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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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트리오 출현
4월16일 롯데전의 선발오더를 보면 94시즌 LG의 달라진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다. 선발투수는 단국대출신 인현배, 톱타자 국가대표 5년경력의 유지현, 2번타자 신일고 출신 김재현, 3번타자 94신인 2차지명 41번째로 뽑힌 서용빈. 루키 4명이 지난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LG의 선발명단에 당당히 포함돼 있었다.
이 오더는 큰 변동없이 한해를 보내게 된다. 야수 신인 3명이 주전으로 낀 경우는 프로야구 13년동안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신인트리오가 벌인 신인왕다툼 3파전도 흥미진진했다. 또한 LG 야구사를 다시 쓰게 만든 주인공들이다.
◇3박자를 갖춘 톱타자 유지현◇
돌이켜보면 ‘꾀돌이’ 유지현에게 94시즌은 해태의 야구천재 이종범의 벽에 부딪혀 눈물을 삼킨 한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활약은 MVP 후보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상대배터리를 흔드는 현란한 베이스러닝과 도루능력, 타격6위를 차지한 매서운 타격솜씨, 아군투수들의 방어율을 낮춰주는 뛰어난 수비 등은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기량이었다.
93년 11월3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실. LG OB 관계자들이 94 서울지역 1차지명선수를 뽑기 위해 모였다. 92년 이맘때 좌완 이상훈을 서로 지명하려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긴장감이 감돌지도 않았고 취재진도 1차지명으로 뽑힐 대상선수가 신통치 않다고 보고 덤덤하게 지켜봤다.
양쪽 구단은 ‘쓸데없는 신경전은 피하자’며 추첨하지 않고 서로 명단을 제출, 중복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우선권가르기로 했다. LG의 흰봉투에는 내야수 유지현, OB가 내민 봉투에는 좌완투수 유택현이 적혀 있었다. 너무나 싱겁게 끝난 1차지명이었다.
좌투수 기근에 시달리던 OB는 류택현을 지명했고 LG는 송구홍이 군입대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내야수 유지현을 택한 것이었다.
94신인지명은 전년도처럼 투수 이상훈 김홍집(태평양) 구대성(한화) 유격수 이종범(해태)같은 대어급이 없어 별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94시즌 서울팀의 명암이 이 하나로 결정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스카우트는 도박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스카우트들 사이에서는 근거가 불확실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국가대표때 어깨를 다쳤기 때문에 유격수로서는 끝났다’, ‘타격이 신통치 않아 2할3푼대도 치기 어렵다’, ‘1차지명으로 뽑을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 등등 유지현에 대한 악성루머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OB가 유지현을 선택하지 않은 까닭도 바로 이런 소문들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1차지명이 열리기 전 LG 유지홍 스카우트와 OB 양승호 스카우트도 이구동성으로 “유지현이 프로에서 2할5푼대 이상을 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공언한 장본인들이다. 아무튼 내야보강에 이렇다할 대책이 없는 LG는 유지현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계약금은 쥐꼬리만큼 책정할 수밖에.
175㎝, 73㎏의 작은 체구의 유지현은 충암고―한양대를 거친 내야수. 충암고 3년 때부터 태극마크를 달았다. 유격수 이종범, 2루수 유지현으로 짝을 이룬 키스톤콤비는 역대 국가대표 내야수 가운데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유지현은 공격―수비―주루를 두루 갖춰 톱타자로서는 적격이었다. 국가대표 5년경력이라면 틀림없이 억대 계약금을 챙길 만했으나 현실은 유지현을 외면했다.
LG는 93년 11월 유지홍 스카우트를 일본 오키나와로 밀파, 고교생인 김재현에게 1억원이 넘는 계약금으로 사인을 맺은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구단은 “LG가 신인들 몸값을 너무 올려놓는 바람에 우리가 계약하기 어렵게 됐다”는 다른 구단들의 원망섞인 투정을 의식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사상 최고계약금(1억8천8백만원)을 준 좌완 이상훈이 첫해 겨우 9승에 머문 게 대표적인 사례였다.
