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라니까. 이거랑 이건 다른 글자잖아.”
“똑같이 생긴 것 같아서…”
“아니지, 점이 있고 없고가 다른 거야. 이건 대(大), 그리고 이건 태(太).”
“그럼 이거랑 이것도 다른 글자에요?”
“그럼, 이건 견(犬)자야.”
시동을 앞에 앉혀 놓고 글자를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재중의 목소리가 잔뜩 들떠있었다. 배운 걸 누군가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 꽤나 즐거운 일인 듯 글자를 쓰는 몸짓이 재빨랐다.
“내일까지 다 외워 와야 해?”
“예, 마마.”
“응, 나가 봐.”
발을 걷어내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던 시동이 윤호의 허리춤에 툭 부딪치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예를 올리곤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짓는지라 윤호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주었다. 나가 보거라, 하는 말에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종종걸음을 걸어 나가는 시동의 뒤를 지켜봐주고 발을 걷고 윤호가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아이에게 글을 언제부터 가르치셨습니까.”
“한 삼 일정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준수야, 준수.”
앉아 있던 의자에서 살짝 내려 와 재중이 윤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수련을 하기 싫으시다 떼를 쓰시는 것이 분명해 그러면 아니 된다 윤호가 표정을 굳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재중이 손을 놓고 윤호에게서 목검을 받아들었다.
“난 그냥 글 읽고 쓰는 게 좋은데…”
“그럼 저는 필요 없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싫어.”
“그러니 수련 하셔야지요.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으니 조금 빨리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단신을 찾아 이리저리 둘러보는 재중에게 윤호가 가죽신을 내밀자 마음에 안 찬다는 듯이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가 어쩔 수 없이 재중이 신을 신었다. 옷이 펄럭거리지 않도록 비단 띠로 발목부분과 허리부분을 살짝 동여매어주고 윤호가 두어 발 뒤에 서서 재중이 내려가는 모양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휘청이는 감이 없어지질 않아 걱정이었다.
“어제 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응, 그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차분히 외웠던 것을 해보세요.”
아무래도 무예에는 영 감이 없어 보법을 밟으면 상체가 흐트러지고 상체에 신경을 쓰면 하체가 흐트러졌다. 재중이 울상으로 윤호를 올려다보자 윤호가 이번에도 시범을 보인답시고 두어 번 반복해 걸으면서 또 꾹꾹 흙바닥에 자국을 내었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걸어보세요.”
딱히 윤호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재중이 검을 잘 다룰 수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유약해질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일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말도 타셔야 할 텐데, 윤호도 그건 차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말을 보면 커다란 눈을 맞추고 쓰다듬어 주기 바쁘시지 타려고는 생각도 하질 않으시니, 내일부터는 말을 타는 법도 조금은 가르쳐 드려야지 싶어 윤호가 조금 생각에 빠져든 순간 재중이 비틀거리면서 쿵, 옆으로 넘어져버렸다.
“아야…”
“마마! 어디 상하신 곳은…”
“아냐, 안 다쳤어.”
“손바닥을 내어 보세요.”
“안 다쳤다니까.”
“어서요.”
억지로 손을 내밀게 할 수는 없어 윤호가 몇 번이나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재중이 꼭 말아 쥐고 있던 손을 폈다. 붉게 피가 조금 배어나와 있어 궁녀를 불러 윤호가 깨끗한 면에 물을 적셔 오라 하고 괜찮으시냐고 재중에게 몇 번이나 되물었다.
“괜찮아.”
“제가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내가 넘어진 건데?”
여타 다른 황자들과, 왕족, 심지어 황제와도 대면을 해봤지만 재중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예상을 빗나가는 것들이라, 당연히 왕족이라 하면 제 탓보다는 밑에 있는 사람 탓을 하기 마련인데 미안하다는 말도 잦으시고 거기에 제 잘못이라 먼저 말씀하시기까지. 이런 반응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것이 힘들어 윤호는 재중의 말에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물에 적신 면으로 상처부분을 살살 쓸어내었다. 많이 까지지 않고 조금 표피가 벗겨진 정도로 다행이었다.
