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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近代化(근대화)와 身分上昇(신분상승)-f
내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新聞(신문)을 보실까 그림을 그리실까
湖畔(호반)의 bench-벤치로 가봐야겠네
내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가름한 얼굴일까 도톰한 얼굴일까
湖畔(호반)의 bench-벤치-로 가봐야겠네
내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하는 님일까 만나보고 싶네
會社(회사)엘 다니실까 學校(학교)엘 나가실까
湖畔(호반)의 bench-벤치-로 가봐야겠네-----------------------------------------------------------이보라사 황문평곡 권혜경, 강수향노래<湖畔(호반)의 bench-벤치-.
學士歌手(학사가수) 김상희의<대머리 總角(총각)>亦是(역시) 八時(시)에 電車(전차)를 타고 通勤(통근)길에 나서는 會社員(회사원)의 日常(일상)을 그렸습니다
여덟시 通勤(통근)길에 대머리總角(총각)
오늘도 만나려나 떨리는 마음
시원한 대머리에 나이가 들어
행여나 장가갔나 근심 하였죠
여덟시 通勤(통근)길에 대머리 總角(총각)
來日(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
無心(무심)코 그를따라 타고본 電車(전차)
오가는 눈총속에 싹트는 사랑
빨갛게 젖은얼굴 부끄러움에
處女(처녀)맘 아는듯이 답하는 微笑(미소)
여덟시 通勤(통근)길에 대머리 總角(총각)
來日(내일)도 만나려나 기다려지네----------------------------------------------------------------------------진원사 정민섭곡 김상희노래<대머리 總角(총각)>
1960년대후반 개봉된영화<단벌 紳士(신사)>의 主題歌(주제가)도 단벌옷에 necktie-넥타이-를 매고 出勤(출근)하는 老總角(노총각) salary man-샐러리맨-을 노래하고 있읍니다
단벌紳士(신사) 우리愛人(애인) 서른한살 老總角(노총각)님
단벌옷에 necktie-넥타이-두개 언제나 변함없죠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眞實(진실)해
주머니가 텅텅비어 date-데이트-는 못해도
단벌紳士(신사) 老總角(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
단벌紳士(신사) 우리 愛人(애인)은 서른한살
단벌구두 다떨어져도 언제나 변함없죠
멋이야 없지만 마음만은 믿어워
흔해빠진 映畵管(영화관)에 구경한번 못해도
단벌紳士(신사) 老總角(노총각)님 당신을 사랑해요--------------------------------------------------------------------------------김문응사 정민섭곡 김상희노래<딘벌 紳士(신사)>
1303—近代化(근대화)및 身分上昇(신분상승)-g
한편 洗練(세련) 된 都市女子(도시여자)의 雰圍氣(분위기)를 演出(연출)하기위하여 無分別(무분별)한 外來語(외래어)로 包裝(포장)된 노래들도 속속 登場(등장)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經濟開發(경제개발)의 都市集中(도시집중)으로 都市(도시), 農村(농촌)의 貧富格差(빈부격차)가 날로 深化(심화)되어 불만이 쌓여가자 이를 숨기기위하여 이런노래가 필요해 쿠테타정부서
創作(창작)을 强要(강요)했으니깐요
최희준의<우리 愛人(애인) old miss-올드미스->은 題目(제목)부터 外來語(외래어)를 濫用(남용)하고 있습니다
우리愛人(애인)은 old miss-올드미스- hysteria-히스테리-가 이만저만
Date-데이트-에 좀 늦게가면 하루종일 말도안해 what should I do
우리愛人(애인)은 old miss-올드미스- 강짜 새암이 이만 저만
젊은 女子(여자)와 人事(인사)만해도 누구냐고 꼬치꼬치 oh help me
우----------우-----------라라라라 우리 愛人(애인)은 old miss-올드미스-
Service-서비스-가 이만저만 춥지않느냐 뭘먹겠느냐 털어주고 닦아주고
oh thank you 아 아 남들은 몰라요 old miss-올드미스- 우리愛人(애인)
number one-넘버원- number one-넘버원----------------------------------------------------------------------------------------------손석우사,곡 최희준노래<우리 愛人(애인)은 old miss-올드미스->
이곡은 洗練(세련) 된 都市女子(도시여자) image-이미지-를 살리기위하여 old miss-올드미스, date-데이트-, what should l do, help me-헬프미-, service서비스-, oh thank you-오탱큐-, number one-
넘버원- 등 外來語(외래어)를 誇示(과시)하듯 使用(사용)하고 있습니다
西歐(서구)의 美人(미인) 雰圍氣(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한 外來語戰略(외래어전략) 인듯하나 역겨움만 줄뿐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 가요가 華麗(화려)한 近代都市風景(근대도시풍경)만 노래한 것은 결코아닙니다
三角地 rotary-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젖어 한숨짖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三角 地(삼각지) ----------------------------------------------------------- 이인선작사, 배상태작곡, 김오성노래 배호 remake<돌아가는 三角紙(삼각지)>
서울 뒷골목의 음울한 雰圍氣(분위기), 비오는 밤거리의 悲哀感(비애감) 들 都市(도시)의 어두운 內面(내면)을 그려내고 있고 이것이 眞情(진정) 1960년대 平凡(평범)한 貌襲(모습)이었습니다
軍府(군부)에 의한 쿠테타에의하여 國民(국민)의 主權(주권)을 잃어버린 時代(시대)에 疏外(소외)된 부류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生氣(생기)잃은 日常(일상)이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三角地 (삼각지) 그곳에 비가 내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나이가 悲哀感(비애감)에 젖어있습니다
이것이 平凡(평범)한 市民(시민)들의 그時期(시기) 꿈을잃은 모습입니다
이노래 에 elegy voice-엘레지보이스- 배호의 목소리로 불려지는”잃어버림” “서글픔” 같은 情緖(정서)들은 그간 誇張(과장)된 서울 讚美歌(찬미가)에 밀려나있던 그時期(시기) 實在感情(실재감정)
들입니다
쿠테타 政府立場(-정부입장)에서 보면 否定的(부정적)이고 悲劇的(비극적)인pathos-비애감- 입니다
이런 悲哀感(비애감)은 배호의 또다른 힛트송 <안개낀 奬忠壇公園(장충단공원) <비나리는 明洞(명동)>등에서도 反復(반복)됩니다
안개낀 奬忠壇公園(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落葉松(낙엽송) 古木(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자난날 이자리에 새긴 그이름
뚜렷이 남은 이글씨 다시한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奬忠壇公園(장충단공원)
비탈진 산길을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事緣(사연)에 가슴을 움켜쥐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사람이 남긴 발자취
落葉(낙엽)만 쌓여있는데 외로움을 달래가면서
돌아서는 奬忠壇公園(장충단공원)--------------------------------------------------------------------------------------최치수사 배상태곡 배호노래<안개낀 奬忠壇公園(장충단공원)
1304--近代化(근대화) 및 身分上昇(신분상승)-h
비내리는 明洞(명동)거리 잊을 수 없는 그사람
사나이 두뺨을 흠뻑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너를 사랑했다 이 瞬間(순간)까지 나는너를
믿었다 잊지봇하고 사나이 가슴속에 비만내린다
비내리는 明洞(명동)거리 사랑에 취해울던밤
뜨거운 두뺨을 흠뻑적시고 울면서 떠난 사람아
나는너를 떠났어도 이 瞬間(순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해 잊을수없다 외로운 가슴속에 비만내린다-----------------------------------------------------백영호사,곡 배호노래<비내리는 明洞(명동)>
“비내리는 明洞(명동)”은 서울의 繁華街(번화가)인 명동의 憂愁(우수)를 노래한 先輩歌手(선배가수) 玄仁(현인)의<暑鬱夜曲(서울야곡)>의 變奏曲(변주곡)일수있습니다
이러한 都市的感性(도시적감성)에 기초한 憂愁(우수)와 悲哀感(비애감)은 都市化(도시화), 近代化(근대화)의 또다른얼굴 좀더이야기해서 無分別(무분별)하고 國民(국민)의 同意(동의)없는
一方的(일방적)인 經濟開發(경제개발)로 인한 後遺症(후유증)인 어두운 暗影(암영)을 赤裸裸(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읍니다
“----모든것에는 빛과그림자가 있듯이 都市化(도시화)에도 빛만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는 글이보입니다
그말이 眞心(진심)에서 나온 글이라 해도 “빛보다는 그림자가 더욱켰다”는게 問題(문제)인 것입니다
---허지만 이러한 悲哀(비애)와 憂愁(우수)마져도 그것이 세련된 都市的感受性(도시적감수성)이라는 側面(측면)에서 볼 때 都市禮讚歌(도시예찬가)의 範疇(범주)에 包含(포함)시킬수 있을것이다—
-“라는 一般大衆(이반대중) 의 生角(생각)과 正反對(정반대)의 ---쿠테타정부 代辯人(대변인) 같은글이보입니다
“---슬픔과 孤獨(고독)과 悲哀(비애)도 감미로운 都市的感受性(도시적감수성)에 녹아있기때문이다_----“ 라는는 世上(세상)을 오로지 自己爲主(자기위주)로 편히도살고있는 작금의 어떤
部類(부류)의 生角(생각)을 말하는 글도있습니다
1960년대 産業化(산업화), 都市化政策(도시화정책)에 副應(부응)하는 서울讚揚(찬양) 都市讚美(도시찬미)의 노래들은 마치 人心(인심)쓰듯 自然(자연)스레 都市(도시)에사는 庶民(서민)들의
꿈에대해서도 關心(관심)을 보였다는 글이보입니다
희망찬 서울이어야 했으니깐 혜택받은 사람들과 함께하자고 하지는 않드니 마지못해 그곳에사는 사람들도 希望(희망)과 꿈을 가져야 한다
힘들고 고달퍼면 그고달픔을 함께해서 그짐을 減(감)해주면 될것인데 겨우 한다는 소리가 참고견디면 좋은 世上(세상)이 올것이라는 그저 말로만의 希望(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希望(희망)이 거의 이루기 不可能(불가능)한 身分上昇(신분상승) 의 慾望(욕망)을 推動(추동)하는 大衆(대중)들의 꿈으로 表現(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와핫하하하하하 나는곰이다
미련하다 못났다 골려도좋다
재주는없어도 할짓은 다한다
泰山(태산)이 높다해도 못오를게 무어냐
험한길 자빠져도 웃으면서 일어나
자빠져서 코를 다쳐도 울지 않겠다
山(산)만보고 올라가는 나는 곰이다--------------------------------------------------------------------추식사 이봉조곡 최희준노래<나는 곰이다>
上記歌謠(상기가요) 최희준이 부른<나는 곰이다>는 泰山(태산)처럼 높은 人生(인생)길, 아무리 험해도 오르고 올라 마침내 頂上(정상)을 征服(정복)하겠다는 信念(신념)과 鬪志(투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르다보면 험한길도 있어 자빠지고 코를 다쳐도 다시 일어나 人生(인생)길을 헤쳐가겠다는 삶의 意志(의지)를 노래 하고있습니다
이노래의 主人公(주인공)인 “곰”은 1960년대를 사는 사람들을 代辯(대변)하는 象徵的(상징적)인 名稱(명칭)입니다
모두가 한마리 곰이되어 希望(희망)과 信念(신념)을갖고 거친 人生(인생)길을 헤쳐나가자는 覺悟(각오)를 다짐하고 있읍니다
1305—近代化(근대화)와 身分上昇(신분상승)-i
이화자 선우일선, 황정자의 대를이는 新民謠歌手(신민요가수) 김세레나가 부른<짚세기 신고왔네>는”기왕에 만났으니 잘 살아보자구요”라고 希望(희망)을 노래하고있고 김승호주연의 映畵(영화)
主題歌(주제가) <아빠의 靑春(청춘)>은”나에게도 아직은 靑春(청춘)이 있으니 wonderful-원더풀- wonderful-원더풀-아빠의 靑春(청춘) bravo-브라보- bravo-브라보- 아빠의 人生(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아래저래 情(정)이들면 호박꽃도 꼬칭랑께
緣分(연분)이 따로있나 짝이맞으면 緣分(연분)이지
요모조모 뜯어보면 쓸만한데 있더란다
이왕에 만났으니 잘살아 보자구요 예~
사랑이 별거더냐 지켜봐야 알것이요
요래저래 눈에들면 그럭저럭 살겠더라
지지고 볶아본들 만났으면 별수없어
天下一色(천하일색) 楊貴妃(양귀비)도
시들어니 그만이더라 기왕에 만났으니
잘살아 보자구요 예~----------------------------------------------------------------------------유호사 최창권곡 김세레나노래<짚세기 신고왔네>
이 世上(세상)의 父母(부모)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幸福(행복)하라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朴令監(박영감)인데 노랭이라 비웃지마라
나에게도 아직까지 靑春(청춘)이있다 hey-헤이-
Wonderful-원더풀- wonderful-원더풀- 아빠의 靑春(청춘)
Bravo-브라보- bravo-브라보- 아빠의 靑春(청춘)-----------------후략--------------------------------------반야월사 손목인곡 오기택노래<아빠의 靑春(청춘)>
앞의<나는 곰이다>와<짚세기 신고왔네>는 tv-drama-텔레비전 드라마-主題歌(주제가)인바 드라마 主題(주제)였던 希望(희망)찬 人生(인생) 樂觀的未來(낙관적미래)를 表現(표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獨裁政權(독재정권)의 입맛에 맞을테니깐요
이러한 雰圍氣(분위기)는 都市(도시)의 疏外(소외)되고 落後(낙후)될수밖에 없었던 庶民階層(서민계층)의 거의 不可能(불가능)한 身分上昇(신분상승)을 꿈꾸는 노래로 表現(표현)되었습니다
빙글빙글 도는 倚子(의자) 回轉椅子(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있나 앉으면 主人(주인)인데
사람없어 비워둔 倚子(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
아~아~ 억울하면 出世(출세)하라 出世(출세)를 하라
돌아가는 倚子(의자)에 回轉椅子(회전의자)에
課長(과장)이 따로있나 앉으면 課長(과장)인데
올때마다 앉을자리 비어 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
아`아! 억울해서 出世(출세)했다 出世(출세)를 했다---------------------------------------------------------------신봉승사 하기송곡 김용만노래<回轉椅子(회전의자)..
너무 有名(유명)한 諷刺歌謠(풍자가요) 回轉椅子(회전의자)입니다
回轉椅子(회전의자)는 社長(사장)이나 높은지위에있는 사람들이 앉을수있는 倚子(의자)의 象徵(상징)입니다
곧 回轉椅子(회전의자)는 會社員(회사원)들이 꿈꾸는 出世(출세)의 表象(표상)이요 人生(인생)의 目標(목표)일 것입니다
그回轉椅子(회전의자)에 앉기위하여 主人公(주인공)은”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밟아 버렸던”것입니다
回轉椅子(회전의자)가 象徵(상징)하는건 “빙빙도는 倚子(의자)”인것이니 人生(인생)도 돌고도는 것일테고 노력하면 회전의자 가 빙빙돌듯이 내인생도 돌고돌아 회전의자의 임자가 될것이라는 거의
不可能(불가능)한줄 알지만 身分上昇(신분상승)을 꿈꾸기라도 하는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現實(현실)에서는 꿈이나꾸는 身分上昇(신분상승)이 노래에서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아! 억울해서 出世(출세)를 했다 出世(출세)를 했다” ”잃어버린 사랑도찾고 밟아버린 젊음도 즐길수있다”고 하고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表現(표현)을 해야 音盤出盤(음반출반) 을위한 審議(심의)에서 通過(통과)할수 있었겠지요
1306—近代化(근대화)와 身分上昇(신분상승)-j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불나비> <쾌지나칭칭> 飜案曲(번안곡) <聖者(성자)의 行進(행진)><해뜨는 집>등으로 有名(유명)한 김상국도 이러한 不可能(불가능)의 身分上昇(신분상승)을 비꼬는
가요<쥐구멍에도 볕들날있다>을 發表(발표)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쥐구명에 볕들날이 오기 힘든걸 뻔히 알지만 캄캄한 쥐구멍에 볕들날이 오듯이 신분상승의 꿈을 실현할날이 반드시 올것이라는 희망을 노래하고있습니다
이는 결국 實現不可能(실현불가능)한 일을 可能(가능)한것처럼 創作(창작)하기를 强要(강요)하는 부류들에게 同意(동의)하는듯한 노래를 創作(창작)해주며 이를 자기편 이라고믿고 심의를 내준 자들을 諷刺(풍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만담가 산불출이 創氏改名(창씨개명)을 强要(강요)하자 에하라 노하라 로 지은 心情(심정)과같다 할것입니다
돈없다 괄세마오 無情(무정)한 아가씨
캄캄한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소
모를건 사람의 八字(팔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쌀쌀할건 없지 않겠소
돈이란 돌고돌아 없다가도 있는 것
世上(세상)일 그뉘라서 알수있겠소
꽃이란 시들면 아무 소용없는데
무정한 아가씨여 괄세를 마오---------------------------------------------------------------------------전우사, 김인배곡 김상국노래<쥐구멍에도 볕들날있다>
이 時期(시기) 靑春star-청춘스타- singer-가수-남진도 kbs-tv 連續劇主題歌(연속극주제가)로 <사람나고 돈났지>를 발표하며 이러한 노래흐름에 합류했습니다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이 났다더냐
급하면 돌아가란 말이있듯이 富貴榮華(부귀영화)
좋다지만 덤벼선 안돼 돈이란 돌고돌아 돌아가다가
누구나 한번쯤은 잡는다고 하지만 허겁지겁 덤비다는
코만 깨지고 잡았다고 까불다는 사그러진다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이 났다더냐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이 났다더냐
돈이란 쓰는맛에 돈이라는데 무슨수로 벌었는지
알수없지만 돈이란 무서웁다 무서웁다고
죽기를 기를쓰고 잡고있지만 저 世上(세상)에 돌아갈 땐
빈손인 것을 人心(인심)아나 쓰다가지 벌어서 뭘해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이 났다더냐-----------------------------------------------------------------이성재사,백영호곡 남진노래<사람나고 돈났지>
이곡 亦是(역시)도 “돈이란 돌고돌아 돌아가다가 누구나 한번쯤은 잡는다”는 이루어지기 힘든 希望(희망)을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애써 自己慰勞(자기위로)를 自己催眠(자기최면)을 걸고 있을뿐입니다
하지만”저세상에 돌아갈땐 빈손인 것”이니 돈보다 사람自體(자체)를 于先生角(우선생각)하라고 一針(일침)을 놓고있습니다
이처럼 希望(희망)을잃은 1960년대 가요들은 庶民(서민)들의 한낱헛된 身分上昇(신분상승) 慾望(욕망)을 濾過(여과)없이 直說的(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있으나 곧 금지가요로 묶여버리고 맙니다
그시기 엉터리정부의 엉터리 정책의 後遺症(후유증)으로 富益富(부익부)貧益貧(빈익빈) 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런 時代狀況(시대상황) 으로 拜金主義世態(배금주의세태)가 얼마나 漫然(만연)
했는지 克明(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만큼 이루기 힘들었기에 庶民(서민)들의 出世慾(출세욕) 身分上昇慾求(신분상승욕구)가 (噴出(분출)되던 時代(시대)가 1960년대였다고---그것이 쿠테타 정부의 無分別(무분별)한 産業化(산업화)
都市化(도시화)로 인한 어두운 그늘이자 反面(반면)얼굴이라 이제사 ”근대화와 신분상승”코너 집필자가 告白(고백) 하고있습니다
그러면 그간 洗練(세련) 되고 modern-모던-했던 都市(도시)라 稱讚一色(칭찬일색)이었던 主張(주장)은 어찌되나요??
