* 이미지가 매우 중요한 글인데, 각주와 더불어 붙여넣기가 되지 않는다. 파일을 열어서 보라.
사람
https://fr.wikipedia.org/wiki/Jean-Claude_Dumoncel
Jean-Claude Dumoncel
장-끌라우드 뒤몽셀Jean-Claude Dumoncel은 1944년 7월 18일 Manche의 Bricquebec에서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 철학 전문가입니다1,2.
Biographie
Jean-Claude Dumoncel은 철학 박사입니다3,4. 그는 19875년 낭트에서 Jean-Louis Gardies의 지도 하에 Whitehead의 체계와 분석 철학이라는 제목의 철학 박사 학위 논문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Lisieux에 있는 Lycée Gambier의 철학 교수이자 Caen6 대학의 CNRS 연구원이었습니다. 그는 캉 대학교에서 논리학, 미학, 수학사, 수학 철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는 현재 캉 신학 연구 센터[Centre d’études théologiques de Caen]의 교수로 재직하며 논리학과 자연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7.
그는 Nancy의 Henri Poincaré Archives의 CNRS Academos 팀 회원이자 l’Académie des sciences, arts et belles-lettres de Caen 의 해당 회원이자 Société normande de philosophie의 창립 회원입니다8.
그의 연구는 철학적 문제에 논리학과 수학을 적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및 분석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9.
Publications
Philosophie des mathématiques, Paris, Ellipses, 2018.
L'intime, ouvrage collectif, préface de Julia Kristeva, Editions M-Editer, 201710.
La Mathesis de Marcel Proust, Paris, Éditions Classiques Garnier numérique, 201511.
La Mathesis de Marcel Proust, Paris, Classiques Garnier, 2015.
Gilles Deleuze à l'écoute de la folie, Vallet, Loire-Atlantique, Éditions M-Editer, 201312.
Deleuze et les insularités : les moi, les mondes, les temps, Editions M-Editer, 201113.
Dire est-ce faire?, Editions M-éditer, 201114.
Whitehead ou le cosmos torrentiel : introductions à Procès et réalité, avec Michel Weber, Louvain-la-Neuve, Chromatika, 2010.
Qu'est-ce qu'une question de vie ou de mort?, Editions M-Editer, 201015.
Deleuze, Wahl, Whitehead & Wittgenstein, Editions M-Editer, 201016.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Editions M-Editer, 201017.
Deleuze et l'individuation, Editions M-Editer, 201018.
Deleuze face à face, Vallet, Editions M-Editer, 200919.
Alfred North Whitehead : le procès de l'univers et des savoirs, avec René Daval et Didier Debaise, Paris, L'Art du comprendre, 2009.
Whitehead, avec Xavier Verley, Maurice Élie et Didier Debais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6.
La philosophie telle quelle, Pétra, 2004.
Philosophie des mathématiques, Paris, Ellipses, 200220.
La tradition de la Mathesis universalis : Platon, Leibniz, Russell, Paris, L'Unebévue éditeur, 2002.
Le pendule du docteur Deleuze : une introduction à l'Anti-Oedipe, Paris, EPEL, 199921.
Les sept mots de Whitehead ou L'aventure de l'être, Paris, EPEL, 1998.
Le symbole d'Hécate : philosophie deleuzienne et roman proustien, Orléans, Editions HYX, 1996.
Le jeu de Wittgenstein : essai sur la Mathesis universali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122.
Articles
Le théorème de l’action indirecte, En attendant Nadeau23, 202324.
Métaphysique de la morphogenèse. Les perspectives de la conception deleuzienne des mathématiques dans la métaphysique, La Deleuziana, 202025.
Hintikka, Husserl et l'horizon phénoménologique, Klesis, 201826
Une archéologie du structuralisme, Critique, 2014.
Suivre une règle. Wittgenstein entre Aristote et Lejeune Dirichlet,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2011.
La Métaphysique de l’événement chez Whitehead, Péguy et Deleuze dans son rapport à Ruyer, Simondon et Dupuy, Annales de la philosophie en procès, 201027.
La thèse de Tarot-Tesnière, Archives de sciences sociales des religions, 200928.
La vie-aventure : organisme et symbolisme selon la métaphysique de Whitehead,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200629.
Ontologie des notions nomades. Whitehead et le problème primordial de la métaphysique, Les Études philosophiques, 200230.
Le mobilisme mathématique du second Wittgenstein, in: Visages de Wittgenstein, sous la direction de Renée Bouveresse, Beauchesne, Paris, 199531.
L'essence double du langage selon Gilbert Hottois, 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 198532.
Notes et références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Babelio.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Persée.
Dix-sept vidéos de Jean-Claude Dumoncel [archive], Youtube, Editions M-Editer.
Quatre vidéos de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Babelio.
Thèse de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theses.fr.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data.bnf.fr.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le site des Editions HYX.
La philosophie telle quelle : suivie de Conversation apocryphe entre Bergson et Russell [archive], par Jean-Claude Dumoncel, sur le site lautrelivre.fr, 2004.
La Part de l'Oeil [archive], sur le site lapartdeloeil.be.
L'intime [archive], ouvrage collectif, préface de Julia Kristeva, Editions M-Editer, 2017, sur Google Livres.
La mathesis de Marcel Proust [archive], sur Google Books.
Gilles Deleuze à l'écoute de la folie [archive], Éditions M-Editer, 2013, sur Google Livres.
