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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
전선 설비용 기자재가 들어찬 민성공업사 창고 아래 지하실은 일정 말기에 미
국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 구실을 톡톡히 했듯, 전쟁 때는 맞춤한 대피처이다. 지
하실 앞쪽 출입구와 뒤쪽 비상구 사이 벽에는 불이 켜진 램프등이 밝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고 중부 지방이 그 중 혹심해 경기도 일대는 6
월 중순을 넘기기까지 모내기를 못 한 실정이다. 그러다 23일부터 구름이 몰리
더니 비가 감질나게 뿌려 갈라터진 논바닥을 적시자, 농촌은 내남없이 물대기에
분주했다. 전쟁 소식이 난 25일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려 해갈은 푼 논에는 늦
모내기로 소피볼 짬도 아껴야 할 만큰 농민 일손이 바빴다. 농민들에게는 전쟁
소식이 귀 밖으로 들렸으므로 자주 있는 삼팔선 경계의 밀고 당기는 소규모 총
격전이려니 여겼다. 남한과 북조선의 전투가 삼팔선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그날 오후에 들어, 비가 멎고 하늘이 개었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은 북조선 인민군의 총공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북조선 공산군이 홍수처럼 밀고
내려온다. 국군이 되받아쳐 개성을 점령했다는, 이런 갈피잡을 수 없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으나, 이틀 뒤부터 포소리가 북한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런 흉흉
한 소식이 전해진 이틀 동안은 구름 낀 하늘에 바람이 시원하더니, 어제 저녁부
터 다시 비를 뿌렸다. 빗방울이 굵은 장대비였다.
민성공업사 지하실은 곰팡이 썩는 내음에 습한 냉기가 감돈다. 홍기증은 어제
피란 짐을 싸다 안진부의 권유로 그만두고 지하실에 널린 책상. 의자. 잡동사니
를 말끔하게 청소했다. 어제 오후부터 우선 다급하게 쓸 살림 도구를 날라와 모
여든 여러 가구가 꿉꿉한 시멘트 바닥에 깔개를 깔고 끼리끼리 뭉쳐앉아 있다.
안진부가 빠진 그 가족 넷, 조민세가 빠진 가족 셋, 맏이 동구가 빠진 홍기중 가
족 넷, 박귀란과 그네의 갓난아기 배달이, 그외에도 이문달, 여태껏 고향으로 내
려가지 못한 채 어영부영 서울에 눙쳐 있던 심찬수가 있다. 고물상 작업을 거들
던 마칠구. 김장쇠, 넝마주의로 폐지와 고물을 나르던 김석응. 변삼개는 어제 아
침에 홍동구와 함께 황황히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바깥은 작렬하는 포소리와 총소리가 대단하다.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바싹 접
근했다는 낌새는 가까워진 그 소리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둔중하게 터지는
포소리에 비해 연발로 쏟아붓는 총소리는 마치 악머구리 끓듯하다. 맹렬한 기세
로 쏘아대는 그 전투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거리가 가깝게 들린다. 자정을 넘
겼으니 어젯밤이라 해야 할 어둠이 내린 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곳은 미아
리고개나 망우리고개쯤이라 짐작되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갈수록 그 소리는 더
욱 격렬해지고 가까워지더니, 북동쪽 미아리 고갯마루에서 대치한 공방전의 국
군 쪽 방위선이 기어코 터진 게 틀림없다. 이제 멀게 잡아도 동대문께가 아니면,
혜화동. 창경원 어름에서 전투가 붙고 있다. 삼팔선 전역에서 북조선 인민군이
총공세를 시작했다는 급보가 라디오 방송과 신문 호외, 벽보를 통해 알려진 뒤
불과 사흘 사이 수도 서울이 힘없이 무너지는 위기를 맞았다. 반나절이면 평양
을 점령할 수 있다고 국방부 장관이 호언하던 그 막강한 10만 대한민국 국군이
이렇게 허무하게 밀리고 있다면 날이 밝기 전에 서울 중심부가 북조선 인민군
수중에 떨어질 게 분명하다. 지하실 안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으나 바
깥의 그런 상황을 근접한 전투 소리를 통해 짐작한다. 그러나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쉬 납득할 수 없다.
민성공업사 주위에도 잇달아 폭탄 터지는 굉음이 요란하다. 쿵, 하는 소리에
이어 집채가 무너지며 날라온 파편이 공업사 벽을 치고 함석 지붕에 떨어진다.
만약 직격탄이 공업사의 얇은 함석 지붕을 뚫어 일층 바닥이 주저앉는다면 지하
실에 피신한 사람들은 그 무거운 쇳덩이인 발전기. 변압기. 차단기. 모터 따위에
깔려 즉사하기가 십상이다.
박귀란이 포대기를 여며 싸안은 배달이 이외 아무도 잠에 든 사람이 없다. 눈
을 뜬 자나 감은 자나 얼굴이 모두 뻐덩하게 굳었고 선겁들렸다. 아니, 박귀란만
은 눈을 깜빡이며 조금 들뜬 표정으로 귀를 모두고 있다. 지하실이라 잡음이 많
아 말이 끊겼다 이어졌다 하던 라디오가 그나마 멈춰버리자, 지하실은 귀뚜라미
울음만 찌르륵댈 뿐 바깥과 달리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비상선마저 나가버렸으
니 배터리를 충전해야 라디오도 쓸모가 있을 터이다. 북침한 남조선 괴뢰군을
내치며 승승장구하는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영용한 군대는 의정부. 문산을 거쳐
파죽지세로 저항선을 뚫고 ... 국군은 남침한 공산 괴뢰군을 용맹무쌍하게 물
리치며 문산과 의정부를 탈환하고 일로 북으로 진격을... 방송도 이렇게 남쪽과
북쪽의 격앙된 목소리가 혼선을 일으키며 자기 쪽 전과를 떠벌리기도 어제 저녁
으로 끝났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모를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전황이었는데,
어두이 내리고부터 그 말싸움의 판가름이 인민군의 승승장구로 나타나고 있는
참이다.
안진부 가족은 가마니에 화문석 돗자리를 깔고 모여앉아 있다.
엄마, 총소리가 가까워지잖아. 이렇게 되면 어떻게 돼? 무서워. 아빠 어디 계
셔? 제 엄마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윤자가 응절거린다.
경기여중 3학년인 윤자는 이틀 전만 해도 등교했다. 학교에는 갔으나 수업을
전폐하고 선생의 지시로 들통 따위를 들고 학교 부근 민가를 방문해 전방에서
싸우는 국군 양식감을 거두었다. 그렇게 거둔 양식을 학교 운동장에 대기하던
트럭에 싣고 학생 대표가 의정부 쪽 전선 가까이에 동원되어 전선에 투입될 국
군의 주먹밥을 만들어주었다. 부급장이었던 윤자도 의정부 북쪽 덕정 부대까지
갔다가 밤늦게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총소리와 포소리를
지척에서 들었고, 피를 철철 흘리는 부상병과 외마디 비명 끝에 숨을 끊는 국군
을 보았다고 가회동댁에게 치를 떨며 응절거렸다.
기도를 하거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섭지 않다. 정말 네 아버지야말로 이 난
리판에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구나, 몸이나 성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가회동댁
은 딸의 등을 싸안은 손으로 어깨를 다독거린다.
가회동댁이 어제 낮에야 상황의 다급함을 알고 피란을 가려 지프를 한 대 내
어달라고 친정오라버니 근무처인 치안국에 전화를 내었으나 계속 통화중이라 건
짜증이 났을 때, 넥타이 풀어젖힌 와이셔츠 차림으로 서방이 잠시 집에 들렀다.
서방은 피란 갈 생각 말고 사촌네 식구와 함께 공업사 지하실로 우선 대피하라
는 말만 남기고 무엇이 바쁜지 휑하니 집을 나갔다. 저녁 무렵에야 홍기중의 아
내 태안댁이 집에 들러 알게 되었는데, 서방은 그 길로 고물상 판잣집에 드러
홍동구와 인부 넷을 데리고 떠났다 했다. 안진부가 홍동구에게 바깥 심부름을
더러 시킬 적이 있었으나, 아들이 밤을 넘겨 오지 않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태
안댁도 걱정이 태산 같다.
윤태 형제와 유해 형제는 포탄이 공업사 주위에 떨어질 때마다 그 충격에 깜
짝 놀랐으나 내내 눈을 말똥거리고 있다.
형, 비행기 소리는 안 들린다. 그치? 윤극이 형에게 묻는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쓸모 있는 전투기를 몇 대나 갖고 있겠으며, 고물 전투긴
들 제대로 띄울 실력이 되겠냐.
앞으로 전쟁은 공중전이 좌우한다던데?
아우의 말에 윤태는 생각에 잠긴 채 대답이 없다. 윤태는 관청의 높은 사람과
줄을 달고 있는 아버지가 자본주의 사상과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장 경제
체제를 선호하고 있기는 한데 어떨 적에 하는 말은 은근히 북조선 정책을 동조
하는 발언도 했던 점을 상기한다. 특히 이승만 정부가 친일 세력을 마구잡이로
관직에 앉히는 점, 농지 개혁의 우유부단한 처리, 물가 정책의 실패를 비판할 때
가 그랬다. 아버지의 그 비판은 맞는 말이었고, 수업 중에 그런 식의 발언을 하
는 선생도 있었다. 현 정부에 대해 그런 비판적 발언을 하는 선생은 대체로 공
부도 열셩적으로 잘 가르쳤다. 그는 아버지가 동구형과 고물상 인부 넷을 데리
고 나간 채 밤새 돌아오지 않는 게 평소의 그런 모호한 태도와 연관이 있지 않
나 짚어본다. 어쩌면 아버지가 비밀리에 남한의 공산당 지하 조직과 연계되어
있지 않나 싶다. 그 점은 지난 봄부터 갑자기 출현한 수수께끼 인물 갑해아버지
가 그 방면의 지하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윤극아, 난 이북 비행기 봤데이. 옆에 앉은 갑해가 조그맣게 말한다 그는 어
제 낮 붉은 별 표지판을 단 비행기 한 대가 굉음을 일으키며 낮게 날아와 기총
소사를 퍼부으며 포탄을 떨구던 장면을 떠올린다.