1307-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a
1960년대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 흐름의 特徵(특징)중 하나가 地方色(지방색)을 바탕으로 鄕土歌謠(향토가요)와 民謠風歌謠(민요풍가요)의 流行(유행) 이었습니다
地方名(지방명)이나 地方(지방)의 民俗(민속)을 素材(소재)로 하여locality-鄕土性(향토성)-을 물씬 풍기는 鄕土謠(향토요)가 많이 불려졌고 이런 雰圍氣(분위기)에 맞춰 民謠風(민요풍)의 노래도
制作(제작)되었습니다
1930년대 流行(유행)했던 新民謠(신민요)가 다시 復活(부활) 한듯 1960년대는 新民謠(신민요)의 全盛期(전성기)였다는 主張(주장)도보입니다
그흐름 中心(중심)에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이미자의<黑山島(흑산도)아가씨> 김태희<昭陽江處女(소양강처녀)>이 있습니다
1960년대 新民謠(신민요) 흐름은 김세레나, 김부자, 최숙자, 하춘화, 최정자, 등 일련의 女歌手(여가수) 들이 中心(중심)되어 펼쳐졌읍니다
그야말로 1930년대 新民謠(신민요)에 버금갈 정도로 量産(양산)되었다는 글이 보이나 이는 잘못된 說明(설명)입니다
이러한 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신민요)가 유행을 이룬 背景(배경)과 原因(원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1960년대 時代狀況(시대상황)이 큰 要因(요인)으로 作用(작용)하였습니다
1960년대는 5,16군사쿠테타후 名分(명분)도없는”祖國近代化(조국근대화)”라는 强要(강요)된 王朝時代(왕조시대) 槪念(개념)인 統治理念(통치이념)에 맞추어 무리한 經濟開發(경제개발)이
실시되고 産業化(산업화) 都市化(도시화)가 推進(추진)되면서 必然的(필연적)으로 農村社會(농촌사회)의 疲弊化(피폐화) 招來(초래)했습니다
農産物(농산물)이 資本主義(자본주의) 流通構造(유통구조)에 編入(편입)됨으로써 價格(가격)이 暴落(폭락)하는는 현상이 招來(초래)되고 農事(농사)로 먹고살기힘든 經濟構造(경제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다 産業化(산업화)에따른 都市化(도시화)가 促進(촉진)됨으로써 농촌은 점점 疏外(소외)되는 空間(공간)이되어 自然(자연)스럽게 離農(이농), 脫鄕(탈향) 현상이 深化(심화)되어 버립니다
이에 모두가 살기힘든 농촌을 떠나 서울로 ,도시로 그야말로”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의 rush-러시-를 이루게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時代的(시대적) 흐름을 批判(비판)하는 歌謠(가요)가 發表(발표)되는건 너무나 當然(당연)한일입니다
서울가면 運(운)이터서 금송아지 생기는지 저마다
모여드는 終着(종착)의 서울驛(역) 목화따던 꽃분이도
斷髮(단발)하고 人造絹色(인조견색) 치마끌며 서울로만
간다네 아~希望(희망)의 서울 서울로 간다네
서울가면 鴛鴦枕(원앙침)에 정든님이 부르는지
날마다 모여드는 終着(종착)의 서울역 農事(농사)짓던
깜둥이도 中折帽(중절모)쓰고 백양담배 피워물고
서울로 간다네 아~ 꿈에본 서울 서울로 간다네
汽笛(기적)소리 울때마다 사막지가 볼때마다
만나면 헤어지는 終着(종착)의 서울驛(역) 울고웃는
눈동자 낯설은 얼굴로 손수건 흔들면서 서울로 간다네
서울로 간다네-----------------------------------------------------------------------------------------------------김문응사 전오승곡 명국환노래<終着(종착)의 서울驛(역)>
그러나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이 모든걸 해결해 주지않았습니다 그곳도 먹고살기 힘들긴 마차가지였습니다
이모든는게 國民同意(국민동의)없이 軍事作戰(군사작전)듯한 쿠테타정부의 무리한 政策(정책)施行(정책시행) 後遺症(후유증)이었습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값싼 都市勞動者(도시노동자)나 日 傭勞務者(일용노무자)로 前略(전략)했고 여성들은 低價(저가)의 工場勞動者(공장노동자)로 편입되거나 食母(식모) 車掌(차장)등
마지막엔 bar-girl-바걸-로까지 職業戰線(직업전선)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結果物(결과물)인 富益富(부익부) 貧益貧(빈익빈)의 經濟不平等(경제불평등) 구조가 深化(심화)되어가고 있었으나 그누구도 이를 責任(책임)지지았습니다
이러다보니 도사는 量的(양적)으로 膨脹(팽창)하고 貧富格差(빈부격차)는 심화되면서 삶의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두고온 고향에대한 그리움과 鄕愁(향수)에젖어들고 서울살이가 힘들어지니
자연스레 고행에대한 그리움 歸鄕意識(귀향의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못살아도 내고향 잘살아도 내고향” 그리운 내고향에 대한 향수와 愛情(애정)이 時代感情(시대감정)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흐름을 배경으로 대중들의 故鄕意識(고향의식) nostelzer-노스텔져-에 呼訴(호소)하여 그들을 慰勞(위로)하는 노래들이 出現(출현)합니다
말하자면 1960년대 鄕土謠(향토요)와 新民謠(신민요)는 이러한 時代感情(시대감정)에 호소하는 慰安(위안)의노래요, 自由(자유)의노래인것입니다
1308—鄕土歌謠(향토가요)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 –b
또한가지 動機(동기)는 1960년대들어 美八軍(미팔군) show 舞臺(무대)를 통해서 들어오는 西洋音樂(서양음악)에대한 일종의 反撥意識(반발의식) 이었습니다
말하자면 鄕土謠(향토요) 新民謠(신민요)의 流行(유행)은 西洋音樂(서양음악)에대한 反動(반동)이요 反作用(반작용)으로 登場(등장)한 것입니다
解放後(해방후) 美軍駐屯(미군주둔)에 따라 急擊(급격)히 확산된 西洋音樂(서양음악)은 1950년대 춤 文化流行(문화유행)의 큰물결을 이루었으며 1960년대 미팔군쇼에 의해서 하나의 歌謠樣式(가요양식)으로 자리잡았다는 글이 보입니다
이런 西歐的(서구적)이요 外來追隨(외래추수)적인 文化現像(문화현상)에 대한 自己反省(자기반성),自我省察(자아성찰)이 이루어진것이라 할수있습니다
1930년대 韓國歌謠(한국가요)의 主流(주류)를 이루었던 新民謠(신민요)가 30년이지난 1960년대 다시 復活(부활)했다는 것은 이러한 復古趨勢(복고추세) 傳統回復(전통회복) 우리것을 지키려는
時代的雰圍氣(시대적분위기)와 맞물린 것 이라는 억지스런 主張(주장)도 보입니다
1960년대는 쿠테타정부의 軍事作戰(군사작전)하듯 强行(강행)한 無謀(무모)한 經濟開發(경제개발)로 인해 疲弊化(피폐화)된 農村(농촌)으로 인하여 都市(도시)에서의 어쩜 이룰수없는 虛荒(허황)된 꿈을안고 故鄕(고향)을 떠나는 風潮(풍조)를 통칭”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 불렀습니다
無酌定上京(상무작정경)은 1950년대 박정권과 더불어 태어나지 말양했던 私生兒政府(사생아정부) 이승만 自由黨時節(자유당시절)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걸 意識(의식)있는 사람들은 이미
感知(감지)하고 있었읍니다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의 첫 徵候(징후)는 1948년 復活(부활)된 ok-record 서 송민도가 첫취입하고 1952년 六二五空間(육이오공간)에 orient-record 서 장세정이 remake 한<故鄕草(고향초)>
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冬柏(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사람 情(정)든故鄕(고향)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잎두잎 물우에 날리면
내 故鄕(고향)에 봄은가고 서리도 찬데
이바다에 情(정)든사람 어데로 가나
전해오던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김다인사 박시춘곡 송민숙 원창 장세정 remake<故鄕草(고향초)>
故鄕(고향)에서 뽕을따던 아가씨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가 버렸읍나다
處女(처녀)들뿐만 아니라 ”이바다에서 정든사람들”도 다 서울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故鄕(고향)뒷동산에 冬柏(동백)꽃이 피고 봄이오명 찔레꽃도 곱게 피건만 어찌 故鄕(고향)에 돌아오지 않는가 라고 恨歎(한탄)하는 內容(내용)입니다
故鄕(고향)의 흙냄새조차 잊어버린게 아닌지 怨望(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앞서 여러 번 多樣(다양)한 素材(소재)에서 言及(언급)한 김정애의<앵두나무 處女(처녀)>도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 바람이 深化(심화)되었음을 告發(고발)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紹介(소개) 더 詳細(상세)한 說明(설명)은 했기에 여기서 줄입니다<종횡무진가요사 1276, 338>
<에레나가된 순희>는 이렇게 無酌定(무작정)上京(상경)을 한 시골처녀가 cabaret-girl-카바레걸-로 轉落(전락)한 모습을 보여줌은 亦是(역시) 앞서 여러 번 紹介(소개)드렸읍니다
해서 해당란을 참조바랍니다< 종횡무진가요사 1276 , 335>
<人生(인생)은나그네><마음의 自由天地(자유천지)>를 힛트시킨 방운아의<서울가야지>는 아예 題目(제목)부터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서울에대한 꿈 無酌定(무작정)上京(상경)의 慾望(욕망)이 강하단 徵表(징표)입니다
1절--가야지 가야하지 갈곳을 가야지
낯설은 他鄕(타향)에서 빛나는 幸福(행복)보다
청실홍실 아롱젖는 내자란 내 故鄕(고향)을
釜山港(부산항) 아 잘있거라 옥분아 잘있거라
가야지 가야하지 서울을 찾아가야지
2절-------------가야지 가야하지 한사코 가야지-------------------------후략--------------------월견초사 백영호곡 방운아노래<서울 가야지>
“가야지 가야하지 한사코 가야지” 句節(구절)에서 ”한사코 라는 單語(단어)에서 悲壯(비장)한 覺悟(각오)와 決心(결심)을 엿볼수있습니다
내가 자란 釜山港口(부산항구) 꽃피는 아름다운 故鄕(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낯설은 他官(타관)에서 幸福(행복) ”을 찾기 위함입니다
幸福(행복)을찾는 그他官(타관)이 바로 서울이라 하고있습니다
1309—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신민요)復活(부활)-c
봄이오면 그마을에 진달래피고
뒷동산에 들薔薇(장미)도 곱게 피는데
서울가는 離別(이별)길 눈물에 삼킨
돌암보고 돌아보고 울며 울며 떠나올 때
便紙(편지)하라 당부하던 삼용이는 잘있는지---------------------------------------------------------------------반야월사 김성근곡 박광자노래<서울에온 광자>
在日同抱歌手(재일동포가수) 박광자가 부른 이곡은 노래 題目(제목)의 主人公(주인공)이 광자인 것을 보면 어쩌면 노래한 박광자 自身(자신)의 노래인지 모르겠다는 글이보입니다
서울가는 離別(이별)길을 울며불며 떠나 왔건지만 두고온 故鄕山川(고향산천)과 親舊(친구)들이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몸은 비록 서울에와 있지만 마음은 그대로 故鄕(고향)땅에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자의 마음은 當時(당시) 無酌定(무작정) 上京(상경)을 敢行(감행)하던 젊은이들과 또 같은 心情(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노래는 無酌定(무작정) 上京(상경)을 한 모든 광자에게 慰安(위안)과 慰勞(위로)의 노래가 되길 바랬을 것입니다
決論的(결론적)으로을 그시기 형편없는 執權者(집권자)들의 형편없는 政策(정책)으로 인하여 無酌定(무작정)上京(상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광자가 많이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Queen of popular song-歌謠女王(가요여왕)- 이미자가 外國公演(외국공연)서 막돌아와 작곡가 박춘석의 呼出(호출)로 金浦空港(김포공항)서 바로 錄音室(녹음실)로 直行(직행) 연습도없이 더구나
無理(무리)한 公演(공연)으로 목청컨디션이 最下狀態(최하상태)서 취임을 敢行(감행)했던 가요로 결국 再吹入(재취입)을 해야했던<黑山島(흑산도)아가씨>도 그당시 유행이던 서울을 그리는
섬處女(처녀)의 애틋한 心思(심사)를 그리는 가요입니다
남몰래 서러운 歲月(세월)은 가고
물결은 千番(천번) 萬番(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陸地(육지)를
바라보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黑山島(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黑山島(흑산도) 아가씨-----------------------------------------------------------------정두수사 박춘석곡 이미자노래<黑山島(흑산도)아가씨>
흑산도아가씨는 바다건너 저쪽의 陸地(육지),곧 서울을 그리워 합니다
하지만 바다에막혀”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가보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검게타버려 섬이름 그대로”黑山島(흑산도)”가 되어 버렸읍니다
모르긴해도 그녀가 그리는 서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터입니다
아니라면 외로운 孤島(고도), 노래에 등장하듯”귀양살이”처럼 서러운 黑山島(흑산도)를 脫出(탈출)하여) 無酌定(무작정)서울로 떠나는꿈을 꾸고있는지 모를일입니다
서울은 그처럼 希望(희망)의 都市(도시)고 꿈의 空間(공간) 이었을 것입니다
이노래는 그시기 靑瓦臺(청와대) 에서 黑山島居住者(흑산도거주자)들을 招聘(초빙)했다는 소식이 新聞紙上(신문지상)에 보도되 흑산도가 전국적 알려지자 이러한 歌謠素材(가요소재)거리에
敏感(민감)했던 박춘석이 歌謠化(가요화)했고 이러한 大衆(대중)들의 關心(관심)을 映畵界(영화계)에서까지 活用(활용)하기 이릅니다
윤정희 남진을 主人公(주인공)으로하여 映畵化(영화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310—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d
1960년대 韓國歌謠(한국가요) 大勢歌手(대세가수) 이미자의 또한곡의 힛트곡<纖마을 先生(선생)님>도 앞서 言及(언급)한”黑山島(흑산도) 아가씨” 처럼 섬에사는 處女(처녀)가 사랑한 先生(선생)님과
의 離別(이별)을 노래한 곡입니다
이곡은 서울로 떠나지말것을 呼訴(호소)하고있어------ “흑산도아가씨”가 막연한 陸地(육지)로의 憧憬(동경)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곡은 具體的(구체적)으로 先生(선생)님의 서울행을 挽留(만류)하고
있음이 다릅니다
海棠花(해당화)피고지는 섬마을에
따라 찾아온 總角先生(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純情(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이름은 總角(총각)先生(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마오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엇하려 왔는가 總角先生(총각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總角先生(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마오----------------------------------------------------------------------------------------------------이경재사 박춘석곡 이미자 노래<섬마을 先生(선생)님>
해당화 곱게피는 섬마을에 總角先生(총각선생)님이 赴任(부임)하면서 19살 섬처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純情(순정)을 바쳐”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對象(대상)인 總角先生(총각선생)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떠나야 합니다
함께 따라가고 싶지만 그럴형편은 안되고 안타깝게 떠나지 말라고 呼訴(호소)하고 있는것입니다
섬마을과 서울사이 그엄청난 空間的(공간적)거리가 섬색시와 선생님사이의 心理的(심리적)거리로 나타나면서 悲哀感(비애감)은 高調(고조)됩니다
1960년대 靑春star-청춘스타- 남진이 불러 크게힛트한<가슴 아프게>도 “섬 image-이미지-를 통해서 陸地(육지)에대한 그리움을 절절이 노래하고있다’는 글이 보입니다
당신과 나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離別(이별)만은 없었을것을
해저문 埠頭(부두)에서 떠나가는 連絡船(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운다
당신과 나사이에 連絡船(연락선)이 없었다면
날두고 떠나지는 않았을것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운다--------------------------------------------------------------------------------------정두수사, 박춘석곡 남진노래<가슴 아프게>
이들 노래들<黑山島(흑산도)아가씨><섬마을先生(선생)님><가슴아프게>은 다 “섬과 서울사이의 거리”를 노래하고있다는 共通點(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노래에서 섬은 疏外(소외)된 地域(지역)으로 <黑山島(흑산도)아가씨> 歌詞(가사)에서 처럼”귀양살이” 의 空間(공간)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그에비해 서울은 꿈과 希望(희망), 機會(기회)와 幸福(행복)의 空間(공간)으로 設定(설정)됩니다
말하자면 섬은 切望(절망), 敗北(패배), 落伍(낙오)의 心理的空間(심리적공간)이고 서울은 希望(희망), 幸福(행복)의 空間(공간)인 것이라는 주장이 보입니다
정말 이 主張(주장)이 說得力(설득력)이 있나요??