“약은 바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천을 얇게 잘라오라 해 재중의 손에 살살 감아주고 윤호가 여기저기 재중의 하얀 비단옷에 묻은 흙먼지도 털어냈다.
“아직 열 번 남았어. 오늘은 안 더우니까 할래.”
하기 싫다 싫다 하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또 끝까지 해야 하는 성격인지라 재중이 다시 윤호가 꾹꾹 밟아놓은 자국을 따라 걸었다. 며칠 전처럼 덥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면 어질거리는 머리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구름이 끼어서 비가 올 듯 습기가 많기는 했지만 땡볕은 아니었으니까. 발 되게 크구나, 왠지 신기해 재중이 보법을 밟다 말고 윤호의 발과 제 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또 기우뚱, 넘어지려는 찰나 허리께에 감겨오는 단단한 팔에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만 하세요. 이러다 크게 다치시겠습니다.”
괜히 민망해져서 툭툭 옷을 털어내고 재중이 목검을 윤호에게 건넸다. 오늘은 글 배우러 가지 않아도 되는데, 연꽃을 또 보러가자 하면 안 될까. 하얀 천이 감긴 손으로 윤호의 옷자락을 재중이 툭 잡아당겼다.
“호, 오늘 태사님이…”
“예, 알고 있습니다. 폐하와 잠시 출궁하셨다 들었습니다.”
재중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만 조금 윤호가 뜸을 들였다. 해달라는 대로 바로바로 해주지 말라던 태사의 말을 기억하고 아니 된다 말하려는 순간 어느새 물기가 들어찬 재중의 눈에 윤호의 고개는 반사적으로 끄덕이고 말았다. 너무, 재중에게 그리고 그 눈에 약해서 탈이다.
“준수도 데리고 가야지.”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준수는 호 무서워한단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뒷방에 마음대로 들어가시면 궁녀한테 혼나실 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살짝 들어가 준수를 불러낸 건지 금세 나오는 재중의 얼굴에 윤호가 발걸음을 떼자 움찔, 준수가 놀란 듯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재중의 말에 준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윤호와 눈이 마주치고는 푹 다시 숙였다. 지금까지 윤호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을 터이니. 준수는 궁녀의 아들이었다. 궁녀가 황제의 씨가 아닌 다른 씨를 품는다는 건 죽어 마땅한 일이었지만 궁녀들이 서로 쉬쉬하여 그 궁녀가 아이를 낳게 만들었다. 그 궁녀는 재중의 모(母)인 현비의 도움으로 궁을 나갈 수 있었으나 아이는 데리고 나갈 수 없어 준수는 궁녀들 사이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윤호와 같은 성인 남성은 거의 본 바가 없었고 게다가 윤호는 무인이었기 때문에 키도 크고 위압적으로 보여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호, 오늘 샘에 들어가도 될까?”
“그럼 궁녀에게 여벌옷을 준비해 오라 해야겠습니다.”
“안 젖게 할게. 버선을 벗어놓고 들어가면 되잖아.”
“샘은 얕으니까 괜찮습니다.”
조금 뒤따라 걷는 준수를 재중이 살짝 잡아 당겨 옆에 세웠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준수가 뒤로 물러서려는 걸 재중이 억지로 끌어다 세우는 걸 보고 윤호가 들리지 않게 웃었다. 묘한 곳에서 고집 있으신 분이니.
“준수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예?”
“먹고 싶은 거.”
또래가 없어 심심하셨구나, 재중의 바로 위의 황자도 나이가 열여덟이니 챙겨주길 좋아하는 성격에 그러질 못해 답답도 하셨겠구나 싶어 윤호는 입 안이 썼다.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하는 준수의 답에도 재중이 계속 재촉하자 수박이 먹고 싶다 하는 대답을 끝내 얻어내고는 재중이 윤호를 올려다보았다.
