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일기예보 대로 비는 아직 내리고 있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하늘이 영 찝찝하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번 오키나와 여정은 썩 인상깊은 여행이 되지 못했다. 모레 아침 일찍 후쿠오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기 때문에 이 섬을 돌아볼 시간이라곤 겨우 2일에 불과했고 그 이틀 내내 비와 먹구름 투성이의 날씨였던지라 자연경관을 보는데 좋은 재미를 못봤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오키나와 본섬은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관광만을 하기에는 이제는 신선도가 좀 떨어졌다는 점도 있었고. 차라리 아직 가보지 않은 케라마 군도나 얀바루 지방의 맹글로브에서 카누 투어라도 했으면 좋았을걸.
렌트카를 빌리러 유이레일을 타고 오우노야마 공원으로 향한다. 나하라는 도시의 크기를 한 눈에 실감할 수 있는 유이레일.
렌트카 업체 사무소는 아사히바시역에서 내려서 가는 게 더 가까웠지만 이번엔 조그만 변덕을 부려서 한 정거장 후에 있는 츠보카와역(壺川駅)에서 내려봤다. 역에서 내리면 바로 오우노야마 공원(奥武山公園)이다. 나하 시내의 체육관들이 모두 집결되어 있는 운동공원이다.
특이한 건물 모양새로 예전에 한국TV에도 소개되어 일약 유명세를 탄 아시아 식당. 그렇게 유명해지고서도 정작 별 재미를 못봤는지 그 식당은 망해서 없어졌고 지금은 다른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맛이 별로였나?
산책을 겸해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연못은 이렇게 류큐 고유의 정원양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슈리성이나 시키나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이다.
오늘 차를 빌린 오키나와 트래블렌트카. 드디어 오키나와에서 차를 몰아보는구나. ㅋㅋ
오키나와는 대중교통편이 미비한 탓에 대부분 렌트카를 빌려서 여행을 하기 마련인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직접 차를 몰고 돌아다니게 됐다. 첫번째 여행은 정기관광버스의 힘을 빌었고 두번째 여행은 노선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면서 돌아다녔다. 렌트카를 빌려야 오키나와를 제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에 눈이 아찔해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비용 측면에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본토에 비하여 그만큼 싸기 때문이다.
내가 이날 하루 빌린 차는 스즈키의 웨건R인데 소요된 렌트비용은 2,500엔에 불과했다. 본토에서 차를 빌리는 비용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때가 12월 겨울이라 비수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금액이지만 평상시에도 본토보다 싸다. 물론 성수기가 되면 그건 그대로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웨건R은 참 마음에 드는 차였다. 오토기어의 경차답게 운전이 편하기도 했지만 실내 공간도 넓었고 의외로 힘이 있어 혼자서 여기저기 쏘다니기에는 이만한 차도 없는 것 같았다.
트래블 렌트카의 직원은 얼굴만 봐도 딱 알 수 있을 정도로 오키나와 토박이 사람이었다. 국제운전면허증을 제시하고 몇가지 주의사항을 들은 다음 계약서에 싸인만 하면 렌트 절차가 완료된다. 나하는 출퇴근시간이면 도로정체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극심한 동네인데 시간대별로 버스전용차로가 되는 곳이 있으니 주의하란다. 잘못알고 해당시간대에 버스전용차로에서 달리다가 적발되는 사람 열의 아홉이 렌트카로 관광다니는 외부인이라고 한다.
몇가지 궁금한 점 있느냐 묻길래 최북단 헤도미사키를 가려하는데 오늘 내에 갔다올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젓는다. 멀기도 멀지만 모토부 반도를 넘어서면 도로가 1차선이 되어버린다고 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가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다시 돌아온다나? 다녀올거라면 오늘 꼬박 하루가 걸릴거라는데 조금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 외에는 주일미군 카데나 기지를 전망할 수 있는 곳이 카데나PA가 맞는지를 물어 확인했다. 네비게이션 사용법을 간단히 전수받고 만자모를 찍어달라 부탁했다. 그리하여 출발.