1311—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신민요)復活(부활)-e
섬이라는 空間(공간)이주는 地理的(지리적) 距離感(거리감) 斷絶(단절)과 疏外感(소외감)이 無酌定(무작정) 上京(상경)의 心理(심리)의 衝動(충동)으로 作用(작용)하고 있는것입니다
이러한 孤節感(고절감), 疏外感(소외감)을 極大化(극대화)시키기 위하여 陸地(육지)에 뚝떨어진 섬을 노래의 舞臺(무대)로 設定(설정) 했던것입니다
외로운섬은 다순한 疏外感(소외감), 孤獨感(고독감)이 아니라 挫折感(좌절감),敗北感(패배감)의 象徵(상징)이요 表象(표상)입니다
이처럼 서울과 地方(지방)의 心理的(심리적)距離(거리), 經濟的(경제적)距離(거리)가 1960년대 社會的空間意識(사회적공간의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입니다
같은 主題(주제)<섬과 서울사이의 距離(거리)>의 變奏曲(변주곡)으로 김상희가 부른<蔚山(울산) 큰얘기>가 있습니다
내이름은 慶尙道(경상도) 蔚山(울산)큰얘기
상냥하고 복스런 蔚山(울산)큰얘기
서울간 삼돌이가 便紙(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蔚山(울산)이라 큰얘기 제일좋테나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내이름은 慶尙道(경상도) 蔚山(울산) 큰얘기
多情(다정)하고 純直(순직)한 蔚山(울산)큰얘기
서울간 삼돌이가 便紙(편지)를 보냈는데
成功(성공)할날 손꼽아 기다리어 준다면
좋은 선물 한아름 안고온대나
그래서 삼돌이가 第一(제일) 좋더라-----------------------------------------------------------------------------탁소연사 나화랑곡 김상희노래<蔚山(울산)큰얘기>
蔚山(울산)큰얘기와 사랑을 나누던 삼돌이가 서울로 떠났습니다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蔚山(울산)큰얘기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約束(약속)을 다짐합니다
이노래에서도 비록 섬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漁村(어촌)인 蔚山(울산)과 서울사이의 地理的空間(지리적공간)을 設定(설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蔚山(울산)이 大都市(대도시)가 되었지만 이노래가 발표된 1960년대 중반은 자그마한 漁村(어촌)에 不過(불과)했습니다
비록 두사람은 서로믿고 사랑하는 사이로 葛藤(갈등)과 슬픔은 없지만 分明(분명) 서울사이의 乖離感(괴리감)이 低邊(저변)에 깔려있다고 볼수있습니다
노래속에서 삼돌이가 上京(상경)을 한 것은 蔚山(울산)이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고”成功(성공)하면 좋은 선물 한아름 안고온다”고 約束(약속)했던 것입니다
蔚山(울산)은 家難(가난)한 마을 落後(낙후)된 空間(공간)이지만 서울은 成功(성공)이 保障(보장) 된 希望(희망)의 都市(도시)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사는 아가씨들은 모두 어여쁘다는 歌詞內容(가사내용)도 이러한 無意識(무의식)이 反映(반영)된것입니다
서울거주 아가씨들은 다 세련되고 멋쟁이이라는 생각이 相對的(상대적)으로 地方(지방)의 疏外感(소외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傾向(경향)과 다르게 故鄕(고향)마을의 人情(인정)과 風光(풍광),아름다움을 노래한곡도 많이 존재함을 알아야합니다
무작적상경의 心理的(심리적) 乖離感(괴리감)이 아니라 地方色(지방색)을 바탕으로 鄕愁(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들이 바로그것입니다
이미자의 수많은 노래중<西歸浦(서귀포)바닷가><春川宅(춘천댁) 沙工(사공)>같은노래가 있습니다
“西歸浦(서귀포)바닷가”는 海棠花(해당화)가 곱게피고 달빛실은 돛단배가 떠다니며 沙工(사공)의 뱃노래가 들리는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노래에는 離別(이별)의 슬픔도 서울에대한 그리움도 전혀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波濤(파도)가 밀려오는 西歸浦(서귀포)七十里(칠십리)
소라따던 비바리는 어디로가고 해저문 바다위엔
물새가 운다 돛단배 달빛싣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어디로가나 구성지게 들려오는 뱃노래 물결에
꺼져가네
그리운 남쪽바다 西歸浦(서귀포)七十里(칠십리)
海棠花(해당화)는 피고지고 몇해나갔나
아득한 水平線(수평선)엔 노을이 곱다
돛단배 달빛싣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어디로가나 구성지게 들려오는 뱃노래
물결에 꺼져가네-------------------------------------------------------------------------------------------------------정두수사 박춘석곡 이미자노래<西歸浦(서귀포) 바닷가>
1312—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신민요)復活(부활)-f
<春川宅(춘천댁) 沙工(사공)>亦是(역시) 실안개 퍼지는 昭陽江(소양강), 흰구름이 定處(정처)없이 떠도는 湖水(호수)의 風光(풍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떠나간님을 그리워하는 戀情(연정)도깔려 있지만 서울간님이 成功(성공)하길 바라는비는 感情(감정)은 없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끼리 純粹(순수)한 愛情表示(애정표시)에 그칩니다
실안개 소리없이 풀리는 昭陽江(소양강)에
조각배 띄어놓고 未練(미련)을 싣고
春川宅沙工(춘천댁사공)이 꽃각시 沙工(사공)이
한사코 오마던 그님을 기다리네
떠나간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春川宅沙工(춘천댁사공)---------------------------------------------------------------------------------------------배동욱사 백영호곡 이미자노래<春川宅沙工(춘천댁사공)
김태희가 불러 어느날 갑자기 유행에 불이붙었던 가요<昭陽江處女(소양강처녀)>亦是(역시) 鄕土色(향토색)짙은 歌謠(가요)입니다
<春川宅沙工(춘천댁사공)> 처럼 昭陽江(소양강)을 背景(배경)으로 創作(창작)된 歌謠(가요)입니다
해저문 昭陽江(소양강)에 黃昏(황혼)이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杜鵑(두견)새야
열여덟 딸기같은 어린내 純情(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어쩌나
아~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昭陽江(소양강)處女(처녀)
冬柏(동백)꽃 피고지는 季節(계절)이오면
돌아와 주신다고 盟誓(맹세)하고 떠나셨조
이렇게 기다리다 멍든가슴에
떠나고 안오시면 나는 나는 어쩌냐
아~그리워서 애만태우는 昭陽江(소양강)處女(처녀)------------------------------------------------------------반야월사 이호곡 金台憙(김태희)노래<昭陽江(소양강)處女(처녀)>
昭陽江(소양강)에 살고있는 18살소녀가 떠난임을 그리워하는 戀情(연정)을 昭陽江(소양강)의 아름다운 風景(풍경)을 담아 부른 가요입니다
해저문 昭陽江(소양강)의 黃昏(황혼), 외로운 갈대밭에 우는 杜鵑(두견)새, 江邊(강변)에피는 冬柏(동백)꽃이 抒情的(서정적)인 鄕土色(향토색)을 짙게 풍겨줍니다
그야말로 昭陽江(소양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鄕土謠(향토요) 인것입니다
이노래는 1969년 發表後(발표후)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無心(무심)한歲月(세월)에 밀려서 잊혀졌다가 노래방문화가 1990년대 活性化(활성화)되며 노래방에서 자주불리는 人氣(인기)곡으로
revival-리바이벌- Hit-힛트-를 하고 이에 便乘(편승) 1993년 한서경이 remake 할때 曲(곡)을 作詞(작사)한 반야월이 3절가사를 追加(추가)하기도 합니다
달뜨는 昭陽江(소양강)에 조각배 띄어
사랑의 小夜曲(소야곡)을 불러주던 님이시여
풋가슴 언저리에 아롱진 눈물
얼룩져 번저나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가슴태우는 昭陽江處女(소양강처녀)------------------------------소양강처녀 3절--
<昭陽江(소양강)處女(처녀) > 더 詳細(상세)한 것은“종황무진가요사454” 를 참조바랍니다
1313—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g
에헤야 에헤야 에헤애 데헤야
에헤야 에헤야 에헤야 데헤야
八道江山(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찾아 百里(백리)길
八道江山(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찾아 千里(천리)길
에헤야 데헤야 우리江山(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살림 절씨구
잘살고 못사는게 八字(팔자)만은 아니더라
잘살고 못사는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八道江山(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八道江山(팔도강산) 좋을시고 살판이 났네
八道江山(팔도강산) 얼싸안고 웃음꽃을 피우네
에헤야 데헤야 너도 나도 얼씨구
에헤야 데헤야 우리모두 절씨구
잘살고 못사는게 八字(팔자)만은 아니더러
잘살고 못사는게 마믐먹기 달렸더라
줄줄이 八道江山(팔도강산) 좋구나 좋다
5,16 軍事(군사)쿠테타로 정권을잡은 獨裁政權(독재정권)이 1964년 名分(명분)없는 越南 强制派兵(월남강제파병) 등으로 국민들의 怨聲(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이를 무마하고 國政弘報(국정홍보)를
目的(목적)으로 脅迫(협박) 懷柔(회유)를 통해 김희갑,황정순, 김진규, 허장강등 當時(당시)國內(국내) top star-톱스타- 를 强制動員(강제동원)해서 國立映畵製作所(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國策(국책)映畵(영화) <八道江山(팔도강산)> 主題歌(주제가)입니다
그 當時(당시) 映畵(영화)외에는 별볼거리없던 時期(시기) 華麗(화려)한 스타의 强制出演(강제출연)으로 觀客(관객)들이 好奇心(호기심)으로 모여들자 이를 政府治績弘報(정부치적홍보) 가 效果(효과)를
거둔것으로 着角(착각) 여러편의 속편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에 재미를붙인 쿠테타정부는 이를 tv방송으로 연장 kbs-tv에서 1974년<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더상세한 내용은 추후 설명드립니다
“----- 鄕土謠(향토요) 의 隊列(대열)에는 男性(남성)歌手(가수)들도 同參(동참)했다
최희준이 부른 八道江山(팔도강산)은 同名映畵主題歌(동명영화주제가) 인데 全國八道(전국팔도)의 아름다움과 훈훈한 인정을 노래한 가요이다
鄕土色(향토색)을 바탕으로 훈훈한 인정을 노래한 humanism-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鄕土謠(향토요)였다-----“라고 노래가 만들어진 노래가 만들어진 목적은 생략하고---- 수박곁핣기식의
說明(설명)이보입니다
“低音(저음)의 魔術師(마술사)” 라는 呼稱(호칭)으로<故鄕無情(고향무정)><永登浦(영등포)의 밤>, <matross 朴(박)-마도로스 박><등대지기><비내리는 板門店(판문점)><雨中(우중)의女人(여인)>
<아빠의 靑春(청춘)>---등 여러곡을 힛트시킨 오기택의<忠淸道(충청도) 아줌마> 亦是(역시) 구수한 忠淸道(충청도) 사투리로 人情(인정)을 베푸는 鄕土色(향토색)은짙은 노래입니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放浪(방랑)의길은 먼데
忠淸道(충청도)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酒案床(주안상) 하나놓고 마주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따르면서
네설음 내설음을 엮어나 보자
서울이고 釜山(부산)이고 갈곳은 있지마는
구수한 사투리가 너무도 정답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반을 새운사람아
過去(과거)를 털어놓고 털어놓고
새로운 아침길을 걸어나 보자----------------------------------------------------------------------------------------------김운하사 서영은곡 오기택노래<忠淸道(충청도) 아줌마>
鄕土歌謠(향토가요)는 이처럼 단지 自然風物(자연풍물)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사는 맛과 훈훈한 humanism-휴머니즘-을 짙게깔고 있는 것이 特徵(특징)입니다
적어도 그當時(당시)는 시골은 서울과 다르게 人心(인심)좋고 景致(경치)좋은 살기좋은 空間(공간)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노레들은 無酌定上京(무작정상경)으로 서울살이에 지친 사람들을 慰勞(위로)하고 歸鄕意識(귀향의식)을 높하는데 作用(작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故鄕(고향)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山川(산천)과 함께 살아갈꿈을 꾸도록 誘導(유도)하고았습니다
1960년대 鄕土謠(향토요) 가 많이 불려졌다는 것은 逆說的(역설적)으로 그時代(시대)가 쿠테타 政府(정부)의 國民(국민)의 同意(동의)없이 軍事作戰(군사작전)하듯 밀어부친 都市化(도시화),
産業化(산업화)로 인하여 疲弊(피폐)해진 現實(현실)을 反映(반영)함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합니다
특히 쿠테타 軍府時節鄕愁(군부시절향수)에 젖어있는 一 部人士(일부인사) 들에게 (覺醒(각성))과 反省(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1314—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h
이러한 鄕土謠(향토요)와 함께 民謠風(민요풍)의 노래도 大流行(대유행)을탔다----는 글이 보이나 이시기 新民謠(신민요)는 大衆(대중)들로부터 잊혀져가는 genre-장르-였을뿐입니다
마치 1930년대 新民謠(신민요)가 復活(부활)한듯 많은가수들이 新民謠(신민요) 隊列(대열)에 同參(동참)헀다----고 하나 잘못된 설명입니다
굳이 新民謠(신민요) 吹入歌手(취입가수)를 紹介(소개)해보면 이미자, 황정자, 김세레나, 최숙자, 조미미, 하춘화등이 그主役(주역)이라 할수있습니다
이들노래는 대체로 3방향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新民謠創作(신민요창작)의 가장흔한 事例(사례)로 傳統民謠(전통민요)를 編曲(편곡)한것입니다
또하나는 새롭게 創作(창작) 한 民謠(민요)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民謠風(민요풍)이 加味(가미)된 trot-트로트-입니다
이들 歌手外(가수외)에 김부해, 서영은, 형석기, 고봉산등의 作曲家(작곡가)들이 민요의 remake 에 가담하면서 新民謠(신민요)는 더욱 活氣(활기)를 띠었다는 글이 보입니다
解放後(해방후) 新民謠(신민요)의 터전을 닦은 歌手(가수)는 황정자였습니다
그녀는1948년<옛郎君(낭군) >을 시작으로 1940년대후반 1940년 okeh-record 서 조명암사,박시춘곡,이화자가 原唱(원창) 한<살랑春風(춘풍)>, 1940년 okeh-record 김용호사 박시춘곡
이난영 원창<船夫(선부)의아내>,작곡가 박시춘이 제주도 육군 제훈련소 軍藝大長(군예대장) 在職時節(재직시절) 創作(창작)한 <三多島消息(삼다도소식)>등을 비롯하여 模倣(모방)의
達人(달인) 한복남이 日帝强占期(일재강점기) 이화자가 그녀의 마지막 힛트곡으로부른
조명암사 박시춘곡<牧丹江(목단강) 便紙(편지)>를 몽땅베껴서 만든 <處女(처녀)뱃沙工(사공)>, <오동동 打令(타령)>등으로 新民謠歌手(신민요가수)의 立地(입지)를 굳힌후<봄바람 임바람>
<물긷는 處女(처녀)><물벼락아가씨><藥山(약산)진달래><老處女(노처녀)의봄> <저무는 國際市場(국제시장)> -------1954년 9월25일자 서울신문에 創立廣告(창립광고)를 낸 universal-record
첫 發賣作品(발매작품)으로<정든浦口(포구)><純情歌(순정가)>, 박춘석작곡 으로 oasis-record 서 발매가 확인되나 音源(음원) 未發屈(미발굴) 상태인<비오는 陽山道(양산도)>-----등등을 불렀고
그녀가 닦아놓은 이러한 1950년대 新民謠(신민요)의 土臺(토대)는 1960년대 新民謠(신민요)의 흐름은 있었지만 盛況(성황)을 이루는 水準(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이중에서<三多島消息(삼다도소식)>은 처음 orient-record 서 황정자씨 목소리로 발표되었으나 弘報(홍보)未備(홍보미비)등으로 힛트에 失敗(실패)하자 황금심이 1954년, 7월4일자 제1회 新譜(廣告(신보광고)를 新聞(신문)에 실은 star-record 서 remake 해서 流行(유행)시킵니다