몸값을 깎기 위해 구단은 뜬소문을 근거로 제시했고 전년도 해태 이종범(7천만원)의 예를 들췄다.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유지현은 결국 93년12월15일 계약금 7천5백만원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유지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천부적인 야구센스와 두뇌플레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라운드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미래의 타격왕 김재현◇
김재현 스카우트는 94년 신인 스카우트의 백미였다. 93년 11월11일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스포츠서울이 주최한 한일친선프로야구경기가 벌어질 참이었다. 한국은 롯데―LG 연합팀이, 일본은 지바 롯데 마린스―주니치 드래건스 연합팀이 나섰다. 10일 부산에 도착한 LG 어윤태 단장의 얼굴은 마냥 희희낙락이었다. 특유의 큰 목소리가 더욱 컸다.
11일 상오2시 부산 미라보호텔 10층 객실. 트레이닝복 바람의 어단장은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전화가 올때가 됐는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따르릉”
벨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어단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 어떻게 됐어?”
“네. 됐습니다.”
“뭐 됐다고?”
“재현이 아버지 옆에 계시나?”
“여보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저희가 잘 키워서 꼭 보답하겠습니다.”
유지홍 스카우트와 김재현 아버지와 통화를 끝낸 어단장은 이 기쁜 소식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으나 참기로 했다.
11월13일 하오 5시. 각 신문사에는 LG구단이 보낸 팩시밀리 한장이 기계음을 내고 들어왔다.
‘김재현 일본 오키나와에서 LG와 프로입단 계약체결’
계약금 9천1백만원 연봉 1천2백만원(구단발표). 그리고 신일고 3년 동안의 성적이 적혀 있었다.
기업적인 스타일 그대로 밀어부쳐 유지홍 스카우트를 일본으로 급파, 김재현을 붙잡은 LG의 저돌성은 돋보였다. 일부 매스컴이 도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통에 곤욕을 치렀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프로팀다운 스카우트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LG구단이 김재현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의 등번호 7번을 김재현에게 달아준 데서 그 기대의 크기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번호는 유지현에게 물려주어야 적합한 번호였다. 그러나 LG는 김재현이 김재박의 대를 이을 최고스타로 성장하기를 빌며 7번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연세대 진학예정이던 김재현이 진로를 바꿔 프로행을 택한 이유는 LG의 집요한 접촉과 부모들의 ‘열린 마음’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김재현은 돈 때문에 프로로 선회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 김웅용씨가 중소기업 규모의 사업을 하는 터라 생활에 여유가 있고 금전적으로 궁핍을 모른 채 살았다. 부모가 모두 대학교육을 받아 흔히 말하는 배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김재현은 대학을 포기했다. 김재현의 어머니 차승의씨는 남편과 상의하면서 “우리가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지금 현재 전공을 살리고 있느냐. 재현이가 대학을 나오더라도 야구가 직업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야구판에 들어가 승부를 내는 편이 낫지 않느냐”며 “선택은 재현이에게 맡기자”고 했다는 것이다. 김재현은 프로를 선택했다.
올시즌내내 부친 김웅용씨는 아들 재현이의 활약을 지켜보았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보았고 팬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는 것도 보았다. 20―20클럽(홈런―도루)에 가입하는 영광의 순간도 잠실스탠드에서 직접 목격했다. 아직은 프로행이 성공이냐 실패냐를 대나무 쪼깨듯 구분할 수는 없으나 19살의 어린 김재현이 타격에서 무한한 성장가능성을 가진 것은 확인했다.
