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눈'/임명철
알 수는 없지만
내리는 눈이
그 해의 마지막 눈이란 걸
알 수만 있다면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낼 것이다
모진 이별의 아픔이 시작되는 날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으므로.
휴가사유서에는 눈병, 이라고 적을까?
동료들은 안과에 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깜찍한 거짓말은 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
나는 진짜 눈병이 난 것이다
회사를 나와 바닷가 찻집 창가에 앉아
떠나가는 그녀, 마지막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리라
맥없이 맥없이 바라만 보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눈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외치지는 않으리라
울지도 않으리라
그냥 조용히 얘기나 하자고 하리라
다만 손가락을 펴 떨어지는 눈송이와 손잡는 걸 잊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짧은 입맞춤도 하리라
지난 몇 달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정들어 버렸다고
없이는 못 살 정도가 되었다고
차마 말은 안 하리라
서서히 사라지던 어느 날의 노을처럼
어느 날의 안개처럼
가야만 할 운명
구차한 말은 필요없으리
그저 하루의 휴가를 함께 보내는 일밖에
함께 걷는 일밖에
함께 젖는 일밖에
알 수는 없지만
알 수만 있다면
나는 기어코 그렇게 하리라
'머루나무 한 그루 심은 까닭은'
제가 집 뜨락에
머루나무 한 그루 심은 까닭을
당신은 모르실겁니다
가을을 기다려
다디단 과육의
미각을 즐기기 위한 것인 줄
당신은 아실 겁니다
아니면 그 머루열매 듬뿍 넣고
소주를 부어
술 익어가는 즐거움에 젖는
저를 상상하실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즐거움에 빠지려고
머루나무를 심은 게 아니랍니다
한숨을 쉬며 한숨을 쉬며
겨울부터 가을까지
오직 그 결실의 열매를 기다리는 까닭은
그저 눈으로 한없이 그 까만 눈동자를 보고픈 까닭입니다
내 옆에 앉았던 당신이
고개를 돌려 바로 코앞에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어느 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랬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머루알 같던 까만 눈동자와
부딪치던 그 순간만은
또렷이 기억납니다
책 읽기 딱 좋은 30센티미터 거리에서
제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당신의
눈동자
비에 씻긴 머루알 두 송이 같던 눈동자
그것은 제 가슴에 운석처럼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간 순간이라
당신은 까마득히 잊었을
그날의 일을
저는 아직도 못 잊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이제는 알겠는지요
느닷없이 어느 날
묘목가게로 달려가
한 그루 머루나무를 사 온 제 마음을요
몇 년을 기다려 처음
주렁주렁 열리는 그 열매를 보고
제 마음 북소리가 얼마나 컸을지를요
해마다
참고 또 참으며
겨울부터 가을까지
기다리는 까만 눈동자
오직 그것만을 위해
머루나무 한 그루를 심은
이 제 마음을요
'덕분에'
술은 어둠이 펼친 그늘 덕분에
말없이 익어가고
골방에서 읽는 한 권 책 덕분에
마음 익어간다
땅속에서 기도하는 뿌리 덕분에
석류열매 익어가고
자장가 덕분에
아기는 자란다
밤,
도라지꽃 덕분에
별이 외롭지 않고
가로등 덕분에
골목, 따스하다
멀리 있는 친구 덕분에
나는
오늘을
견디고
'동짓밤'
동짓달은 밤이 길어서
밤새
시 열 편은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좋다고 하면
어딘가 밤이 너무 길어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서 걱정이다
피차 잠 못 자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찬바람 일렁이는 나뭇가지 같은
그 마음이 잠 못 드는 데 견주면
시 쓰느라 고통스러운 밤은 사치일 뿐일까봐
그래도 혹시
그 마음가지에 덜컥 걸릴
꼬리연 같은 시 한 편 쓸 수 있다면
동짓밤, 두 사람 모두에게
축복이 될까?
고민만 깊어가는 긴긴 밤
'멸치'
앵두 빨갛게 익어갈 때
꼭 이맘때 멸치 올라온다고
텔레비전에서 한 아주머니가
시인처럼 말한다
갓 잡아올린
멸치회 먹으러 가고 싶은 한낮
초고추장 입술에 묻히며
멸치회 나눠 먹던
앵두 같던 섬처녀
수박등 아득한 바닷가 횟집
파도소리
여적지 마음에 찰랑이는데
앵두는 열리고
멸치는 올라오는데
'시를 읽다가'
한 시인의 시를 읽다가
줄줄 울다가
다시 시를 들여다보네
"마침내 내가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손담배 따라 피우며
못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보다가 또 우네
연애 십 년 결혼 삼십 년
쎄빠지게 고생한 우리 마누라
불쌍해서
시벌 시벌 중얼거리며
중얼거리며
*김사인의 시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심곡항'
골이 너무 깊어
심곡이라고 부르는 항구
한국전쟁 때 인민군조차
올 수 없었다는 이곳은
오래오래 몽돌해변이었네
나씨 성을 가진 어린 내 친구가
싸두바리로 멱을 감던 바다
드르륵 드르륵
이명처럼 귓속을 드나드는
몽돌, 파도에 쓸리는 소리
야전점퍼 주머니만 하던
그 항구를 나는 기억하네
전마선 몇 척 위태롭게
떠 있던
등대 하나 없던 적막한 항구
이제는
추억의 파도만
켜켜이 밀려오는.
