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108) 구리돈 반 문의 청부 거북이처럼 느린 자가 미친놈처럼 입만 살았다고 하여 귀광두(龜狂頭)라 하였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 지금 비무장 주변에 모여든 중인들 누구도 귀광두를 미쳤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광두가 일궈낸 두 번의 승리는 일상적인 비무에서 승리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던 탓이다. 진파룡(震琶龍) 양천리(梁天理)에게 승리함으로써 신진십룡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고, 무림의 전설이라 불리는 혈영고루강시마저 갈가리 찢어버렸다. 도검이 불침하는 신체를 가졌다는 강시가 아닌가. 이곳 숭산에 모인 무인들 중 혈영고루강시를 없앨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있을지. 채 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일할 안에 속한 사람이 귀광두였다. 무인들은 다시 한번 소림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더구나 귀광두는 소림의 정식제자가 아닌 속가제자라 했다. 정식제자보다 열악한 조건에서 무공을 익힌 속가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귀광두 천하를 지배하고 있다는 남천벌과 마교 무인을 꺾었다. 천붕회를 천외천이라 불렀던 이유가 귀광두를 통해 입증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혼자서 비무를 치르겠다고 폭탄 선언까지 했다. 이제 남은 곳은 북황련. 비무장에 모여있던 군웅들의 시선이 북황련 건물로 향했다. “총사, 구룡전장에서 돈을 인출한 놈이 귀광두라 했던가?” 훤하게 뚫린 창 너머로 비무장을 주시하며 위지천악은 제갈승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련주님.” 짧게 대꾸하며 제갈승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상황에서 위지소령에 대한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그동안 누차에 걸쳐 귀광두에 대해 말이 오갔다. 모주앙(毛周央)과 만우순(滿右淳) 그리고 칠사(七邪)의 일인인 장마(長魔)를 죽인 자가 그라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내가 무림왕이 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림왕. 지금껏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말이다. 처음엔 동창제독의 말에 혹하여 제일 먼저 비무를 수락했다. 승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처소로 돌아와 차분히 생각을 해보니 무림왕 자리를 준다하여 덥석 받을 게 아니었다. 동창제독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북황련은 그의 휘하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닌, 하후장설의 명령을 받들어야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가 무림왕이었다. 관부에 빌붙기 위해 오십 년 세월을 투자하여 북황련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득(得)과 실(失)이 다 있습니다.” “……?” 위지천악은 말없이 제갈승후를 보았다. “득이라 함은 무림을 장악하는 데 동창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고, 실(失)이라 함은 동창제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만일 동창제독이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다거나, 아니면 어떤 세력의 일원이라면.” “죽 쒀서 개준 꼴이 된다는 말이구나. 알아 봤느냐?” 위지천악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천붕회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림세력이 신경 써야 할 일이다. 황실 권력을 쥐고 있는 하후장설이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림왕이라는 대단한 미끼를 던져 천붕회를 없애려 하고 있다. 황실에 관련된 일이라 보기엔 너무 엉뚱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지금 정리 중에 있습니다.” “그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요광을 내보내라.” “요광이라면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흠칫 굳어진 얼굴로 제갈승후는 위지천악을 쳐다보았다. 요광 또한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귀광두가 강기를 구사하는 고수지만 요광이 전력을 다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다. 막요광은 그만큼 강자였다. 하후장설이 어떤 세력과 연관이 없다면 예정대로 천붕오천멸살지계는 진행되어야 하고 그 중심에 귀광두가 있어야 한다. 해서 하는 말이었다. ‘혹시…….’ 일순 제갈승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마 전 잠영루 사건 이후 막요광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충분히 이용할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위지천악은 그런 상황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문득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건 육감이 보내는 경고였다. 이럴 때는 의견이 필요 없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건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일이다. 