정말? 난 못 봤는데?
새이와 한길에 나갔다가 보았어.
이발관집 무너진 것?
그래, 붉은 별판 단 이북 비행기가 폭탄을 떨갔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저녁 무렵이었다. 서울역 쪽에서 빠르게 날아온 풀색 비행기는 민성공업사 정
문 앞 네거리 건너 이발관 이층에 포탄 한 개를 떨구고 사라졌다. 굉장한 파열
음을 내며 터진 포탄에 이층은 통째 날아가버려, 저녁 이내가 내리자 이발관집
은 마치 유령의 집처럼 그 몰골이 볼썽사나웠다. 이발관집 이층방에서 피란갈
짐을 꾸리던 젊은 부부와 아기가 즉사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기는 저녁밥
먹을 때였다.
남산 쪽에 연달아 포탄이 떨어져 그 충격에 공업사 건물이 흔들린다. 일층 유
리창이 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히죽히죽 웃던 유해가 깜짝 놀라 사추리에 머
리를 박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 얼간아, 그치지 못해! 봉주댁이 진저리치곤 아들 머리통에 꿀밤을 먹인다.
그네는 꿉꿉한 시멘트벽에 등을 기대더니 눈을 감는다.
봉주댁은 윤자의 응석부리를 귓가로 흘려들은 참이라, 그네 역시 집 떠난 서
방을 생각한다. 서울 바닥에 있는지 어디로 떠났는지 열흘 넘이 소식 없는 서방
이다. 사촌오라버니는 서방 행방을 알 만한테 그네가 몇 차례 물어도, 중요한 일
로 서울을 잠시 비웠으니 기다리라고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오라버니의 표정
이 밝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방이 전쟁날 걸 미리 알고 이 난리판에 껴붙는지도
모른다. 그네의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서울이 만약 이북 수중에 넘어간다면 서
방이야말로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자기 세상을 만난 셈이다. 물을 만난 고기인
듯 이제야말로 당신은 물론 처자식도 떳떳이 큰소리치며 살게 될 터이다. 서방
은 이북 관청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북 세상이 될지라도
그 세상이 남한 세상과 어떻게 다르리란 점은 그네로서 감을 잡을 수 없다. 서
방이 집 안에 들어앉아 남의 땅이나마 빌려 소작지어본 적 없으니 농지를 공짜
로 받을 리 없을 터이다. 서방은 공장 기술자가 아니고 장사 일에 나서본 적 없
다. 관청에서 사무 보는 월급쟁이가 제격일 터인데 그 월급이 어디에서 어떤 손
을 거쳐 나오든 안사람은 살림만 할 터이니, 목숨 걸고 숨어 다니지 않는다는
이점 외 그쪽 세상과 이쪽 세상이 무슨 차별이 있겠냐 여겨진다. 언니네 주막
봉노에서 장꾼들로부터 양식을 배급받는다 했는데 서방이 관청의 높은 자리에
앉으면 배급쌀이나 넉넉히 받게 될까, 그네는 고작 그 정도에서 추측이 머문다.
사촌 오라버니처럼 큰 집칸 차지하여 아랫사람 두고 유세하게 될는지 알 수 없
다. 그렇다면 진영에 떨군 시해를 불러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네는 그런 과분한
호강이 조만간 닥치라는 데 별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어느 쪽 세상이 되든 제
발 끔찍스런 포소리. 총소리나 그쳤으면 싶고 바깥을 싸돌 서방이 죽지 않고 살
아 돌아와주기만 바란다.
홍기중 가족은 옷가지가 든 궤짝과 부엌살림을 구석에 모아두고 그 앞에 가마
니 넉 장을 깔고 앉았다. 허리가 좋지 않은 태안댁은 삼베 겹이불을 덮고 누었
으나 거슴츠레하게 눈을 뜬 표정이 불안에 질려 있다. 그네는 안진부를 따라나
가 돌아오지 않은 맏이 동구 걱정뿐이다. 열아홉 살 덩실한 몸이라 어느 쪽 군
이에게든 적으로 오인받아 총질당하지 않을까, 그네는 그게 염려스럽다. 자정 가
까이 전쟁 소식을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홍기중의 아이들 동필이와 순
옥이는 한참 전부터 말을 끊고 바깥의 작렬하는 굉음에 귀를 모두고 있다. 모주
꾼 홍기중은 초저녁부터 열무김치를 안주 삼아 찔금찔금 마신 독주 탓에 불쾌한
얼굴로 담배 쟁인 곰방대만 연방 빤다. 그는 난리를 피해 어제 식구를 데리고
고향 태안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을 못내 후회하고 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
기에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고향 태안에는 노모와 형네가 소작이나마 농사
를 짓고 있어 당분간은 기댈 수가 있었다.
동경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가 미군을 보내 도와주기로 했으나 피란갈 생각
말고 잠시 참고 있으라고? 그렇다면 이박사 그 양반은 그 연설을 어데서 했단
말이오? 그 양반이 아직도 서울에 있단 말이오? 심형과 내가 어제 낮에도 라디
오로 분명히 그 양반 방송 말을 듣지 않았소. 세운 무릎에 깍지낀 손을 두르고
앉은 이문달이 불퉁한 목소리로 심찬수에게 묻는다.
글세 말입니다. 나도 영문을 모르겠구려. 수도 서울이 이렇게 허무히 무너지
다니, 바깥 총소리로 보건대 이미 글러버린 것 같아요. 참모총장이 국회 연설에
서도 서울 사수를 결의한 데다 서울 시민 모두가 신문 방송을 철석같이 믿었으
니 일백오십만 서울 시민 중 피란간 사람이 과연 몇십만이나 되겠어요. 심찬수
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심찬수가 이문달 사이의 가마니에는 던져둔 [경향신문]과 호외가 구겨져 있다.
국군 해주시 일각 돌입 국군 의정부 탈환 북진 이란 큼지막한 글자가 보인다.
앉은뱅이 신세로 꼽다시 당하누만.
내 잠시 바깥 동정을 살펴보고 오겠어요.
심찬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하실 안 모두의 눈길이 그에게 쏠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난장판에 어디로 나서겠느냐는 눈치이고, 가화동댁은 급한 성미
가 탈을 부러 저 꼴이 되었나 싶은지 한쪽 팔 없는 그의 홀쭉한 왼소맷자락에
눈을 준다.
아저씨, 저와 함께 나가요. 윤태가 따라 일어선다.
안 된다! 넌 가만 있어. 총소리가 이렇게 볶아치는데 어딜 나서려구. 꼼짝 말
구 있어. 가회동댁이 놀라 말하며 아들 뒤춤을 잡아 주질러앉힌다.
같이 나가봅시다. 이문달이 따라나선다.
둘은 공업사 정문으로 난 어두운 계단을 밟는다. 바깥 총소리가 조금 전보다
덜 볶아친다. 이문달이 빗장 질러진 지하실 나무문짝을 연다. 일층으로 나서자
사방이 깜깜하여 코앞조차 분별할 수 없다. 심찬수가 라이터불을 밝혀 정문께로
앞서간다. 포탄 터지는 진동으로 정문 유리 문짝은 박살나버렸고 바깥 덧문은
닫혀 있다. 이문달이 덧문 아래켠 쪽문 문고리를 딴다. 문짝을 당기자 훅 끼얹는
냉기 속에 볶아치는 총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화약 유황 냄새가 코 끝에 묻는다.
둘은 허리 숙여 바깥으로 나선다. 이틀 앞둔 음력 보름께라 달이 밝을 텐데 바
깥은 칠흑 어둠속에 비가 뿌린다. 둘은 빗발 속으로 나서지 않고 처마 아래 나
란히 선다. 창경원 쪽과 동대문 쪽 하늘에는 포탄. 야광탄. 조명탄에서 뿜는 빛
이 불기둥과 번개불을 일으킨다. 그쪽은 가옥이 불타는지 하늘까지 벌겋다.
빨랑빨랑 걸어. 어서! 가재 도구를 이고 진 한 가족이 공업사 건물벽을 따라
걸어온다. 손 잡혀 따르는 아낙네가 채근하고, 큰딸애는 어린 동생을 업었다. 제
가끔 짐을 덩이덩이 이고 졌다. 그들 뒤로 피란민때가 줄을 잇는다. 이쪽만 아니
다. 어둠속을 자세히 보니 길 건너 쪽도 담장과 건물벽을 의지 삼아 많은 피란
민이 추적추적 따르는 빗발을 무릎쓰고 쫓음걸음을 걷는다. 전장터를 등지고 걷
는 그들의 걸음은 모두 명동성당 쪽이다.
어디로 이렇게 피란가는 거요? 심찬수가 보릿짚모자 쓴 사내에게 묻는다.
다급한 판이니 우선 한강 다리는 건너고 봐야지요.
왜, 북조선 세상은 싫습니까?