<處女(처녀)뱃 沙工(사공)>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1943년 okeh-record 발매 징용, 징용을 勸奬(권장)하는 음반-가요극장-에 실리기도 해 親日歌謠(친일가요) 烙印(낙인)이 찍히기도 한 이화자의
<牧丹江便紙(목단강편지)>를 한복남이 편곡을해 마치 自己作曲(자기작곡)처럼 발표해 剽竊是非(표절시비) 가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洛東江(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軍人(군인)간 오라버니 消息(소식)이 오네
근얘기 沙工(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父母(부모)님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윤부길사 박시춘곡 한복남편곡 황정자노래<處女(처녀) 뱃沙工(사공)>
三多島(삼다도)라 濟州(제주)에는 돌멩이도 많은데
발부리에 걷어채는 사랑은 없다더냐
달빛이 새어드는 연자방앗간
밤새워 들려오는 콧노래가 서럽구나
응응 콧노래가 서럽구나
三多島(삼다도)라 濟州(제주)에는 아가씨도 많은데
바닷물에 씻은살결 옥같이 귀엽구나
미역을 따오리까 소라를 딸까
비바리 이 물결속에 꺼져간다
응응 물결에 꺼져가네-------------------------------------------------------------------------------------------------------유호사 박시춘곡 황정자노래<三多島消息(삼다소식)>
1315—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i
<處女(처녀)뱃 沙工(사공)>은 가수 윤향기,복희 남매의 친아버지요” one man show-원맨쇼- 로 有名(유명)하고 boogie wooge rhythm-부기우기 리듬-이 유행하기 시작할무렵<부길부길 쇼단>을
구성해 運營(운영)하기도한 윤부길이 實在(실재)로 처녀뱃사공의 이야기를 듣고 가사를 쓴것으로 군인간 오빠를 대신해 삿대를잡은 여동생의 삶을 노래한 것으로 회자되는 가요입니다
그時節(시절) 마치 運命(운명)처럼 우리민족에 따라다니는 가난을딛고 늙은신 父母(부모)님을 공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처녀뱃사공의 삶의 意志(의지)를 노래해서 많은 사람들의 共感(공감)을
사 후에 남성 duo-듀오-금과은 이 remake 하기도합니다
解放後(해방후) 1960년대 唯一(유일) 한 國樂專攻(국악전공) 正統派(정통파) 民謠歌手(민요가수)로 認定(인정)받고있는 김세레나는 일찍이 판소리명창 박초월에게 창을배우며 국악에 눈을떠
이를 바탕이 新民謠(신민요)를 부르는데 큰 힘이됩니다
그녀는 동아방송-dbs-全國巡廻(전국순회)노래자랑 프로그램인 가요백일장 에서 김부자 조미등과 함께 경연 장원을 차지 歌謠界入門(가요계입문)했는데 그무렵 서라벌대 음악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작곡가 김부해가 1939년 이병한 함석초가 서 regal-record 서 발표한 김다인사 전기현곡<溫突(夜話(온돌야화)>를 편곡해 노래가사에 등장한 가사를 차용<갑돌이와갑순이>로
題目(제목)지어서 최숙자와 duo-듀오-로 부르게한 것이 대힛트해 주목을 받습니다
이어서 <새타령> <성주풀이>등 口傳民謠(구전민요)를 편곡해부르고 이어서<까투리타령>tv연속극 주제가 <짚세기 신고왔네>등이 成功(성공)을 거두면서 일약 新民謠歌手(신민요가수)의
정상에 등극합니다
그녀는 民謠(민요)를 大衆歌謠(대중가요)로 부르는 방법의 標準(표준)을 提示(제시)한 歌手(가수)로 評價(평가)받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는 황정자<三多島消息(삼다도소식)>,<노랫가락 챠챠챠> 선우일선<朝鮮八景(조선팔경)>,김정애<닐리리 mambo-맘보-> 등을 remake 해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드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모르는척 했드래요
모른척 했더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간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안그런척 했더래요
안그런척 했더래요
갑돌이도 화가나서 장가를 갔더래요
장가간날 첫날밤에 달보고 울었더래요
갑돌이 마음도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고까짓것 했더래요
고까짓것 했더래요---------------------------------------------- --------------------------------전기현작곡, 김부해편곡 김세레나, 최숙자<갑돌이와 갑순이>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애틋한 情(정)을품고살던 두젊은이가 따로 結婚(결혼)을 하게되면서 겪는슬픔을
시골總角(총각), 處女(처녀)들의 純粹(순수)한 感情(감정)과 淳朴(순박)한 風俗(풍속)이 잘담긴 노래입니다
가수 최정자는<머슴의딸>로 debut-데뷔-하여 <草家三間(초가삼간)>< 處女(처녀)농군><一片丹心(일편단심)> <故鄕山川(고향산천)>등을불러 新民謠(신민요)에 能(능)한가수로 알려집니다
이어서<임打令(타령)><倡夫(창부)타령><梅花打令(매화타령)>등의 民謠風(민요풍)의 trot-트롯-을 連續的(연속적)으로 발표 발표 그부분 능한가수로 통하고 해서 音域(음역)의 폭이넓은
歌手(가수)로 評價(평가)받습니다
실버들 늘어진 언덕위에 집을짓고
정든님과 둘이살짝 살아가는 草家三間(초가삼간)
世上(세상)살이 無情(무정)해도 비바람 몰아쳐도 정이든 내故鄕(고향)
草家三間(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수없네
시냇물 흐르면 님의옷을 빨아널고
나물캐어 밥을짓는 정다워라 草家三間(초가삼간)
밤이되면 오손도손 호롱불 밝혀놓고 살아온 내 故鄕(고향)
草家三間(초가삼간) 오막살이 떠날수없네-----------------------------------------------------------------------------------------------------황우루사,곡 최정자 노래< 草家三間(초가삼간)>
1316--j鄕土歌謠(향토가요)와 新民謠復活(신민요부활)-j
秋夕(추석)만 다가오면 가장 바빠지곤 햇던 가수 김부자는 앞서 언급한 가요백일장 프로에서 김세레나 에 이어서 차상을차지 가수의 길로 들어섰고 <江華島(강화도)아가씨>를 취입하기도 합니다
김효천감독 의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八道妓生(팔도기생)을 부르면서 民謠風歌手(민요풍가수)로 자리를 잡게됩니다
이인선작사, 허현작곡으로 oasis-record 발매 lp음반-팔도기생- 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이어서 剽竊(표절)로 판명난 이호사,곡<사랑은 이제그만>, blues-rhythm 으로 가창되는 고향사 남국인곡<당신은 철새>등을 힛트시키며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녀의 一字上書(일자상서)는 일제강점기 남인수씨의 노래와 同名異曲(이곡이)기도하고 1942년 조명암사 박시춘곡 남인수노래의<남쪽의달밤>을 편곡한 곡이기도합니다
大作曲家(대작곡가) 박시춘의 마지막 全國的(전국적) 힛트곡이라고 평가받기도합니다
어쩜 그녀의 最高(최고) hit曲(힛트곡)은<달타령>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달아 李太白(이태백)이 놀던달아
正月(정월)에 뜨는 저달은 새希望(희망)을 주는달
二月(이월)에 뜨는 저달은 동동주를 먹는달
三月(삼월)에 뜨는달은 處女(처녀)가슴을 태우는달
四月(사월)에 뜨는달은 釋迦牟尼(석가모니) 誕生(탄생)한달
달아 달아 밝은달아 李太白(이태백)이 놀던달아
五月(오월)에 뜨는 저달은 端午(단오)그네 뛰는달
六月(유월)에 뜨는 저달은 流頭(유두)밀떡 먹는달
七月(칠월)에 뜨는달은 牽牛織女(견우직녀)가 만나는달
八月(팔월)에 뜨는달은 강강수월래 뛰는달
달아 달아 밝은달아 李太白(이태백)이 놀던달아
九月(구월)에 뜨는 저달은 豊年歌(풍년가)를 부르는달
十月(십월)에 뜨는 저달은 門風紙(문풍지)를 바르는달
十一月(십일월) 뜨는달은 冬至(동지)팥죽을 먹는달
十二月(십이월)에 뜨는달은 임그리워 뜨는달-------------------------------------------------------------------------------------------신선지사 오영원곡 김부자 노래<달打令(타령)>
이곡은 조선 헌종때 정학유가 지은<農家月令歌(농가월령가)>를본따 1년 12개월의 특색을 연작형으로 노래한 가요입니다
1957년, 6월 공보처에서 새노래 普及運動(보급운동)을 벌이기위해 旣成作曲家(기성작곡가)들에게 누구나 부를수있는 健全歌謠(건전가요) 한곡씩을을 작곡할것을 委囑(위촉)했을 때
박시춘이 作曲(작곡)한 <삼천리강산 백화가 만발하구나>를 kbs 합창단과 함께부르고 송민도원창 영화주제가<카츄사의노래>를 remake 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말<개나리 處女(처녀)>로 일찍이 新民謠歌手(신민요가수)의 土臺(토대)를 닦은 최숙자역시 1960년대 代表的新民謠(대표적신민요)歌手(가수)로 활동했다는 설명이 보입니다
흔히들 그녀의 debut 曲 -데뷔곡- 을 <개나리 處女(처녀)>라 하나 1957년 oasis-record 발매 sp음반-손석우사곡<꼭두각시>로 가수데뷔를 했습니다
이면에는그有名(유명)한 손석우사,곡 박신자의 <少女(소녀)의꿈>이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소규모레코드 신성레코드서 천지엽사 김화영곡<개나리처녀>을 sp 음반으로 발표 크게힛트시킨후 후일 10인치음반으로 再發賣(재발매)) 합니다
이면은 명국환의 진성화사,곡 <(科擧(과거))길 七百里(칠백리)> 가실려있습니다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찾는 開(개)나리 處女(처녀)
종달새가 울어울어 二八靑春(이팔청춘) 봄은 가네
어허야 얼시구 타는가슴 요놈의 봄바람아
늘어진 버들가지 잡고서 歎息(탄식)해도
郎君(낭군)님 아니오고 西山(서산)에 해지네
夕陽(석양)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개나리 處女(처녀)
소쩍새 울어울어 내얼굴에 주름지네
어허야 얼시구 無情(무정)쿠나 지는해 말좀해라
城隍堂(성황당) 고개너머 소모는 저 牧童(목동)아
가는길 멀다해도 내품에 쉬려마---------------------------------------------------------------------------------------------천지엽사,김화영곡 최숙자노래<개나리 處女(처녀)>
이시기 上記題目(상기제목) 처럼 新民謠(신민요)의 復活(부활)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新民謠(신민요)만 固執(고집)하지않고 trot-트로트-과 genre的(장르적) 인 교섭이 이루어져
“民謠風(민요풍) trot-트로트-“ 登場(등장)하게 된점은 音樂(음악)의 發展的次元(발전적 차원)서는 鼓舞的(고무적)인 일이라 할수있습니다
해서 意味(의미)를 구태여 附與(부여)한다면 傳統民謠(전통민요)의 創造的繼承(창조적계승)이 稀微(희미)하게나마 이루어졌다고 할수있습니다
1317—歌謠整理(가요정리))運動(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a
政府(정부)에의한 歌謠規制(가요규제)는 이미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부터 始作(시작)되었습니다
大衆歌謠(대중가요)가 대중들에게 끼치는 政治社會的(정치사회적) 效果(효과)와 波及力(파급력)이 至大(지대)함으로 統治者(통치자)들은 자신들의 統治理念(통치이념)과 政策(정책)에 어긋나는
노래를 統制(통제)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一方的生角(일방적생각)이 이런 規制(규제)를 만든原因(원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온갖檢閱(검열)과 統制手段(통제수단)을 動員(동원)하여 植民統治(식민통치)의 方向(방향)에서 벗어난 노래들을 規制(규제)하는 (蠻行(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抗日鬪爭(항일투쟁)의 노래는물론 民族主義性向(민족주의성향) 外國風(외국풍)의노래, 風紀紊亂(풍기문란) 頹廢的(퇴폐적)인 곡까지 禁止(금지)시켰습니다
우리 民族(민족)의 노래<아리랑>은 물론이고 이애리수의<고요한 長安(장안)>은 純宗他界(순종타계)를 哀悼(애도)했다는 이유로 最初(최초)의 職業歌手(직업가수) 채규엽의<봄노래부르자>는
民族情緖(민족정서) 喚起(환기)와 煽動(선동) 이애리수의<荒城(황성)의 跡(적)>은 歷史意識鼓吹(역사의식고취) 이난영의<木浦(목포)의눈물>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想起(상기)시킨다는
罪目(죄목)으로 禁止(금지)시켰다는 기록이
보이나 物證(물증)이 不足(부족)한 說(설) 水準(수준)입니다
그럴수록 逆說的(역설적)으로 音盤販賣高(음반판매고)는 急增(급증)했습니다
<황성의적><목포의눈물>은 그시기 天文學的(천문학적) 數字(수자)인 五萬枚以上(5만매이상)의 販賣高(판매고)를 올려 일제강점기 best seller-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는 글도보입니다
販賣量(판매량)이 많으면 그만큼 大衆(대중)의 影響力(영향력)도 따라서 커지니까 그에대하여 規制(규제)가 다시 反復(반복)되었습니다
解放後(해방후)에 정부의 統制下(통제하)에서 歌謠規制(가요규제)가 가 실시된 것은 1960년대 無分別(무분별)한 倭色歌謠禁止(왜색가요금지)가 代表的(대표적)이었습니다
이미자의<冬柏(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많은 人氣曲(인기곡)들이 倭色歌謠判定(왜색가요판정)을 死藏(사장)되고 말았습니다
헤일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가슴 도려내는 아픔에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冬柏(동백)아가씨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冬柏(동백)꽃잎에 새겨진 事緣(사연)
말못할 그事緣(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冬柏(동백)아가씨
가신님은 그언제 그어느날에
외로운 冬柏(동백)꽃 찾아 오려나-----------------------------------------------------------------------------------------한산도사 백영호곡 이미자노래<冬柏(동백)아가씨>
이어서 1975년 6월 “歌謠大虐殺(가요대학살)”로 통칭되는 大規模(대규모) 歌謠禁止令(가요금지령) 이 아무 根據(근거)도없이 一方的(일방적)으로 실시됩니다
한마디로 日帝强占末期(일제강점말기) 發惡期(발악기) 가 있었듯이 朴政權末期(박정권말기) 마지막 發惡(발악)을 한것입니다
1960년대 박정희쿠테타 政權(정권)의 너무나 어리석은 判斷(판단)으로 社會的波長(사회적파장)을 몰고온 歷史的事件(역사적사건)이 韓日協定(한일협정)이었습니다
1960년 대들어서 36년간 恥辱的(치욕적)인 日帝强占(일제강점)의 歷史(역사)를 淸算(청산)하는 問題(문제)가 (急激(급격))히 (擡頭(대두))되었습니다
물론 식민지청산을 위한 한일협정회담은 1951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육이오민족상잔으로 잠시 묻혀있다가 5.18군사쿠테타와 함께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했건만 울며겨자 먹기로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無分別(무분별)하고 一方的(일방적)인
經濟開發(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추어 쿠테타정부의 陰凶(음흉)한 慾心(욕심)으로 급물살을 탑니다
쿠테타정권은 5.16군사쿠테타로 정권을 거머쥐었으나 아직 미국으로부터 承認(승인)을 받지못한 상태였고 侵略者(침략자)들로부터 眞心(진심)어린 謝過(사과)보다는 政權留止(정권유지)를 위한
經濟開發(경제개발)에 필요한 資金調達(자금조달)이 절실했음으로 韓日協定(한일협정)과 修交(수교)가 필요했기에 국민들의 同意(동의)도없이 屈辱的(굴욕적)인 協商(협상)을 해버려 두고두고
우리民族(민족)의 歷史發展(역사발전)에 걸림돌이됩니다
美國立場(미국입장)에도 한국,일본등 友邦(우방)의 安定(안정)을위해서 韓日修交(한일수교)가 절실했다는 글도보입니다
이러한 국제간 相互要求(상호요구)에 의해서 1965년 6월에 7차례회담끝에 마침내 協定調印(협정조인)이 이루어져버렸고 우린 國民(국민)들이 원하는 제대로된 사과도 보상도 받지못체 쿠테타정부의
입맛대로 韓日正常化(한일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결과 상업차관이 들어와 5개년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줄이 확보되었다는 글이보입니다
결국 36년간 국민들의 고통스런 삶의 댓가로 쿠테타정부의 정권유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사용하는 歷史(역사)에 씯지못할 罪(죄)를 저지러고 말았습니다
