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황사를 비롯한 해남의 풍광을 돌아본 후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로 들어간다. 1984년에 준공된
길이 484m의 사장교인 진도대교 한 복판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물살은 빠르고 바닷물은 여기저기서
용솟음치고 있다.
[진도대교;라이즈님 작]
1597년 9월16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군선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명량대첩은 여기 울돌목
조류를 활용해 얻은 승리였는데, 울끈불끈 솟아오르는 웅장한 물살 속에 장군의 비장한 자세와 호연지기가 겹쳐
떠올라 외경심이 든다.
]
다리를 건너니 진도다. 진도는 호남정맥 상에서 서남으로 뻗친 달마지맥이 서해에 이르러 침강한 결과
생긴 섬으로서, 섬 안에는 금골산(▲194m), 첨찰산(▲485m), 여귀산(▲452m), 지력산(▲325m), 백야산
(▲251m)의 5개 산군이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섬의 사면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수려한
경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과 바다는 섬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켜 왔다. 따라서 진도에선 많은 예술인들이 배출되었고, 지리적으로 외부지역과 단절되어
있다 보니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예술이 형성되어 왔다. 진도에 가면 세 가지만큼은 자랑하지 말라 했다.
글씨와 그림, 노래가 그것이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485m) 자락에 이르니 아담한 쌍계사와 ‘한국 남화의 성지’라 불리는
운림산방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찰인데, 절집 자체
보다는 뒷편의 첨찰산 상록수림이 더 인상적이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생달나무를 비롯해
50여 종의 상록수가 우거진 이 숲은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생태적 가치가 큰 곳이다.
운림산방은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은 뒤 남종화(동양화는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뉘는데, 남종화가 부드럽고 추상적인 반면 북종화는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화풍이다)의 대가가 된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9~1894)이 만년에 거처하던 화실이다.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루었다 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이란 이름이
붙었다.
[☞운-1 첨찰산자락의 운림산방과 연못]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82년 그의 손자 허건에 의해 복원되었고, 현재 운림산방 안에는 소치의
생가와 화실, 소치와 후손들의 그림이 전시된 소치기념관이 질서 있게 자리하고 있다. 기념관 안에는 허씨 집안
4대(허련, 그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증손자 허문)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운-2 소치 기념관]
직원들이 아직 출근을 안 한 이른 아침에 산방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은 너른 잔디밭에 밝고 명랑하게 퍼지고 있고,
청아한 새소리는 산방 안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너른 잔디밭을 가로 질러 왼쪽에 보이는 연못으로 다가 갔다. 방지는 한면이 35m 가량 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서있다. 연못 안에는 수련이 가득하다.
산방의 연못은 이른바 방지원도(方池圓島)라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네모난 연못은 땅을 비유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다는 것이다. 안압지와 같이 연못 가장자리에 굴곡을 두지 않고 언뜻 보면 무미하다 싶을 정도로
직사각형의 단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못 안에선 첨찰산이 거꾸로 들어 앉아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고, 분홍빛 수련은 파문에 흔들리며 그 옛날 자기를
바라보며 날렵하게 붓을 놀리던 화가를 기억한다.
[☞운-1 첨찰산자락의 운림산방과 연못]
[연못에 비친 운림산방;수평선님 작★편집시 삭제]
방지를 돌아 운림산방으로 간다. 산방에 이르는 길은 정면의 방지로 인해 측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소롯길 좌우에 시립한 향나무, 쥐똥나무, 사철나무 등은 은근히 산방을 깊숙한 처소로 만들고, 툇마루 앞
파초는 아직도 그 옛날 화가주인의 감성을 못잊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큰 잎을 출렁이고 있다. 소치 허련이
화실로 사용하던 이 작은 기와집은 특별한 치장이 없이 단아하다. 검박한 그의 생활이 엿보인다. 하긴 이 집이
여늬 아흔 아홉간집처럼 높직하다면 사람들은 이를 화가의 집이라 하지 않고 무슨무슨 벼슬을 한 이의 집이라
할 것이다.