“예, 수박도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문지기들이 문을 열고 재중과 준수를 먼저 들여보낸 윤호가 궁녀 하나를 불러 수박과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하라 하고 샘 가까이에 가 있는 둘의 뒤에 섰다. 벌써 샘에 손을 담가 물장난을 치고 있는 재중 옆에서 준수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재중의 옆으로 다가섰다.
“여기 시원해.”
“마마, 저는…”
“빨리, 담가 봐.”
준수의 팔을 덮고 있던 옷자락을 삭 쓸어 올려주고 재중이 준수의 손을 샘 안으로 넣어주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팔에 닿아 준수가 움칠 몸을 떨었다.
“시원하지.”
“예.”
신발을 벗으려는 재중을 보고 윤호가 보송거리는 면을 접어 재중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 위에 서서 버선을 벗는 재중의 바지를 윤호가 살살 올려 접어주자 재중이 샘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발바닥까지 새하얀 발에 시리도록 푸른 물이 닿아 발이 파랗게 물들었다. 돌에 걸터앉아 발장난을 치는 재중의 옆에서 윤호는 미끄러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준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너도 들어가 보련.”
“아, 아닙니다, 장군님.”
“더울 텐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계속 아니라 괜찮다 하는 준수의 눈이 풀이 죽은 듯 축 내려와 있었다. 윤호가 신을 벗기려 하자 휘휘 손을 저으면서 아니라 하는 것이 꽤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거기에 들어오라고 하는 재중의 말까지, 어느새 신이 벗겨졌고 버선도 곱게 벗긴 윤호가 준수의 허리께를 들어 샘 안에 넣어주었다.
“아으, 차가.”
“여기 앉아, 준수야.”
“예? 제가 어떻게…”
“서 있으면 미끄러져, 젖어서 옷 가지고 오려면 호가 고생한단 말이야.”
딱히 제가 고생하진 않는데, 재중의 말에 섞인 농조를 읽지 못한 건지 허둥지둥 윤호의 눈치를 보던 준수가 재중의 옆에 앉아서도 안절부절못하고 파닥거렸다. 가만히 좀 있으라 준수의 어깨를 눌러 앉힌 재중이 수박을 달라 윤호에게 손을 벌렸다.
“근데 호는 안 더워?”
“예, 저는 체열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맞다. 작년에도 물어본 것 같아. 손 차갑게 해서 줘.”
작년에도 똑같이 그리 해 달라 하셨으면서, 어려운 일도 아니니 조금 몸의 체열을 낮춰 윤호가 손을 살짝 내밀자 재중이 그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여름 열기로 인해 분홍색으로 상기된 보들한 볼이 손등에 닿아오는 감촉이 새로워 윤호가 몸을 굳히자 재중이 조금 더 손을 당겨 푹 뺨을 묻었다.
“많이 낮아지는 거야?”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너무 체온이 낮아지면 몸에 무리가 가니까요.”
“근데 되게 시원해.”
어느새 준수가 샘에서 나와 신을 신고 있는 걸 본 재중이 샘에서 폴짝 뛰어 윤호가 펴 놓은 면 위에 올라섰다. 궁녀가 가져다 준 면으로 재중의 발등과 가느다란 발목까지 물기를 닦아낸 윤호가 버선에 신까지 다 신겨주고 허리를 폈다.
“호는, 궁녀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잘 챙겨?”
“모친께서 몸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제가 챙기는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많이?”
“많이 편찮으시지는 않습니다.”
또 금세 걱정 어린 눈으로 변해버리는 재중에게 가야 한다 윤호가 조금 재촉했다.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어두워져버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혹시 몰라 뒤를 따르는 시종에게 우산을 준비하라 하고 윤호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다고 해서 재중과 준수 때문에 빨리 걸을 수도 없었지만. 다행히 재중의 처소에 당도하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안도 섞인 한숨을 뱉고 윤호가 재중에게 들어가시라 조심스럽게 조그만 등을 손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비가 올 거라고 칭얼거릴 것이 분명했기에.