힐끔 눈길만 보낼 뿐 사내는 대답 없이 앞쪽으로 사라진다. 심찬수는 문득, 나
도 저 대열에 끼여 남도 끝 고향까지 걸어서 간다?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나 피
란가기에는 이미 글렀다는 체념이 앞선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민다니오 섬에서
도생에 급급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미군 비행기의 공습이 심했고 연대 보급선마
저 끊어져 중대원이 밀림 지대를 헤매었다. 전투다운 전투를 체험하지 못한 채
쫓기다 미군 기습 공격에 그나마 중대가 찢겨 여섯 명이 낙오되어 숲속을 떠돌
았다. 더위와 풍토병과 주림에 시달리는 싸움이었다. 그 악전고투의 생존은 차라
리 전투보다 무서웠다. 한 팔을 잃고 천신만고 끝에 생환되고서 이제 동족상잔
의 전투 와중에 갇혔다고 깨닫자, 그는 피식 실소를 흘린다. 질긴 운명의 올가미
가 아직도 자신의 청춘을 옥죄고 있다는 느낌이다. 상경한 지 보름 남짓 사이의
서울 생활이 자신을 이곳에 목줄 매어 붙잡아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찍 하향
못 한 이유는 오로지 조민세 선생 가족을 만난 탓이고, 지하 암약중이던 남로당
운동원들이 비밀의 탄로를 미끼로 그의 목에 걸린 올가미를 더욱 세게 죄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사주를 받아 세 차례 공안 검사 장영권을 통해 별 어려움 없
이 정보를 빼내어 알려주었고, 그 뒤로도 하향 기회는 있었으나 박귀란과 서성
구. 서성호를 만나 며칠을 보내다 끝내 전쟁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그러나 따져
보면 고향으로 내려간들 당장 치를 일감이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신이
어디에 있든 달리 의미는 없다. 아니, 서울 생활은 바빴고 때에 따라 긴장을 요
구하는 아슬아슬함도 있었다. 판단 착오는 자신 탓이 아니고 어떻게 이곳에 머
물다 전쟁을 만났고, 이제 당분간 고향으로 가려 해도 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는 사실뿐이다.
도대체 이 전쟁은 어느 쪽이 일으킨 거요? 이문달이 불꽃놀이라도 하듯 창
경원 쪽에서 작렬하는 불기둥과 불티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의 말은 밤내 화가
가라앉지 않은 투다.
북조선 방송은 남한이 도발했다 발표하고 남한측은 이북이 전면 공격했다니,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심찬수는 포천에 잇는 찬규형을 떠올린다. 전세가 이렇
게 기운다면 형이 포천을 떠났을 터이다. 부연대장으로 고급 장교니 총알받이로
앞장서진 않았겠고 작전상 후퇴했다면 지금쯤 한강을 넘었겠거니 여겨진다. 이
선생도 포천 전방에 가보지 않았나요. 어디 전쟁 일으킬 낌새가 보입디까. 긴장
감이 없잖습니까. 아무래도 전면 도발은 이북 쪽이겠지요. 그저께 방송도 그랬잖
습니까. 외출. 휴가나간 장병은 빨리 원대 복귀하라고. 아무리 일요일이라지만
전쟁 일으킬 쪽이 전쟁 터지는 날 장병들 외출 내보내겠어요.
연막 전술일 수도 있소. 노회한 이승만인지라 현금 자신의 국내 입지가 불리
하니 철수한 미군을 다시 끌어들이려 유인책을 썼을 수도 있고요. 전쟁광으로
동경에 상주하는 맥아더와 짜고 말입니다.
글쎄요. 거기까진 생각 못 해봤습니다. 그보다는 해방 후 남한 정세가 내전
양상이었으니 확전으로 보는 해석도 있을 수 있겠지요. 좌익 게릴라의 준동에다
그 동안 삼팔선 충돌은 늘 있어왔잖습니까. 삼팔선을 누가 만들었든, 남과 북이
언제까지 갈라져 살 수 없는 한 동포니 통일을 위한 전쟁은 시점이 문제지 언제
터져도 터질 게 뻔했잖습니까. 전 그렇게 봅니다.
심형과 내가 때아니게 서울에 왔다 고향에 가족을 두었으니 졸지에 이산 가
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찬수 역시 날이 밝기 전에 서울은 북조선 인민군에 의해 검령되리라 확신한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치하? 그는 그 긴 이름의 새 국가 질서 아래 자신
이 무슨 일을 해야 할는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정
말 운명에 맡겨 될 대로 되게 버려두고 목줄에 끌려가는 개처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앞선다. 당분간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길
이외 어떤 대안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포자기, 그 말이야말로 그는 숙달될 만큼
된 터이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봐요. 심형, 마 들어갑시다. 멀쭉이 섰는 심찬수에게 이문
달이 말한다.
내리는 빗발을 가르고 피란민 대열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둘은 그들과 등
을 돌려, 이문달이 민성공업사 쪽문을 막 밀 때다 남산 뒤켠, 이태원이나 한강
어름쯤이라 여겨지는 지점에서 굉장한 폭음이 들린다.
저쪽에서도 진투가 붙었단 말인가? 심찬수가 혼잣말을 한다. 그렇다면 인민
군이 문산과 원당을 거쳐 마포 쪽으로 협공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
나 십 초 정도 연달아 터진 폭음을 끝으로 다른 소리는 더 들리지 않는다.
혹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는 소리 아니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국군 쪽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어요.
이문달의 추측이 정화하다. 그 폭음은 후퇴하던 국군이 적 선발대의 공격을
저지할 목적으로 서울 시민 유일의 남부 지방 통로인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이
다, 인도교에 이어 철교가 폭파되었는데, 그 시간은 새벽 2시 30분경이다.
선생님, 바깥 상황 어떻습니까? 둘이 지하실로 내려오자 이문달을 보고 들뜬
목소리로 박귀란이 묻는다. 그네는 배달이가 잠을 깼늕 품에 안은 포대기를 어
르는데, 분명 희열을 억제 못한 들뜬 표정이다.
아직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남한군이 패퇴하는 것 같아요.
이문달의 말에 이어, 심찬수가 북조선군이 창경원 부근까지 들어온 게 틀림없
다고 말한다.
그럼 창경원 동물은 어찌 됩니까. 동물들도 피란시켰을까요? 만약 사자나 호
랑이 우리가 부서져 그 동물이 튀어나왔다면 큰 사고 아녜요? 윤극이가 나선
다.
애들이란 할 수 없군. 사람이 죽는 판에 동물 걱정하게 됐냐. 눈꼽을 닦던
홍기중이 혀를 찬다.
언니, 우리 배달이 잠시 맡아주이소. 박귀란이 포대기에 싸인 배달이를 봉주
댁에게 넘긴다.
왜 어딜 가겠다구?
변소 댕겨오며 바깥 잠시 살피고 올께예.
아서라, 변소는 갔다 와두 한길루 나가진 마. 죽구 사는 막판에 편 갈르며 놔
두게 됐냐. 닥치는 대루 쏴 죽이겠지. 진득이 참구 있어. 살아만 있다면 올 사람
이야 어련 집 찾아오잖겠어. 배달이를 넘겨받으며 봉주댁이 말한다.
봉주댁이 말한 집 찾아올 사람이란 박귀란의 서방 배종두를 두고 한 말이다.
무슨 교육인지 교육을 받으려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니 정말 살아 있다면
북조선군과 함께 당당히 서울로 돌아올 터이다. 박귀란의 말로는 배종두가 서울
에서 지하 활동을 할 때 민성공업사에도 들락거렸다니 서울로 돌아만 온다면 아
내와 자식을 찾아 필경 이곳에 나타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박귀란은 봉주댁의
말을 들은 체 않고 지하실 뒤쪽 비상구로 빠져나간다.
아저씨, 한길은 조용해요? 윤태가 심찬수에게 묻는다.
빗발 무릅쓰고 피란민이 서울역 쪽으로 몰려가더군. 서울 사람이 죄 한강 다
리로 몰린다면 차와 사람 홍수로 용산 삼각지부터 미어터질 테고, 다리 넘기도
전에 북조선군이 서울을 평정할 걸.
나룻배 타고 건너면 되잖아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배라도 쉽게 구할 수 있겠어? 후퇴하는 군인들 건너기도
바쁠 테지.
한심한 새끼들! 국민을 버려두고 높은 놈들은 지금쯤 적게 잡아도 수원까지
는 도망갔겠지. 이문달이 심찬수가 건네주는 담배 한 개비를 받으며 이빨을 간
다.
고물상 마당으로 나간 박귀란이 변소를 몇 차례 다녀와도 남을 시간 넘겨서야
비에 함초롬히 젖은 채 돌아온다. 모두 염려하던 참이라 안도의 숨을 쉬며 그네
를 맞는다. 램프 불빛 아래 물기로 번들거리는 그네의 뺨이 상기되었다.
해, 해방군이 정말 입성하나봐예. 서울이 해방됩니더!
해방군이라니? 생경스럼 용어에 가회동댁이 놀란다.
쏜살같이 내빼는 지푸차를 수도극장 앞에서 봤는데 국방군이 타고 있습니다.
피란민한테, 우리는 곧 돌아올 거라고 고함지르데요. 이제 자신이 어느 편임을
당당히 밝혀도 괜찮다는 듯 박귀란의 목소리가 감격에 떨린다.
수도극장까지 갔다왔어예? 갑해도 놀란다. 수도극장이라면 충무로 3가이고,
그는 그 극장 위치를 잘 안다.
너무 기뻐서 막 돌아댕겼다. 난 무섭지 않더라.
세상이 뒤바뀌면 귀란이는 좋겠다. 배도령두 만나겠구. 봉주댁이 말을 받는
다.
언니는 안 좋고예? 우리 모두 인민해방군을 열렬히 환영해야 합니더. 미제
괴뢰 정권 학정 아래 남조선 인민은 그 동안 얼마나 고생 많았습니껴. 남조선
해방을 못 보고 투쟁하다 죽은 동지는 또 얼마나 많았고예. 남조선 해방 투쟁에
앞장서 싸우다 투옥된 동지는 또한 얼마나 많았습니껴.