[☞운-3 운림산방]
[운림산방;라이즈님 작★편집시 삭제]
허련은 조선 순조 9년(1809)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부터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 초동(樵童)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인연법은 참으로 묘해서 소치는 여기서 사람과, 그리고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다. 윤선도 고택에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화첩이 있어 전통 화풍의 맛을 다소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허련은 다시 윤선도
고택에서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에 거처하던 초의선사의 시동이 되어 시서화와 차를 배우게 된다. 봄이 되면
하루 종일 산에서 야생 찻잎을 따고, 초의선사가 가마솥에서 찻잎을 덖어 내놓으면 그것을 비비고 말렸으며,
마당 한 귀퉁이에 솔방울을 모아 화덕에 넣고 주전자를 올려 찻물을 끓였다.
초의선사는 허련의 그림 재주를 알아보고 한양의 추사 김정희에게 소개한다. 허련은 31세 때인 1839년부터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워 중국 대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익혔다. 그는 원나라 말기 산수화의
대가인 대치(大痴) 황공망의 화풍을 익힌 뒤로 자신의 호를 소치(小痴)라 하였다. 그 즈음부터 추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평하였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쳐 여러 차례 왕을 알현한 뒤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소치는 점차 시서화에 뛰어난 삼절(三絶)로 칭송받으면서 해남 우수사 신관호,
다산의 아들 학연, 민승호,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의 유명인사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그는 스승인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 위로하기도 했다. 1856년에 추사가 죽자, 소치는 다음 해에
한양을 떠나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 뒤 자신의 이름도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의 왕유를 본떠 허유라고 개명한다.
[꽃사과가 피어 있는 소치의 생가 입구;라이즈님 작★편집시 삭제]
[홍매가 운치있게 피어 있는 소치의 생가;라이즈님 작★편집시 삭제]
운림산방 뒤꼍에는 초가집 한 채가 잠잠하고 다소곳이 들어서 있다. 잔디가 깔린 생가의 바깥뜰을 거닐면서
초가집을 바라보니 멀리 앞산의 중턱에 걸린 초가지붕 주위로 친근한 감나무며 대추나무, 꽃사과, 홍매 등이
솟아올라 있고, 돌담장에는 마삭줄, 할미밀빵 등이 뒤덮고 있으며 돌담 아래로는 맥문동이 가지런히 깔려 있다.
전형적인 고향집 그림이다.
[☞운-4 허련의 생가 바깥뜰]
바깥뜰을 한 바퀴 둘러보고 생가로 들어간다. 연도에는 편평한 돌이 깔려 있고, 길 좌우에는 맥문동이 나무 그늘 아래서
짙은 녹색의 길고 풍성한 잎을 시원스레 펼쳐보이고 있다.
[☞운-5 돌바닥이 깔려 있는 생가 입구]
[☞운-9 담 밑의 맥문동 군락]
맥문동은 백합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본으로 중국이 원산지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도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중부이남의 산과 들의 그늘지고 습한 곳에서 자생한다. 뿌리가 보리(麥)와 닮았고 겨울에도 얼어죽지 않는다고
하여 '맥문동(麥門冬)'이란 이름이 붙었다. 꽃은 총상화서로 6∼7월에 엷은 자색꽃이 피고, 장과는 구형이며
흑백색으로 정원에 심어 관상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뿌리의 괴근은 약용으로 쓴다.
보통의 풀들은 그늘진 곳에서 잘 자라지 못하지만 맥문동은 어두울 정도의 나무 그늘 아래서도 견디는 힘이 커서
공원이나 정원의 지피식물(地被植物)로 흔히 활용되기도 한다.
[맥문동;풀꽃정원 인용 ★편집시 교체]
생가 안뜰로 들어가니 앞마당은 작으나 단정하고, 오른쪽 담 밑에는 예의 맥문동이 길게 펼쳐져 있으며, 저 쪽
끝 담장 안으로는 파초가 껑충 솟아올라 있다.
[☞운-7 소치의 생가 안뜰]
남도의 화가집에서는 으레 파초 하나쯤은 심어놓고 완상한다. 파초는 쌍떡잎식물 생강목 파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중국이 원산지이다. 멀리서 보면 나무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줄기가 녹색이고 가을이면 잎이 마르는 풀이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그 넓은 잎새와 잎새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아주 운치 있게 여겼으며 그 심취의 멋을
풍류(風流)삼아 명상에 들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소치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에 와서 살고 있는 이 파초를 볼 때마다 존경하던 스승 추사가 이 세상을 떠나고,
또한 철종 임금 곁을 떠나 온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파 초
-----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월광>(1936) -
[☞운-6 파초]
옛날 얘기에도 파초가 등장한다. 한 선비가 여름밤에 혼자 앉아 글을 읽고 있는데 방문 열리는 기척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언제 들어왔는지 한 미인이 방안에 들어와 서 있었다. 선비는 무척 놀라 '어디서 오신 분인가'고 물었다.