어차피 장마 때 윤호는 퇴궁하지도 못하고 재중의 처소 주변을 지켜야했다. 언제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에. 준수도 작은 뒷방 처소에 넣어주고 윤호가 문지기들의 인사를 받았다. 제 행동이 보모보다 더 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뒤에서 보모라고 불려도 할 말은 없다. 툭툭,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기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장마의 시작이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놀라 눈을 떠버린 재중이 보드라운 면으로 된 금(衾)을 당겨 쥐고 귀를 막았다. 보통 비단으로 만들지만 비단의 미끈거리는 느낌이 싫어 일부러 궁녀에게 부탁해 면으로 만든 금(衾)이었다. 번쩍하고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걸 봐서 금방 천둥소리가 들릴 거였다. 어릴 때부터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겁이 많아 유모를 불러 놓거나 했었는데 지금은 윤호를 불러야 하나 망설이다 재중이 궁녀를 부르려 살짝 일어나는 순간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 놀라 귀를 막고 있다가 다시 재중이 일어나 궁녀를 불렀다.
“마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궁내에 좌장군이 있는 지 알아보고 혹시 있으면 좀 와 달라 해 줘.”
“정장군님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응.”
대답과 함께 궁녀가 물러가고 재중이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계속 불러대 혹여 화가 나지는 않을까 조금 겁이 났지만 윤호가 그럴 리 없다 자신을 다독이고 재중이 아예 일어나 앉았다. 다시 잠들기는 힘들 것 같았다.
“마마, 장군님께서 곧 오겠다 하셨습니다.”
항상 장마가 시작될 쯤에는 퇴궁하지 않고 윤호가 궁내에서 밤을 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딱히 윤호가 온다고 해서 달래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재중이 다시 잠들 때까지 앉아 기다려 주곤 했다. 그래도 윤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중은 조금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다.
“마마.”
“응, 들어 와. 얼른.”
윤호가 들어도 되겠냐고 묻기도 전에, 궁녀들이 문을 열기도 전에 재중이 쪼르르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이리 나오시면 안 됩니다.”
하얀 침의만 입은 채 잠이 완전히 깬 눈으로 올려다보는 재중을 윤호가 살짝 나무랐다. 아랫것들이 해주는 일을 하시지 마시라고, 어렸을 때부터 높임이란 높임은 다 받았으면서 그 높임을 부담스러워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아무리 성품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것도 문제였다.
“비가 많이 옵니다.”
“젖었어.”
“많이 젖지는 않았습니다.”
가죽으로 된 우비를 덮어쓰고 오긴 했지만 다리부분이 젖어 눅눅했다. 침상 옆에 의자 하나를 끌어 와 앉은 윤호가 툭툭 젖은 부분을 털었다.
“예 있을 터이니 침수 드세요.”
“잠이 안 와.”
“그래도 내일 진시에 폐하께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눈 감으세요.”
그래도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주어서 다행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살짝 실눈을 떴다가 윤호와 눈이 마주치면 다시 눈을 꼭 감으면서 장난을 치긴 했지만.
“장난치지 마시고.”
“잠이 다 깨버렸단 말이야.”
“그럼 제가 나가있는 것이…”
“아니, 아냐! 잘게, 잘래.”
2년 만에 재중을 다루는 방법을 익힌 윤호였다. 가슴까지 금(衾)을 올려 덮고 곧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던 재중이 살짝 다시 눈을 뜨고 윤호를 바라보다 사르르 웃어버리는 걸 보고 윤호가 고개를 비틀어 올렸다. 눈을 마주치질 말아야지, 계속 마주대고 있으면 끝이 나질 않을 게 뻔했다.