이에 意識(의식)있는 學生(학생)들과 野黨(야당)의 극심한 反對運動(반대운동)이 벌어지는건 더무나 當然(당연)했습니다
1964년 6월 이른바 “6.3事態(사태)” 불리는 騷擾(소요)가 발생해서 국론을 모아야할 시기 심한 國論分列懸象(국논분열현상)이 深化(심화)됩니다
學生(학생)들의 연이은 同盟休學(동맹휴학)과 투쟁, 정준하의<사상계>를 중심으로한 言論鬪爭(언론투쟁)윤보선, 장택상등의 野黨(야당) 政治人(정치인)들의 反對鬪爭(반대투쟁)이 전개됩니다
이른바 “對日屈辱外交(대일굴욕외교)” 反對運動(반대운동)이 社會的(사회적) issue-이슈-로 떠올랐습니다
1318—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b
이러한 정치 社會的潮流(사회적조류)를 타고 가요계에서도 日本歌謠殘滓(일본가요잔재))를 淸算(청산)하자는 이른바 “倭色歌謠(왜색가요) 淸算運動(청산운동)”이 일어납니다
1965년 9월 週刊韓國(주간한국)에서 불붙은 왜색가요 척결운동은 이를 반대하는 한국연예협회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社會的(사회적) issue-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政治(정치)가 아니라 大衆(대중)들이 즐겨부르는 가요에서 提起(제기)된 문제라 더욱 국민들의 關心(관심)거리로 浮刻(부각)됩니다
贊反論難(찬반논란)이 極甚(극심)해지자 정부가나서”韓國放送歌謠審議會(한국방송가요심의회)” 를 구성하고 조정에나서 결국 倭色歌謠(왜색가요) 整理(정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그시기 爆發的人氣(폭발적인기)를 누리던 이미자의<冬柏(동백)아가씨> 오기택의<永登浦(영등포)의 밤> 같은 힛트곡들이 禁止曲(금지곡) 지정은 국민들에게 큰 (衝擊(충격))을 안겨줍니다
이미자의<冬柏(동백)아가씨>은 그녀를 名歌手班列(명가수반열)에 올려놓은 곡이요 잊혀져가던 trot 歌謠(트로트가요)의 復活(부활)을 가져온 노래였던바 이곡이 倭色風(왜색풍이)라는 判定(판정)은
歌手本人(가수본인) 뿐만 아니라 歌謠fan-가요팬- 들의 놀라움과 判定眞僞(판정진위) 를두고 激烈(격렬)한 反響(반향)을가져옵니다
쿠테타 정권의 屈辱的(굴욕적)인 韓日頂上會談(정상회담)에 비판여론이 심상찮게 흘러가자 “우리도 日本(일본)을 반대한다”는 것을 明示的(명시적)으로 보여주기위해 犧牲羊(희생양)을 만든것이라는
설이 亂舞(난무)합니다
허나 정작 이미자 본인은 이곡의 힛트에 시샘이난 라이벌회사서 工作(공작)을 한것이라 主張(주장)하기도 합니다
박정권은 이곡을 禁止曲(금지곡)으로 묶어놓고는 청아와대로 이미자를 불러 이노래를 부르게하기도 했습니다
어쩄던 이미자의 노래는 그녀의 3대힛트송으로 불리던<기러기아빠><섬마을선생님>마져 판금되어 그녀의 충격은 매우컸으리라 믿어집니다
異色的(이색적) trot duo-트로트듀오- 은방울자매의 出世(출세)曲(곡) <三千浦(삼천포)아가씨>, 1960,70년대 靑春star-청춘스타- 南珍(남진)의 첫번째 힛트곡<울려고내가왔나>,도 倭色歌謠
判定(왜색가요판정)을 받아 死藏(사장)되는 悲運(비운)의 歌謠(가요)가 되고맙니다
울려고 내가왔나 누굴찾어 여기왔나
낯설은 他鄕(타향)땅에 내가 왜왔나
하늘마저 날울려 궂은비는 내리고
無情(무정)할사 옛사람아
그대찾아 千里(천리)길을 울려고 내가왔나
그누구 찾아왔나 榮山江(영산강)아 말해다오
반겨줄 그사람은 마음이 변해
아쉬웠던 내사랑아 찬서리에 시드나
그렇지만 믿고싶어
보고프면 또 오리라 울면서 찾아오리----------------------------------------------------------------------------------------김중순사 김영광곡 남진노래<울려고 내가왔나>
山(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 외로운 兄弟(형제) 길잃은 기러기
하늘엔 조각달 江(강)엔 찬바람
재너머 汽笛(기적)소리 한가로운 밤중에
마을마다 窓門(창문)마다 등불은 밝은데
엄마는 어다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아~아~우리는 외로운 兄弟(형제) 길잃은 기러기-----------------------------------------------------------------------------김중희사, 박춘석곡 이미자노래<기러기 아빠>
1319--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c
1967년경 남진의<가슴아프게>가 발표될무렵 <울려고내가왔나>를 倭色(왜색)으로 묶은 방송서는 倭色唱法(왜색창법)을 구사한다는 이유로 放送歌謠 大賞(방송가요대상)서 制外(제외)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이미자의<섬마을선생님>은 1987년, 6,29 宣言以後(선언이후)에도 剽竊歌謠(표절가요)라고 禁止曲 解除(금지곡해제) ) 에도 除外(제외)되는 受侮(수모)를 당합니다
이러한 雰圍氣(분위기)는 1970년대로 이어져<昭陽江(소양강)處女(처녀)>를 힛트시킨 김태희의<사랑하다 싫어지면>도 倭色歌謠(왜색가요)로 烙印(낙인)이 찍힙니다
사랑하다 싫어지면 떠나갈사람
이렇게 고운정만 내가슴에 남기고
아~ 가시면 어쩌나
서로좋아 만났으면 사랑인가요
서로 싫어 헤어지면 離別(이별)인가요
나는 나는 싫어 離別(이별)만은 싫어요
사랑하다 미워지면 떠나갈사람
이렇게 고운정만 내가슴에 남기고
아~가시면 어쩌나
서로좋아 만났으면 사랑인가요
서로싫어 헤어지면 離別(이별)인가요
나는 나는 싫어 離別(이별)만은 싫어요---------------------------------------------------------------------------------------------이호사, 곡 김태희노래<사랑하다 헤어지면>
倭色歌謠(왜색가요) 剔抉運動(척결운동)은 이미 1950년대중반부터 시작된 歌謠淨化運動(가요정화운동) 의 연장이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부터 韓國歌謠(한국가요)는 일본의 앤카<演歌>의 影向下(영향하)에 展開(전개)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영어로 trot-트로트-라불리는 大衆歌謠(대중가요), 流行歌(유행가)는 그기본틀이 일본앤카에서 起源(기원))한것입니다
한국의 草創期(초창기)의 大衆歌謠(대중가요)는 大部分(대부분) 日本歌謠(일본가요)의 飜案歌謠(번안가요)였고 創作歌謠(창작가요)라 해도 앤카풍의 rhythm-리듬-에 맞춘 곡이 大部分(대부분)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音盤會社(음반회사)도 대부분 日本界(일본계)였고 노래 吹入(취입)도 일본에서 해야했기에 그영향은 絶對的(절대적)일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래編曲(편곡), 伴奏(반주)가 日本作家(일본작가) 樂士(악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에 자연히 日本色(일본색) 이 反映(반영)될수밖에 없었습니다
解放後(해방후)에도 앤카의 殘滓(잔재)는 如前(여전)했고 歌手(가수)나 作曲家(작곡가), 演奏家(연주가)들도 큰변화를 試圖(시도)하지않고 그대로 過去 作曲形態(과거 작곡형태) 를 踏襲(답습)하고
있었기에 自繩自縛格(자승자박격)으로 淸算作業(청산작업)을 당해야 했습니다
主權(주권)을 되찾고 이제는 日本音盤資本(일본음반자본)를 위해서 곡을 창작하던 형태에서 탈피해 母國-모국-의 音樂(음악)을 만들어야하는 큰변화가 있었기에 歌謠界(가요계)는
主導的(주도적)으로 創作形態(창작형태)를 變化(변화)시켜야 했으나 無事安逸(무사안일)에 빠져있자 外部人(외부인)들에 의해서 淸算作業(청산작업)을 당하는 受侮(수모)를 당하는 것입니다
1956년들어 新聞紙上(신문지상)을 통하여 이문제가 社會的 issue-사회적이슈-로 浮刻(부각)됩니다
----------- hlka-서울중앙방송- 방송과장 이었던 송영호는 1956년,1월14일 東亞日報(동아일보) “國民娛樂(국민오락)과 歌謠(가요)” 에서 “過去(과거)의 流行歌(유행가)는 日本調(일본조)의
歌謠曲(가요곡) 혹은 植民地(식민지)의 壓政(압정)과 酷使(혹사)에서밀려 悲哀(비애)와 感傷(감상)을 담뿍실은 世紀末的(세기말적)인 노래다” 라고 비판하고”新興國家(신흥국가)의 늠름한
氣象(기상)을 象徵(상징)하고 民族情緖(민족정서)가 풍기며 生産意慾(생산의욕)을 昻揚(앙양)하는 建設的(건설적)인 씩씩한노래”를 불러야 할것을 强力(강력)하게 主張(주장)했다--------------
는 글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哀傷的(애상적)이고 頹廢的(퇴폐적)인<홍도야 우지마라>식의 倭色風(왜색풍)노래를 剔抉(척결)하고 希望的(희망적)이고 建設的(건설적)인 노래를 불러야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보기엔 그럴싸한 말이나 좀깊이 생각해보면--- 過去(과거)에 그런 悲哀(비애)와 感傷(감상)을 담뿍실은 世紀末的(세기말적) 노래를 부를수밖에 없었던 時代狀況(시대상황)에 대한
理解(이해)부족으로 그렇게 만든 支配層(지배층)들 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하고 “늠름한기상”—운운하는 씩씩한노래를 부르자했는데 1956년 그당시가 그런노래를 부를만한
時代狀況(시대상황)이었냐를 생각해보면 “일재강점기보다 더살기힘들다” 怨聲(원성)이 자자했던 이승만 獨裁(독재)에다 六二五(육이오)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않은 시기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大衆歌謠(대중가요)는 그 時期(시기) 時期(시기) 대중들의 가장 原初的(원초적)인 感情(감정)의 表現(표현)일진데 그러한 人間(인간)의 原初的感情(원초적감정)까지 정부가들어서
정화운운 하며 통제하는 것은 아직도 정부는 有識(유식)하고 국민들을 啓蒙(계몽)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日帝總督府(일제총독부) 視角(시각)과같아----大衆歌謠淨化(대중가요정화)는 대중들의
삶속에서 自然(자연)스레 이뤄지는 感情(감정)이지 정부가 관여할 分野(분야)가 결코아닙니다!!!
一般大衆(일반대중)들이 좋은노래 나쁜노래 정도를 구분해 들을수있는 水準(수준)이 되고도 남고 나쁜노래는 듣지않으니 自然(자연)스레 淘汰(도태)되는 것이지 강제로 淨化(정화)하려
해봤자 陰地(음지)로 숨어들뿐 이라는걸 이미 歷史(역사)속에서 體驗的(체험적)으로 알고있습니다
1320—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 과 歌謠規制(가요규제)-d
이어서 倭色歌謠(왜색가요) 에대한 反省的講演會(반성적강연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1956년 4월 서울 시공관에서 해방후 아직까지 日本俗樂音階(일본속악음계)로 구성되는 음악을 脫皮(탈피)못하고있는 실정에대한 贊反(찬반)세미나겸 啓蒙講演會型式(계몽강연회형식)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倭色歌謠排擊-왜색가요배격- 國民蹶起(국민궐기) 講演會(강연회)” 였습니다
많은 청중들 가운데는 가요인도 많이있었고 저명인사들의 강연내용에 대해선 원칙적으로는 찬성하고 공명하나 대중가요를 인하고 말살하려는 악의에 가득찬 독선적 횡포에 대해선 가요인들은
분격해 마지않는다는 것이었읍니다----라 紀錄(기록)한 作詞家(작사가) 강사랑 글도보입니다
이 講演會(강연회)에 刺戟(자극)을 받은 몇몇가요인들은 바로 대한레코드작가협회를 結成(결성) 반격에 나섭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singer 진방남으로 作詞家(작사가) 반야월로 활동한 진방남의 기록에 의하면-------
純粹音樂(순수음악)을 하는 분들이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을 깔보며 자기들은 차원높은 음악을 한다는 긍지로 당시 국제극장이던 명동 시공관 에모여 대중음악은 倭曲(왜곡)으로
미야코부시는 단조고 이나카부시는 장조라며 聲討大會(성토대회)를 벌였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倭色(왜색)에 대해 疑問(의문)과 함께 강한 反撥(반발)을 했다
한일양국은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고 언어만 다를뿐 정서는 같을진대 前後事情(전후사정) 살피지않고 얄팍한 생각으로 저속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은 말이었다
아무튼 이일이 있고나서 大衆音樂人(대중음악인)들은 (激忿(격분))하여 참을수없어 우리도 뭉쳐 우리의 길을찾고 自覺(자각)도하고 反省(반성)도하고 그들의 理論(이론)에 對抗(대항)할 것은
對抗(대항) 해야 겠다고 意見(의견)을 모았다
Oasis-record –오아시스레코드-사장 봉철의 고모부의 삼선교 그댁에서 김교성 박시춘 이재호 백년설 엄토미등 15~6명이 참석한가운데 대한레코드 작가협회의 발기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3월31일 다동에있는 universal-record-유니버살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창립총회를 열어 협회를 탄생시켰다
사단법인체로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김교성씨가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대중음악계가 반격의 기치를 올리자 순수음악인들은 언제 우리가 대중가요에 대해 무슨말을 했더냐 식으로 입을 다물고 잠잠 해졌다---------
1957년, 1월16일 마침내 이러한 운동을 실천하는 音樂放送委員會(음악방송위원회)가 구성되기 이릅니다
그리하여 1957년 6월 公報處(공보처)중심으로 새노래 普及運動(보급운동)이 전개됩니다
새노래 普及運動(보급운동)을 벌이기위하여 旣成作曲家(기성작곡가)들에게 누구나 쉽게부를수있는 健全歌謠(건전가요) 한곡씩 작곡할것을 委囑(위촉)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가요인들의 원성을 듣게되는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대중가요에 대한 심의제도가 실시됩니다>
이렇게해서 選定(선정)된 곡들이 황문평곡<꽃중의꽃>, 박시춘곡<錦繡江山(금수강산) 에 백화가 만발하구나>, 손석우곡<少女(소녀)의꿈>, 김교성곡<故鄕驛(고향역)>, 이재호곡
<故鄕(고향)에 찾아와도> 송민영곡<靑春牧場(청춘목장)>---등이었습니다
꽃중의꽃 無窮花(무궁화)꽃 三千萬(삼천만)의 가슴에
피었네 피었네 永遠(영원)히 피었네
白頭山(백두산) 상상봉에 漢拏山(한라산) 언덕위에
民族(민족)의 얼이되어 아름답게 피었네
별중의뼐 蒼空(창공)의별 三千萬(삼천만)의 가슴에
빛나네 빛나네 永遠(영원)히 빛나네
이 江山(강산) 온누리에 祖國(조국)의 하늘위에
民族(민족)의 꽃이되어 아름답게 피었네
노래하자 너도 나도 三千萬(삼천만)의 노래를
統一(통일)의 기븜이 波濤(파도)치는 아침
손잡고 달려가는 希望(희망)의 언덕위에
네 얼굴 내얼굴에 太陽(태양)처럼 빛나네----------------------------------------------------------------------------------------------------서일수사 황문평곡 서혜영 노래 始唱(시창) 꽃중의꽃>
이리하여 上記(상기)한 것처럼 選定(선정)된 곡들은 당시 서울신문에 가사와 악보를 실어서”백만인의노래”라고 발표됩니다
이런 健全歌謠(건전가요)들은 매일아침 “오늘도 明朗(명랑)하게” 라는 라디오프로그램을 통하여 널리 불려짐을 강요당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 倭色歌謠(왜색가요) 剔抉運動(척결운동)은 1950년대 延長線上(연장선상)에 있었던 제2의 歌謠淨化運動(가요정화운동) 이었다는 글이보입니다
1321—歌謠 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e
1960년대 일었던 倭色歌謠(왜색가요) 論爭(논쟁)은<주간중앙><한국일보><mbc > 등 言論機關(언론기관)을 통하여 再現(재현)되었습니다
김대현, 황병기, 박용구등 贊成派(찬성파) 와 김지평, 박춘석등의 反對派(반대파)의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해방된지 40년이지난 1980년대 와서도 倭色歌謠論爭(왜색가요논쟁)이 再現(재현)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일제강점기의 앤카의 영향과 그에대한 淸算問題(청산문제)가 얼마나 深刻(심각)했나를
反證(반증)하고 있는것입니다
倭色歌謠(왜색가요)라는 罪目(죄목)으로 禁止(금지)된 곡들은 Olympics-올림픽-을 앞둔 1987년에 한국이 모든면에 水準(수준)높은 국가임을 誇示(과시)하고 싶었던 軍府(군부)의
一時的(일시적) 解氷mood-해빙무드-에 便乘(편승)해 禁止曲解除(금지곡해제)가 善心(선심)쓰듯 이루어집니다
아무 根據(근거)없이 無差別(무차별) 묶어버렸던 禁止曲(금지곡)들이 20여년의 긴 歲月(세월)이 지난후에 빛을 보게된것입니다
1970년대는 박정희 쿠테타정권의 마지막 發惡(발악)인 維新憲法時代(유신헌법시대)에 우리국민들은 일제강점기보다 더큰 苦痛(고통)스런 삶을 해야 했습니다
1972년 아무근거도 없이 一方的(일방적)으로 公布(공포)한 維新憲法(유신헌법)은 쿠테타 政權(정권)이외는 그어느것도 認定(인정)하지않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살아야한다고 强要(강요)하는---