Deleuze et les insularités : les moi, les mondes, les temps [archive], Editions M-Editer, 2011, sur Google Livres.
Dire est-ce faire? [archive], à consulter sur Google Books.
Qu'est-ce qu'une question de vie ou de mort? [archive], Editions M-Editer, 2010, sur Google Livres.
Deleuze, Wahl, Whitehead & Wittgenstein [archive], Editions M-Editer, 2010, sur Google Livres.
Deleuze, différence et répétition [archive], Editions M-Editer, 2010, sur Google Livres.
Deleuze et l'individuation [archive], Editions M-Editer, 2010, sur Google Livres.
Deleuze face à face [archive], sur Google Books.
Philosophie des mathématiques [archive], par Jean-Claude Dumoncel, Université catholique de Lille.
Le pendule du docteur Deleuze, une introduction à l'anti-Oedipe [archive], sur Gallica.
Le jeu de Wittgenstein. Essai sur la mathesis universalis [archive] de Jean-Claude Dumoncel, recension par Thomas de Praetere, 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 1993, sur Persée.
Passion structurale simple [archive], article de Pascal Engel, analysant notamment La mathesis de Marcel Proust de Jean-Claude Dumoncel, sur le site En attendant Nadeau, 23 janvier 2018.
Le théorème de l’action indirecte [archive], par Jean-Claude Dumoncel, sur le site En attendant Nadeau, 2023.
Métaphysique de la morphogenèse. Les perspectives de la conception deleuzienne des mathématiques dans la métaphysique [archive], sur le site La Deleuziana, revue de philosophie en ligne, 2020.
Hintikka, Husserl et l'horizon phénoménologique [archive], sur revue-klesis.org, 2018.
La Métaphysique de l’événement chez Whitehead, Péguy et Deleuze dans son rapport à Ruyer, Simondon et Dupuy [archive], Philosophy Documentation Center.
La thèse de Tarot-Tesnière [archive], par Jean-Claude Dumoncel, OpenEdition Journals, 2009.
La vie-aventure : organisme et symbolisme selon la métaphysique de Whitehead [archive], par Jean-Claude Dumoncel, Revue philosophique de la France et de l'étranger, 2006, sur Cairn.info.
Articles de Jean-Claude Dumoncel [archive], sur Cairn.info.
Visages de Wittgenstein [archive], publié par Renée Bouveresse, à consulter sur Google Livres.
L'essence double du langage selon Gilbert Hottois [archive], 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 1985, sur poj.peeters-leuven.be.
이-글
들뢰즈 대면하기
DELEUZE FACE À FACE,
Jean-Claude DUMONCEL,
Editions M-EDITER,
2009.
[15/P18]
베르그송, 보에티우스 그리고 보르헤스
Bergson, Boèce & Borges
들뢰즈가 자신의 작품에서 베르그송의 사상에 부여할 줄 알았던 역할은 철학으로서 베르그송주의의 기능을 규정한다. 그것은 세 개의 연속적인 선별에 도달하는데, 그 연쇄는 방법론적 여과를 형성한다.
1° 들뢰즈가 논평 한 철학자들 사이에서 베르그송은 특권적 자리를 보유하고 있다. 들뢰즈는 총체로서 철학의 역사와 자신의 연관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베르그송에 관한 나의 책은 나에게는 이 장르에서 예시입니다"(PPR 15)
2 ° Deleuze의 경우, "벩송니즘의 비밀은 의심할 여지없이 물질과 기억에 있다"4. 정확히 두 테제를 포함하니: (a) 베르그송의 작품은 물질과 기억을 첫째가는 참조로 취하며 읽어야 한다.5 (b) 벩송니즘의 비밀이 있다.
3° 들뢰즈는 물질과 기억의 표식인 몇몇 도표들을 다시 생산하고 시간의 도식들이라고 부른다6. 주요한 두 개가 여기 표지의 세 번째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온기억 혹은 무의식의 원뿔에 대한 “유명한 메타포”7라고 부른 것을 보이는 것이다(그림 ∀). 그런 다음 벩송식 회로 또는 고리들의 도식이 "8 형태"로8 온다. 벩송은 자기 주제로서 이러한 기하학적 도상들이 물리적 모델, 전위차( 전기적 “긴장”)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밝힌다 : 각 고리에 위치한 “모든 요소들은” “전기 회로에서와 같이 상호적 긴장 상태로 보존된다”9. 따라서 원뿔에서 수평의 자름들은 등전위 평면들에 상응한다.
이미 베르그송에서 이러한 도상들은 철학 전체를 끌어안는 여러가지 강독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Bergson의 방법에서 심리학은 존재론의 실험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해야 할 것은 도상들의 심리학적 방향[의미]으로부터이다. 들뢰즈가 재현한 원뿔 이전에 베르그송은 들뢰즈가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이미 응축한 더 단순한 원뿔을 선묘(線描)했다.
[16/P19]
그 단순성 속에서 이 도상이 묘사하는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의 제목에 한점 다름없이 이러한 도상은 상응한다. 이 제목은 도상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 평면 P는 물질을 재현하고, 도상 위쪽의 높은 ABC원뿔은 온기억을 재현한다. 그러나 Bergson의 경우, 이 ∇는 기하학적 바탕일 뿐인데, 이 바탕 위로 도상 ∀에 부기한 영역들과 같은 새로운 구성물들을 들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구성물들이 제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기억에 대한 벩송의 전체 학설을 요약하는 도상 ∀+를 얻는다.