잠이 다 깨버렸다더니 금세 잠들어버린 재중의 옆에서 한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윤호가 덜컹거리는 의자 소리가 나지 않게 일어났다. 방울방울 처마를 타고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를 울리고 멀어졌다. 소리를 내지 말라 궁녀들에게 조용히 명하고 빈 집무실을 찾아 들어가 의자에 앉아 윤호가 눈을 감았다. 언제 또 부르실지 모르니 그를 대비해서 귀는 열어두는 걸 잊지 않고.
“호는?”
“정장군은 아마 잠시 댁에 들어갔을 겁니다. 어제 궐내에서 밤을 새는 바람에…”
“오늘 안 오는 거야?”
“신시쯤에는 입궁할 듯합니다.”
“기다려야 하는구나.”
“마마, 포도가 들어왔는데 드시겠어요?”
“응, 조금만.”
처음에는 호, 라고 부르면 누군지 몰라 궁녀들이 당황했지만 이제는 윤호를 말한다는 걸 재중이 거하는 궁내의 궁녀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중이 수련정을 워낙 자주 가기 때문에 수련정의 궁녀들도 알고 있었고. 궁녀들은 재중 덕에 윤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까지 다 꿰고 있어야 했다.
“마마,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세요.”
“방금 닦았어. 준수는?”
“아마 밖에 있을 터인데, 데리고 올까요?”
“응, 글공부 했는지 확인해야지.”
태사가 그랬던 것처럼 재중도 준수에게도 외워야할 것을 잔뜩 주었다. 물론 준수는 바빠서 다 외우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래도 반쯤은 외워두었겠지, 윤호가 없는 동안 준수에게 글이나 가르쳐야 할 것 같아 벼루와 붓을 꺼내들었다.
“마마, 부르셨어요?”
“응, 이리 와서 앉아. 포도 들고 왔네?”
“네, 김상궁님이 많이 주셨어요.”
“같이 먹으라고 주셨나 보다, 앉아.”
“예? 예.”
매번 휘청거리면서 넘어지고 하는 재중이 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써 준수는 물 흐르듯 움직이는 재중의 손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와, 하고 감탄이 나올 것만 같은 움직임. 태사께서 스치는 말로 명필이라 하신 것이 빈말이 아니었다.
“이만큼 배웠는데, 얼마나 외웠어?”
“외우긴 다 외웠어요, 마마.”
“정말?”
“쓰지는 못하지만… 무슨 글자인지는 다 알아요.”
그걸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외웠냐고 신기하다는 듯이 재중이 준수를 바라보자 그게 민망했던지 준수가 시선을 피해 고개를 폭 숙였다. 예전부터 글이 너무 배우고 싶었지만 궁녀들 중에서 글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고 또 자신을 가르쳐줄만한 사람도 없었다. 재중이 글을 가르쳐 주겠다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금방 배우겠다. 그럼 오늘은 이만큼 하자.”
“예, 마마.”
“포도 안 먹어?”
포도 알맹이를 쪽 빨아 먹고 궁녀가 세심하게 같이 반상에 올려놓은 물수건에 재중이 손끝을 문질러 닦았다. 달콤한 음식을 워낙 좋아해 과일이나 과자에 사족을 못 쓰는 재중이었다. 그래서 재중이 먹는 찬도 굉장히 달았다.
“맛있다, 좀 남겨두라 해야지.”
살짝 문을 열고 궁녀를 불러 포도가 남았는지 묻고 남았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재중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나중에 호, 오면 더 가져다주어.”
“예, 마마.”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어떤 모양인가 외우려고 하는 준수에게 재중이 획순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그어주며 익히게 했다. 뜻과 음을 알려주고 읽는 법까지 알려주고 나자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어 준수가 중얼거리면서 외우는 걸 옆에서 가만 보고만 있다 밖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재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다.”
“예?”
놀라 고개를 드는 준수를 두고 재중이 문을 열어젖혔다. 마마, 하고 놀라 부르는 준수의 목소리가 채 들리기도 전에 툭, 재중이 문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마마, 제발 조심하시라 제가…”
“호가 잡아줄 거 알았는걸.”