우리 歷史上(역사상) 가장 最惡(최악)의 (時代(시대))였습니다
박정희는 자기만이 나라를위하고 자기만이 그럴 資格(자격)이 있다는 小英雄主義(소영웅주의) 빠져 마치 王朝時代(왕조시대) 왕처럼 행동하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戰爭中(전쟁중)
敵軍(적군)대하듯 하며 국민들을 恐怖(공포)의 雰圍氣(분위기)로 몰아갔고 끝내는 스스로 終末(종말)을 향해 發惡(발악)을 하고있었습니다
政治(정치) 社會(사회) 文化(문화) 全般(전반)을 그들입맞대로 통제하는 법이었기에 季節(계절)이 겨울철이 아닌데도 세상은 꽁꽁 얼어붙었고 이러한 헌법을 誹謗(비방)하거나 違反(위반)하는
것을 막기위한 緊急措置(긴급조치)를 發表(발표) 국민들의 입과발을 묶어버려 시대는 20세기인데 국민들의 處地(처지)는 王朝時代(왕조시대) 兩班(양반)앞의 奴婢身世(노비신세)했습니다
그리하여 1970년대는 그 終末(종말)이 훤히 들어나 보이는 소위”緊急措置時代(긴급조치시대)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東亞日報(동아일보) 廣告禁止(광고금지) 休校令(휴교령)등으로 막아보려했으나 維新反對運動(유신반대운동)은 社會(사회)全般(전반)으로 擴散(확산)되었고 이를 방지하기위한
强制措置(강제조치)들이 잇달아 발표됩니다
허나 박정권은 政權維持(정권유지)의 最後堡壘(최후보루)인 民心(민심)이 그를 떠나가고 있음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民心(민심)은 天心(천심)인 것을---
바로 이무렵 마치 박정권의 이러한 恐怖政治(공포정치)를 비웃기라도 하듯”담배하며 청자 노래하면 추자”로 불리던 김추자가 신중현과 손잡고<거짓말이야>를 발표하여 維新政權(유신정권)의
心氣(심기)를 不便(불편)하게 합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그렇게도 잊었나 歲月(세월)따라 잊었나
웃음속에 만나고 눈물속에 헤어져
다시 사랑하지 않으리 그대 잊으리
그대 나를만나고 나를 버렸지 나를 버렸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신중현사,곡 김추자노래<거짓말이야>
이노래는 마치 쿠테타정부 立場(입장)에선 도둑이 제발저리듯 자기들을 비웃고 諷刺(풍자)하는듯 들렸던지”不信風潮(불신풍조))를 助長(조장)하며 國家的狀況(국가적상황)과 國民的(국민적)
氣風(기풍)에 나쁜 영향을 끼칠우려 가있다”는 국민들 그누구도 理解(이해)시키지 못하고 그들만의 一方的(일방적) 지레斟酌(짐작)으로 禁止曲(금지곡)으로 묶어버립니다
동아일보가 1974년”자유언론선언문”채택하여 維新反對運動(유신반대운동)에 나서자 광고를 싣지못하게 한 것이 “東亞日報白紙廣告事態(동아일보백지광고사태) 입니다
新聞(신문)은 sponsor-役割(스폰스역할)을 하는 廣告(광고)없이는 運營(운영)이 不可能(불가능)하기에 廣告金紙(광고금지)는 결국 新聞社(신문사)를 閉鎖(폐쇄)시키려는 措置(조치)입니다
마치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가 그랬던 것 처럼---
해서 박정희를 親日分子(친일분자)라 하는것입니다 日本陸士出身(일본육사출신) 이기도하고 만주에서 우리 獨立軍(독립군) 討伐(토벌)에 參與(참여)했다고 알려져있고---
1322-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f
이러한 强壓的(강압적)인 維新憲法(유신헌법), 緊急措置(긴급조치), 言論統制(언론통제)등의 상황에서 가요계도 결코 자유로울수 없는건 當然之事(당연지사)입니다
긴급조치는 예술계 대중가요계에도 예외없이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었습니다
대중예술, 특히 대중가요는 대중적 波及效果(파급효과)가 만만치 않기에 그에대한 방지책이 필요했을것입니다
無能(무능)하기 짝이없던 妄靈(망령)난 이승만 自由黨(자유당) 獨裁時節(독재시절) 박재홍이부른<有情千里(유정천리)>라는 노래한곡이 選擧(선거)의 版圖(판도) 政治(정치)의 地形圖(지형도)를
바꿔놓은 사실을 爲政者(위정자)들도 모를리 없었을것입니다
自由黨(자유당)의 腐敗(부패), 不正選擧(부정선거)를 “有情千里(유정천리)”에 假託(가탁)하여 諷刺(풍자)함으로써 삽시간에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었던것이니 그만큼 대중가요는 대중들의
사랑을받고 인구에 회자되는 만큼 政治社會的(정치사회적) 影響力(영향력)도 크다는걸 쿠테타정권도 감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이러한 暴壓的(폭압적) 恐怖政治(공포정치)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그결말이 항상 悲劇的(비극적)이었음을------勸力(권력)의 無常(무상)함도 미쳐 몰랐습니다
이미 그들은 獨裁政治(독재정치)의 달콤함에 强醉(강취) 해있었기에---
政治人(정치인)은 勿論(물론) 言論(언론), 學院街(학원가)에서 維新反對運動(유신반대운동)이 擴散(확산)되자 이를 統制(통제)하기위해서 自己(자기)들이 騷擾事態(소요사태)의 原因(원인)을
提供(제공)해놓고 賊反荷杖格(적반하장격)으로 마침내 박정희 쿠테타정부의 終末(종말)을 招來(초래)하고 마는 1975년 5월”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를 (公表(공표))합니다
이어서 6월 그時期(시기) 軍府(군부)의 꼭두각시 기관이었던 文化公報部(문화공보부)는 이를 근거로 具體的(구체적)인 규제책인”공연물 및 가요정화대책”을 내놓습니다
산하에”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설치하여 1968년이후 1975년까지 7년간 발표된 대중가요 2만3천여곡을 심사하여 222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합니다
그 기준은 그들의 一方的視角(일방적시각)으로 그들의 입맛대로 國家安保(국가안보)와 國民總和(국민총화)에 나쁜영향을 주는 것, 外來風潮(외래풍조)의 無分別(무분별)한 도입과모방,
敗北的(패배적)이고 自虐的(자학적)인 노래, 煽情的(선정적)이고 頹廢的(퇴폐적)인 歌謠(가요)등 이었습니다
이모든 것이 日帝(일제)가 戰況(전황)이 불리해지자 마지막 發惡(발악)을 하던 1940년대초 狀況(상황)과 너무닮아 있었음을 그들은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勸力(권력)이 이조치로 永遠(영원)할것으로 着角(착각)하여 우리역사에 가장暴力的(폭력적)이 羞恥(수치)스러운 行動(행동)을 저지러고 말았습니다
1975년, 6월부터 10월까지 3차에걸쳐 심사끝에<철새><무정한 밤배><나그네주막><사람나고돈났지><한잔에한잔사랑> 등 많은노래가 금지곡에 지정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좀더자세히 들어다보면 1차 6월21일 방송윤리위원회 이미 금지하고있던 월북작가의 흘러간노래 87곡포함<거짓말이야><철새><기러기아빠><무정한밤배> 등 포함 43곡등 130곡
2차 7월12일<한잔의추억><미인><그건너>,나그네>등 44곡 3차 10월2일에는<나그네추억><사람나고 돈났지>,한잔에 한잔사랑><꿀밤삼백석>등 48곡 등이었읍니다
사람나고 돈났지 돈나고 사람이 났다더냐
급하면 돌아가라 말이 있듯이 富貴榮華(부귀영화) 좋다지만
덤벼선 안돼 돈이란 돌고돌아 돌아가다가
누구나 한번쯤은 잡는다지만 허겁허겁 덤비다간
코만 깨지고 잡았다고 까불다간 사그러진다-----------------------------------------------------------------------------------이성재사 백영호곡 남진노래<사람나고 돈났지>
女子(여자)의 運命(운명)은 사랑이기에
이 生命(생명) 다하도록 盟誓(맹세)했건만
無情(무정)한 밤배는 내마음을 싣고
허무한 내마음을 울려만주네----------------------------------------------------------------- ----------------------------김령인작사, 홍현걸작곡 patti kim 노래<無情(무정)한 밤배>
禁止曲(금지곡)이 된 “無情(무정)한밤배”은 歌詞(가사)어디를 봐도 금지곡이 될만한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運命(운명)을걸고 사랑한 사람과의 離別(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곡입니다
이정도 내용이면 왠만한 大衆歌謠(대중가요)의 基本情緖(기본정서) 가 아닌가?
일제강점기는 나라를빼앗기고 고 희망을 찾아보기힘든 暗鬱(암울)한 시기였기에 流行(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新派(調(신파조) 流行歌(유행가)는 이보다도 심한내용이 얼마나 많았던가??
헌데 이곡이 쿠테타정부가 禁止曲(금지곡)으로 規制(규제)한 기준 세번째항 ”敗北的(패배적)이고 自虐的(자학적)인 노래”에 해당되기에 금지곡이 되었다는 주장이 보입니다
“사랑은 離別(이별)과 失戀(실연)이 基本(기본)인 것이고 그슬픔을 달래주고 慰安(위안)한 것이 大衆歌謠(대중가요)의 役割(역할)이요 義務(의무)가 아닌가
이런 노래를 금지곡으로 규제했다는 것은 사랑의 俗性(속성)대중가요의 特性(특성)을 無視(무시)한 處事(처사)로밖에 볼수없다
그저 규제를위한 규제 莫無可奈式(막무가내식) 규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라는 글이 보입니다
허나 이곡의 禁止事由(금지사유)는 剽竊(표절)이라는게 定說(정설)입니다
1323-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 g
이미자가 부른<기러기아빠>도 歌謠(가요)淨化(정화)對策(가요정화대책)의 맘에들지 않았는지 禁止曲(금지곡) 딱지를 받습니다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엄마구름 애기구름 정답게 가는데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에서 살고있나
아~아~우리는 외로운 兄弟(형제) 길잃은 기러기--------------------------------------------------------------------------하중희작사 박춘석작곡 이미자노래<기러기 아빠>
이 가요는 兄弟(형제)가 힘들게 살아가는 苦痛(고통)과 슬픔을 노래한것입니다
어쩜 이곡이 發表(발표)된時期(시기) 大部分(대부분)의 大衆(대중)들의 삶이 上記(상기)曲(상기곡) ”기러기아빠” 처럼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1960년대는 아직 六二五民族相殘(육이오민족상잔)의 後遺症(후유증)이 남아있던 時代(시대)였고 孤兒棄兒(고아, 기아)들의 問題(문제)가 社會的(사회적) 생채기로 如前(여전)히 남아있던
時節(시절) 이었습니다
이노래 亦是(역시) 그런 戰爭後遺症(전쟁후유증) 六二五(육이오) trauma-트라우마-가 깔려있는 1960년대 社會的雰圍氣(사회적분위기)를 背景(배경)으로 하고있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너무 凄凉(처량)한 悲歎調(비탄조)라는 이유로 禁止(금지)시킵니다
그것보다는 자기들이 執權(집권)하고는 世上(세상)의 實體(실체)가 까발려 지는게 무서웠겠지요
“철없는 들국화야 너를 버리고 남몰래 숨어서 눈물흘리며” 떠나는 엄마를 怨望(원망)하지말라는 이미자의<들국화> 낳은정 기른정의 갈등과 슬픔을 노래한 남진<미워도 다시한번>
<엄마찾아 삼만리 >등의 노래도 그렇습니다
누가만든 길이냐 나만이 가야할 슬픈길이냐
罪(죄)없는 들국화야 너를 버리고 남몰래 숨어서
눈물 흘리며 아~아~ 떠나는 이엄마 怨望(원망)말아라-------------------------------------------------------------------월견초사 이인권곡 이미자 노래<들菊花(국화)>
이 生命(생명) 다받쳐서 죽도록 사랑했고
純情(순정)을 다바쳐서 믿고 또믿었건만
永遠(영원)히 그사람은 사랑해선 안될사람
말없이 가는길에 미워도 다시한번
아~아~ 安寧(안녕)-------------------------------------------------------------------------------------------------------------------김진경사 이재현곡 남진노래<미워도 다시한번>
無分別(무분별)한 政策强行(정책강행)으로 인한 産業化(산업화), 都市化(도시화)의 뒷전으로 밀려난 疏外(소외)된 群像(군상)들 속에 六二五(육이오) 戰爭未亡人(전쟁미망인)과 孤兒(고아)들이 있었음을
쿠테타정권도 몰랐을이 없습니다
이러한 疏外(소외)된群像(군상)들의 가장 原初的本能(원초적본능)일수 밖에없는 哀切(애절)한 事緣(사연)조차 ”敗北的(패배적)이고 自虐的(자학적)인 노래로 규제해버렸습니다
現實(현실)은 그렇치못한데 발전적이고 밝은면만 誇張(과장)하고 어두운면은 감추려는 爲政者(위정자)들의 假飾(가식)과 僞善(위선)에 불과한 조치일뿐입니다
그밖에 배호의<영시의 離別(이별)>은 通行禁止(통행금지) 違反(위반) 한대수의<물좀주소>는 물 拷問聯想(고문연상) 김추자의<거짓말이야>는 不信感助長(불신감조장) <동백아가씨_는 왜색 일보앤카풍
노래라는 이유로 禁止(금지)됩니다
Neon-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離別(이별)앞에 너와나는 한없이 울었다
追憶(추억)만 남겨놓은 젊은날의 불장난
原點(원점)으로 돌아가는 零時(영시)처럼
사랑아 安寧(안녕)------------------------------------------------------------------------------------------------------------이철수사 배상태곡 裵湖(배호)노래<零時(영시)의 離別(이별)>
김추자의<거짓말이야>는 박정희정권이 時局(시국)이 안정되면 민간에 정권을 移讓(이양) 하겠단 약속등 국민들을 자꾸속이자 이노래가 이를 풍자하는 가요처럼 불려졌는바 사실을 꼬집은것인데
爲政者(위정자)들 눈에는 反省(반성)은커녕 不信感(불신감)을 助長(조장)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니 이 政府(정부)가 얼마나 我執(아집)과 (獨善(독선)에 찬 勸力(권력)이었나를 赤裸裸(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예입니다
1324—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h
이러한 規制(규제)의 雰圍氣(분위기)는 大衆歌謠(대중가요)뿐만 아니라 大學街(대학가)로 擴散(확산)되어 folk-포크- rock-록- 音樂(음악)까지 퍼져나갔습니다
그시기 젊은층에 사랑받던 송창식의 映畵揷入曲(영화삽입곡) <왜불러> 김민기곡<아침이슬>등이 禁止曲(금지곡)으로 묶여버렸습니다
심지어는 社會批判的(사회비판적)인 內容(내용)을 담은 外國歌謠(외국가요)까지 規制(규제)해 버리기에 이릅니다
反戰運動(반전운동)의 상징이었던 bob Dylan-밥딜런-의<blowing in the wind> joan baez-존바이즈-의< donna donna>등 200여곡을 금지해버립니다
反戰(반전), 體制批判的(체제비판적)인 風潮(풍조)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防止(방지)하기 위한 (措置(조치))였습니다
왜불러 왜불러 돌아서서 가는사람을 왜불러 왜불러
토라질땐 無情(무정)하더니 왜~ 자꾸 자꾸 마음 설래게해
아니 안되지 들어서는 안되지 아니 안되지 돌아보면 안되지
한번쯤 불러주는 그목소리에 다시 또속아서는 안되지
안들려 안들려 마음없이 부르는 소리는 안들려 안들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
이제 다시는 나를 부르지도 마
거던길 멈춰선 안되지
야절하게 부르는 소리에
자꾸만 약해지는 나의 마음을
이렇게 돌이켜선 안되지
왜불러 왜불러 돌아서서 가는사람을 왜불러 왜불러
토리질땐 무정하더니
왜~자꾸자꾸 불러 설레게해-----------------------------------------------------------------------------------------------------------송창식사,곡 송칭식노래,왜불러>
이노래는 금지조항”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라는 항목에 걸려 금지곡 처분을 받았습니다
1975년 開封(개봉)된 靑春映畵(청춘영화) <바보들의 行進(행진)> 에 “고래사냥”과 함께 삽입되어 영화와 함게 특히 젊은층의 사랑을받았습니다
허나 어이옵게도 揷入(삽입)된 두곡이 모두 禁止曲處分(금지곡처분)을 받습니다
“왜불러”는 영화중 주인공이 경찰에 쫓기는 장면에 이곡이 흐르는데 이것이 執權者(집권자)의 앞잡이 審議官(심의관)들 눈에는 마치 警察(경찰)을 戱弄(희롱)하는듯 보여서 禁止曲(금지곡) 이되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고래사냥>은”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처봐도”라는 가사가 있는바 이부분을 頹廢的(퇴폐적)으로 보아서 禁止曲(금지곡이)이 되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하지만 失望(실망)과 (絶望(절망))을딛고 고래잡으로 동해바다로 떠나는 젊은이의 理想(이상)과 꿈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한대수의<고무신>은 반체제적 양희은의<늙은군인의 노래>는 軍士氣低下(사기저하) 김민기<아침이슬>은 저항의식과 “太陽(태양)”으로 상징되는 不穩思想鼓吹(불온사상고취) 이장희<그건너>
頹廢助長(퇴폐조장) 이란 理由(이유)로 禁止曲處分(금지곡처분)을 당했습니다