이 도상은 벩송니즘의 ABC를 형성하는 세 테제를 결합한다 :
(A) 기억 속에는 "동일한 원뿔의 여러 절단면 A’B’, A”B” 등으로 도상화된" 소위 우리의 전체 과거를, "우리의 심리적 삶을 천 번, 만 번 반복한 것"10이 있다. 이 영역들은 원뿔 안에 그렇게나 많은 "다른 평면들"11 혹은 그렇게나 많은 "시스템들"12을 결정한다. 과거가 온전하게 무의식 속에 보존되는 순수 기억의 AB 평면에서부터, 의식의 지점 P까지 이어진다.
(B) 각 평면 위에는 대조가 있다. “빛나는 지점들”과 견줄 수 있는, 이 지점에 고유한, 어떠한 “ 주도적 추억들”13과 “모호한 성운을 형성하는” 다른 추억들 사이의 대조 말이다.
(C) 추억은 잠재적 대상인데14, 이중의 움직임으로 활성화된다 : 한편으로 주어진 평면 위 회전[rotation]의 움직임으로 현재에 유용한 추억을 찾는다. 다른 한편으로 평면들 사이 변환의 움직임으로 순수 추억(무의식[내재의식])을 이미지-추억(의식)으로 변형한다; 두 움직임들의 교차는 번개침의 지그재그 모양을 띤다.
각각 세 지점들이 들뢰즈의 전환에 자리하고 있다 :
[17/P20]
(A) 벩송의 천 번의 반복들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 될 것이다.
(B) 벩송의 빛나는 지점들은 “구별되거나” 혹은 “특이한” “ 표식할만한 지점들”로 다시 분석될 것이다.
(C) 잠재적 대상은 항상 “초월론적 대상 = X”로서 다시 사유되겠다. 이 초월론적 대상은 (주어진 평면 위) 영토화들과 (다른 평면의) 탈영토화들 사이에서 취해진다.
심리학은 형이상학의 교양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책의 끝에서 베르그송은 자신의 진실된 목적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도면을 기억에 병치하면 "비균질한 탄성으로서 지속들" 논문의 테제가 따라 나온다.
« 지속의 단일한 리듬은 없다 ; 우리는 각기 다른 리듬들을 물론 상상할 수 있는데, 더 느리거나 더 빠른, 이 리듬들은 의식의 긴장 혹은 풀어짐의 정도에 필적할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존재들의 연쇄 속 각기 그들의 자리들을 고정할 것이다 »15
존재들의 연쇄와 더불어, 우리는 존재론으로 이행한다. 기억의 고깔은 온존재의 온창조가 된다. 이는 들뢰즈가 기억-세계16 혹은 더 낫게는 기억-온존재17로 이름 붙인 것이다.
벩송의 존재론을 완전하게 도상화하려면, 따라서 시간의 고깔을 통해 온존재의 고깔을 함께-잡아나가야만 한다. 우리는 그리하여 도상 Z를 얻는다. 이 Z는 우등한 V 부분과 열등한 A부분으로 나뉘어진 X를 주파하는 것으로 선묘된다. 기하학의 용례를 따라 대립되는 이러한 두 고깔들은 도상 Z의 면이라고 이른다.
기억의 상승하는 고깔 안에 동일한 과거의 “천 번에 천 번의 반복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지속의 하강하는 고깔 안에 천 번의 “비균질한 탄성으로서 지속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리듬들의 지속들 각각의 자리들은 온기억 안 “긴장”의 정도가 야기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우등한 부분 V와 열등한 부분 A 사이 관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기린다 : 이것이18 잠재성들과 가능성들의 현현이다.
온기억-온존재가 온기억-온생일 때. 들뢰즈는 그리하여 이것을 분석한다 :
DR 274 벩송의 도식은 창조적 진화와 물질과 기억을 결합한다. 이 도식은 무지막지한 기억, 모든 것들의 잠재적 공연성을 통해 형성된 다양체의 드러냄을 개시한다. [18/P21] “고깔”의 영역들에는 모든 타자들의 반복과 같은 것인, 특이한 지점들의 연관들과 분배의 질서를 통해서만 구별되는 각각의 영역이 있다. 게다가 분기하는 선들의 창조와 같이 이 잠재적인 기억과 같은 것의 현동화가 출현한다. 여기에서 각각은 잠재적 영역에 상응하며 문제를 푸는 방식을 재현하고, 그뿐만 아니라, 고려되는 영역에 고유한 특이성들의 연관들과 분배의 질서를 차이화하는 종류들과 부분들 속에서 현현한다.
8자 도식으로서, 이는 초입에서는 벩송에게 “지적 작업”을 도상화한다19. 하부의 고리들의 부풀어오름은 여기에서 “실재성의 가장 심층적인 층들”로서 사유의 가속을 외시한다20. 상부의 고리들의 부풀어오름은 “새로운 순환들”21을 외시한다. 이러한 광맥에 도달하려 지적인 것이 창조하는 새로운 순환들을 말이다22. 8자 도식은 그래서 들뢰즈가 “사유-존재”라고 이름 붙인 것23 속에서 온존재에 상응하려는 사유의 노력을 도상화한다.