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뻔해서 놀랄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줄 줄 알았다는 재중의 말에 놀란 가슴을 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윤호가 눈만 감았다 떴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서 떨어지는 건 막았지만 만약 잡지 못했다면 크게 상할 수 있었던 터라 들어가서 크게 혼을 내두어야지, 하고 어차피 시도도 하지 못할 다짐을 했다. 바닥에 발이 닿도록 윤호가 재중을 내려놓고 뒤에서 놀라 있는 준수에게 들어가 있으라 손짓을 했다.
“마마, 제가 항상 조심하시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이런 걸로 크게 다치지 않잖아.”
“계단에서 떨어지는 것인데 어찌 크게 안 다치십니까, 게다가 돌계단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호가 받아줄 거잖아.”
“그럼 제가 없으면 어쩌시려구요.”
“…없어?”
“만약 제가 없을 때는 어찌하실 겁니까.”
“없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호가 없을 때는 시종들이 졸졸졸 따라다니는 걸.”
없을 리가 없다는 단호한 재중의 말에 윤호의 얼굴이 덮개라도 씌워진 듯 삭 굳어졌다. 며칠 전에 내려온 공문 때문이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그 공문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지방 도독으로 명한다는 내용이었고 거절의사가 있다면 거절해도 좋다 하였지만 그 말 자체가 거절하지 말라는 뜻과 상통해 있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마마. 아무리 그래도 위험하니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응, 안 그럴게. 맞다, 포도 맛난 거 있어. 먹을 거지?”
“저는 괜찮습니다.”
“일부러 호 몫까지 남겨 두었는걸.”
“예, 그럼 주세요.”
“응.”
너무 제게 익숙하게 만들어서 죄송스러워졌다. 태사가 바뀌었을 때처럼 앓지는 않으실지. 조금 말라버린 입술을 축이면서 저를 올려다보는 준수의 동그란 머리를 윤호가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 그리 외로워하지는 않으시겠구나 싶어.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 윤호를 기다린다고 재중이 아예 문 밖에 나와 섰다. 사정을 알고 있는 궁녀들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재중의 유모였던 김상궁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이 궁내에서 재중에게 제일 약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또 눈물을 커다란 눈에 잔뜩 달고 매달릴 게 당연한 재중을 달랠 수 있을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마.”
“호가 안 와. 늦은 적 없는데,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정장군은 오늘부터 상주(尙州)지방 도독으로 명을 받았다 합니다.”
미리 말하고 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윤호도 재중의 반응을 예상하고 차마 입도 떼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난감함이 가득한 유모의 말에 재중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발갛게 칠해놓은 듯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조금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멍하니 정신을 빼고 있던 윤호였다. 왜 그러냐고 몇 번을 물어도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해 믿고 있었는데.
“상주?”
“예.”
“언제 오는데?”
“그것이…”
확실히 언제 돌아온다고 대답해줄 수 없어 상궁이 한참을 망설였다. 어리다고 해도 그걸 읽지 못할 재중이 아니라 빤히 보던 시선을 거두고 툭툭 옷자락을 털면서 일어났다.
“마마, 괜찮으셔요?”
“응, 괜찮아.”
방 안에 놓아둔 연꽃이 아직 시들지도 않았는데,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아직도 청남색 비단자락에 손에 쥐여져 있는 것만 같은데, 까마득하게 높은 시선을 무릎을 굽혀 맞추어주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옷자락을 잡아당기곤 했는데.
“오는 거야?”
“무관들이 대부분 거치는 과정이니까요, 아마 곧 돌아 올 겁니다.”
“응, 알았어. 유모, 타래과―”
“예, 준비해두라 하겠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상궁을 보내고 재중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연꽃잎을 쓰다듬었다. 윤호가 검을 쓰는 걸 보느라 연꽃 같은 건 벌써 잊고 멍하니 그 움직임만 시선에 두고 있었다. 항상 너무 신경을 많이 쓰게 해서 미안한 마음만 가득이었지만 이렇게 언질 하나 없이 가버리다니.