긴반 지새우고 풀잎마다맺힌
眞珠(진주)보다 더고은 아침이슬 처럼
내맘에 설음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미소를 배운다
太陽(태양)은 墓地(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더위는 나의 試鍊(시련)일지라
나 이제가노라 저 거친 廣野(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김민기사, 곡 김민기노래 양희은 remake
허나 이곡은 禁止曲處分時(금지곡처분시) 처음 唯一(유일)하게 處分根據(처분근거)가 없었고 더구나 이곡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아름다운 노랫말” 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든 것이 審議官(심의관)들의 目的(목적)에따라 그들의 입맛대로 “不穩思想鼓吹(불온사상고취)”로 느닷없이 罪目(죄목) 이붙여지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1325—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i
대체로 作品全體(작품전체)의 主題(주제)를보지않고 그들이 보고싶은 部分的(부분적)인 歌詞(가사)만보고 쿠테타정권의 입맛에맞게 스스로 알아서---이미 준비된 審査基準(심사기준)에 어거지로
끼어맞추는 行爲(행위)를 한것입니다
耳縣令(이현령) 鼻縣令(비현령)<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式(식)으로 갖가지 설익은 이유로 禁止曲(금지곡) 딱지를 濫發(남발)해 점점 人心(인심)은 그들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事實(사실)로볼 때 禁止曲規制(금지곡규제)가 얼마나 恣意的(자의적)이고 偏向的(편향적)이 었나를 알수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終末(종말)을 催促(최촉) 하는---- 그들의 입맛대로 칼을 휘두른 無分別(무분별)한 行爲(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인기가요 222곡금지 이는 가히 歌謠彈壓(가요탄압)이라해도 (過言(과언))은 결코아닙니다
때로는 오직 政治的(정치적)인 理由(이유)로 금지되는 最惡(최악)의 現像(현상)도 發生(발생)습니다
심수봉의<無窮花(무궁화)>는 國花(국화)인 무궁화를 소재로 愛國心(애국심)을 鼓吹(고취)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동원되었는데도 大統領(대통령)이 弑害(시해)되는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禁止曲(금지곡)에 처해지는 가장 抑止(억지)스러운 禁止事由(금지사유)가 되었습니다
이몸이 죽어 한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커주소서
歲月(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祖國(조국)을 물어 오거든
强忍(강인)한꽃 발고 맑은 無窮花(무궁화) 보여주렴
無窮花(무궁화)꽃이 피는건
이말을 전하려 핀단다
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來日(내일)은 이된다
無窮花(무궁화)가 핀단다---------후략--------------------------------------------------------------------------------------------------------------심수봉사,곡 심수봉노래<無窮花(무궁화)>
독도사랑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제2의 愛國歌(애국가)로 애창되던 정광태의<獨島(독도)는 우리땅>이 쿠테타정권의 대통령이 日本訪問(일본방문)을 앞두고 和解雰圍氣(화해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시킬정도 였으니 대중가요가 政治(정치)風向計(풍향계)에 얼마나 敏感(민감)한지 알수있다----는 글도 보입니다
1970년대 길거리에서 稀罕(희한)한 風景(풍경)이 演出(연출)되고 있었습니다
日帝時代(일제시대) 일본인들 앞잡이가되어서 우리민족을 참으로많이 괴롭히던 존재였던 巡警(순경)들이 이제는 쿠테타정부의 앞잡이가 되어서 자를들고 다니며 여자들의 치마길이를 재고 남자들의
長髮(장발)을 團束(단속)하고 다녔습니다
그들 입맛대로 정한 許容値(허용치)를 넘으면 卽席(즉석)에서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거나 派出所(파출소)로 가차없이 連行(연행)했습니다
그래서 길이가 기느니 짧으니 실랑이하는 珍風景(진풍경)이 백주대로에서 연출되었습니다
團束根據(단속근거)는 소위 美風良俗(미풍양속)이었습니다
派出所(파출소)로 연행되면 反省文(반성문)이나 覺書(각서)를 쓰고 풀려났으나 남자들은 바리캉으로 밀어버리기 때문에 곧장 理髮所(이발소)로 直行(직행)해야하는 困辱(곤욕)을 치렀습니다
길이가 짧은 mini-skirt-미니스커트- 를 입다가 摘發(적발)되면 벌금형이나 구류에 처해졌읍니다
그래서 앞서 言及(언급)했듯이 그에 抗議(항의)하는 노래까지 登場(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송창식의<왜불러>입니다
“왜불러 왜불러 돌이서서 가는사람을 왜불러” 물론 이노래는 스크린 속에서 “사랑을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을 다시 부르지말라”는 노래입니다
하지만 별일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警察(경찰)이 왜부르느냐는 抗議調(항의조)노래로 解釋(해석)되어 大流行(대유행)의 물결을 탑니다
또한 民主人士(민주인사)들이 종종검거되기도해 무고한 사람을 왜부르느냐는 抗議性意味(항의성의미)도 內包(내포)하고있다는 글도 보입니다
결국 이노래는 처음 영화에 삽입한 意圖(의도)와는 다르게 一種(일종)의 政治抵抗歌(정치저항가) 時代諷刺歌(시대풍자가) 로 用度變更(용도변경)이 됩니다
1326—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j
이러하니 결국 금지곡으로 단속되는건 불을보듯 뻔한일입니다
“---<왜불러><아침이슬> 2곡은 禁止曲名團(금지곡명단)에도 없이 禁止曲(금지곡)되었다는 글이보입니다
아예 審議對象(심의대상)에서 배제되어<鬼神禁止曲(귀신금지곡)>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귀신도 모르게 금지곡으로 올려놓았다 뜻이다------“ 라는 글이 보입니다
심지어는 당시 “韓國(한국)의 ray Charles-레이찰스-“ 로 불리며 期待株(기대주)이던 盲人歌手(맹인가수) 이용복은 “맹인이어서 보기에 안좋다 재수없게 맹인이 방송에 나오느냐”는 이유만으로
演藝界(연예계 를 떠나야하는 참으로 一般人(일반인)들 常識(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荒唐(황당)한 일들이 茶飯事(다반사)로 發生(발생)했습니다
그는 高校時節(고교시절) 작곡가 김준규에 의하여 가수로데뷔 특히 1970년대 산레모가요제 入賞曲(입상곡)들을 飜案(번안)해서 불렀는데 原曲歌手(원곡가수)들보다도 더 잘부른다는 評價(평가)를
받으며 盲人(맹인)이면서도 guitar-기타를 直接演奏(직접연주)하며 노래해 大衆(대중)들에게 强(강)한 印象(인상)을 남겼습니다
눈을 감으면 저멀리서
다가오는 多情(다정)한 그림자
옛얘기도 잊었다 하자
約束(약속)의 말씀도 잊었다하자
그러나 눈감으면 잊지못할 그사람은
저멀리 저멀리서 무지개타고 타고오네--------------------------------------------------------------------------------신명순사, 김강섭곡 이용복노래<그얼굴에 햇살을>
이처럼 시민등의 善良(선량)한 日常(일상)까지 규제한 殺伐(살벌)한 恐怖(공포)의 時代(시대)였습니다
12시이후에는 사람이 아예 통행할 수 없는 通行禁止(통행금지) 시대였습니다
1970년대는 아직은 黑白寫眞時代(흑백사진시대)였습니다
하지만 黑白寫眞(흑백사진)속의 主人公(주인공)들은 어울리지않게 모두 長髮(장발)이거나 mini-skirt-미니스커트-들이었습니다
Snap- 寫眞(스냅사진) 으로 찍은 寫眞(사진)속에 偶然(우연)히 찍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그時代(시대)는 長髮族(장발족), mini skirt-미니스커트-가 流行(유행)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길고 여자는 짧던 時代(시대)였습니다
왜그런 fashion-패션-이 유행했을까요??
물론 머리나 패션은 個人(개인)의 趣味(취미)고 趣向(취향)이니까 多樣(다양)한 것이 當然(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流行(유행)을 타면서 普遍化(보편화)되곤 합니다
個性(개성)의 一般化(일반화) 라고 할수있습니다 어쨌던 그점이 流行(유행)의 俗性(속성)입니다
너도나도 長髮(장발)이고 여름이나 겨울에도 mini skirt-미니 스커트-였습니다
그것이 한 개인의 愼重(신중)한 熟考(숙고)끝의 自己(자기표현)이면 나무랄일이 아니지만 그저 남이하니깐 無條件(무조건) 뒤떨어지는 것같해서 따라하는 쏠림현상은 결코 바람직 하지못합니다
韓國人(한국인)의 “쏠림현상”은 그누구나 認定(인정)하고 感知(감지)하고있는 일인것이니-------
長髮(장발) 이나 -skirt-미니스커트-는 그당시 旣成世代(기성세대)의 道德價値(도덕가치) ) 旣存倫理(기존윤리)로 볼때는 分明(분명) 基準(기준)에 어긋나는 fashion-패션-들 일수밖에 없었읍니다
그시기는 男子(남자)든 女子(여자)든 丹精(단정)한 옷차림, 端正(단정)한 머리가 (社會通念(사회통념) 이었습니다
그런意味(의미)에서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는 이에대한 反抗(반항)이고 挑戰(도전)이라 여겨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時節(시절)은 쿠테타정부 시절이었고 軍府(군부)는 모든 것을 軍事作戰(槪念(군사작전개념)으로 바라보았고 모든 것을 劃一化(획일화), 規範化(규범화)를 强要(강요)했기에---軍隊(군대)의
規律(규율)처럼 모든 것을 統制(통제)하고 抑壓(억압)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軍事文化(군사문화)가 社會(사회)구석까지 파고들어 個人(개인)의 個性(개성)이나 個別的(개별적) 價値(가치)가 徹底(철저)히 毁損(훼손)되었습니다
大學生(대학생)은 물론 女高生(여고생)들 조차도 군복을입고 敎鍊(교련)을 받아야하는 그야말로 uniform-유니폼-시대를 强要(강요)당했습니다
1327-歌謠(가요)整理(정리)運動(운동)과 歌謠(가요)規制(규제)-k
長髮(장발)과 mini skirt-미니스커트-는 바로이런 숨이막힐듯한 군사문화의 劃一化(획일화),制度化(제도화), 規格化(규격화)에대한 反抗(반항)이요,反撥(반발)인 셈인데 民主主義國家(민주주의국가)
에서는 當然(당연)한 權利(권리)입니다
Fashion-패션-이름으로 支配ideologie-지배이데오로기-에 맞선 일종의 文化的抵抗(문화적저항)이었습니다
마치 朝鮮末期조선말기) 斷髮令(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儒林(유림)들이 抵抗(저항)하고 自決(자결)까지 敢行(감행)했던일이나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創氏改名(창씨개명) 에 우리 民族(민족)이
抵抗(저항)했던과 매우 恰似(흡사)합니다
박정희 쿠테타정부가 親日分子(친일분자)였던 그의 履歷(이력)처럼 日本(일본)의 政治文化(정치문화)를 踏襲(답습)하고 있는것입니다
斷髮令(단발령)에 대한 抗拒(항거)는 지금에 이르러 시대에 맞지않는 점이 있다해도 儒敎的價値(유교적가치)와 理念(이념)을 分明(분명)히 毁損(훼손)하는것에 대한 抵抗(저항)의
象徵的行爲(상징적행위)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長髮(장발), mini skirt-미니스커트-의 大流行(대유행)은 軍事文化(군사문화)에 대한 抗拒(항거)였습니다
쿠테타정부로서는 認定(인정)하기를 拒否(거부)하겠지만—이러한 一方的(일방적)이고 暴壓的(폭압적) 行爲(행위)가 결국 民心(민심)이 그들로부터 떠나가고 그들의 終末(종말)을 재촉하는 짓거리임을
그들은 애써 外面(외면)했읍니다
말하자면 1970년대 長髮團束令(장발단속령)은 日帝時代(일제시대) 斷髮令(단발령)의 複寫版(복사판) 이었습니다
이는 박정희가 日帝時代(일제시대) 日本陸士出身(일본육사출신)으로 우리 獨立軍討伐(독립군토벌)에 앞장선 履歷(이력)과 無關(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때 보고 배웠을터니깐요
결국 1970년대 大衆歌謠規制(대중가요규제)는 健全(건전)한 (大衆文化促進(대중문화촉진))이라는 名分(명분)과 다르게 統治理念(통치이념)에 順應(순응)하도록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한 文化政策(문화정책)의
一環(일환) 이었던 것입니다
젊은층의 覇氣(패기)를 꺾고 時代(시대)와 政權(정권)에 順應(순응)하는 국민을 키워내기위한 象徵的(상징적)인 規制(규제)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批評家(비평가)의 말대로 “75 歌謠大虐殺(가요대학살)”은 이렇게 自行(자행)됐던 것입니다
그것은 歌謠大虐殺(가요대학살)이 아니라 文化大虐殺(문화대학살) 精神 大虐殺(정신대학살) 에 버금가는 일입니다
이러한 政府(정부)의 殺伐(살벌)한 規制(규제)에 기름을부은 事件(사건)이 演藝人(연예인) 大麻草事件(대마초사건) 이었습니다
歌謠大虐殺(가요대학살)이 (恣行(자행))되고 있던 바로 그해에 歌手(가수), 演藝人(연예인)들의 大麻草檢擧令(대마초검거령)이 施行(시행)된것입니다
1975년, 11월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大大的(대대적) 團束(단속)이 이루어졌읍니다
大部分(대부분) folk포크- 나 rock-록-장르의 가수들이었고 이반 trot-트로트-가수들도 상당수 포함되었습니다
이에 이미 쿠테타정부 손아귀에 놀아나던 있던 허수아비 韓國演藝人協會(한국연예인협회)에서는 제명처분이라는 劇藥(극약)處分(처분)을 서슴지않아서 1976년부터 아예 音盤出盤(음반출반)이나
出演禁止處分(출연금지처분)을 해버려 대상자는 오랫동안 歌手活動(가수활동)을 못하게됩니다
결국 大麻草事件(대마초사건)은 虎視眈眈(호시탐탐) 機會(기회))를엿보던 정부의 歌謠禁止令(가요금지령)에 좋은 名分(명분)을 주어버린 悲劇的(비극적)인 事件(사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1970년대의 無慈悲(무자비)하고 强壓(강압)적인 歌謠(가요)規制(가요규제)는 1980년대에도 쿠테타정권의 沒落(몰락) 눈앞에 보이는데도 1980년대도 如前(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代表的(대표적)인 예가 박정권 沒落(現場(몰락현장)에 있었던 歌手(가수) 심수봉 의<순자의 가을>입니다
Gag-woman-개그우먼- 出身(출신) 방미가 remake 하여 알려지기도한<올가을엔 사랑할거야>의 原曲(원곡)이기도 합니다
1979년 신성일주연의 영화”순자야 문열어라” 主題歌(주제가)였다는 紀錄(기록)도 보입니다
헌데 이곡을 그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의 허수아비 심의관들이 “令夫人(영부인)의 이름을 노래제목에 감히 使用(사용)했다”는 이유로 이곡을 금지시키는 황당한 일을 벌여버립니다
마치 忠誠(충성)競爭(충성경쟁)을 하듯 -------
묻지말아요 내나이는 묻지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거야
나홀로 가는길은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窓(창)밖에 눈물짓는 나를닮은 丹楓(단풍)잎하나
아~ 가을은 보체만체 흘러만 가는데----------------------------------------------------------------------------------심수봉사,곡 심수봉노래<순자의가을>
1328—歌謠整理運動(가요정리운동)과 歌謠規制(가요규제)-l
그시기 심수봉은 1978년 제2회 大學歌謠祭(대학가요제)에서 다른 出戰者(출전자)들과달리 대학생들이 별관심을 갖지않은 trot풍의<그때그사람>을 본인이 직접 피아노를 반주하며불러
異色的(이색적)인 광경을 演出(연출) 휘오리바람을 몰고왔으나 大學歌謠搖祭(대학가요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상을받지못했으나 대상을 훨씬넘가하는 인기와 음반판매고를 기록해
歌謠祭主催側(가요제주최측)을 머쓱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그때그사람>은 이시기는물론 지금까지도 最高hit曲(최고힛트곡) 記憶(기억)되고 있습니다
비가오면 生角(생각)나는 그사람
언제나 말이없던 그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감추고
떠난사람 못잊어서 울던 그사람
그어느날 車(차) 내게 물었지
世上(세상)에서 제일슬픈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은건 情(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사람
외로운 病室(병실)에서 GUITAT-기타-를 쳐주고