“사유-존재” :
QPh 41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사유하기와 존재하기는 홀로-똑같이-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탈레스의 사유가 도약할 때, 사유는 물처럼 돌아온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가 폴레모스를 스스로 만들 때, 그것은 사유 위로 불이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의미의 논리가 뜻하는 바이다. 8자 안에 두 고리들의 불균등성이 있다. 큰 도상과 작은 도상 사이의 차이는 온존재로서 사유의 종속관계를 도상화한다. 벩송은 도상 ∇에 대한 사유가 가능한 두 움직임들을 구별하면서 고깔 도식에 있는 순환들의 도식을 보고한다 : 수평적 동일 평면 위에 펼쳐지거나 혹은, 이 평면에서 다른 평면으로 상승하는 고로24.
마조흐 들뢰즈25가 플라톤식 인물들과 근대의 에로틱한 연관의 주동인물 사이의 계통을 간파하자마자:
플라톤은 밝히기를, 소크라테스는 연인이 된 것 같으나, 더 심층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드러난다. 다른 방식으로 마조히스트 영웅은 독선적인 여성을 통해 교육받고 육성되는 것 같으나 더 심층에서는 그 여자를 육성하고 옷을 달리 입히는 것은 바로 그 영웅이다. 그리고 영웅을 그 여성이 일으켜 세울 굳센 발화들을 불어넣는 것 또한.
[19/P22]
변증법의 이중성을 등장하니 :
변증법은 단순히 담론의 순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장르의 전환들이나 이동들을 뜻한다.
언어[langage]와 역할들의 분배 안에서 뒤집기들과 양분하기들을 따르면서, 이러한 변증법은 동일한 장면이 동시적으로 여러번 새롭게 연기되도록 한다. 그것은... 동일한 장면들이 마조흐편에서 다른 평면들 위에서 취해지는 만큼 일종의 얼어붙은 폭포 안에 있다 : 그리하여 비너스 안에 있으니, 심각한 활약의 장면으로, 여기에서 여자-사형집행자의 대단한 장면이 꿈꾸어지고, 연기되고,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다시 출발하고, 이동된다26.
여기에 벩송의 도식주의[schématisme]가 함축되어[en filigrance] 있다. 담론의 순환작용은 8자 도식 위에서 논리적 장소로서 생산된다. 이 장소에서 고리들 중 하나 위에서 변증법적 주동인물들 각각을 상상해야 한다 ;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도상 ∇이니, 이 도상이 존재론으로 복합적 단계들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 “동일한 장면이 동시적으로 연기된다”.
따라서 마조히즘은 구체적인 상황을 분석할 때 벩송 도식주의의 두 주요 도상들의 유용성을 입증한다. 이 스칼라에서 동일한 드라마가 여러 단계에서 다르게 생산되는데, 이 스칼라를 맞아들이려는 것이, 바로 적합한 다른 높이들로 영역화된 원뿔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연인의 역할을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역할로 바꿀 때(또는 그 반대) 우리는 이번에는 χ자형 모양 때문에 키아즘[chiasme]이라고 불리는 [동작의-]엇갈림[chassé-croisé]을 직면하게 된다.
χ
이것은 모든 역전도 지지한다. 그러므로 한 χ는 “변화의 흐름”의 회로로서 한 8에서 추출될 수 있다(DR 315). 키아즘으로부터 들뢰즈식 연역.
우리는 그들이 가능한 두 위치들 안에서 벩송의 고리들을 필요로할 것이다 : 수직의 8과 수평의 ∞ : 벩송의 8과 벩송의 띠. 그리고 기울어진 8은(LS 149) 완전한 원환 ∞ 혹은 깨진 원환 ∝일 수 있다.
주름에서27 들뢰즈는 기울어진 S의 형태로 클레의 도상을 솔페지오의 회음으로 재생산한다.
[20/P23]
이러한 클레[Klee]의 변곡은 또한 “∞” 에 대한 축출을 통해서도 획득된다.
8자 도상은 벩송 자신을 통해 풀려나온 다른 적용방법을 지닌다. 상상해보자, “어떠한 물질적 대상 (예를 들어 글자)이 어떠한 인물들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찾아내야 하는 것이라고”28. 어떠한 극장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항상 빠져나가는 이 물체는 방을 가로질러 굴러다니면서 제 길 위에서 점점 더 심각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글러모은다.”
벩송이 말한 '눈덩이 효과'. 이것은 여전히 확장이 가능한 회로이다. 꽤나 많은 사유의 노력들이 요구되는 현실의 깊이들을 도상화하는 대신, 그는 모종의 사건들(미풍 또는 태풍)일 것이나 우선 작동을 검증할 수 있는 중량감을 외시한다. 무의식 속의 가상의 대상이었던 것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벩송은 자신의 도상 8의 적합성을 온논리학에서 온윤리학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바가 그 온미학을 담고 있는, 웃음 안에 있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이러한 모든 분야에 굴절시킬 수 있는 특유한 도식주의를 전체 철학을 위해 마련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깡의 세미나로 가보자. 벩송을 아는 한 철학자에게는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운동이 1900년 이래 벩송의 8자 회로에 대한 선보인 것 중 특별한 경우라는 것이 명백하다. “어떠한 인물들에게 첫째 중요성의 대상”을 굴리도록 말이다. 벩송니즘이 구조주의를 포섭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더 깊은 것이 남아있다.
실제로, 벩송은 우선 "이런저런 특별한 놀이"와 그것을 통제하는 법 사이의 논리적 변별[un distinguo]에 이끌렸다29.