타점타이틀을 노리고 막판까지 형뻘되는 선배들과 어깨를 겨뤘다. 아깝게 타이틀은 놓쳤지만 어린 김재현에게는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이광환감독을 비롯해 LG 코칭스태프는 김재현이 3년내에 타격왕이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운도 따라야 하겠지만 그만한 소질과 자질을 갖춘 선수라는 것이다. LG타자들을 11연패의 늪에 빠뜨린 해태 ‘싸움닭’ 조계현도 김재현 앞에서는 쩔쩔맸다.
야구계 속설에 ‘타자는 타고나고 투수는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다. 김재현이 바로 대표적인 케이스다. 프로세계에 발을 들여놓은지 1년도 안된 그가 홈런 20개를 때려내고 타점타이틀 경쟁을 벌였던 것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이 있기에 가능했다.
유지현이 뱃속부터 야구센스를 갖고 태어났다면 김재현은 타자로서 완벽함을 갖췄다. 좋은 타자들의 공통점인 빠른 스윙을 갖고 있고 배팅포인트는 강타자들처럼 뒤에 있다. 몸쪽 볼은 놓치지 않고 때려낸다. 손목힘도 탁월하다.
김재현의 홈런은 직선타구가 거의 없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홈런타자 왕정치처럼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간다. 20개의 홈런이 모두 그랬다. 강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볼과 배트가 오랫동안 붙였다가 스윙을 마치기 때문이다.
미래의 타격왕 김재현에게도 많은 약점이 있다. 바깥쪽 볼에 대한 공략이 미약하다. 타율의 굴곡이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또하나 19살의 김재현이 ‘반쪽선수’가 아니라 완벽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수비보완이 시급하다.
LG 코치들은 “어린 나이에 저 정도로 해주는 것만해도 고마운데 수비까지 신경쓰면 죽도 밥도 안된다”며 시즌중에 수비보완을 외면했다. 일면 타당성이 있는 말이지만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몸에 타성이 배어버리면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사실 지명타자가 있으므로 해서 국내에는 방망이만 휘두르는 ‘반쪽선수’가 너무나 많다. 야구선수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만큼 약한 어깨, 고졸선수 정도의 수비능력 등. 지명타자제도가 없었더라면 감독들은 골치깨나 썩였을 것이다.
어쨌든 김재현은 LG 스카우트사에 영원히 기억될 선수며 다듬기에 따라 90년대 한국야구를 이끌고갈 선두주자임에 틀림없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서용빈◇
94시즌 야구계 최고 화제의 인물은 단연 해태 이종범이다. 신기에 가까운 기량으로 공격부문 4개를 휩쓸었으니 주목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에 비해 무명신인 서용빈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무명으로서 최다안타 2위, 타율 4위, 타점 6위를 마크했다. 예년 같았으면 최다안타부문은 독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종범이 있기에 2위에 그쳤다.
서용빈은 94신인 2차지명에서 마지막에서 두번째인 41번으로 뽑혔다. 지명당시 LG는 2차지명 5라운드에서 신인스카우트를 마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온 최정우 작전코치가 “손해볼 게 없으니 일단 찍어보자. 찍고 나서 시원치 않으면 계약을 포기해도 되니까 별 문제가 없다”며 프런트 간부들을 설득했다.
최코치 말마따나 서용빈 정도야 계약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다. 계약금도 2천만원 미만이라 그동안 스카우트 실패로 허비한 돈을 생각하면 ‘코끼리 비스켓’이었다. 최코치가 서용빈을 뽑자고 한 이유는 연습경기를 해본 결과 타격은 보통 수준이지만 수비가 아주 뛰어나 최소한 2군용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
93년까지만 해도 LG 2군은 구리운동장에서 대학팀과 자주 연습경기를 가졌었다. 단국대학도 파트너중의 하나였다. 연습경기를 치르면서 서용빈이 눈에 띈 것이다. 각 구단 스카우트들에게는 좌타자 1루수에 단국대 졸업예정인 그저 그렇고 그런 선수로 꼽히고 있었다.
서용빈의 올시즌 행적을 살펴보면 자신에게 온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행운도 작용했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딱 들어맞았다.