나하→만자모 : 48.8km
오키나와 중부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만자모로 향한다. 렌트카 직원이 58번 국도로 가나 고속도로로 가나 별 차이 안난다면서 일반도로 루트로 찍어놓았으니 이대로 달리면 된다고 해놓고서는... 그냥 네비가 가르키는 대로 달리니 고속도로로 접어들게 되었다. -_-;; 고속도로 이용료가 1,000엔 정도 들었던 것 같다.
한시간 정도 신나게 달리다보니 만자모(万座毛)에 도착했다. 오키나와 관광에 있어 누구나 반드시 꼭 한번은 가게 되는 곳인데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방문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기념품점들이 늘어서 있고 오키나와 전통 과자인 사타안다기 냄새가 구수히 난다.
예전에 방문했을 때는 2006년 12월. 그 때도 잔뜩 낀 구름 때문에 별 재미를 못봤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T.T 만자모를 보는 방법은 드넓은 잔디가 융단처럼 깔려있는 산책로를 따라 해안절벽을 구경하는 것이다... 만자모라는 이름의 유래가 이 잔디밭에서 나왔다. 류큐왕이 이 곳을 보고 '족히 만명이 앉을 만하다' 언급한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자모다. 만자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인 코끼리바위.
날씨가 좋고 파도가 잔잔할 때면 코끼리 바위 밑에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아름다운 코발트가 바다가 펼쳐진다고 하는데...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절벽을 때리는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보기란 어려웠다. - -; 그냥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시원한 장관이긴 하지만.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육지가 모토부반도이다. 나고시와 나키진성, 오키나와 해양 공원 등의 볼거리가 잔뜩 몰려있는 곳...
가운데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는 섬이 오키나와 본섬에서 다소 떨어져있는 낙도인 이에지마(伊江島)이다. 저 섬 또한 면적의 1/5이 미군기지이다.
산책로를 따라 바다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어느새 한 무리의 수학여행 단체가 들어와 시끌벅적하다. 겨울이 되면 상당히 싸지기 때문에 단체관광객들로 번잡해지는 곳이 오키나와이다. 물론 유명관광지만 그렇고 그 밖의 다른 곳들은 파리 날리겠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자리인데... 원래 여기에 300엔 정도를 받고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던 류큐 전통 복장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없어졌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면, 코끼리바위 반대쪽의 해안이 훨씬 경치가 좋다. 이쪽은 ANA의 리조트단지들이 들어서 있는데 해안절벽과 리프가 모여 이뤄내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가히 압권이다.
나도 보트를 타고 저렇게 질주하고 싶다 T.T
해변에는 더 이상 해수욕하는 인파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해양레저들을 만끽하는 사람들은 그대로다.
떠나기 전에 사타안다기(サーターアンダギー) 몇개를 사서 먹고 간다. 소맥분, 흑설탕, 계란, 베이킹파우더 등을 넣고 튀겨낸 오키나와 어디에서나 흔히 사먹을 수 있는 류큐의 전통과자이다. 류큐어로 사타(サーター)는 설탕, 안다기는 기름을 뜻하는 안다(アンダ)와 튀기다를 뜻하는 동사 아기(アギー)의 조합이다. 겉은 바삭바삭하면서도 속은 다소 부드러운 도넛츠와 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최북단 헤도미사키(辺戸岬)를 향해간다.
렌트카직원이 가기 힘들거라고 했고 네비에 나와있는 예상시간과 거리도 만만치 않아 보여 잠시 주저했지만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에.
가는 도중에 나고(名護) 시가지를 통과한다. 2008년 벚꽃축제를 보러 하루 묵었던 곳인데 오키나와 제2의 도시이긴 하지만 그냥 겉보기로는 어디 시골 읍내같다. 일본에서 가장 빨리 벚꽃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매년 1월)
58번 국도를 타고 서부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한다. 어느새 구름도 개어 꽤 화창해졌고 제 속도도 낼 수 있어 참으로 드라이브 할 맛이 난다.
