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인 시인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에서 대상
시집 -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2004년 천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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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네이버 포토갤러리>
수련 . 2 / 조정인
...............................................물 위의 마을,
여름 못에 서식하는 물풀 가운데
수련의 군락만 유독 환한 창을 가진다
무딘 동공으로 흘러드는 사금의 섬 하나
수수만년 상징으로만 검게 열렸던
상처 속, 舍利
불시에 날아든 빛의 표창(鏢槍)에 눈멀어
세상의 아침이 태어난다는 꽃잎 위의 정적
눈으로만 좇지 못할 휘돌기 속으로 내가 흘러든다
못이 제 얼굴을 갖기 위해
갈등하는
근심하고 늙은 수면 아래는
얼마나 많은 어린 질문들이 자라왔나
그 중, 오래된 의혹에서 내린 빛의 손가락들이
어두운 물의 얼을 더듬어 낸
등 하나 밝기의 창문들
얼굴 없던 미신의 늪이, 있는 힘껏 깨어 나
수련 사리(舍利)
수려한 이마를 씻어놓는다
사진 <오마이뉴스>
지렁이 · 2 / 조정인
대낮, 지열 들끓는 마당에 지렁이가 나왔다
어둠이 제 시력인 줄 모르는
놈에게는
오체투지 해독해 내야 할
문장이라도 있는지
점자를 짚어 가듯
온몸이 손가락 끝 눈알이 되어
막막한 백지를 더듬어 간다
전신이 붕대로 친친 감긴
얼굴 없는 사내를
난타한 것처럼
소리없는 비명만 젖어 들어
놈 스스로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토막 글이 된,
붉은
적막이 다 놈의 눈이다
닻을 내리다 / 조정인
나무는 제 생의 대부분을 그늘에 적시네
후박나무 언저리
잎사귀 끄트머리에 薄明이 걸터앉았네
뱃전 같은 잎새 위
빛과 어둠의 가변 경계에 내 마음도 걸터앉아
내려다보니
그윽하여라 그늘의
수심,
투명하게 저문 제 바닥에
닻 내리는
목선 한 채 그림자 일렁이네
지구의 이마 다 젖어든
저녁은 어디로부터 밀물져 오는 것일까
멀리 바라보이는 지평은
창이 많은 기선처럼 깜빡이네
정박하는 모든
아스라한 것들 닻 내리는 기척에
젖가슴 미동처럼 푸들대는
무른 땅덩이
시간의 물살에 쓸려 오래 씻긴
몇 낱, 젖은 별떨기
저 닻별*
일억 광년 어둠의 깊이에 닻줄 내리네
*카시오페아좌에 붙인 다른 이름
사진 <네이버 포토앨범>
옛날 보랏빛 물안개, 무 꽃밭이 있었다 / 조정인
열망이 틔운 날개, 꽃은 제가 피운 꽃의 수효만큼 천사를 거느리지
가령 일곱 송이 수선화는 수선화의 일곱 천사
밤중에 일어나 이를 닦는데 의혹이 칫솔 대가리처럼 목구멍으로 불거졌어
옛날 그의 집 두 개의 칫솔 중 다른 하나는 유일한 하나인지
혹 여섯 번째 방문자의 몫이었는지 그때
다섯번째 네번째… 점점 아득해지는 타자의 구취
그가 칫솔을 내주면서 게임을 벌였을까
- 네게 내 영혼을 나눌 것 같애?