93년 11월18일 일찌감치 1천8백만원에 계약한 서용빈은 잠실 실내연습장에서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대학 때와 다르다고 느낀 점은 훈련방식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서용빈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심지어 스카우트하자고 앞장섰던 최정우코치도 관심있게 지켜보지 않았다.
해태가 지명하고나서 계약교섭권을 LG에 넘겨준 같은 포지션의 허문회는 2차지명 1순위라는 것과 국가대표를 거친 경력이 있어 각광을 받았다.
1월하순 선수단은 진주로 내려가 처음으로 실외 타격훈련을 시작했다. 맞히는 소질은 허문회가 단연 앞섰다. 그러나 서용빈의 타격도 보통수준은 넘고 있었다. 섣불리 내칠 선수는 아니었다.
선수들의 능력을 분류할 때 ‘훈련용’이 있고 ‘시범경기용 선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1군에 합류하는 선수는 따로 있고 베스트10은 특정한 선이 그어진다고 말한다. 신인들을 훈련모습만 보고 평가하면 오판하기 십상이다. 야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감독들도 보는 사람에 따라 얘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허문회와 서용빈의 경우도 코칭스태프는 판단을 내리기가 조심스러웠다.
앞서 말했듯이 서용빈에게 첫번째 찾아온 행운은 오키나와 전지훈련 참가다. 이광환감독은 “신인들의 기량을 전훈지에서 직접보고 판단할테니 모두 데려가게 해달라”고 구단에 요청했다. 구단은 감독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두번째 행운은 ‘타격의 달인’ 장훈씨와의 만남이다. 허문회와 서용빈의 명암이 여기서 갈라졌다.
세번째로는 ‘미스터 LG’ 김상훈의 해태 트레이드를 꼽을 수 있다. 만약 김상훈이 그대로 LG에 남아 있었더라면 서용빈이 아무리 출중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뒷전으로 밀려나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히 누구 앞에서.
서용빈은 태평양과의 개막전 경기서 6타수4안타를 기록하며 1루 주전자리를 가등록했다. 이어 4월16일 신인 최초의 사이클링히트로 스타대열에 올랐다. 4월24일에는 만원사례를 이룬 잠실구장서 해태 이대진으로부터 역전 3점홈런을 뿜어 완전히 스타로 도약했다. 행운과 실력이 어루러진 이런 일련의 일들을 서용빈은 놓치지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아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재능인지는 우리가 인생살이를 하면서 숱하게 느끼는 일이다.
5월이 지나면서 서용빈의 실력은 반짝세가 아님이 입증됐다. 지칠 줄 모르고 안타와 타점사냥에 몰입했다. “도대체 스카우트들은 무엇을 보고 다녔느냐”는 핀잔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법했다. 2차지명 꼴찌에서 두번째로 지명된 선수가 LG 주전1루수가 됐고 타격1위까지 올라갔으니 다른 팀의 스카우트들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서용빈이 장점은 타격과 수비의 부드러움에 있다. 타격기술이 장효조 전성기를 보는 것처럼 유연하다. 수비솜씨는 “여지껏 서용빈처럼 수비를 잘하는 1루수는 본 적이 없다”는 게 이감독의 말로 대변된다. LG로서는 흙속에서 진주를 캐낸 것이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서용빈의 공은 아무리 높이 사도 지나치지 않는다.
첫댓글 저도 그래요...아직도 서용빈 선수보다 1루수비 잘하는 선수 못봤습니다...객관적으로여..
어윤태 단장씨...잘 키워서 보답한다는게 그거유?
실지 서용빈 선수가 3할 쳐준다면 나머지 1루 후보들은 전부 2군감이죠 기존의 서용빈 선수가 개인적 문제로 자리를 비우니 2군감 선수 기용하는 거지요 1루수비 정말 잘하죠 용빈선수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그립네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94년..
감사합니다.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