“빨리 와, 호 없으면 넘어져도 잡아줄 사람이 없잖아.”
억지로 방싯거리는 웃음을 만들고 재중이 연꽃을 다시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준수를 불러다 글공부를 하자 그래야지, 옆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걸음을 조심조심 내딛으면서 재중이 뒷방 문을 열어 준수를 불러냈다. 허전한 옆을 느끼지 않으려 애써 옆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원래 황자님이 13세인 건 앞부분에 도입으로 짧게 넣으려고 했던 겁니다. 딱히 뭐 이별이라던가, 견디기 힘들다던가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다음편은 16살이 된 제제와 23살이 된 윤호가 다시 만나겠네요.
++)높임법을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상대높임법과 객체높임법에 의하면 윤호가 재중에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모친께서 몸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제가 챙기는 것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 "모친이 몸이 안 좋기 때문에~" 로 바꾸어야 하거든요..하지만 그러면 너무 어색한 것이 많아서 그냥 익숙한대로 쓰고는 있습니다만..;ㅁ; 아무래도 익숙한대로 쓰는 것이 좋겠죠?
+++)너희가부럽다 님, 윤호추종자님, 다시김준수님, 그들은운명님, 외사랑소녀님, 윤호껀내꺼님, 말레님, 가끔은정상님, Everlasting님, 체리공주 님, 어깨춤님, 비혈준수님, 검정버섯님, 에리카 님, 왕에뿜김재중님, 하얀밀가루님, CARI님, 傾國之色在中님, 동방네주인님, 적빛윤호님, 듈씨이님, 세상의중심님, 은타님, Heroism님, 카아는하나님, 가시나무새님, surosy님, 백시님, 렘수면님, 까미유님, 마담언니님, 이런말도안돼님, 삼두타고두둥님, 원돌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
다음편엔 어느정도 커진 재중을 만나겠네요...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해요...윤호도 재중일 만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ㅜ.ㅜ
이야~~~ 내용이 옛날꺼네요~ 사극.. ㅋㅋ 맞나??? 힛^^ 재밌어여~~ 저번편도 엄청나게 재밌게 봤는뎅.. ㅋㅋㅋ 님의 소설 열심히 기다릴꼐여~~~~~~~~~~~~~~~
시험완전히끝나고오늘모의고사봐서빨리끝나서들어왔는데 아이쿠반가워요~~~~~~~~~~~~~~~~~ 완전 다음편도기달리고있을게요~!
굿굿굿 이번편도굿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서서히 크고 있군요 으항항.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건필하세요~
우허우허......;ㅅ; 다음편.......ㄷㄷㄷ 이 달달하고 말랑한 제제가 윤호없이 자랐겠군요-_ㅠ 역시 재중이는 정이 맣고 만들거릴 때가 젤 예뻐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재중이 왜케 귀여워여 으엉 어뜩해
오오 - 빠른 성장! 그래도 좋다는'ㅅ',, 아 - 귀여워 죽겠네 - 글쓰시느라 고생하셨어요 -
아 최고예요 정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아우, 진짜 달달하고 글 완전 잘쓰시고 진짜 장난아니에요ㅠㅠ
엄마 !!! 왠일이야 증말!!!!!!!!!!!!!!꺄아아아아아아..ㅠㅜ 왜 그냥 갔어 ㅠ 흑흑
이열~ 점점 흥미 진진해지는데요? 아 담편 고고~
흥미진진!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윤호가 원망스러울 만한데도 돌아오리라 믿고 꾹 참고 있는 재중이가 참 대견스럽네요~
역시 제 생각대로 준수가 시동이였네요, 윤호의 떠남으로 인해, 재중이가 앓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윤호야, 빨리돌아와ㅠㅠㅠ
글솜씨가 너무 좋으신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