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 격동기 (제2부 후반기)
남 도 국
1969년 11월 군에서 만기 제대하여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군산경찰서에 근무하는 셋째 형님이 영어에 능통하니 월급 많고 대우 좋은 군산 비행장 경비원으로 응시해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난 형님이 마련해 놓은 초등교사 자격증을 활용하여 교사로 시작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20대 젊은 나이에 미국 공군 비행장 경비원으로 권총 차고 훈련된 독일산 셰퍼드 경비견을 몰고 활주로를 경비하는 군견경비원에 도전장을 내었다.
20명 모집에 130명의 내로라하는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휴전 후 격동기에 일자리가 없어 헤매든 많은 젊은이가 좋은 일자리 미군 부대 개 보초 모집에 몰려들었다. 경쟁이 심하여 전에 없이 필기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전에 없든 치열한 테스트를 통과하여 어렵게 합격하고 미군 부대의 막중한 경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신원조사 (사상검증)을 일 년 동안 진행하여 1972년 3월 드디어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 헌병대 군견경비원으로 사회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초저녁 반은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야간 반은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주 엿 세, 매일 다섯 시간 동안 비행장 활주로를 경비견과 함께 지킨다. 사회가 불안하고 무질서로 혼란하던 때, 밖의 불순한 사람들이 철조망을 뜯고 부대 안으로 들어와 부대 내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훔쳐다 팔아넘기는 일이 비일비재 하던 때였다.
착하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상관의 눈에 잘 띄어 1964년 비행장 정문을 지키는 첵크포인트로 이동시켜 준다. 건물 안에서 일하며 비행장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의 출입증을 내주고 나올 때는 받아 정리하고 또 방문객들의 출입과 안내도 해주는 활주로에서 모진 비바람과 싸우며 일하던 때와 비교하면 이곳은 마치 천국 같다.
친절하게 열심히 일하며 열심히 영어 단어 외우며 누가 봐도 성실한 젊은 청년으로 인증받을 수 있었다. 3년 후, 사령부 안전관 자리가 공개 채용 공고란에 뜬다. 부족하지만 간 크게 도전했다. 비행장 역사상 9급 직원을 채용한 적 없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꿈의 도전이었다. 다른 상대자는 나이도 젊고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면접 후 포기하고 현장에 열중하고 있는데 전에 없이 오랜 숙고 끝 2주 후에 학벌이 훌륭한 상대를 제치고 현장 영어에 익숙한 나를 불러 주었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사령부 건물에서 근무를 시작하는 행운아로, 그다음 해 1967년 여름에 일본 요꼬다 공군 기지로 보내주며 안전 업무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듬해 미 태평양 공군 작전 요원으로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서 실시되는 태평양 공군 합동 훈련에 참가시켜 정글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전술을 배워 익히게 하였다.
이듬해 1967년 봄, 미 국방성 초청으로 미국 콜로라도 덴버시에 자리한 미 공군 안전 전문 대학에 보내주어 8주간 안전 기초 교육을 이수하였다. 이년 후, 1969년 미국 국방성에서 다시 초청하여 콜로라도 덴버시 미 공군 안전 전문학교 군사 안전 전문가 과정의 교육을 4주간 가르쳐 주어 안전 전문가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2년 후, 1971년 가을에 또 미국 국방성 초청으로 콜로라도 덴버시 미 공군 자동차 운전 안전교육 과정을 4주간 가르쳐주어 명실공히 군사 지상 안전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 후 1976년, 1979년, 1981년, 세 차례 미국 시카고 미국 안전 협회 (NSC) 연차 안전 세미나 (워크숍)에 초청되어 안전 업무에 관한 토론, 사례 발표, 재발 방지 방법 등을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기회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일상 생활 특히 군대에서의 안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일깨워 주었다.
외국을 자주 들락거리는 시기에 나는 많은 군산시민이 미국이나 외국에 나가고 싶어 애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여권도 입국 비자도, 외국인과 혼인하면 혼인신고 방법도 몰라 많은 애를 먹는 한국 아가씨들을 만나고 이들을 돕는 사업에 도전한다. 한국해외 개발공사 전북 지사를 시청 뒤 영화동에 개설하고 가난한 아가씨들을 결혼, 여권, 비자, 혼인신고를 돕는 일을 시작하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주업인 비행장 안전 업무를. 금 토 양일은 서울 가서 여권 비자 혼이신고 등의 일을 하고 비행기로 가고 오고, 택시로 일보고 하는 일을 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비행장 안의 노사 업무가 자주 발생하여 어려운 일들이 생겨난다, 한인 직원들이 부대 물건, 설탕, 커피, 담배, 식품, 의류, 공구, 양주 등, 미군 물품을 훔쳐 나오다가 들켜 해고나 정직을 당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 미제 물건 (Made in USA)는 밖에만 나오면 불티나든 때라, 부대 커피 부대 고기로 만든 커피와 찌개는 동이 날 정도로 못 팔아 부대에서 훔쳐 나오는 물건을 전문으로 알선하는 브로커도 등장하던 시대였다. 많은 직원의 억울함을 글로 써서 제출하여 직장에서 쫓겨나는 일을 막아 주어 원치 않는 노동조합 군산지부의 수석부 지부장으로 추대되어 8년간 봉사하며 많은 어려운 조합원들을 구제하였다.
그러는 사이, 군산시청 뒤 미장원을 개업하고 잘 나가든 형수씨가 대전에서 온 신선하고 아름다운 미용사 아가씨와 결혼하라며 중매해 준다. 당시 내 몸값이 하늘 높이 올라가든 때라 시청 직원, 비행장 월급 많은 교환원, 선연리 부잣집 딸 등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내 눈에는 대전 출신 미용사가 가장 마음에 들어 몇 차례 만난 결과 결혼하기로 합의하고 양가 어른들의 동의를 받아
1965년 10월 중앙로 2가 동원 예식장서 결혼식을 올리고 영화동 미도파미장원을 형수씨로부터 인수하여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아 3년 만에 영화동 요지의 2층집을 마련하였다.
한국해외 개발공사 지사장, 미도파미장원 대표, 군산 비행장 노동조합 수석부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영화동 터줏대감으로 군산 신문사에서 “군산의 새 인물 탄생”이란 제목의 내용을 대서특필로 기재한 적도 있었다. 시청이나, 경찰서, 검찰 어디든 특이한 외교술로 군산을 활보하고 다니며 귀한 양주, 양담배, 고급안경, 불연성 잠바 등 남들이 구하지 못하는 미제 물품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구해다 전달하는 재주가 있어 남에 덧보였다.
(후반기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