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적산(白積山, 1141m)은 평창군의 용평, 대화, 진부 등 3개면의 경계에 정수리를 둔 듬직한 산이다.
험산준령의 산줄기를 이끌며 남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던 백두대간이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곁가지를 내려 남한에서 다섯 번째 높은 계방산(1577m)을 밀어 올리고 이 계방산의 1462봉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정남녘으로 약 50리를 달려 오랜 산고 끝에 이번에 소개하는 백적산을 낳게 된다.
우리 거대한 독수리가 되어 평창군 하늘 위를 훨훨 날아가 보자. 커다란 나래를 펄럭이면서 계방산에서 정남녘으로 힘차게 날아가노라면 서쪽의 평창강과 동쪽의 오대천 사이에 하늘 마루금을 긋고 있는 거대한 백적산 산줄기가 눈에 든다. 이 백적산을 통하여 금당산(1173m), 거문산(1175m), 고두산(1030m), 잠두산(1243m), 백석산(1365m), 중왕산(1376m), 남한에서 아홉 번째 높은 가리왕산(1560m), 청옥산(1256m), 남병산(1150m), 만지산(716m), 백운산(883m) 등 참으로 기라성 같은 명산들이 태어났으니 백적산이야말로 참으로 그 덕이 만대에 이어갈 명산 중의 명산이라 하겠다.
백적산은 이렇듯 소중한 산이건만 강원도 오지의 땅 평창군에서도 첩첩산골에 있어 찾는 이가 무척이나 드물었다. 다행히 작년부터 대화면의 신리와 진부면의 마평을 연결하는 군도의 확장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자작정을 지나 백적산 남쪽 자락인 소근리까지 대형버스의 출입이 가능케 되었다. 산행시간도 동쪽 능선으로 올라 서쪽 능선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이 4∼5시간만에 가능하니 앞으로 멋진 코스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대형버스 몇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소근리 주차장에 내려서면 북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목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배낭을 메고 한달음에 다가서면 1982년 마을 보호수로 지정된 느릅나무 고목이다. 높이 23미터, 최대 직경 3.9미터,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는 고목은 약 220년 동안 세찬 바람과 눈비 속에서도 묵묵히 한자리에 서서 마을을 지켜온 소근리의 충직한 터줏대감이려니. 고목 조금 남쪽의 ‘산불조심’ 팻말이 있는 곳에서 널찍한 비포장길이 동북쪽으로 이어진다.
바로 이 도로가 모릿재로 오르는 백적산 원점회귀 산행의 시발점이다. 비포장길을 느긋이 따라 오르면 ‘국유임도시설현황판’과 이정표 안내석이 선 삼거리에 이르는데 이 삼거리에서 왼쪽 오름길을 따라가면 잠시후 모릿재 마루에 도달한다. 모릿재 마루에는 ‘신리 10km, 마평 2km’라 적힌 이정표가 있고, 신리∼마평간 군도 확장포장공사 안내판이 있는데 다시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제법 미끄러운 오름길을 약 20분 올라가면 해발 800미터가 넘는 주능선에 올라서게 된다.