여기서 중요한 것, 정신이 보존하는 것, 그것은 지각할수없는 등급매기기들을 통해, 아이의 놀이들부터 어른의 놀이까지 거쳐가는데, 이것이 바로 조합의 도식이며, 혹은,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추상적 양식이다. 놀이들은 이 양식의 특별한 적용들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편지 혹은 이탈리아 밀짚모자를 뒤쫓는 극적인 논쟁은 “이동하는 대상과 그것과 연대하는 사람들을” 개입하게 만드는 일반 형식의 경우일 뿐이다. 그 결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사람들 사이에 점점더 중해지는 상황의 변화들을 기계적으로 이끄는 [21/P24]대상의 위상 변화”가 라깡에 따르면 “기호화한것(signifiant)의 이동”과 마찬가지로 개입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종의 물체가 그것을 쫓아다니도록 강요받은 등장인물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야기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벩송은 “사물들 구조의 내적 선들”30을 쫓는 업무를 사유에 처방했다. 그가 도식이라 부르는 것, 그가 이것의 위상을 탐구하는 “추상적 양식”, 가장 이질적인 것들의 분야들 속에서 도해될 수 있는 추상적 양식인 바, 사물들의 구조라는 이름에 걸맞는 “마치 많은 음악적 환상들 속에서의 오페라의 동일한 분위기와 같이” 그러한 것이다. 그 이유는 원환의 도식은 온존재의 고깔 속에 겹쳐지는 평면들의 도식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벩송의 진정한 구조주의가 있다.
더 정확하게 벩송의 도식주의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벩송의 의미로서 도식은 표준 구조주의들의 구조들에 비해 첫째가는 이득을 갖기 때문이다.
벩송은 실제로 역동적 도식의 개념을 도입했는데31, 이 도식은 앞서 놀이의 법을 통해 도해되고, 그리하여 생동하는 모든 구조를 검증하는데 적용된다. (잠재적 대상의 이중적 운동을 거두는) 의식의 고깔과 원환들의 도식은 그래서 모두 편지에 앞서있는 역동적 도식들이다. 벩송의 “역동적 도식”은 들뢰즈의 “시간의 도식들”과 동치이다.
그래서 소쉬르식 구조주의의 악명높은 난점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공시성으로의 통시성의 종속화 혹은 구조로의 사건의 종속화에 있다32. 그러나 구조주의가 우선 역동적 도식이라면, 그렇다면 들뢰즈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알 수 없다... 생성과 구조가 타협하는 데 있는 어떤 난점도.”33,
베르그송의 그림 8에는 이중의 바닥이 있다. 우리는 그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인데, 현재가 이미 경험한 장면의 반복처럼 보이는 이상한 현상인 데자뷰 (« paramnésie ») 환상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제목은 « Le souvenir du présent et la fausse reconnaissance ». 이것은 제안된 설명을 요약하는데, 이는 Bergson이 매우 단순한 물음을 제시하며 얻은 바이다: 추억은 언제 형성되는가? 기억된[remémoiré] 사건 이전에는 형성될 수 없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 “전부가 끝난 후에야 어떻게 기억은 탄생할 수 있는가? ” 그러므로 유일한 탈출구는 기억이 현재와 동시에 형성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상의 경우에는 아무런 소용 없이 태어나는 그 추억은 무의식적[내재의식적]이다 ; 역으로 의식에 정상적이지않게[별다르게] 표면화되면[affleurer] 기억상실증이다. 이 설명의 원리는 들뢰즈가 "별다름의 출현"34이라고 부르는 그림 8에 이미 나와 있다. 이 그림에서 물체 O를 중심으로 한 대칭을 통해, 생각의 원들 BCD는 존재의 원들 B'C'D'를 반영한다. 그러나 먼저 어떤 A'도 반영하지 않는 [22/P25] 추기되는 A 원이 있다. 이것은 A가 현재의 추억이기 때문에 A는 현재 대상 O 그 자체를 반영한다. 따라서 바로 8번 도식 속에 기억상실증 강의(C2106)를 배치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현존에 대한 벩송의 학설은 다음과 같다 :
« 우리의 현실적 현존은 시간 속에서 전개되면서 가상의 현존, 즉 거울 속의 이미지로 이중화된다. 그래서 우리 삶의 어떠한 순간이라도 이 두 가지 측면을 제공한다: 그것은 현실적인것과 가상적인것, 한쪽은 지각이고 다른 쪽은 추억이다." 35
이는 들뢰즈를 휘에[Ruyer]와 시몽동[Simondon]으로부터 받은 결정학 수업들의 지점, 온결정[Crystal] 개념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결정은 거울 효과를 생산하는데 이는 잠재적 이미지가 결정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며, 이미 본 것 같은 감정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추억이 현재에 등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8자 도식 위에 벩송의 현재에 대한 설명이 자리한다. 여기서 현재는 “전개되는 것인데, 매 순간, 제자신의 샘솟음 자체 속에서, 하나는 과거 쪽으로 다시 떨어지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상동하는 두 내던짐들로서 말이다”36, 이는 각각 극단이 화살표인 “S” 모양일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시간의 배아들”이라고 칭한 것37. “역동적 도식”의 일반관념이 이것에서부터 변환된다. 현재까지 만약 8이 역동적 도식이었다면, 그것은 잠재적 대상을 위한 회로와 같은 것이었다. 지금, 시간의 이행 속 이중적으로 샘솟는 회로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원뿔이 8자 도식을 통제하고 있다. 도식 V에서 평면 AB는 순수 추억을 재현하고 점 S는 순수 지각을 재현한다. 따라서 벩송의 원뿔은 기하학적 도형 그 이상이다 : 선별하는 기계가 바로 이것인데, 만약 input이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혼합"이라면, output은 분리하기를 요구받은 한 순수 경우 혹은 다수 순수 경우들이다. 기계 이론의 언어로 말하자면 :
플라톤식 혼합—[벩송식 기계 ∇]➝순수 경우
이러한 선별을 통해, 벩송은 플라톤과 라이프니츠까지 거쳐가며 칠학의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전통 속에 등록된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보편들에 대한 중세 시절 논쟁에서의 보편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데아는 우선 그것에 참여할 것의 온이상이며, 이러한 기치아래 선별하는 시험 속에서 시금석인 것이다. 시험은 연속적인 분할들의 대상인 수직의 선[Linge] 위에서 벌어진다38. 첫번째 것은 단지 가시적 세계에 지각가능한 세계를 겹쳐놓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우등한 영역 안에서 두 번째 분할이 개입하는데,[23/P26] 이 분할의 기능은 지각가능한 세계 자체에서 월등한 영역, 선의 이데아,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변증법적 온대상과 같은 것을 선별하는 것이다.
