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남 도 국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농사일만 전념한 농부였습니다. 남자 인자 수 자 (南仁守) 님, 일제 통치가 극에 달했든 1899년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날도 시도 모르는 때에 부모님을 따라 강 건너 구산리 뒷들 마을로 이주해와 우리 칠 남매 육 형제를 낳고 정직과 성실을 모토로 오로지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살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를 키워오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잘 살 수 있다” 는 신념 하나로 본인이 손수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실행해 보이면서 모든 식구가 그분을 따라 움직이며 살아가기를 철칙으로 삼고 살아왔으며 세상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그 어른도 1974년 8월 추석을 나흘 앞두고 78세로 일생을 마감하고 소천하셨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러했고 세월의 요구에 따라 몸은 힘들고 고달파 땀이 몸에 배어 마를 날 없이 더운 날 뙤악볕에서 논과 밭을 일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그분은 그분 스스로 흔적을 부지런과 근면을 지키며 살아온 작은 청지기 농부셨습니다.
일흔 살 될 때까지 힘에 지치면 자리에 앉아 쉬는 법 없으시며 그 자리에 선체 후 긴 호흡 몇 번 내쉬며 굽은 허리를 바로 펴는 것 외에는 항상 움직이는 동체였습니다. 무엇이든 만지고 치우고 정리하고 내다 버리는 일들로 손과 발을 정지시키는 일은 없고 오직 잠자는 시간만 예외였고, 또 남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인정이 많으신 분으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손꼽히는 정직 우매하신 분이셨습니다.
육체적 노동으로만 살아오셨지만, 칠십을 넘으면서 그렇게 강한 분도 한계점을 느끼면서 우리 보는 앞에서도 벅차다 힘들다 하며 내려놓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움직임이 느려지고 몸이 아픈 신호를 보내오며 마땅한 병원도 약국도 없는 시골에서 수소문으로 들은 이 약 저 약을 찾아 드시며 바르고 붙이고를 하셨지만, 팔십을 채우지 못하고 그래도 장수했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1974년 8월 11일 낮에 숨을 거두시고, 그분이 손수 지정한 소골 정상의 따뜻한 자리에 안치되셨습니다.
그분 말씀 중 일화, 이야기할 때, 미쳐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거시기”로 대처합니다. “거시기”가 그분에겐 대명사요 대체 형용사입니다. 듣는 우리는 그래도 잘 알아듣다가 때로 잘못 알아들으면 그게 아니 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기억을 더듬어 어떻게 든 바르게 알리려 애쓰시든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그거 있잖아“ 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시기“ 와 ”그거 있잖아“ 는 우리 집의 대화 중의 단골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모두 ”그시기“와 ”그거 있잖아“ 를 대화 단골 대명사로 사용하며 지금까지 살아옵니다, 우리 아버지 살아생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깊이 있는 인생철학을 간절하게 되새겨 소천하신 50년에 우리 아버지의 숭고하신 철학을 추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