아니, 새댁이 언제부터 좌익질했기에? 서방이 남로당 서울지도부 자금책이란
사실조차 모르는 가회동댁이 박귀란의 말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언니헌테 차마 말씀 못 드렸지만 사실은 새댁과 새댁 신랑이 우리집 바깥 양
반허구 한통속 되어 숨어다니며 그 일 한 지 여러해라요. 고향서 쫓기다 못해
모두 서울루 올라왔잖습니까.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정말 그 꼴이란 듯 봉주댁이
실소를 짓는다. 동창회다, 계 모임이다, 친정 나들이다 하며 살림은 식모에게 맡
기고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도는 언니라 서방이 무슨 일 때문에 오늘밤 외박하
는지두 모르겠구나 싶다. 그러나 사촌오라버니의 당부가 있었으니, 오라버니가
좌익 고수인 줄 아직 모르나보죠 하는 말까지 그네는 차마 뱉을 수 없다.
두고 보이소. 윤자어무임도 새 시대 새 세상 만나면 인민정부 은전을 입게 될
겁니더. 박귀란이 뜸들여 모호하게 말한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난 친정집이 그래서... 경찰 가족 누명이나 쓰잖을까 간
이 콩알만 한대. 유해아버지가 그런 일 하는 줄은 대충 눈치채구 있었지. 그래서
거기에 어떻게 기대볼까 궁리하던 참이다.
나중에 저절로 다 밝혀질 겁니더. 박귀란이 그 내역을 더 엮기가 무엇하다는
듯 심찬수와 이문달을 보며 말을 바꾼다. 두분이야말로 조국이 통일되면 고향
땅에서 할 일 많으실 겁니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 부르좌 토착 세력, 친일.
친미 주구 세력을 내몰고 무상 몰수 무상 분배 토지 개혁을 새로 실시하게 될
거고, 그래 되면 양심적 지식 일꾼인 두 분도 새 향토 건설에 인민 대중의 앞장
에 서셔야지예.
마치 환상을 좇는 듯한 박귀란의 들뜬 목소리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심찬수
와 이문달은 입을 봉하고 있다. 바깥의 쏟아붓는 공방전으로 보면 그 말을 사실
로 확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 선다. 믿을 수 없게 된 남한 쪽 방송 말
에 미련을 둔다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막강한 미 8군 부대가 비행기 편대를
이끌고 지금이라도 참전하여 육공으로 밀어붙인다고 가정할 때, 전세가 단박 역
전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점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다. 서울이 북조선군 무
력 앞에 무너지는 현실을 기성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지금으로선 박귀란의 말
에 심찬수나 이문달이 뭐라고 맞장구칠 입장이 아니다. 둘 다 공산주의자가 아
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그렇다면 아버지가 좌익과 손잡고 있었단 말입니까? 골똘히 생각
하던 끝네 윤태가 박귀란에게 묻는다.
유해아버님과 안사장님은 일본서 함께 대학 다닌 오랜 동무아인가. 유해아버
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알제? 박귀란의 암시적인 되물음에 윤태도 입을 닫는
다.
어둠이 그치면서도 밤내 추줄추줄 따르던 비가 멎는다. 그와 더불어 광화문통
일대와 서울역 쪽에서 산발적인 포소리와 총소리가 들릴 뿐, 시내가 차츰 평온
을 되찾는다. 그 동안 심찬수. 이문달. 홍기중이 번갈아가며 바깥으로 나가 동정
을 살피고 들어왔으므로 외곽 지대는 몰라도 서울 중심부는 북조선 인민군에 의
해 점령당했음을 알고 있다. 아니, 북조선측에서 보자면 미 제국주의와 그 하수
인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해방시킨 셈이다. 홍기중은 을지로 4가까
지 내려가, 칡넝쿨로 위장한 인민군 탱크를 직접 보고 왔다는 말까지 전했다. 두
대의 탱크가 빠르게 시청 쪽으로 달려가며 포를 쏘아댔다는 것이다. 그 뒤로 한
무리의 무장한 북조선군이 따랐다 했다.
날이 밝았을 겁니다. 이제 모두 밖으로 나가도 별일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른
세상된 마당에. 심찬수가 가마니 바닥에서 일어난다.
따지고 보면 지하실에 피란한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북조선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다. 한들 특별히 불이익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다. 조민세 가족, 안진부 가
족, 박귀란의 경우는 두 손 들어 열렬히 해방군을 환영해야 마땅할 입장이다. 그
가장들은 온갖 핍박에도 외곬의 지하 투쟁 끝에 살아남아 이제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고물상 홍기중네야말로 안진부의 일가붙이이기 전에 저들이 항용 말하
는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기본 출신이니 북조선 서울 해방에 불평이 있을 리
없는 계층이다, 이문달의 경우는 평소에도 이승만 정권의 정책에 불만이 많았고
그의 성향으로 보아 온건 좌파로 분류해도 무방하므로 북조선 정권 아래 교사로
서 봉사할 의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찬수만은 그들과 처지와 입장이 조금
다르다. 해방 후 좌. 우 이념 쟁투에 환멸을 느끼고 그 세계를 외면한 뒤 무위도
식으로 빈둥거린 꼴이니 부르주아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계급 없는 사회에는
누구나 일을 해야 당으로부터 배급을 받는다니 그는 외팔이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공산 치하에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질 직분이 떠오르지 않는
다. 부모의 도움을 받을망정 하릴없이 시간 죽이기에는 그래도 남한 사회가 그
에게는 적당한 토양이었던 셈이다.
아저씨, 이제 우리도 밖으로 나가봐도 되잖아요? 윤태가 일어서며 심찬수에
게 묻는다.
나가봐도 괜찮을걸. 피란 못 떠난 이상 언제까지 퀴퀴한 지하실에 죽치고 있
을 수야 없잖겠나. 지하실에 사흘 동안 갇혀 심문을 당했던 심찬수가 그때의 답
답함을 떠올리며 말한다.
심찬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윤태 형제, 유해 형제, 홍기중 둘째 아들 명구가 일
어선다. 가회동댁이 두 아들을 말리나 윤태가 한사코 나가보겠다고 우기니 더
붙잡을 수 없어 그네는 멀리는 가지 말고 금방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한다. 봉주
댁은 갑해에게 유해 손 꼭 붙잡고 있으라 이른다. 이문달과 홍기중도 심찬수를
따라나선다. 그들이 정문 쪽으로 나가자 박귀란은 포대기에 싼 배달이를 안고
뒤쪽 비상구로 빠진다.
바깥 하늘은 구름이 끼었으나 동녘이 밝아오고 있다. 서쪽의 명동 천주교회당
은 박명 속에 우뚝 솟아 있는데 그 근방 명동 거리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다. 서울역과 서대문 쪽에서 포소리와 연발 소총 소리가 들리지만 명동 이쪽은
전투가 벌어지는 조짐이 없다. 묵정동 일대는 평온을 유지하여 여느 새벽과 다
름이 없다. 두부 장수의 달랑대는 요령 소리를 들을 수 없음이 여느 날과 다르
다. 그러나 포장 안 된 한길 건너 목재소는 포탄을 맞았는지 각목들이 날아가고
큰 웅덩이가 패어 빗물이 고였다.
여름 새벽은 한 순간에 달라져 사방이 금방 훤해진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하
나 둘 쭈뼛거리며 한길로 나선다. 이숭끼리 눈이 마주치면, 간밤에 무사했느냐
니, 한숨도 눈을 못 붙였다느니 하며 안부를 나눈다. 이제 세상이 어찌 되는 거
지요? 이웃간에 이렇게 묻기도 했으나 그 말에 뾰족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
다. 그런데 한길에는 이제 간밤의 피란민 행렬이 서울역 쪽이 아닌 장충단 쪽으
로 늘어지고 있다. 그들은 짐과 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외양이 초라하다. 문밖으
로 나온 사람들이 궁상맞은 일행에게 말을 붙이자,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주저
앉아버린 통에 피란길을 단념하고 돌아오는 길이라 한다. 차와 사람떼가 한데
엉겨 한강 다리를 넘다 갑자기 다리가 폭파되어 앞서가던 수백 명이 물에 빠져
떼죽음을 당했다고 전한다. 웃돈 주어도 한강 건널 나룻배를 탈 수 없는데, 그나
마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하며 나룻배를 그들이 징발했다는 것이다. 인원을초과
해서 태우고 떠난 나룻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돌아오는 사람들
로부터 들었다 한다. 용산역까지 길이 꽉 막혔는데 사람떼에 밟혀 죽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라며 그들은 한숨을 내쉰다.
을지로까지 내려가봅시다.
이문달의 말에 따라 민성공업사 지하실에서 나온 일행은 을지로 4가를 향해
길가 건물에 붙어 내려간다. 홍기중이 흩어지지 말고 어른들 뒤를 따르라 했으
므로 그 중 나이 든 윤태가 소년들을 챙긴다. 버즘나무가 큰 잎 펼쳐 늘어선 포
장된 한길이 한적하다. 주위를 열심히 살펴도 박귀란이 말한 해방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갑해야, 저기 봐. 구멍가게가 박살나버렸어.
윤극이의 손짓에 갑해가 길 건너쪽을 본다. 정말이다. 골목 어귀에 판자로 지
은 가건물인 구멍가게가 포탄을 맞아 형체도 없이 날아갔고 부서진 판자 조각과
함께 구멍가게 상품이 인도에 어수선히 널렸다. 유해가 언제 그쪽에 눈을 주었
던지 갑해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한길을 건너뛴다.
새이야, 어데 가노?
갑해가 뒤쫓는다. 윤태가 명구도 뒤따라 한길을 건넌다. 사탕. 껌. 과자 나부랭
이가 뒤섞여 널려 있다. 유해가 허겁지겁 사탕과 과자를 주워 바지주머니에 쑤
셔넣는다.
형, 남의 것 주으면 도둑놈이야.
윤극이가 말했으나 명구까지 그짓을 멈추지 않는다. 갑해도 유지에 싼 알사탕
을 주우려다 윤극이의 말에 멈칫한다. 구멍가게 주인이 없다 해도 남의 물건을
공짜로 가진다는 게 께름칙하게 여겨진다.