QPh21 플라톤부터 벩송까지, 우리는 개념이 분절의, 가름의, 교각의[d’articulation, de découpage et de recoupement] 사항이라는 생각을 발견한다.
세헤[Serres]가 보았듯이, 선별 프로그램은 라이프니츠에서 발견되는데, 일련의 여과기들을 장착한 점점 더 미세하여지는 여과활동(혹은 체로 치기) 속에서 말이다39 ; 그리고 들뢰즈의 선별주의는 체를 앙블렘으로 하게 될 것이다40. 이러한 선별적 과업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우리는 오디세우스와같은것의 기원을 알고있다. 선별해야 할 거리, 그것은 구혼자들이다. 기원적 모델은 그래서 율리시즈가 키르케 혹은 칼립소 때문에 귀환이 늦어지는 동안 구혼자들이 치근댄 페넬로페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의 기원일 뿐이다. 핵심은 라이프니츠에서 벩송을 경유하여 플라톤으로부터 전송된 것이다.
벩송의 다른 기하학적 도상41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 (C2 106) 형상을 사용하여, 우리는 이 도상을 « anti-T »라고 말할 것이다.
C
A ± B
I
2차원인 이 도상 ±은 3차원 도상 ∇ 이후에 오는데, 이는 ∇의 단순화된 단면이다. (온물질의) 기본 평면은 세그먼트 AB로 환원되고, (온기억의) 원뿔은 축 IC로 환원된다. 이 좌표에 관하여 들뢰즈는 “표면들 혹은 절대부피들”42의 서문에서의 휘에로부터 결정적인 영감을 받는다. 휘에, 들뢰즈에 따르면43 “라이프니츠의 위대한 제자들 중 가장 최근 사람”은 두 종류 “장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이 개념을 도출한다44 : (평원의) 물리적 장들과 파라독스적 자연의 의식의 장.
전체를 보거나 물리적 장을 조감하려면, 바깥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일반화되고 있는 법칙: “사진을 찍거나 표면을 인식하려면 3차원에 있어야 한다.” “선을 촬영하거나 인식하려면 2차원에 있어야 한다.” 시각적 장[시야]의 경우에는 상당히 다르다: “이번에는... "나"는 다른 것으로부터 떨어져서 이것으로 내 감각의 모든 세부 사항을 서로 고려하기 위해 수직적인 차원에서 내 감각 밖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3차원이 없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포착된 표면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표면"이며, 그 어떤 외부의 관점과도 관련이 없고, 자신을 관찰하지 않고 자신을 아는 것이다"
휘에를 따르면 절대 표면은 한 유형의 구조를 정의한다 : ‘절대 조감’45으로서 구조. 절대적 표면은 "관계적" 표면에 맞선다. 그리고 절대 표면의 객관의 이점은 주관의 불가능성이라는 대가를 치룬다 : "나는 그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고려하기 위해 그것을 그 자리에서 돌려놓을 수 없다"(관계적 표면은 돌려놓을수있지만). 한 가지 본질적 이유는 이렇다 :
“그것은 한편으로는 (뫼비우스 표면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표면이기도 하다. »
이 표식46은 분수되어 나오는 흐름들에 대한 전경과 더불어 물들의 분수선처럼 휘에의 분기작용들을 추적한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가장 잘 알려진 지류가 나타내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 뫼비우스의 유명한 띠 혹은 표면.
의미의 논리는 "표면의 정복"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여기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루이스 캐롤을 통해 소개된다(LS 21). Sylvie & Bruno에서는 '늙은 교수'가 정장 손수건을 든 여인에게 '어려운 수업'을 한다.