慰勞(위로)하며 多情(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安寧(안녕)이란 단한마디 말도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幸福(행복)할까
어쩌면 한번쯤은 生角(생각)해줄까
지금도 보고싶은 그때 그사람
외론운 내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고 감싸주던 多情(다정)했던 그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되겠지
다시는 生角(생각)해서도 안되겠지
철없이 사랑인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그사람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그사람-----------------------------------------------------------------------------------------------------------------심민경사곡 심수봉노래<그때 그사람>
허지만 심수봉 自身(자신)은 10,26사태에 휘말려 悲劇(비극)의 主人公(주인공)이 되고맙니다
朴統(박통)을 踏襲(답습)해 또다시 쿠테타를 일으킨 전두환 新軍部(신군부)에 의하여 放送(방송)이나 公演出演(공연출연)에 禁止(금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수봉 제3집”아낌없이 바쳤는데”에 실려있는”순자의가을”은 販賣高(판매고)가 상승하며 興行(흥행)몰이에 成功(성공)합니다
하지만 또다시 不幸(불행)의 그림자가 그녀를 찾아옵니다
바로 上記曲(상기곡) title-타이틀-인 ”순자”가 쿠테타세력의 令夫人(영부인)의 이름이 重複(중복)된다해서-- 마치 漫畵(만화)속에서나 존재할수있는 사건같이 販禁(판금)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렇게해서 또다시 심수봉 自身(자신)도 그녀의 노래도 그녀의 명곡 ”그때그사람”이 되어 歌謠界(가요계)에 死藏(사장)됨을 强要(강요)당합니다
이미 1970년대 말도안되는 어거지식으로 倭色(왜색), 淫亂(음란), 風氣紊亂(풍기문란) 의 罪目(죄목)으로 시행되었던 歌謠規制(가요규제)의 雰圍氣(분위기)가 支配(지배)했던 時代(시대)였던만큼
쿠테타정부 令夫人(영부인) 이름과 같다는건 한참 忠誠競爭(충성경쟁)을 벌이던 그들에게는 참기힘든 侮辱(모욕)으로 느껴졌을테고 해서 후세 두고두고 嘲弄(조롱)거리가 되는-----
이곡은 살아남기 힘들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苦痛(고통)의 歲月(세월)은 흘러가도 名曲(명곡)은 남는법
無所不爲(무소불위)의 勸力(권력)을 휘두러든 그들은 한마디 사과의 말도없이 죽어버리지만---- 그전 1983년 방미에 의하여<순자의가을>은<올가을엔 사랑할거야>로 復活(부활)합니다
그녀는 1978년 mbc comedian-코미디언-으로 公採(공채)되었으나 팝송 one ticket 를 飜案(번안)한 ”날보러와요”로 歌手(가수)로 變身(변신)합니다
이노래로 크게 人氣(인기)가 上乘(상승)하고 이듬해 1984년 동경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結果的(결과적)으로 남의不幸(불행)을 自身(자신)의 幸運(행운)으로 거머쥔 幸運兒(행운아)일수도---
덧없이 흘러가는 歲月(세월),落葉(낙엽)처럼지는 靑春(청춘), 돌아올수없는 사랑, 그아픈 傷處(상처)를 다시 새로운 사랑으로 治癒(치유)하겠다는 다짐을 쓸쓸하게 토해내는 가을戀歌(연가)일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노래가 단지”순자의가을”이라는 題目(제목) 때문에 規制(규제)되는 苛酷(가혹)한 時代(시대)였습니다
1329--離散家族(이산가족) 찾기와 離散歌謠(이산가요)-a
“離散家族(이산가족)”이란 좁은意味(의미)에서 六二五民族相殘(육이오민족상잔)으로 인해 헤어질수밖에 없었던 家族(가족)들을 말한다 할수있습니다
戰爭(전쟁)통에 헤어진가족들, 理念(이념)이나 여러가지 問題(문제)로 越拉北(월납북) 된 人士(인사)들, 북에 가족을두고 越南(월남)한 사람들, 戰爭捕虜(전쟁포로) 들이 여기에 포함될수 있습니다
하지만 넓은의미에서 일제강점기에 먹고살기위해 故鄕(고향)과 親知(친지)를 등지고 멀리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등지로 떠나갈수밖에 없었던 游移民(유이민)들도 포함되는 槪念(개념)일것입니다
“離散(이산), diaspora-“는 말그대로 이리저리 흩어져 서로 만날수없게된 狀況(상황)을 意味(의미)하기 때문이기에-----
離散(이산)의 歷史的原形(역사적원형)은 朝鮮時代(조선시대) 豆滿江(두만강),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中國(중국)땅에 농사짓고 장사하려 移住(이주)한 游移民(유이민)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이 日帝植民地(일제식민지)가 되어버리자 游移民(유이민)들이 幾何級數(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수 밖에없었습니다
日帝(일제)와 地主(지주)들의 등살에 못이겨 夜半逃走(야반도주)한 流浪民(유랑민)들이 줄을지어 豆滿江(두만강)과 鴨綠江(압록강)을 건널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로 이 時期(시기) 장차 韓國歌謠界(한국가요계) 代父(대부)로 불리게되는 김용환이 이러한 時代狀況(시대상황)을 노래로 發表(발표)하니 그곡이<豆滿江(두만강) 뱃沙工(사공)>입니다
어제는 이 나그네 실어 건너고
오늘은 설운消息(소식) 전하여 오는
豆滿江(두만강) 건너는 늙은 뱃沙工(사공)
힘없이 푸른물에 노를 접니다
떠나는 나그네가 서러워 울 때
잘되어서 돌아오라 달래주면서
一年(일년) 二年(이년) 五年(오년) 十年(십년) 四十餘年(사십여년)을
豆滿江(두만강) 물결위에 늙었습니다
어제도 설운 便紙(편지) 싣고 오고요
다시 오라 約束(약속)했던 그사람들이
혹여나 江(강)을건너 오시나 하고
오늘도 배를저어 더나 갑니다---------------------------------------------------------------------------------이원형사 임벽계곡 김용환한노래<豆滿江(두만강) 뱃沙工(사공)>
이노래는 朝鮮日報(조선일보) 新春懸賞當選(신춘현상당선) 流行歌(유행가)에다 곡을붙인 노래입니다
解放(해방)이되자 國外居住者(국외거주자)들이 歸國列車(귀국열차)와 歸國船(귀국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많은사람들이 힘들여 마련한 삶의터전을 버리고 떠나오기는 쉽지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죽고살기로 힘들여 마련한 삶의 터전이었기에-------
해서 결국 歸國(귀국)을 抛棄(포기)하고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음으로 재일동포, 재미동포, 사할린동포 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다 같은 韓民族(한민족) 이지만 다시는 故鄕(고향)땅을 밟기힘든 政治的(정치적) 流浪民(유랑민)으로 남게되어 버립니다
解放(해방)直後(직후) 北韓傀儡國(괴뢰국)이 陰凶(음흉)한 本色(본색)을 드러내기전에는 比較的(비교적) 南北交流(남북교류)가 自由(자유)로운 時期(시기)가 잠시나마 있었습니다
신의주와 원산을 잇는 경의선, 경원선도 그대로 運行(운행)되어 人的(인적),物的(물적) 交流(교류)는 解放前(해방전) 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백범김구선생을 비롯 많은 국민들이 반대했지만 美國(미국)의 歷史意識不在(역사의식부재)와 이를 등에엎은 妄靈(망령)나고 執權慾(집권욕)에 사로잡힌 이승만의 합작으로 남한만의
반쪽짜리 정부가 1948년, 8월 들어서고 스탈린의 허수아비 김일성에의하여 같은해 9월 북에 조선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미소 강대국의 便宜(편의)에의한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에 불과했던
三八線(삼팔선)은 禁斷(금단)의선으로 固着(고착)되버립니다
남한만의 單獨選擧(단독선거)를 그렇게 반대했던 愛國市民(애국시민)들이 이미 豫測(예측)했던 最惡(최악)의 事態(사태)가 눈앞에 펼쳐져버린 것입니다
眞情(진정)한 解放(해방)과 獨立(독립)을 이루지못한채 南北分斷(남북분단)의 悲劇(비극)이 招來(초래)된것으로 이미 意識(의식)있는 사람이면 豫測(예측)할 수 있는 事實(사실)이었기에 더욱 憤怒(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1330—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와 離散歌謠(이산가요)-b
그리고 運命的(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없는 六二五(육이오)民族相殘(민족상잔), 그混亂(혼란)통에 수많은 避難民(피난민)과 越拉北民(월납북민), 收容所(수용소)에 수용된 南北(남북)捕虜(포로)들이
離散家族(이산가족)의 中心(중심)을 이룹니다
우리가 一般的(일반적)으로 離散家族(이산가족)이라 할때는 이와 같은 六二五(육이오)南北相殘(남북상잔)으로 인한 이산가족을 의미합니다
自意(자의)든 他意(타의)든 수많은 사람들이 家族(가족)을 잃고 모래알처럼 불뿔이 흩어지게 된것입니다
같은 南韓(남한)땅에 居住(거주)하지만 서로 連絡(연락)이닿지않아 數十年歲月(수십년세월)동안 離散(이산)의 苦痛(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 奇跡(기적)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kbs-tv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生放送(생방송) 이었습니다
이방송을통해 잃어버린 血肉(혈육)을 찾는다는 꿈과 希望(희망)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終戰後(종전후) 30년만에 먹고살기에 여념이없고 連絡(연락)할 방법도 없기에 離散(이산)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한줄기 救援(구원)의빛이 비친것입니다
물론 radio-라디오-에서 먼저 1973년 10월27일부터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 放送(방송)을 하여 10년간 342편의 家族(가족)이 相逢(상봉)을 한 前例(전례)가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tv는 畵面相逢(화면상봉)이 可能(가능)하기 때문에 그 波及效果(파급효과)는 radio-라디오-에 比(비)할바가 아닐만큼 呼應(호응)과 期待(기대)가 컸읍니다
1983년, 6월30일 처음실시한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 生放送(생방송)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한 78%의 視聽率(시청률)을보이며 國民(국민)들의 呼應(호응)을 이끌어내어 瞬息間(순식간)에
社會的 issu-사회적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높은 視聽率(시청률)을 紀錄(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이 새벽 1시까지 放送(방송)을 지켜봤습니다
그야말로 뜬눈으로 tv앞을 지켰던 것입니다
及其也(급기야) 定規放送(정규방송)을 全面取消(전면취소)하고 5일간 連續(연속)으로 放映(방영)하는것에 그치지않고 1983년, 11월14일까지 5개월간 生放送(생방송)이 이어졌습니다
放送(방송)이 시작되면서 放送局(방송국) 담벼락에 離散家族(이산가족)을찾는 數萬(수만)장의 壁報(벽보)가 나붙었습니다
視線(시선)을 끌기위하여 mannequin-마네킹- 세우기, 금관쓰기, 甚至於(심지어)는 離散家族(이산가족)이 直接(직접) accordion-아코디언-이나 saxophone-색소폰-을 演奏(연주)하는 奇想天外(기상천외)의 방법까지 動員(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총방영 138일간에 접수 10만 952건 放送出演(방송출연) 53536명의 大記錄(대기록)을 남기며 10189명이 劇的(극적)으로 相逢(상봉)하는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타이틀과 함께 背景音樂(배경음악)으로 곽순옥원창, patti kim이 remake 한<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가 사람들의 心琴(심금)을 울리며
再照明(재조명)되는 異變(이변)이 演出(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눈
고운 마음씨에 달덩이같이
이 世上(세상)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江(강) 가에서 盟誓(맹세)를하던
이 女人(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한운사사, 박춘석곡 곽순옥노래<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비록 이산가족이 아니더라도 같은 苦難(고난)을 겪은 (同胞(동포))로서서 서로의 아픔을 끌어안고 共感(공감)하는 民族愛(민족애)를 유감없이 發揮(발휘)했던 것입니다
이산의 슬픔으로 이처럼 온국민들이 하나가되어 共感帶(공감대)을 빚어낸 것은 有史以來(유사이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해 7월10일부터 해외까지 視線(시선)을 돌려 海外同胞(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찾기 生放送(생방송)이 개시됩니다
1990년 1월에는 사할린-서울-대구 kbs 3각 위성방송을 실시하여 화면상봉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국내이산가족은 물론 미, 일, 중,사할린 등 해외까지 呼應(호응)이 빗발친 것은 너무나 當然(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이산가족찾기생방송은 1984년 世界平和定着(세계평화정착)에 寄與(기여)한 자에게 수여하는”gold mercury-골드머큐리-”상을수상했고 2015년 單一主題(단일주제)에의한
最長期 生放送紀錄(최장기생방송기록)을 세워 유네스코 紀錄遺産(기록유산)으로 登載(등재)되기도 했습니다
1331—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와 離散(歌謠(이산가요)-c
及其也(급기야)는 한국의 이산가족찾기에 刺戟(자극)을받은 동서독도 離散家族(이산가족) 生死確認(생사확인) 放送(방송)을 실시하여 2만1734명이 相逢(상봉)하는 快擧(쾌거)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kbs 의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 放送(방송)은 국내는물론 海外(해외)로까지 波及效果(파급효과)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는 國內問題(국내문제)가 아니라 國際的 issue-국제적이슈-로 떠 올랐던 것입니다
그결과 1985년 마침내 南北(남북)離散家族(이산가족) 故鄕訪問團(고향방문단) 및 藝術公演(예술공연)이 成事(성사)되기에 이릅니다
放送(방송)으로만 生死(생사)를 確認(확인)하기엔 너무 不足(부족)해 直接(직접) 南北離散家族(남북이산가족)이 만날수있는 機會(기회)까지 磨鍊(마련)된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늦은감이 있는 當然(당연)한 일이었고 南北(남북)의 體制問題(체제문제)와는 次元(차원)이다른 가장 原初的(원초적) 人間愛(인간애)의 發露(발로)입니다
그전 1972년 南北赤十字會談(남북적십자회담)부터 進行(진행)된 訪問事業(방문사업)이 드디어 結實(결실)을 보게되었다는 글이 보입니다
비록 소규모였지만 고향방문단 50여명 예술공연단 50여명으로 꾸려 서울과 평양에서 離散家族(이산가족)相逢(상봉)이 劇的(극적)으로 이루어진것입니다
이러한 人的交流(인적교류)를 계기로 南北交流(남북교류)가 活性化(활성화)되는 발판을 마련하게되었다는 글도 있습니다
南北離散問題(남북이산문제)를 다룬 drama-드라마-는 이보다 훨씬앞서 1964년 한운사가 극본을쓴<南-남-과 北-북->이 있습니다
그때 drama 主題歌-드라마주제가-로 쓰인곡이 앞서 紹介(소개)한 한운사작사 박춘석작곡 곽순옥의<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였습니다
이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다음해 신영균, 엄앵란, 주연으로 映畵化(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영화에서 곽순옥의 노래가 心琴(심금)을 울렸으나 그녀가 홍콩으로 移住(이주)를 하는바람에 1983년 離散家族(이산가족)찾기에서는 patti kim version-패티김 버전-으로 放送(방송)
되었습니다 해서 이곡이 patti kim-패티김- 原唱(원창)으로 아는사람들도 있습니다.
_____호응부족으로 이란은 여기서 줄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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