얘들아, 뭘 하니. 빨리 건너오잖구! 윤태가 길 건너에서 외치고, 마침 가까이
어디에서 난사하는 총소리가 들리므로 넷은 자리를 뜬다. 갑해는 형의 손을 끌
고 한길을 다시 건넌다.
일행이 한 구의 시체를 보기는 을지로 4가 네거리를 얼마 두지 않은 지점이
다. 국군 시체다. 덧문 닫힌 철물점 앞에 시체는 등을 보인 채 엎어져 있다. 시
체에서 흘러내린 피가 포도의 빗물에 섞여 그 주위가 붉게 흥건하다. 시체를 처
음 본 소년들은 흠칫 놀라 멀찌감치 비켜 서서 걷는다. 갑해는 처음으로 비릿한
피냄새를 맡는다.
네거리까지 오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륜 오토바이가 을지로 5가쪽에서 빠르
게 다가온다. 모자와 군복 윗도리에 풀을 꽂은 인민군 둘이 오토바이에서 일행
을 보고 손을 흔든다.
동무들, 해방이 됐수다!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인민해방군 만세! 오토바이 보
조차에 탄 기관총 사수가 벌떡 일어서서 손을 쳐들고 외친다.
만째! 유해가 손을 흔들며 덩달아 소리친다.
갑해야, 저기 봐. 오토바이 앞에 펄럭이는 저 깃발이 북조선 국기다. 윤극이
가 말한다.
니가 우째 아노? 오토바이가 눈앞을 지나쳤기에 갑해는 깃발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공산 국가는 모두 붉은색을 좋아하거든. 그리고 조금 전 외치는 소리 들었
지? 남쪽 군대는 국군으로 부르는데, 북조선 군대는 인민군이라 불러.
윤극이의 말에 갑해는 머리를 끄덕인다. 윤극이는 도회지 소년답게 여러 점에
서 자기보다 아는 게 많고 눈썰미 또한 밝다.
일행은 을지로 5가쪽으로 걷는다.
여기서도 시가전이 벌어졌던 모양이군. 이문달이 인도와 포도 사이에 나뒹굴
어진 국군 시체 두 구를 보며 말한다.
앞쪽에서 소나무 가지와 넝쿨로 위장한 육중한 탱크가 캐터필러 소리도 요란
하게 굴러온다. 그 뒤로 122밀리 포를 꽁무니에 단 트럭 한 대가 뒤따른다.
숨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적대감을 안 갖는 걸 보니.
심찬수의 말에 일행은 인도에 늘어서서 입성하는 북조선 인민군의 탱크와 포
를 구경한다. 트럭에는 인민군들이 올망졸망 타고 있는데, 일행을 보더니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앳되어 보이는 소년 전사들이다. 유해가 만째! 하며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든다. 소년병들 역시 옷과 모자에 풀을 꽂고 있다. 둥근 탄창이 달린 총
을 쳐들고 흔들며 그들은 인민해방군 만세를 외친다.
선생님들, 이제 돌아가요. 코가 석 자라두 먹어야 산다구. 아침밥 먹구 구경합
시다. 홍기중이 화원시장 골목길로 꺾어들며 말한다. 동구 이놈은 어찌 된 게
야. 안사장님 따라나가 무슨 변이라두 안 당했는가 모르겠군.
유해가 명구는 주머니의 고자를 먹다. 갑해와 윤극이에게 알사탕 하나씩을 준
다. 윤극이는 받지 않았으나 갑해는 유지를 벗겨 알사탕을 입에 넣는다. 단물이
금방 입 안에 고인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길거리에 나왔다는 말을 듣고 민성공업사 지하실에 있던
아녀자들도 밖으로 나온다. 비 뒤끝이라 대기가 청량하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숨막히든 간밤의 지하 생활에서 풀려나온 그들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기색이
감돈다. 바깥 세상은 여느 날과 다름없게 평온하고, 숨죽이며 남산 숲에 숨었던
새들도 다시 지저귀고 참새들은 짹짹대며 동네로 내려온다.
국무총리하구 선교사는 피란갔겠지.
봉주댁이 비구름으로 자욱한 남산을 올려다본다. 공업사 뒤쪽 높다란 축대 위
에는 서양식 건물의 선교사 사택이 있고, 동국대학으로 오르는 골목길로 한참
들어가면 남산 밑턱에 초소가 있고 헌병이 정문을 지키던 국무총리 공관이 있
다. 사태가 이렇게 빨리 역전될 줄 내다봤다면 그들이야말로 남 먼저 한강 건너
줄행랑쳤을 특권층이다.
우리두 수원 시댁까지라두 피란갔어야 하는데 서울에 이렇게 남았어두 되는
가 모르겠다. 아직도 서방의 하는 일이 긴가민가한 가회동댁이 자식을 앞세워
고물상 마당을 거쳐가며 혼잣말을 하더니, 돌아보며 봉주댁이 들으라고 말한다.
식모가 짐 챙겨 제 집에 가버렸으니 이제 내가 밥지어야지 어떡해요. 어서 얘들
아버지나 와야 할 텐데...
언니가 밥을 짓다니, 당분간 부엌일은 저한테 맡겨요. 봉주댁이 말을 받는다.
사촌오라버니네 부엌일과 서답일을 해주면서 식구들 양식 걱정은 덜겠거니 하는
궁리가 그네의 머리에 스쳤던 것이다. 수중에는 돈이 2만 5천여 원 있지만 세상
이 바뀐 마당에 남한 돈이 통용될 리 없다. 양식은 쌀. 보리를 합쳐 세 말 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서방이 소식 한자 남기지 않고 서울을 떠났다니 언제 올는지
알 수 없기에 아껴 먹으며 여투어야 한다.
유해하구 갑해야 우리집에서 밥 먹어두 괜찮지만 남자 두 분 식사는 어떡하
려우? 갑해를 보내요. 집에 있는 반찬이라두 담아 보낼 테니. 가회동댁이 말한
다.
우리집에는 새댁이 있잖아요. 언니, 새댁한테 아침밥 해서 먹이라 하구 제가
뒤따라갈게요.
그럼 그렇게 해주구려. 기명통 물에 손 담가본 지 오래라 밥짓기를 귀찮게
여긴 가회동댁이 마지못한 듯 말한다. 서방이 돌아오지 않은 데다 친정집은 피
란을 떠나버렸는지 어젯밤부터 전화가 불통이라 그네의 마음이 어수선하다.
봉주댁은 박귀란 방 앞으로 간다. 늘 그렇듯 박귀란이 신발을 방으로 들여놓
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문고리를 당기니 방문이 안으로 잠겼다. 귀란이 없냐며
봉주댁이 방안에 대고 부른다. 박귀란은 날이 밝자마자 비상구로 빠져나간 뒤
지하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방에 있습니더. 문 열어드릴께예.
방안에서 말이 들리고 방문이 열린다. 박귀란은 배달이를 한 켠에 눕혀놓고
이불 호청을 반으로 찢어 큼지막한 깃발을 만들고 있다. 물감을 언제 구해놓았
는지 가로 면을 삼등분하여 아래위로 군청색을 칠해놓고 흰 띠를 남긴 바탕에
붉은색을 칠하고 있다.
그게 뭐니? 뭘 만든다구 그러니? 봉주댁이 묻는다.
북조선인민공화국 깃발이라예. 해방군이 들어왔으니깐 깃발 흔들며 환영해야
지예. 박귀란이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는다.
물감하구 붓은 언제 준비했구?
이럴 때 쓰려 어제 아침 시장에 나갔다 사왔지예.
참말 정성 하난 놀랍구나. 그런데 아침밥 안 먹을 텐가? 국기 만들어 흔들면
누가 밥 준다던?
별판만 칠하면 이제 다 만들었심더. 금방 나가서 쌀 안칠께예. 박귀란은 하
나 입이라 봉주댁네 부엌일과 빨래일을 도우며 한솥밥을 먹는 처지이다.
이선생과 심도령 밥두 안쳐라. 전쟁판이라 한톨 양식두 아껴야 허지만 찾아온
고향 사람을 어찌 내치누. 난 오빠네집에 가서 거기서 밥 먹구 오겠다. 식모가
가버렸다니 내가 나서줘야지. 부엌살림 안 살아본 규방마님이라 부엌에 나서면
얼마나 서글프겠냐. 봉주댁은 찬도 얻어오고 그 사이 돌아올는지 모를 사촌오라
버니를 만날 겸 휑하니 고물상 마당을 빠져나간다. 판잣집 앞 수챗가에는 태안
댁이 바가지에 쌀을 씻고 있다.
차츰 구름이 걷히면서 언뜻언뜻 푸른 하늘이 보이고 해가 구름 사이로 스칠
적마다 반짝 햇살이 든다. 박귀란은 서둘러 풍로에 불을 피워 아침밥을 짓는다.
아침밥 먹고 나면 무슨 일부터 할까를 궁리하지만 마땅한 일감이 떠오르지 않는
다. 아기 아버지가 벌써 서울로 들어왔을까가 궁금하다. 이제 인민공화국 땅으로
해방된 서울에서 그이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를 생각하니 기쁨이 북받쳐 가
슴이 두근거린다. 삼대독자 집안이나 자랑스러운 사내아기부터 덥석 안겨야지.
그네는 풍로 아궁이에 부채질하며 벙글거리는 얼굴로 행복한 상념을 엮는다. 아
침밥을 먹고 나면 해방된 거리를 마냥 싸돌고 싶다. 그래서 입성한 해방군을 잡
고,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 강동정치학교에 입교한 남로당원도 서울로 들어왔느
냐, 왔다면 어디에 숙소를 정했느냐는 수소문부터 하고 싶다.
봉주댁네 방에서 둥글상에 둘러앉아 심찬수. 이문달. 유해 형제가 아침밥을 먹
을 때이다.
박동무! 박동무 어딨나에. 서울이 해방됐심더. 드디어 인민해방군이 진주했심
더!