A B
C D
뫼비우스 고리를 얻으려면 B를 C에 적용하고 D를 A에 적용하여 측면 AC와 BD를 꿰매는 것으로 충분하다. 들뢰즈는 [25/P28] 휘에의 분기화에 도상화되는 특징을 언급하는 로트망(Lautman47)을 인용하여 속행한다 : 뫼비우스의 띠는 “단지 한 측면만을 지닌다”48이다(“일방적”일 뿐이다). 따라서 뫼비우스 표면은 로트망49이 상기시키는 표면들의 위상학적 분류작용 안에서 다시 결합하는 여러 표면(구, 토러스 등) 중 하나일 뿐이다. 휘에의 분기화는 일방적인 특질로 외부-수학의 가시적 장과 공유하는 속성을 만들면서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Ruyer는 뫼비우스의 띠가 절대 표면과 같이 한쪽 면만 갖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분기화에서는 두 가지들 사이의 교차면이 필요하다. 8자 도식으로써 충족되는 조건: 한편으로는 기하학적 형태로 인해 뫼비우스 띠와 동질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상 ±와 개념적으로 연대한다..
Ruyer는 들뢰즈도 채택한 관찰을 덧붙인다 : “'나'는 내 시각적 장의 모든 장소에 동시에 있다. 그러한 분야에는 가까이에서 가까이로의 전파도 없고, 한계 속도도 없다.”50. 우리는 움직임을 인식하려면 동일한 의식 행위 속에서 운동체의 여러 연속적인 위치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특수하다고 말해지는) 체험된 현재는 시간의 경과이다. 그래서 시간에서의 특수한 현재인 것, 휘에의 절대 표면은 공간에서의 그것이다. 휘에는 결국 두 일반관념들, “의식이 지배하는 ‘여기-지금’”이라는 일반관념, “편재성을 지배하는 바, 통시주의[synchronisme]가 절대적일 수 있는 바인, 공간-시간의 특유한 ‘세포’”51라는 일반관념으로 통합한다. 휘에가 (한계 속도에 대한) 부정으로 발언한 것을 들뢰즈는 “무한 속도”52에 대한 긍정으로 전환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그의 시스템은 빛의 무한 속도라는 주제가 떨어지는 곳에 세워져 있다. 휘에의 발견, 그것은 res extenso에서는 불가능한 무한 속도가 res cogitans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기울어진 위상의 벩송의 8 ∞은 절대 표면에서 무한한 속도를 기호로 만들고 클레Klee의 굴절은 바로크53의 "무한으로 가는 주름"을 기호로 만든다53.
Sylvie & Bruno에서 교수는 Lady Muriel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 나라에서 "사람들은 낭비된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요?". 그녀는 "지나갔어요.. 돌이킬 수 없이"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교수는 주민들이 다르게 행동하는 나라를 떠올린다. “그들은 불필요한 시간을 저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들은 그것들을 다시 꺼내기도 합니다”. 이 가역적인 시간은 “∞”으로 상징될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는 미래에 다시 돌아오고, 이것이 항상 일어난다면 그것은 영원회귀이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루이스 캐롤의 가역적 시간의 특별한 사례임이 드러난다. 이 "비뚤어진 원"54은 ∞ 혹은 ∝, "깨진 사슬 또는 뒤틀린 고리"가 될 것이다(DR 313).
일 수 있다.
[26/P29]
들뢰즈는 벩송의 모든 진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
벩송의 이름은 지속의, 기억의, 생의 도약의, 직관의 일반관념에 붙어있게 된다55.
들뢰즈는 이 모든 개념들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한 가지 누락이 있다 : 두 원천들에서 온열림, 이러한 닫힌 사회에 대한 반대는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의 갈등을 통제한다. 들뢰즈가 그에 대한 역할을 발견한 곳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1권이다56. K. 포퍼(K. Popper)의 열린 사회가 자본주의를 지칭하기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정신분열증을 어디서 얻었는가! 벩송(PM 81)은 이미 “심리적 긴장, 삶에 대한 주의, ‘정신분열증’ 개념으로 발전하는 모든 것”이 선취하는 “증대하는 중요성”을 알린다. 들뢰즈도 그래서 벩송에게서 분열-분석으로 이어지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두 권으로 구성된다 :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그러나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운동-이미지, 더 심오하게는 시간-이미지에 대한 벩송의 발견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모든 결과를 끌어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을 만큼 풍부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베르그송과 보에티우스 사이의 중재자이다. 그는 (시간의 이미지)분기하는 오솔길의 정원[Le Jardin aux Sentiers qui bifurquent]과 영원성의 역사[une Histoire de l’Eternité.]를 썼다. 그러나 베르그송에서는 온지속 외에도, '죽음의 영원'과 '생명의 영원' 사이의 구별이 있다57. 세 번째 용어는 수학적 세계의 무시기성[l’intemporalité]이다. 즉, 무시기적으로 3 + 2 = 5이다. 따라서 "영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시간의 공간화의 결과인데, 시간으로부터 제임스가 "우주 블록"이라고 부르는 네번째 차원을, 베르그송이 "죽음의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 물리적 시간에 대한 수학적 무시기성의 환각의 투사작용인 바를 만들면서 말이다. 생명의 영원성은 보에티우스로부터 오는 보르헤스를 통해 상기된 개념이다 : 그것은 “끝없는 생명의 전부이며, 동시에 일어나며, 온전한 소유”이다.
보에티우스는 말하기를, 신성한 현재는 과거와 현재를 중층화하거나 포함한다.