의혹은 조금만 방심해도 삽시에 번지는 바오밥나무
각설하고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 반찬하고 남긴 무를 접시물에 담가 창가에 두었는데
무의 DNA는 무청에 집약돼 있군
그 남자가 수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진작에 퇴직금을 챙겨
어디다 날렸는지, 내일이나 모레 따위 정말이지 궁금하지 않아
내겐 무순이 쑥쑥 자라 날개로 치닫는 것만이 전율이야
이것 봐 토막 난 몸에도 연보라 영혼이 날아 앉았군,
무의 사흘 간의 천사가
네 주위를 날며 신전을 나는 나비에 대해 얘기하는데
내 한 생이 다 걸리고 마는군
불현듯 그의 영혼을 싹싹 닦고 싶네
상아질의 반뜩임이 시큰 콧날에 걸려
혈관을 따라 슬픔이 반지처럼 흘러가는 아득한 옛날
보랏빛 물안개 무 꽃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흘간
영혼으로 살던 일 생각나네
그. / 조정인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logfiles3.naver.net%2Fdata5%2F2005%2F5%2F25%2F290%2F%25BF%25DC%25B7%25CE%25BF%25EE_%25BB%25E7%25B6%25F7_%25C7%25CF%25B3%25AA-gulsam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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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 그의 이미지. 사이에는 쓸쓸함이라는 벌판이 있네
돌연 여자의 복판에 허공이 뚫리더니 벌판으로 가 걸리었네
여자에게서 뉘엿뉘엿 하늘이 비쳤던가 찌르레기 울음소리 들렸던가
그의 이미지. 는 여자가 사는 집이 되었네
린넨천으로 지은 낡고 부드러운 집
여자가 그곳에서 일용하는 양식은 햇살과 그늘 조금
그것은 다른 벌레들이 쓰는 만큼이면 족했네
쥐며느리가 등허리에 오소소 햇살을 받고 마루틈새를 기어가네
아휴, 귀여운 것 하마터면 손바닥에 받쳐 젖무덤사이에 넣을 뻔했지
지붕 위로 키 큰 해가 서뿐 내려와 안마당을 거쳐 곧장 안채로 들어섰네
해가 만지는 모든 것은 햇살이 되어 반짝이고 지즐대기 시작했네
그. 라고 여자가 입을 열자
- 난 본시 들판의 갈빛 바람이었다네,
과묵한 갈색 티크 피아노가 중얼중얼 입을 열고
- 떡갈나무 잎사귀에 뛰어내린 최초의 빗방울은 나였다니까!
수돗물이 우쭐대기 시작했네
깔깔대며 향나무숲으로 내달리는 4B연필을 불러 세우네
거기 서!
여자가 머리채를 틀어 올려 은 세공품 빗핀을 낮달처럼 거네
벌판 끝에선 민트향 치약냄새가 나고
햇살의 모포에 싸인 집이 아련아련 기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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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리는 그늘로 가 지난날이 되고싶네
그늘은 추억이 움트기 좋은 모판
집이 우물처럼 깊었네 우물 안은 모짜르트가 가득 차 오르네
집의 눈이란 눈에는 그늘이 고이네 집은 그늘에 잠긴 자귀꽃
그늘은 사위를 적시고 벌판으로 흘러가네 쓸쓸한 순례
그늘이 적시고 간 모든 것은 그늘이 되네 풀포기라는 이름의 나무라는 이름의
그늘 집 앞 전나무 꼭대기에 저녁새가 날아 앉네
저녁새가 그의 이미지. 웅덩이에 들어앉아 알을 품는 여자를 내려다보네
봉인된 그.
그.와 교신이 안 되네 저녁이란 미궁 쪽으로
여자의 어깨가 설탕처럼 사르륵사르륵 허물어지네
그곳은 모든 사산된 시간들이 흘러가는 곳 혹 시간의
사금들이 쌓여있는 곳?
여자가 풀씨를 털 듯 치마를 털고 일어서 방마다 전등을 켜네
어둠 속으로 텀벙 불빛 떨어지는 소리 화아 풀씨가 꽃 여는 소리
여자의 미세한 움직임 소매 끝에서 쩔렁쩔렁 열쇠소리 들리는 그 집은
한 그루 사과나무, 추억 두 볼이 발갛네
지평 위 집들이 앉거나 서거나
제각기 다른 이름의 추억이 싹 튼 창문을 이고 가물가물 떠가네
벌판 끝에서 울음 짧은 아이처럼 전화벨이 울리다 그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