제갈승후는 조용히 위지천악이 다시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우리 북황련에도 귀광두 같은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군웅들에게 알려야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알겠습니다, 련주님!” 제갈승후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북황련 진영에서 온몸에 철삭을 친친 휘감은 막요광이 비무대를 향해 걸어 나왔다. “식인혈삭(食人血索)이다!” 막요광을 발견한 누군가가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비무대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잠영루를 멸문시켰을 때 혈삭마령인이 보여주었던 잔혹함은 지금도 무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다. 그 혈삭마령인의 수장인 식인혈삭이 귀광두의 상대로 등장한 것이었다. 오 척 단구의 작은 키였지만 요광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여느 무인 못지 않게 대단했다. 비무대를 가로질러 천천히 걷던 요광은 백산과 삼 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혈영고루강시를 없애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더럽구나.” 막요광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막요광의 기분은 엉망이었다. 혈삭마령인의 수장 그리고 북천지옥대의 서열 사 위, 북황련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다. 그런 자신에게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신진과 비무를 벌이라니. 설령 비무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전적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빠른 시간에 끝내지 못하면 북천지옥대의 명예만 실추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련주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해라.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정리를……. 이 놈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막요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처음 비무장에 들어올 때부터 녀석은 이편을 보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듯, 지금껏 비무대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관을 봐야 눈물을…….” “조용히 좀 해, 난쟁이 새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안 보여!” “이런 죽일 놈이!” 백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막요광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난쟁이였던 탓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키가 작아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난쟁이라 놀린 아이들과는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북천지옥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시기에 들어왔던 죄수들조차도 작은 키를 비웃었다. 하지만 일 장 길이의 철삭을 무기로 택한 다음부터는 누구도 놀리지 못했다. 난쟁이란 말을 꺼내는 자는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음으로. 그렇게 식인혈삭이란 별호를 얻었다. “그러니까 난쟁이 소리 듣기 싫으면 조용히 하란 말이야 자식아.” 다시 막요광을 향해 고함을 지른 백산은 조금 전 쳐다보았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 유몽과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살수 너는 난쟁이 새끼를 내게 양보하겠다 이 말이지?] 두 사람의 전음 내용은 다름 아닌 막요광의 처리 문제였다. 먼저 유몽에게 전음을 보낸 사람은 백산이었다. 그를 살려줄 건지 아니면 만인이 보는 가운데 없애 버릴 건지를 물은 것이다. [그놈말고도 혈삭마령인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알았어. 천천히 아주 고통스럽게 없애주지.]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이편을 노려보는 요광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듯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방금 난쟁이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 수락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청부자는 비무대 위로 청부금을 던져라!” 비무대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귀광두에 대한 조금 전까지의 평가를 번복해야 했다. 귀광두는 미친놈처럼 입만 살아 있는 게 맞았다. 다른 자도 아니고 식인혈삭 요광을 향해 난쟁이라 부르는 것도 부족하여 청부를 받다니. 그를 청부할 자도 없을뿐더러, 설령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가 청부를 할 것인가. 쉬익! 하지만 예상을 깨는 소성이 중인들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비무대 주변 어디선가 날아온 뭔가가 귀광두 발치에 떨어진 것이었다. 