바깥마당에서 기쁨에 넘친 함성이 들려온다. 부엌 부뚜막에 앉아 배달이에게
젖을 물리던 박귀란이 마당을 내다본다. 언청이 마칠구다. 알머리에 흰 남방 입
은 그가 고물상 마당에서 안마당으로 겅중겅중 뛰어들며 만세를 부른다. 팔뚝에
는 붉은 완장을 찼다. 우리 동구는 어찌 됐냐고 물으며 태안댁이 종종걸음으로
뒤따른다.
마동무, 나 여깄어예. 팅팅 분 젖을 치마말기 안에 우겨넣고 배달이를 안은
채 박귀란이 마당으로 나선다.
밥 묵고 모두 종로로 내려가이소. 인민해방군 본대가 입성합니더. 서울 시민
은 누구나 해방군 환영 만세를 불러야 합니더.
마씨, 우리 동구 어찌 됐냐구 묻지 않수., 무사하지요?
동구예? 갸 어데 갔는지 몬 봤심더. 묵정동 동사무소를 방금 우리가 접수했
고예.
그렇게 빨리? 박귀란이 들뜬 목소리로 묻는다.
인민군 선발대 선무반이 중구 경찰서와 구청을 접수한 후 동사무소를 돌며
알려줍니다. 마칠구가 말을 마치자 바쁘다며 서둘러 마당을 나선다.
마동무 좀 물어봅시다. 마동무! 박귀란이 바깥마당으로 뛰어가며 마칠구를
부른다.
내 나중에 또 들릴께예. 지금은 바뿝니더.
홍기중이 동사무소 거쳐 구청으로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선다. 박귀란은 궁금
한 게 한두 가지 아니지만 마칠구를 서운하게 보내고 걸음을 돌린다. 누님도 얼
른 밥 잡수시라는 갑해 말에,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퍼놓은 누룽지 섞인 바가
지를 들고 봉주댁네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 넷이 다부지게 숟가락질을 한다. 박
귀란은 마음이 들떠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몇 숟가락 뜨고 종로통
으로 나가볼 작정이다.
방안 사람들이 밥을 먹고 나자 박귀란도 바가지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는
다. 이문달과 심찬수가 마당으로 나서서 말을 나눌 동안, 박귀란은 갑해의 도움
을 받아 그릇을 대충 부엌으로 나르고 빈 그릇과 수저는 기명통 물에 불린다.
그네는 방으로 들어와 서둘러 포대기를 둘러 배달이를 업는다. 책상 아래 접어
둔 인공기를 들고 방을 나선다.
이선생님, 이거 장대에다 매달아주이소.
언제 그걸 만들어뒀나요? 이문달이 묻는다.
아침에 만들었어예.
세상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이문달이 비맞은 중처럼 쭝덜거
리며 빨래줄을 받친 장대를 거두어 박귀란으로부터 받은 인공기의 두 귀를 묶어
매단다.
이문달은 물론 심찬수도 그 깃발을 들고 선뜻 나서려 하지 않자 박귀자를 유
해를 보고, 너가 들고 앞장을 서라고 말한다. 유해가 히물쩍 웃으며 좋아라고 장
대를 들고 나선다. 심찬수. 이문달. 박귀란. 갑해가 뒤따른다. 마른내길 쪽에서
홍동구가 털레털레 걸어온다. 비에 젖어 덜 마른 홑등거리 어깨에 김이 피어오
른다.
동구야, 어데 갔다 오는 길이고? 밤새 부모님이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박귀란이 말한다.
사장님 심부름으로 연락하러 다니느라 밤새 다리품 팔았지요. 한숨도 못 잤습
니다. 홍동구는 밤을 새웠는지 눈자위가 벌겋다.
안사장님은?
새벽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죄수들 분류 작업하는 데 계시다 저와는 조금 전
시청 앞에서 헤어졌어요.
인민군이 새벽에 벌써 서대문형무소를 접수했단 말입니까? 이문달이 묻는다.
인민군 특공대가 성내로 들어오자마자 탱크를 앞세워 거기부터 먼저 쳤나봐
요. 탱크 포가 정문을 박살내구... 홍동구는 저녁밥도 굶고 다녔다며 지칫거리는
걸음으로 고물상 마당으로 들어가버린다.
안사장님은 무사하지예? 박귀란이 홍동구 등에 대고 묻는다.
예, 시청에 당원 동지들이 다 모여 있다나뵈요.
갑해야, 우리도 어서 가자. 박귀란이 등에 업힌 배달이를 추스르며 말한다.
마른내길을 거쳐 을지로 4가로 내려가는 큰길에는 많은 시민이 인민군 환영
대회에 나서고 있다. 바뀐 세상에 아직도 실감을 느끼지 못해 사방을 두리번거
리는 겁먹은 얼굴도 있지만 길길이 뛰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박헌영 선생 만세!가 군중의
외침 속에 섞갈리고, 습자지에 그려 만든 인공기를 댓개비에 붙여 들고 흔드는
사람도 있다.
만째! 만째! 유해가 장대에 매단 큰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든다. 그 대형 인공
기가 유독 눈에 띄어 만세 부르는 사람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어 스무여 명이 함
께 뭉쳐 걷는다. 유해는 한껏 기분이 좋아 깨금발로 뛰며 우쭐거린다.
조선인민공화국 해방군 서울입성 만세! 배달이를 업은 박귀란이 깃발 앞으
로 나서며 두 손을 쳐들고 외친다.
박귀란의 선창에 깃발을 싸고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복창한다. 여러
사람 입에서 만세와 환호성이 터진다. 열기 띤 흥분은 금세 전염되어 그 외침이
구름 낀 낮은 하늘을 찌렁찌렁 울린다.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을 닦는 젊은이도
있다. 찌무룩한 표정으로 묵묵히 따라 걷기는 심찬수뿐이다.
일행이 구태여 종로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게 을지로 인도는 환영꾼과 구경꾼
으로 법석을 이루었다. 입성한 인민군 행진이 시작되고 있다. 군장한 보병 부대
다. 인공기와 부대 깃발을 앞세운 팔렬 횡대의 보병 부대가 을지로 3가로 당당
하게 걷는다. 따발총을 가슴 앞으로 걸거나 소총을 등에 멘 병사들인데, 경기관
총을 어깨에 걸친 병사도 있다. 그들은 대체로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들이다. 개
중에는 새벽에 보았던 열예닐곱 살 될 만한 소년 전사도 섞였다. 작은 키에 왜
소한 몸이라 소련제 아카바 소총이 힘겨워 보인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 탓인지
피곤에 절은 모습은 아니다.
인도에 늘어선 사람들은 준비해온 인공기를 흔들며, 맨손으로 나온 사람들은
손뼉을 치거나 만세를 부른다. 붉은 완장 찬 젊은이들이 차도로 나서서 뛰어다
니며, 더 힘차게 만세 부르고 박수치라며 군중을 독려한다. 인민공화국 만세!
인민해방군 만세! 를 연호하며, 박수 소리가 진동한다. 행군하는 보병 부대는
앞만 바라보며 일사불란하게 걷는다. 오토바이 편대가 지나가자, 이제 탱크가 지
축을 울리며 다가온다. 탱크병은 윗몸을 밖으로 내고 기관총좌를 잡고 있다.
탱크 부대다. 정말 대단하군. 남한 군대는 탱크가 한 대도 없었다잖아. 인민
군이 탱크를 앞세워 진격했으니 승승장구한 게지. 저 탱크는 모두 소련제야.
탱크를 처음 본 군중은 그 위용에 모두 감탄한다.
심형, 계속 구경하고 있을 겁니까? 이문달이 묻는다.
글쎄요.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행군 대열에서 눈을 떼며 심찬수가 이문달을
본다. 이선생은 어디 갈 데 있습니까?
양정학교에나 가볼까 하고요. 학생이 등교하지 않을 텐데 선생들이 출근했는
지 모르지만... 출근 안 했다면 도화동 함선생댁을 찾아보까 해요.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남산동 친구 집에나 가보지요. 여기서 가까운 거
리니깐요.
심찬순는 장영권을 떠올린다. 장영권은 공안 검사라 이미 한강 넘어 피란가버
렸기 십상이다, 만약 피란 기회를 놓쳤다면 은신처로 피신했을 터이다. 그러나
가족이 피란을 못 떠났다면 그 부모와 처자식은 남아 있으려니 여겨진다. 막상
조민세 선생 집으로 간다 해도 할 일이 없으니 헛걸음하는 셈치고 남산동에서
명동을 한바퀴 둘러볼 작정이다.
심형은 조선생댁에 계실 거지요?
예, 제가 어디 마땅히 잠잘 곳이 있습니까. 이선생도 저녁에 이쪽으로 오십시
오. 당분간은 조선생 댁 신세를 질 수밖에요. 아니면 효제동 동문여관으로 가보
거나.
이문달이 떠난다. 심찬수도 박귀란에게, 남산동 친구 집에 들렀다 오겠다고 말
한다.
그라이소. 저는 시청으로 가볼랍니다. 안사장님이 거기로 가셨다니 남로당이
시청을 접수한 거 같심더, 아기 아부지 소식도 알아볼 겸... 열 내어 만세 부르
느라 박귀란의 뺨이 발갛게 달았다.
심찬수가 떠나자 박귀란은 갑해에게,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유
해 놓치지 말고 잘 데리고 가서 인공기는 민성공업사 정문에 걸어두라고 그네는
갑해에게 이른다.
박귀란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등에 업은 아기를 추스르곤 을지로 3가로
걷는다. 그네는 밀채이는 사람들 사이로 바삐 걸음을 옮긴다. 을지로 입구를 거
쳐가자 인도는 시내 중심부로 몰려나온 군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탱크가 구
르는 소리, 만세 소리, 환호 소리가 뒤섞인다. 시청 광장 주위에는 시민들로 들
어찼고, 광장 가운데는 탱크 부대. 박격포 부대. 보병 부대들이 진을 쳤다.