그 여인은 아주 공손한 어조로 '자기도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 답하고는 뜰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선비는 궁금하고
묘한 감정을 제어할 수 없어 곧 뒤를 쫓아가 그녀의 팔소매를 잡았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대로 뿌리치고 어디론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는 한참동안 허전한 마음을 쓸어내다가 문득 자신의 손 안에 뜯겨진 여인의
소매 자락이 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뜻밖에도 그 옷소매는 파초 잎새였던 것이었다.
선비는 그날 밤을 꿈을 꾸듯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뒤 날이 밝자마자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파초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파초의 잎새가 찢겨져 있어 들고 있던 조각을 맞춰보았더니 파초 잎의 뜯겨진 부분과 꼭 들어맞았다..
그립고도 그리운 이여!
소치는 파초를 보며 그리움을 삭였으리라.
[☞운-10 파초가 서 있는 풍경]
생가를 나와서 잔디밭을 가로 질러 기념관으로 간다.
[☞운-12 기념관을 향해서]
[운림산방과 기념관 ★편집시 삭제]
[☞운-15 중정]
중정을 가로질러 작은 배수로가 갈지자로 나있다. 규모 있는 한옥 건물 중정에 배수로를 이와같이 갈지자로
냈다면 이는 어울리지 않는 장치이다. 만일 배수로를 낼 양이면 직각으로 깔끔하게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단순한 배수로가 아니라 곡수를 표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런데 곡수 가장자리에 놓인 돌들은 화강암을
정방형으로 쪼아 만든 것들이어서 운치가 따르지 않으니 곡수라 보기엔 또 무리가 따른다. 평상시 이 곡수엔
물도 흐르지 않는다. 참으로 어정쩡한 곡수다.
[☞운-18 곡수]
회랑에 서서 소치 생가를 바라보니 생가는 회랑의 중앙선 상에 위치하였다. 소치의 영혼이 마당을 거닐다가
파초잎에 구르는 이슬방울을 타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회랑으로 들어와 쉽게 기념관을 둘러보게 하기 위한
배려인가 보다.
[☞운-16 회랑]
소치가 서화에 뛰어나므로 민영익은 그를 일컬어 '묵신(墨神)'이라 했으며, 정문조는 여기에 시를 더하여
삼절(三節)이라 하였고, 추사 김정희는 중국 원나라 4대 화가의 한 사람인 대치(大痴) 황공망에 견줄만 하다
하여 소치(小痴)라 했다. 그만큼 소치는 당대의 거화였다.
이를 기려 1980년에 세워진 소치기념관에는 한국화 6점, 서예 9점, 사군자 8점, 민속유물 176점, 수석 95점,
고서 33점, 복사품 97점이 전시되어 있고, 소치(小癡) 허유(許維)의 작품 외에 그의 자손인 미산(米山)
허형(許瑩), 남농(南農) 허건(許健), 그리고 증손자인 허문까지 4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운-14 정면에서 본 전시관]
[☞운-20 전시관 내부]
한국식 전통 조경의 핵심은 자연에 순응하는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공간과 주변 환경을 조화롭게 꾸미는 데 있다.
소치는 첨찰산 자락 운림산방에 돌아와 이제껏 익힌 자연미학을 바탕으로 정원을 꾸민다. 집 앞에 방지원도를 만들어
배산임수의 명당을 만들고 첨찰산의 경관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으로 자연 속의 삶을 영위한다.
여기에 갖가지 야생화를 심어 자연미를 더하고 계절 따라 피고 지는 변화를 즐긴다. 맥문동으론 기를 보하고 파초를
심어놓고선 왕과 조정과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김질한다.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정경을 산방 안에 들여놓고 배를 타고 낚시를 즐기거나 구름 속에 묻힌 산을 오르기도 한다.
오늘은 객이 대신하여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야생화를 탐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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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포엔 맛있는 차로 유명한 하당에 "운림방"이라고 있지요..시와 그림 차가 있는 곳에서 여유를 가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