다소 쇠락해보이는 헨토나(辺土名) 마을에 다다르니 또다시 먹구름이다. 제길... -_- 이 곳 오키나와 북부 얀바루지방까지 오면 인적이 뜸해진다. 사람 사는 마을도 원래 오키나와 자체가 후즐근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이쪽은 더욱 더 낡은 느낌을 준다. 노선버스로 가장 북쪽까지 갈 수 있는 동네가 바로 이곳 헨토나다. 여기에서 헤도미사키까지 달리는 69번 버스가 있었지만 없어졌고 마을버스로 대체되었지만 하루에 몇번이나 다닐런지는 불명이다.
헨토나를 벗어나 더더욱 북쪽을 향해 달리면 이제는 차량도 거의 없다. 그런데 렌트카 직원 말이 틀렸다. 여기에서부터는 1차선이 되어서 운전하기 더 힘들거라고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길은 닦은지 몇년이 채 안됐는지 반듯하고 차량통행도 별로 없어서 안심하고 과속으로 달렸다. -,.-;
머리 위로 또 시누크헬기가 날아다닌다. 요론토와 매일 왕복하고 있는 걸까?
그리하여 드디어 도착했다. 오키나와 최북단, 헤도미사키(辺戸岬)다.
주차장에는 몇몇 편의시설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거의 다 문을 닫고 단 한 곳만이 영업중이었다.
바다와 마주서서 울퉁불퉁한 석회암 지대가 험악하게 펼쳐져 있다. 어찌나 파도가 세게 휘몰아치는지 바닷물이 카메라 렌즈에 튀어서 애를 먹었다.
험하고 다소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랄까... 오키나와 최북단의 땅은 그런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키나와 본섬 북쪽 끝을 알리는 조국복귀투쟁비.
오키나와가 미군 통치기에 있던 시절 일본복귀를 염원하던 사람들이 이 곳에서 봉화를 올린 것에서 유래했다. 여기에서는 당시 일본최남단이었던 요론섬이 보이기 때문이다. 별도의 독립국으로 독립하지 않고 일본으로 복귀한 것은 오키나와 인들의 선택이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 또한 오키나와 인들 스스로가 내리고 있을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녀석인가 싶었더니 이곳 쿠니가미(国頭村) 마을과 요론섬과의 우호를 기념하여 세운 비였다.
무슨 풍화작용으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거칠게 할퀴고 패인 듯한 이곳의 지형은 참으로 기괴스런 느낌이었다.
정면에 우뚝 서 있는 산이 모습이 특이해서 유난히 눈에 띄는데, 류큐의 시조신인 아마미키요(アマミキヨ)가 오키나와를 만들 때 가장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천제(天帝)의 사도로서 이 땅에 강림한 여신은 아마미키요는 오키나와를 만들고 3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장남이 류큐왕부의 초대왕이라는 것이다. 천제의 손자라는 뜻으로 천손(天孫)이라 불리웠다 한다.
류큐왕부의 초대왕조는 25대 17802년에 걸쳐 내려왔지만 마지막 왕이 정변으로 인해 신하의 손에 살해당하고, 왕을 죽인 신하 또한 융텐(舜天)이라는 자에게 살해당했는데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 융텐이 헤이안시대의 무장이었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爲朝)의 사생아라는 것이다.
이곳에도 세계 인류의 평화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었다. 일본최북단 소야미사키에도 서 있었고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보았는데 얼마나 설치를 해둔 것일런지...
오키나와 최북단의 땅은 그렇게 쓸쓸하고 황량한 모습으로 꿋꿋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계속-
첫댓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그 음식점 나무위에 지은 음식점인가?? 폐점되었다니 놀랍네요 코끼리 바위는 정말 꼬끼리를 쏙 빼닳았네요 그리고 어떤곳에서도 보기 힘들것 같은 헤도미사키 사진으로나마 구경잘하고 갑니다 아참 벗꽃이 1월이라니 가히 오키나와의 날씨는 짐작이 되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