박귀란은 군중 사이를 헤집고 시청 쪽으로 간다. 시청 건물 이층 창틀에 확성
기를 설치해놓았는데 우렁찬 군가가 쏟아진다. 그네가 시청 정문 가까이 다가갔
을 때 확성기의 군가가 멎더니, 웅변조의 연설이 터져나온다.
이승만 괴뢰 정부군은 지난 이십오일 새벽 삼십팔도선 이북 지역에 전면적
진공을 개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공화국 경비대는 창발성을 제고하여 적의
진공을 구축하며 격렬한 전투를 전개한 결과 옹진반도는 물론 개성. 동두천을
전격 해방시키고 오늘 새벽 드디어 서울 함락에 성공했습니다. 곧이어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이신 김일성 원수님께서 우리 조국 수도 서울 해방에
제하여 의 생방송이 있게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인민해방군가]를 들려드
리겠습니다... 격앙된 서울 말씨다. 이어 아코디언 반주에 맞춘 남성 합창으로
군가가 힘차게 시작된다.
시청 정문에는 인공기와 소련기가 내결렸다. 따발총을 앞에총한 경비병 둘이
정문을 지키고 있다. 박귀란은 경비병에 의해 출입이 제지된다. 남편이 동정치
학교 입교차 월북했고 자신은 경남 제2지구 제7블록 소속 빨치산 대원이라 말해
도, 당증이나 임시위원회에서 발행한 증명서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고 경비병이
말한다.
남조선 세상에서 당증 갖고 다니는 사람이 어데 있습니껴?
그렇다믄 여성 동무, 동무 용무는 무엇이오?
아는 사람 만나볼까 해서요. 아기 아버지 소식도 알고 싶고요.
인민군 전사와 정치 간부위원 외 피교육자들은 아지 립성하지 않았쉐다. 정
부군을 찾으실라믄 내일 다시 와보시라우. 보믄 알갔디만 당원이라 말하며 립장
시켜달라는 동무들이 많으나 다 통제당합네다.
경비병이 한사코 막아 박귀란은 계단을 내려와 첫 계단에 주저앉고 만다. 정
문으로 어깨에 견장 단 장교가 들락거리고, 팔에 붉은 완장 두른 민간 복장의
남자들도 무시로 출입한다. 경비병은 팔에 완장을 두른 자는 일단 검문했는데
완장에 스탬프 도장이 찍혀 있나를 살펴보고 입장을 허락한다. 박귀란이 출입자
를 유심히 살폈으나 눈에 익은 얼굴이 없다. 경비병의 말대로, 어제까지 남로당
지하당원으로 활동했다며 누구를 만나러 왔다고 통사정하는 자도 있지만 번번이
통제당한다. 박귀란은 서류 봉투를 들고 정문에서 나오는 완장 찬 중년 남자를
잡고 안진부 사장과 조선생의 가명인 조학구 이름을 대도, 그는 잘 알 수 없다
며 머리를 젓는다.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대답조차 건성으로 하곤 국회의사당
쪽으로 뛰어간다.
박귀란은 열한시 삼십분에 스피커를 통해 방송된 김일성 원수의 우리 조국
수도 서울 해방에 제하여 를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채 듣는다. 그네가 평안도 억
양으로 말하는 김일성 원수의 굵직한 육성을 듣기가 처음인 데다 구구절절 그
내용의 당위성이야말로 감격 그 자체이다.
... 전체 조선 인민에게는, 전쟁을 조속한 시일 안에 승리로 종결시키기 우해
모든 힘을 다하여 인민군에게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미해방 지구 인민은 빨치
산 활동을 전개하여 후방을 교란시키고 도처에서 인민 폭동을 일으켜 군수 물자
를 수송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야겠습니다. 또한 해방된 서울 시민은 민주 질서를
속히 수립하며 복구 건설에 착수하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 군대를 적극
원조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김일성은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리승엽
을 임명했다고 발표한다.
리승엽 선생이 서울시 인민위원장이 되셨다니... 박귀란은 감탄한다.
박귀란은 김일성 원수의 연설을 듣자 지난 겨울까지 2년여에 걸쳐 김해군. 창
원군. 함안군 일대의 산야를 누비며 빨치산으로 투쟁했던 고난의 세월이 떠오른
다. 4월에 들어 입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잠입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의
지시에 따라 후방 교란 임무에 박차를 가할 터이다. 어쩌면 유격대 전력이 있는
대원들은 당장 차출되어 지역 연고지인 미해방 지구에 투입될는지도 모른다. 한
편, 그네가 김일성 원수의 연설을 통해 감격한 점은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
원장 임명이다. 리승엽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삼룡 선생과 함께 박헌
영 선생 양팔 구실을 해온 남조선로동당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이므로 그의 중책
기용은 수도 서울시 당 사업을 남로당 영향 아래 둔다는 뜻이다. 남로당 출신의
간부들이 서울시 인민위원회를 장악한다면 몇 달 동안 서울시당 조직부장 대리
를 맡아온 조민세 선생 역시 중용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생은 지금 서
울에 있지 않다. 안진부 사장이 유해어머니께도 알리지 말라며, 조선생이 해주지
휘부에 소환당해 북으로 올라갔다 했다. 조선생이 어쩌면 인민군과 함게 지금
서울에 들어와 시청에 있을는지 알 수 없다. 무슨 이유로 조선생이 소환당했는
지에 대해선 안사장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궁금증을 더하지만 그녀 역시 딱
부러진 이유를 모른다. 전쟁 발발을 앞두고 소환되었으니, 전쟁 발발을 미리 감
지한 북에서 전쟁 수행에 따른 어떤 지령을 내리기 위해선지 모른다. 아니면 [로
력인민]에 실린 선생의 [유격전의 전략과 전술]내용이 문제가 된 탓일까. 그 테
제가 서울시당 지도부 이론진 사이에서 구설수에 올랐다는 말을 그네는 정화언
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조선생이 해주지휘부로부터 호된 자아 비
판을 받고 당에서 축출당했다면 자신은 물론 서방 역시 선 떨어진 패잔병과 다
를 바 없다. 경남도당 제2지구 제7블록이야말로 조선생을 정점으로 지하 활동을
해왔기에 지리산으로 들어간 1조와 2조 외, 서울로 올라온 3조 대원들은 다른
선과 연계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당 재정책 안진부 사장만이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정도이다. 이럴 때 정화언니라도 만난다면 여러 정보를 얻을 텐데 그녀 역
시 조선생과 함께 월북했으니, 고향의 가족을 제외하고 그네가 만나고 싶은 그
리운 사람은 모두 북쪽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이다.
김일성의 생방송 연설이 끝나자 시청 광장은 시민의 환호성과 만세 소리로 진
동한다. 덮쳐오는 물결처럼 잦아들 만하면 다시 열화와 같은 환호와 만세의 외
침이 광장을 메아리친다. 박귀란은 흠복하여 복받쳐오르는 눈물을 닦는다. 그네
가 눈물 밴 눈을 슴벅이며 계단을 바삐 오르내리는 남자들에게 다시 눈을 주었
을 때, 무슨 안면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검정물 들인 군복 윗도리의 걷어붙인
소매에 완자을 찬 떠거머리 사내가 서류 봉투를 들고 계단을 뛰어오른다. 서울
로 함께 올라와 넝마주이로 위장하여 홍기중씨네 고물상을 들락거리는 변삼개
다.
변동무! 박귀란이 계단에서 일어서며 변삼개를 부른다.
아이구, 박동무 아입니껴. 변삼개가 계단 아래로 뛰어와 박귀란을 덥석 얼싸
안든다. 동무요, 드디어 우리가 이겼심더. 우리가 승리한 검더. 해방의 날을 기
어코 맞았심더!
그래, 니 말 맞다. 이제 두 동강 조선이 인민공화국으로 통일됐어. 변삼개가
껴안은 손을 풀자 박귀란이 궁금해하던 소식부터 묻는다. 안사장님이 여게 계신
다 캐서 왔는데 변동무는 봤나? 우리 조선생님 소식은 들은 게 있나? 완장을 찬
거 보니 니사 알겠구나.
안사장님하곤 한참 전까지 같이 있었심더. 지가 간부분들 심부름 댕기느라 똥
줄이 빠지는 거 아입니껴. 안사장님은 시청 안에 있심더. 듣자 카이 조선생님은
일주일쯤 전에 해주로 올라갔다 카데예. 내리왔는지 우예 됐는지 안죽 모르겠심
더.
그라면 니는 여게 마음대로 들랑거릴 수 있으이 어서 들어가서 우리 아기 아
버지하고 조선생님 소식 알아서 나오너라. 난 출입 안 키셔주이 여게서 기다리
꾸마.
벌씨러 머리털이 까맣네예. 변삼개가 잠이 든 채 땀에 함초롬히 젖은 박귀란
의 등에 업힌 배달이에게 눈을 주며 웃는다. 내가 보초 선 군인 동무한테 말해
보께예. 같이 들어가보구로예.
변삼개가 경비병에게 다가가, 애엄마가 남조선로동당 서울시당 부녀부 소속
열성 당원으로 지하 공작을 함께 해온 일꾼이라 설명한다. 입장만 시켜주면 심
사위원으로부터 금방 완장을 교부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경비병은 위원회 명령
에 의해 당증이나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완장 차지 않은 자는 어느 누구
도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거절한다.
여성 동무의 말은 이해하지만 지시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습네다. 경비병이
박귀란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변삼개를 본다.
동무가 들어가서 여성 동무 증명서를 만들어 오시라요. 그러믄 출입이 자유로
울 수 있디 않갔습네까.
경비병이 친절하게 거절하자 변삼개도 단념할 수밖에 없다.
박동무, 그라모 여게서 기다리소. 내 이 서류 퍼뜩 전달해주고 나오께예. 나와
서 이바구하입시더.