'유리집'
온통 눈이 오거나
대책없이 비 오는 날
우리는 바닷가 작은
유리집으로 갔지
사방이 통유리로 지어져
파도와 솔숲으로 포위된 곳
사면초가를 듣듯
하릴없이 시름에 겹던
스무살 언저리 어느 시절
지워진 시간처럼
영영 사라진
우리들의 아지트, 바닷가 유리집
톱밥난로 위에선
놋주전자 뚜껑 설레게
덜컹거렸네
너의 얼굴은 숯처럼 빨갛게
난롯가에서 익고
내 가슴엔
그 네 얼굴같은
사랑의 숯 달아올랐네
아, 그립고 그리운
유리집
'하동행'
늘 은어낚시 하러 섬진강에 가던 D와는 달리
K시인처럼 호미 던져두고 꽃구경하러*
예쁜 여자들, 털털한 남자들과 섬진강에 가는 길
은어같은 봄비가 속살거려*
비꽃인지 꽃비인지 모를 벚꽃길
아이 아홉 낳은 L시인의 팔순 다 된 엄마는
둘째 딸의 시벗들을 위해
밥을 짓고 나물을 무쳐내고
우리는
말통 기득 생막걸리 밤새 퍼마시며
시를 마시며 인생을 마시며
꽃비인지 비꽃인지 모를 떨어져 내리던
것들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작설차와 보이차 향 안개 속에 뿌려져
속살 연한 섬진강 지류 물 속에
허무와 시름 다 씻고 씻어
나는 새로우리
나는 새로우리
이토록 서럽게 꽃같은 마을
이토록 눈물겹게 은어같은 동네
본 것만으로
정녕 나는 남은 한 해를 잘 살아내리
어느 꽃비 오는 날
홀연히 바다에서 올라오는 은어처럼
다시 평사리 넓은 길을 거슬러
지리산 흘러내린 물 오르고 싶다는,
서희*의 우여곡절 인생을 스치며
이 섬진강에 오고 싶다는
와서
L시인 엄마의 밥
꽃비와 비꽃 섞어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고 싶다는
유성같은 꿈 하나 가슴에 품고
잘 있어 섬진강, 속으로 안녕하며
속으로 안녕하며
돌아가는 봄날
어느, 봄날
*:호미 던져 두고 꽃구경하러 예쁜 여자들: 김용택 시인의 '봄날'(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매화꽃 보러간 줄 알그라)
*봄비가 속살거려 :윤동주의 시 '쉽게 쓰여진 시'(밤비가 속살거려)
*서희 :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밤비^
1.
비가 억수로 내립니다
이렇게 모진 비 오던
사라호 태풍 때
엄마와 할머니는
다 필요 없다, 애 하나만 살리자, 고
생후 십 개월 된 나를 업고 산을 넘었습니다
개울가 초가집이 물에 잠기고
떠내려가는 동안
산 너머 어느 나무 아래서
나는 엄마의 젖을 힘껏 빨았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비쩍 마른 몸에
들러붙어서요
군대 간 일병 아버지가
태풍 특별휴가를 나왔을 때
엄마는 서러운 빗물을 얼마나 뿌렸을까요
사라진 집터에 앉아
아기를 내려다보던
젊은 부부의
절망을 생각하는 밤
육십 년 전 젊은 부부를
초대해
위로하고 싶습니다
등을 톡톡 두드리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지독한 비가 오는 밤입니다
2.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오래 오래 시간이 흐른 지금 비로소 알겠습니다
그날 그 물살에 어머니와 내 생이 휩쓸려갔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겁니다
맏이인 나도 물론 이 땅에 없겠지만
두 살, 다섯 살, 아홉 살 터울인
세 동생은 아예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테지요
먼훗날 아내를 만나 연애할 일도
결혼해 세 아이를 낳을 일도
내겐 없었을 겁니다
동생들 슬하의
내 조카들도 마찬가지겠네요
그 밤비 오던 날
문지방에 출랑이는 격랑을 헤치고
어머니가 극적으로 탈출한 짧은 순간이
너무나 많은 걸 바꿔놓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딸과 작은딸이 낳은
내 손주들과
다시 그 애들이 커서 낳을 아기들과
그 아기들의 아기들도 없겠지요
그 아기들의 작은 발바닥과 배냇짓도
세상에는 없겠네요
생명의 신비에 잠 못 드는 밤
지독한 비가 오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