주능선에서는 눈부신 능선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듬직한 백적산의 정상이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하며 다가든다. 그러나 계절은 이미 봄이건만 능선에 켜켜이 쌓인 눈은 산꾼들의 걸음을 무척이나 더디게 하여 한 시간 반을 더 오르내려야 겨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엄청난 눈을 헤쳐가며 정상을 향한다. 겨우내 눈밭 속에서도 초록빛을 잃지 않은 소나무가 어느덧 윤기를 더하고, 코끝을 스쳐 가는 찬바람 속에서도 봄의 기운이 확실히 느껴지는 청산의 능선길은 참으로 상쾌하다. 눈부신 태양은 머지않아 만물이 소생하는 연초록의 봄날을 예고하듯 따사하여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오늘 취재산행에 동행하게 된 산사랑산악회(☎02-523-0367)의 손병욱 회장을 비롯하여 이 산악회 회원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청산의 모습에 매료되어 눈밭에 뒹굴기도 하고 눈 위에 반듯이 누워 둥둥 흘러가는 흰 구름을 우르러기도 하며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워낙 많은 눈이 쌓여 선두에서 애써 러셀을 하였어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은 걸음을 무척이나 더디게 하였고, 자칫 발을 잘못 딛는 날이면 허리까지 잠겨서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참으로 푸짐한 눈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설경을 만끽하며 40여명의 일행들은 한 시간 만에 해발 약 1000미터의 헬기장에 도달한다. 억새꽃 마른꽃대궁이 햇볕과 눈빛을 받아 눈이 부신 이 곳에서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른다.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비탈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낙엽 밑은 빙판이어서 아이젠을 착용하고도 쩔쩔 매며 올라야 하는 최대의 난코스였다.
모두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오르다가 한순간에 주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넘어진 사람을 보고 웃다가, 웃던 사람이 다시 미끄러지고, 한번 넘어지면 4∼5미터 주르르 되내려가는 참으로 미끄러운 빙판 오름길이다. 지금까지 700여개 산을 오른, 경험이 제법 많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널브러진 개구리처럼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반시간이나 걸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올라선다. 거대한 흙산이건만, 바위를 쌓아올려 우뚝 솟구친 정상은 다시 평평하게 흙을 다지고 서녘 끝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한 개 놓아 올라서기에 적당한 받침대를 마련하였다. 배낭을 벗어두고 사방을 둘러본다.
끝 모를 푸른 하늘 아래 첩첩이 포개 쌓은 조국의 청산을 보라. 계방산에서 비롯된 정북녘 오십리 아아한 능선길이며, 그 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다시 정남녘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잠두산, 백석산, 중왕산, 청옥산, 가리왕산…, 동녘의 박지산 발왕산 너머로 고루포기산을 지나는 백두대간이며, 노추산, 다락산, 상원산, 옥갑산…, 눈이 부신 서녘의 태기산, 덕고산, 봉복산, 운무산의 산줄기. 엄청난 청산의 파노라마를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면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뺨을 흘러내린다. 그 누가 말했던가.
“산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조국사랑이라고.” 영원히 우리 겨레의 보금자리로 남아 배달겨레의 영광된 삶을 지켜볼 저 조국의 눈부신 청산들이여. 정상 북녘 능선에는 엄청난 너덜지대가 있건만 첩첩 눈이 쌓여 볼 수가 없었으니 아쉬움을 남기고 산을 내린다. 몹시도 포근한 봄 날씨에 눈이 녹아 내린다. 산을 내려갈수록 실개천이 합하여 제법 봄의 서곡을 연주하며 아름답게 흐르더니 묘련사 부근에서는 폭포수처럼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소근리 외딴 농가에 들러서 최종식(71세) 어른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묘련사에 들러 두 손을 모아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기도 하고, 넓디넓은 고랭지채소밭 한가운데 우뚝 선 또 한 그루의 당고목(느릅나무)을 사진으로 갈무리해가며 천천히 천천히 산을 내려 들머리의 보호수에 도달한다.
선바위(남근석)가 옆에 자리한 느릅나무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녹이 슨 채 쓰러져 누운 보호수 안내판이며 축대 밑으로 제법 쌓인 쓰레기 봉지 등이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수백년 동안 조국을 지켜온 거룩한 고목에게 우리들의 대접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신3리 자연보호회 회원들이시여, 산꾼들이시여, 오늘을 살아가는 배달 겨레여, 우리의 자랑스런 후손들이 영원히 삶을 이어갈 거룩한 조국의 산하를 부디 아끼고 깨끗하게 사용하여 주시길 옷깃을 여미고 두손 모아 간절히 비옵나니. <글·김은남 사진·장병희 기자> |
첫댓글 처음 접하는 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