변삼개가 박귀란에게 말하곤 시청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간다. 복
도로 분주히 오가는 군인과 민간인 사이를 뚫고 기역자로 꺾어든다. 남조선 지
도가 그려진 대형 널빤지를 맞잡아 들고 가는 젊은이 둘이 주고받는 말을 변삼
개가 뒤따라가며 듣는다.
중동부 전선 춘천을 방위한 남선군 육사단이 의외로 강했대. 그래서 인민군
이사단과 칠사단이 이십오일 당일로 춘천 점령 목표가 실패했다잖아. 이십육일
오후에 들어서야 겨우 춘천 시내에 진입했다니, 이사단 일부 병력을 빼내어 서
울 남쪽을 우회시켜 서울 방위 남반부군을 협공 섬멸한다는 계획에 차질이 온
게지.
정말 빠른 정보로군. 어디서 그런 말이 나왔어?
조금 전 작전 보고 회의장에서 직접 들은걸.
지도판을 들고 가던 젊은이 둘이 통제 구역 안으로 들어선다. 변삼개는 3호실
이란 종이를 붙여놓은 문 앞에서 손기척을 내고 문을 연다. 실내는 스물댓 평
크기고 탁구대만한 큰 회의용 책상 주위에 열댓 명 민간 복장과 두 명 군복이
둘러앉아 있다. 노타이 차림의 성주걸이 일어서서 제 주장을 펴고 있는 참이다.
... 남조선 해방 지구에 당의 재건이 무엇보다 급선무라 할 때, 우리는 유능한
당원 확보를 통해 민주 과업 성취에 진군해야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김승하
동무를 천거하는 바입니다. 그 전력과 평판이 경향 각지에 자자했던 만큼 김승
하 동무가 놈들의 협박 회유에 못 이겨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하나 남반부 경
찰과 군 정보 기관에 협조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일제하 투옥 경력,
투쟁 경력을 보더라도 김동무를 끌어들여야 해요. 저는 김승하 동무를 경기도당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천거하는 바입니다.
민간 복장들은 우선 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남로당 서울시당 간부진과 지도부
요원들이다. 남대문시장의 피복 작업실 아지트에 들랑거렸던 박태길. 한봉우. 민
영만. 홍락. 이느티의 얼굴도 보인다. 그 아지트를 운영했던 공현숙과 안진부, 해
주지휘부에서 내려온 김용팔도 있다.
성동무가 일제하 김의 지도 영향을 받은 바 있는 선배라 천거하는 모양인데,
보도연맹 가입자를 당원으로 받아들일 순 없다고 보오. 보도에 가입한 후 동지
를 밀고하는 데 앞장선 많은 배신자를 우리는 똑똑히 목격한 바 있소. 우리는
오히려 그 배신자를 낱낱이 색출하여 죄과를 따져야 하오. 서울시당 지도부 중
앙위원 박태길의 말이다.
변삼개는 발소리 죽여 막 제 의자에 앉은 성주걸 옆으로 다가간다. 들고 있던
봉투를 그에게 전해주자, 성주걸이 쪽지를 내민다. 쪽지에는 중앙도서관 안영달
선생, 속히 시청 2층 3호실로 와주십시오 라 적혀 있다.
이 쪽지 얼른 중앙도서관에 가서 안선생에게 알리시오. 성주걸이 작은 목소
리로 말한다.
변삼개가 이마를 짚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안진부와 눈을 맞추곤 회의장에
서 물러나올 때, 소좌 계급장을 단 인민군 장교의 말이 시작된다.
김일성 원수께서는 전쟁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제국주의 국가의 약소 국가
침탈을 불의의 전쟁이라믄 약소 국가의 제국주의 항쟁은 정의의 전쟁이라 규정
한 바 있습네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와 민주를 위한 정의의 전쟁을 수행하
고 있는 작금의 남반부 해방 전쟁에서 해방 지구의 당 재건 사업이야말루 전쟁
의 영예로운 수행을 적극 후원해야 하는 후방부의 긴급한 당면 목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괴뢰 정권의 수족이 된 보도연맹 가입자를 당원으
로 재등용한다는 발설이야말로 어불성설입네다...
변삼개는 시청 정문을 나선다. 박귀란은 계단 맨 아랫단에 쪼그려앉아 있다.
시청 광장의 탱크 부대와 야포 부대는 어디론가 이동해 자리를 비웠고, 보병 부
대는 덕수궁 안으로 대열을 옮겨가고 있다. 광장 주위를 에둘렀던 시민들도 대
부분 빠져나가고 없다. 확성기에는 계속 군가가 이어진다.
박동무예.
퍼뜩 나왔네. 뭣 좀 알아봤어예?
회의가 계속돼서 말도 꺼내지 몬했심더. 분위기가 얼매나 엄숙하던지. 회의가
끝나봐야 물어보겠는데... 또 심부름이 떨어졌지 멉니껴. 조 앞 중앙도서관에 댕
겨오라 캐서예. 도서관에 아매도 해주지휘부 파견대에 들어와 있는 모양이라예.
저하고 그쪽으로 걸어가며 이바구하입시더.
박귀란은 칭얼대며 우는 아기를 추스르며 변삼개를 따라나서다 뒤돌아본다.
변동무, 저것 봐. 쪼매 전에 저 간판을 달더라. 변삼개가 돌아본다. 어느 사
이 서울시 인민위원회 간판이 길다랗게 내걸려 있다. 안사장님 만나봤나?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더.
안사장님은 어디서 만나 같이 다녔나?
어젯밤 남대문에 있는 아지트에서예. 한강 다리가 폭파되고 남조선군이 시내
에서 자취를 감추자 아지트에 모였던 스무여 명 간부와 연락원들이 비로소 밖으
로 나왔지예. 첫 탱크가 시청에 들어온 기 새북 네댓시쯤이었을 낌더. 탱크 따라
들어온 선발대가 중앙청. 국회의사당. 남산 방송국을 접수할 때, 한 부대는 서대
문형무소부터 쳤지예. 서울시당 간부들이 갇힌 동지를 빼낼라고 그쪽으로 몰려
갔심더. 날이 밝자, 형무소에 갇힌 죄수를 심문해서 흉악범은 빼고 사상 문제로
갇힌 동지들 사천여 명을 무조선 석방시켰지예. 서울에 연고 없는 석방자들은
지금 중앙청 마당에 집결해서 상부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낍니더. 그런데 우리
가 그렇게 구출할라 캤던 김삼룡 선생과 이주하 선생이 읎지 멉니껴. 시체도 몬
찾아 사방으로 수소문했는데... 제게 저 언덕배기... 변삼개가 남산 쪽을 손가락
한다. 개늠들 헌병사령부 뒷문 밖 숲속에서 우리 지도부 간부 선생들을 모아놓
고 그저께 총살해뿌렸지 멉니껴. 시체를 거게서 찾았심더. 서대문과 마포형무소
에 갇힌. 개늠들이 좌익 골수로 지목한 일천이백여 명을 이십육일 밤에 저 연신
내 골짜기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뿌렸는데, 시체가 산을 이랐답니더. 성시백 선생
과 일차로 검거된 열두 명도 그렇게 죽었고예. 총살시키고, 바뿌이께 미처 몬 끌
고 간 애국 동지는 형무소 안에서 처치해뿌렸는데, 옥에 있던 동지들 말로는 이
십육일 자정부터 이십칠일 신새벽까지 밤새 총소리가 콩 볶듯 튀었답니다. 김삼
룡. 이주한 선생 시신을 남산골에서 찾아내자 석방된 동지들도 대성통곡을 했심
더. 이십육일 저녁 방방마다 호명이 있고 동지들이 불려나갈 때 모두들 그런 낌
새를 눈치챈 모양이라예. 형무소 안에도 프락치가 있어 이십오일에 삼팔선이 무
너지고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은 감방마다 쫙 돌았거던예. 반도호텔 앞을 거쳐가
며 변삼개가 입에 침을 튀기며 간밤의 상화을 설명한다.
악독한 놈들, 대명천지에 확정 판결도 없이 한민족 한동포를 그렇게 처형해버
리다이. 미제 앞장이 이승만은 살인광이야.
박귀란은 숨을 들이키며 진저리친다. 한 달쯤 전 안진부 사장의 부탁을 받고
공덕동 홍원댁에 맡겨진 명호 형제를 수원 변뒬 성심고아원에 데려다준 일이 떠
오른다. 명호 형제의 부모도 남조선 해방에 나서서 혁명 투사로 헌신하다 수사
기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 했다. 명호 형제의 부모도 어쩌면
집단 학살당한 그 많은 동지에 섞여 있을는지 모른다. 유격대 활동중 만약 서방
이나 자신이 군경 토벌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ㄷ면 그런
형극을 당했을 것이다.
서울 해방을 몬 보고 그렇게 죽다니... 참으로 억울합니더. 애국 동지들은 죽
었어도 눈 몬 감을 끼라예.
전쟁 나고 동생은 만내봤나?
변삼개의 아우 변용개는 서울로 올라온 뒤 용산역에서 날품일을 하고 있다.
몬 만냈습니더. 인자 만내서 목 놓고 실컷 울어야지예.
중앙도서관 앞에 이르자 박귀란과 변삼개는 헤어진다. 변삼개는 지난 4월 서
울로 함께 올라와 날품일, 지게일, 넝마주이, 잡역부 따위로 지하 생활을 영위해
온 7블록 동지들을 모두 만나 조만간 묵정동 집에 들리기로 약속하고 떠난다.
그때, 조민세 선생 소식은 물론 북파된 교육 요원들 근황도 알아오겠다는 것이
다.
박귀란은 어서 집으로 돌아가 배달이 젖부터 물려야겠다는 생각에 전차길을
건너 명동으로 빠진다. 그네의 감격에 복받친 가슴은 내내 진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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