이는 현재, 미래, 과거가 (과거-현재-미래 순서 속에) 시간의 일부이기 이전에 (현재-과거-미래 순서 속에) 영원의 순간들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시간 학설을 지배하는 질문은 : “현재는 어떻게 지나갈 수 있는가?”이다. (N&Ph 54 //[28/P31]DR 108-112).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다 : 현재의 지나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면 현재가, 그 자체로서는 지나갈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 온현재는 점멸하는 시간의 일부이기 이전에 영원의 불멸하는 순간이다. 들뢰즈는 덧붙이기를, 여기에 스토아학파의 영감이 있다.
스토아주의에서 온시간은 코로노스로서 알 수 있거나, 아이온으로서 알 수 있다. (MP 320 // LS 23e série) :
LS 77 “과거, 현재, 미래”는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으로, 각각은 완전하고 서로 배타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제한된 현재인데, 원인으로서 몸들의 행위, 그리고 심층에서 그것들의 뒤섞임의 상태 (크로노스)를 측정한다. ; 반면에 본질적으로 무제한적인 과거와 미래, 그것들은 효과로서 몸체가아닌 사건들(Aiôn)을 표면에 끌어모은다.
이 두 가지 측면들은 세상의 사건(예: 워털루 전투)과 이상적 사건(전투 자체) 사이의 구별로부터 정의된다. 세상의 사건은 (워털루, 나폴레옹, 웰링턴을 통합하는) 사물들 상태 속에서 이상적인 사건에 대한 구현이다.
1. 크로노스는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시간이며, 미리 결정된 한계가 없는 두께를 지닌 경험된 현재(LS 176), “기름 자국을 남기는 현재”58이다. 나머지는 스토아학파의 물리학[la Physique du Portique]에서 온숨(pneuma)의 기능에서 비롯된다. 생명체의 각 호흡은 체험된 현재를 측정하는 자연적인 시간 단위이다. 우리 필멸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경과는 거의-즉각이다. 제우스와는 다르다. 불멸의 제우스의 삶은 순환의 무한한 연속인 영원회귀 전체를 포괄한다. 따라서 제우스의 호흡은 영원회귀의 온전한 주기(“우주적 기간”59, “장대한 해”)이다. 제우스의 체험한 현재는 영원회귀의 주기를 측정하며, 제우스의 호흡의 회귀는 영원회귀를 생성한다. 크로노스는 주기적인 시간이며 원으로 상징된다. “인간들이 과거와 미래로 파악하는 것을 신은 영원한 현재로 산다”(LS 176). 들뢰즈는 환기하기를, “원인들 안 모든 물리적 원인을 우주적 현재의 통일성 안에서 깊게 결합하는 신적 비전”(LS 169)이며, “과거와 미래를 그 자체 안에 모으는 세계의 현재”(LS 172)이다.
2. 아이온은 이상적인 사건의 시간성이다. 그 속에서 현재는 과거와 비결정된 미래의 어김없는 교차점일 뿐인데, 이는 그 위에서 조우하지만, 그 한계로서는, 전체 모든 시간의 축을 공유한다.
[29/P32]Aîon을 위한 기호는 «∞»인데, 여기에서 두 고리들은 과거에서 미래로의( 그리고 그 역으로의) 영속적인 되돌아옴을 도상화한다. 키아즘의 위치인 중심에 현재의 자리가 있다.
LS 79 현재가 사건의 시기적인 효력, 즉 사건이 활동하는 몸체들의 깊이 속에서의 제 구현을, 사물들의 상태 속에 제 체내화를 측정하는 만큼, 사건이 그 자체로 그리고 그 비정념성 속에서, 제 불침투성을 측정하는 만큼, 현재에는 현재가 없지만, 동시에 두 방향으로 후퇴하고 전진하며 이중 질문의 영속적 대상이다 :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러나 세상의 사건은 이상적인 사건의 구현이기 때문에 아이온과 크로노스는 단순히 병치되거나 중첩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서로 고리로 묶는 것은 다름 아닌 제우스의 크로노스이다. 둘 다 아이온의 영원에 참여하고, 크로노스 안 전체 온시간과 공연적인 살아있는 현재를 통해, 필사자들에게 고유하고 특수한 현재들의 패러다임을 부여한다.
바로 이 틀 안에서 들뢰즈는 보르헤스에게 말을 건넨다(LS 139// C2 171) :
“Fang에게는 비밀이 있고, 낯선 사람이 그의 집 문을 두드립니다... 가능한 대단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Fang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가 Fang을 죽일 수 있으며, 둘 다 살아남을 수 있고, 둘 다 죽을 수 있습니다. 등등. 모든 대단원이 생산되며 각 대단원은 다른 분기화들의 시작점입니다. »
소급하자면 이 예는 들뢰즈가 라이프니츠를 “모든 현대 문학의 원천”60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가능한 세계를 하나로 묶는 피라미드 속의 섹스투스 우화로써 말이다. 들뢰즈는 덧붙이기를, "라이프니츠는 결정(結晶)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수많은 아파트들로서 ‘우발적인 미래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는 결정에 대한 물음이 없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라이프니츠의 가능세계 피라미드를 베르그송의 잠재성들의 결정과 동일시하기로 정했다. 소위, 라이프니츠 피라미드는 벩송 원뿔의 특별한 경우로 승격된다.
첫댓글 『의미의 논리(1969)』(Logique du sens, 1969) (ms 11/11/03)의 해제 : 뒤몽셀(J. C. Dumoncel, 1944-), dans Les Oeuvres II, Dictionnaire, PUF, 1992, p.3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