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참선과 기도는 '공부'의 연장선이고 방편이며 일부분이다.
불교의 입문과 수행은 명상도 참선도 108배도, 불교 기초대학을 다니는 것도, 봉정함 삼보일배도 아닌, 부처님처럼 또는 부처님으로 바라보며 모시며 헌신할 수 있는 '근본스승'이 있느냐에서부터 시작된다. 계사나 은사를 말하는 게 절대 아니다. 스승도 아니다. 바로 '근본스승'이다!
근본스승을 모시기 위해 복을 쌓고 인연을 맺으며 스승을 시봉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게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공성의 지혜라는 대승불교의 3가지 핵심을 모두 원만하게 닦을 수 있게 된다. 물론 계정혜 삼학과 경율론 삼장에 대한 공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더불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쌓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근본스승을 모시고서 불교공부나 수행을 하는 것과, 모시지 않고 수행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로 매우 크다!
과연 여러분들께서는 자신 옆에 늘 항상 가까이 하면서 시봉하는 살아있는 근본스승, 현재 생존하고 살아있는 부처님의 화신이라 믿고 직접적으로 시봉하는 근본스승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불교 입문과 공부와 수행의 첫 시작이다! 근본스승은 절대적이다!
한국 불교는 명상과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인도 티베트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는 명상 또는 기도보다 공부를 더더욱 강조한다. 티베트 스님들을 가까이 하면서 느낀 점 중 참으로 놀랐던 점은, 티베트 스님들은 평생동안, 열반 직전까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느다는 것이다. 평소 법조인들이나 의사들이 공부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티베트 스님들의 공부량에 비할바가 못된다라고 생각한다. 아예 경전과 논서를 외워버리고, 대장경 전체를 읽어 독파하고서 그 대장경 법맥을 후학들에게 전승하는 문화가 오래전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명상(참선)을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남 모르게 은밀히 밀교적 수행을 절실히 이어나가고 있다.
지금도 달라이라마 존자님께서는 <입보리행론>과 <소보리도차제> 및 <현광장엄론> 등의 경논을 늘 반복해서 보신다고 한다. 청화 큰스님께서도 평생 부처님 경전 보시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청화큰스님과 달라이라마 존자님이 바로 불자의 모범이다.
기도는 경율론 삼장의 공부의 연장선이거나 공부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기도는 신심과 지혜를 키우는 방편이다. 초심자에게 기도는 신심을 붇돋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심은 반드시 지혜로서 승화되어야 진정 삼장과 삼학을 통해 공부의 경지를 맛볼 수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번뇌망상 조차도 극복하지 못하고 윤회만 할 뿐이다. 그래서 불교는 신심과 지혜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즉 기도 명상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율론 삼장과, 계정혜 삼학에 대한 경장과 논서에 대한 철저한 공부이다!
처음에 '기도'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라고 게시 스님들께서 법문하셨을 때에, 기도위주의 신행과 수행생활을 당연하다 생각하는 한국불교문화에 익숙한 본인으로서는 정말로 의외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논리적으로 잘 사유하고 따져나가보니, 게시 스님들의 말씀이 백번 천번 옳았다!
그리고 경율론 삼장의 공부를 배우지 않고서 단지 대천신이자 보신인 보살들에게 기도만 하여 복과 가피를 바란다는 것은, 마치 면허증 없는 가짜 의사가 매스를 잡고서 환자들을 잘 고치겟금 막연하게 바라는 것이고, 면허증 없고 운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자가 자동차를 몰고서 서울에서 부산이나 광주로 달리면서 무사히 잘 가기를 막연하게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왜 수행하는가?
왜 명상을 해야 하는가?
기도란 무엇인가?
왜 참선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태어나는가?
인간은 왜 죽는가?
번뇌는 무엇이고 업이란 무엇인가?
근본번뇌는 몇 개가 있고 수번뇌는 몇 개가 있는가?
심왕은 무엇이고 심소는 무엇인가?
번뇌장과 소지장은 무엇인가?
현전과 비현전, 현량과 비량은 무엇인가?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무엇인가?
견성은 무엇인가?
견성이라는 것은, 사향사과와 유식5도에서 과연 어떤 경지에 속하는가?
부처님과 아라한의 차이는 무엇인가?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문연각과 보살의 차이는 무엇인가?
보리심이란 무엇인가?
법신 중 자성법신과 지혜법신이란 무엇인가?
보신은 무엇인가? 화신은 무엇인가?
반야심경에 대해서 즉흥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바로 생각과 말과 뜻으로서 자신있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주관적인 생각이 아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출저까지 댈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바로 답을 말하는 불자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과거 인도에 최고의 현교와 밀교의 스승이셨던 아띠샤 존자님이 계셨다. 아띠샤 존자께서는 한국 불자들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한국 일본을 제외한 불교국가에서는 대단한 인도의 큰스님이셨는데,
아띠샤 스승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까담 스승 한 분이 아띠샤 스승님께 여쭈었다.
“아띠샤 스승님이 열반하시고 난 후에 저는 참선만 하겠습니다.”
아띠샤 스승님은 그것은 의미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설법만 하겠습니다.”
아띠샤 스승님은 그것도 의미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까담 스승이 여쭈어보자 아띠샤 스승님은 말씀하셨다.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이상, 참선을 해도, 설법을 해도, 기도를 해도, 보시를 해도, 육바라밀을 닦아도 수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 까담 스승은 아띠샤 스승님이 열반하시고 난 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 죽을 때까지 지냈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돔된빠 스승님께서 탑돌이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탑돌이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수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은 ‘탑돌이는 수행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며 탑에 절을 하기 시작했다.
“절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수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자 그 사람은 독경과 명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돔된빠 스승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까?” 그 사람의 물음에 돔된빠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세속팔풍에 흔들리고 있다. 행복하고 편안하면 거기에 너무 집착한다. 괴롭고 불편할 때는 너무 싫어한다. 하지만 진짜 수행자는 고통을 좋아하고 행복을 싫어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통을 겪으면 그만큼 업장이 소멸되고, 행복을 누리면 그만큼 복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복이 소멸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업장이 소멸되는 것이 좋은가? 업장이 소멸되려면 욕도 좀 먹고, 몸도 힘들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무언가 얻으면 좋아하고, 잃어버리면 싫어한다. 칭찬을 받으면 좋아하고, 조금만 싫은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기분이 나빠진다. 이름을 떨치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가 훼손되면 싫어한다. 이러한 것들을 세속팔풍, 또는 세속팔법이라고 한다. 세속팔풍에 흔들리고 있다면 아직 세속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번 생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생에 집착하고 있으면 다음 생을 위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하사도(하근기) 수행을 할 수 없다.
기복불교가 좋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번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기복불교는 사실상 근본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기복만을 추구하는 선업은 오히려 윤회를 일으키게 하는 번뇌만 일으킬 뿐, 이런 선업은 윤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세간적 입장에서 기복만을 추구하는 불교는 삼사도(하사도 중사도 상사도,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 중 하사도(하근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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