놀랍게도 청부자가 있었다. “세상에……. 저건 구리돈 반쪽?” 멀리 떨어진 거리임에도 알아차린 무인이 있었을까. 어디선가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반적으로 구리돈 천 문 정도를 은자 한 냥으로 치고 있다. 그런데 식인혈삭의 목에 대한 청부 금액은 구리돈 한 문도 아니고 반쪽이었다. “쯥! 난쟁이 너도 참으로 안됐다. 목 위에 달린 물건값이 구리돈 반 문이라니. 아마 원래는 한 문이었을 건데, 난쟁이라서 반으로 줄었나 보다.” 바닥에 떨어진 반쪽의 구리돈을 주워든 백산은 요광을 보며 이죽거렸다. “죽여주겠다, 놈!” 철컹!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요광의 몸에서 일제히 철삭들이 풀려 나왔다. 그리고, 그 철삭들은 지면에 뿌리를 내린 듯 박혀 들고, 요광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일순간에 요광은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일 장 크기의 괴물로 돌변했다. “얼마 전에 인면지주 한 마리를 죽인 적이 있는데 꼭 너 같았어. 얼굴도 비슷하고.” 싱긋 미소를 던진 백산은 오른 발을 들어올려 힘차게 바닥을 찍었다. 일명 백번신권을 펼치기 위한 필수 동작으로 인식된 진각(震脚)이었다. “또 나왔다!” 비무대 주변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함께 백산의 왼발이 바닥을 찍었고, 이어 그의 몸은 붉은 운무에 휩싸였다. “놈! 혈삭비마행(血索飛馬行)은 진각 따위로 잡질 못한다!” 낮게 소리친 요광은 철삭으로 내공을 흘려보냈다. 팽팽하게 서 있던 철삭들이 대나무 휘듯 둥글게 구부려졌다가 활시위처럼 튕겨나갔다. 일순 요광의 신형은 십여 장 높이의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게, 바로 혈삭탈혼(血索奪魂)이다!” 백산의 머리 위까지 솟구친 요광의 신형이 아래쪽으로 내리 꽂히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요광의 몸놀림에 따라 여섯 개의 철삭 또한 붉은 기운을 머금고 팽이처럼 휘돌았다. 각각의 철삭이 그리는 궤적은 전부 달랐다. 큰 원부터 시작하여 작은 원까지 전부 여섯 개의 붉은 잔상을 남기며 철삭은 빠른 속도로 돌았다. “난쟁이 새끼, 인면지주하고 싸워봤다니까.” 위쪽을 힐끔 쳐다본 백산은 제자리에서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진작을 밟았다. 진각을 밟는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몸을 감쌌던 운무가 핏물처럼 진하게 변하자 그 속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터졌다. “예순네 번!” 왼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오른 손 정권이 하늘로 향했고, 그곳으로부터 붉은 권강이 빨랫줄처럼 쏘아져 나갔다. 차라랑! 강기와 철삭이 부딪치자 기이한 소성이 비무대 주변에 울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백산의 일성이 또다시 터져나왔다. “예순다섯 번! 예순여섯 번!” 왼팔과 오른 팔을 교대로 내지르는 두 번 지르기였다. 허공을 관통하듯 나아가는 두 줄기 붉은 광채가 중인들의 눈에 잡혔다. 또다시 강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커짐과 함께 두 사람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난쟁이 네가 여섯 개의 손을 가졌다면 나도 네 개야 임마!” 낮게 소리친 백산은 뻗어낸 오른 손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왼발을 허공으로 차올렸다. 일순 그의 발끝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온 붉은 강기가 철삭을 향했고,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백번신족(百番神足)의 첫 등장이었다. 하지만 요광의 철삭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산의 발에서 솟구친 강기와 정면으로 부딪쳤음에도 그의 철삭은 잘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한 살기를 머금고 백산의 머리에 구멍을 뚫을 듯이 다가들었다. “내려가면 끝이다 놈!” 철삭으로 더욱 강한 내공을 밀어 넣으며 요광은 진득한 살소를 날렸다. 귀광두가 몸을 피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더욱 유리하다. 여섯 개의 철삭으로 놈을 포위한 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놈이” 내공을 집중하던 요광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아래쪽으로 내려 가야할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철삭의 위치는 귀광두 머리 근처,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붉은 강기가 철삭을 쳐낼 뿐만 아니라 내려서는 것조차 막고 있었던 것이다. 챙! 챙! 챙챙챙! 여섯 개의 철삭이 사방에서 몰아치고 그에 대응하여 백산의 손발도 정신 없이 움직였다. 번갈아 차올리는 양발과 더불어 왼손과 오른 손을 뻗어낸다. 양손과 발에서 뻗어 나온 붉은 광채는 머리 위에서 쟁반처럼 커다란 원을 형성했다. 그것은 붉은 강기의 벽이었다. 검탄강기로 만드는 방어막으로 탄벽(彈壁)이라 불리는 무공이다. 그 탄벽에 가로막혀 요광의 철삭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산의 손발이 움직일 때마다 탄벽은 두꺼워졌고, 요광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찌 이럴 수가…….”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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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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