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일은 전도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나를 본받으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당신도 나처럼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조사를 해보니 전도하지 않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나도 제대로 못 믿는데, 두 번째는 용기가 없어서, 세 번째는 어떻게 뭘 전해야 할지 몰라서, 이 이유들을 역으로 생각하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구원의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외에 한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은혜를 받으면 빚진 자의 마음으로 전도하게 됩니다. 바울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은혜의 체험 전에는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었으나 은혜를 받고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음모로 잡혀 베스도총독과 아그립바왕 앞에서 말할 때 총독은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자기 변호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이렇게 묶인 것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큰 은혜를 구하고 받는 성도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그래야 우리들도 바울처럼“나와 같이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작년 4월 22일 지구의 날에 중국의 한 스타벅스 매장에서 개인 컵을 가져오면 커피 한잔을 무료로 주는 이벤트를 했습니다. 1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해 환경을 보호하자는 의미였습니다. 당일 카페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한번 보시죠!(사진) 대단하죠, 생수통도 등장했습니다. 공짜라는 이유로 최대한 큰 것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오시면서 은혜를 받기 위해 마음 그릇은 얼마나 큰 것을 준비하셨는지요? 늘 큰 은혜를 사모하며 큰 그릇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모르는 삶은 어둠의 삶입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등불인데 은혜를 모르면 빛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과 기쁨을 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도 로마의 여러 주 가운데 하나인 길리기아 성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고향 팔레스타인을 떠나 다소에 자리를 잡고 천막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천막은 주로 군대용 막사, 축제나 체육대회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군용천막의 경우 염소 80-90마리의 가죽을 사용할 정도로 가격이 비쌌습니다. 부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바울은 태어날 때 로마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군에서 20년정도를 복무하거나 많은 돈으로 살수 있든 당대 최고시민권자였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본토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더 율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우며 최고의 율법학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부자였고, 최고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최고의 율법 스승에게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부러워하는 환경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자,미국시민권,서울대?)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받고나서 이 환경에 대해서 9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그는 자신이 덜 떨어진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환경이 자신을 가장 못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도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최고의 환경이지만, 은혜를 받고 보면 최악의 환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학대를 받다가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얻은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그들이 애굽에서 누리던 환경을 그리워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바울도 참된 진리를 모른 채, 랍비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에게 율법을 배우면서 최고의 율법학자가 되기를 원했고,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득을 잡아서 옥에 가둬야 하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집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둠속에 있으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를 모른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맹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15:1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사랑하는 예신 가족 여러분! 은혜 없이 어둠을 헤매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은혜의 순간
바울에게 은혜가 임했습니다. 은혜는 뜻밖의 선물입니다. 언제 받을지, 어떻게 받을지 모릅니다. 저는 청년의 때에 은혜를 받고 방언이 받고 싶어 기도원에 찾아갔었다가 못받았습니다. 그런데 섬기는 교회에서 새벽예배에서 방언을 받았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은혜는 장소불문이구나, 내가 원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셔야 받는구나. 사실 바울은 은혜받을 만한 자격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스스로 사도라고 불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는 우리 인생의 소유권을 바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도 여전히 자기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가다가 벧엘 근처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그 밤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감격하여 3가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얍복강에서에서 에게 죽을뻔한 그를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에서와도 화해하게 해주셨지만 그는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목축하기 좋은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큰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빛을 보게된 바디메오가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
다메섹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잡으러 가다가 바울은 빛으로 그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눈이 멀고 앞을 보지 못한 채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비로서 바울은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3일동안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엄청난 절망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부자요, 로마시민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아무 의미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구원의 빛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자를 보내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행9:17절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고 그는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은혜를 받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실망스러운 실체를 보게 됩니다. 저는 은혜의 체험을 통해 제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운 피조물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의 순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이후의 삶
은혜를 받은 후에도 사람의 성격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보게 되자 세레를 받고,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면서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습니다. 교인들도 놀라고, 유대인들은 더 놀랐습니다. 정반대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9:22절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이제는 거꾸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밤에 다메섹을 벗어나게 합니다.
몇일 사이에 바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변화가 만남의 은혜를 통해서 된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먼저 빛으로 찾아와주신 예수님이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믿음의 사람, 아나니아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이 만남이 바울을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까지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교제하고 싶었지만 제자들은 그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갑자기 변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 때문에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지내는데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행9:30절에 제자들은 그를 고향 다소로 보냅니다.
왜 바울은 고향으로 가야 했을까요? 은혜가 자기 열정이 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은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이 자기만의 열정이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실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전해주신 말씀처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당장 쓰실 줄 알았는데 그에게는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은혜받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열정으로,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정죄하는 것은 은혜의 오용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겸손하고,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주의 열심히 사역합니다. 바울은 후에 이를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가장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해진다.”우리 모두가 은혜받은 자로 겸손하고 온유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미국 보스턴 출신 성공한 사업가 바턴에게 한 젊은 청년이 찾아와 워싱턴에 소매상을 차리기 위해 2천불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물론 담보 없이, 모두 말리는데 바턴은 그의 도전적인 자세를 높이 사서 2천불을 빌려줍니다. 몇 년뒤 이 청년은 2천불과 넉넉한 이자를 합쳐서 갚았습니다.
10년후에 대공황이 일어나 바턴도 도산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제 장년이 된 스트로사가 찾아와 그의 부채를 갚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은 “당신 의 빚은 이미 갚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스트로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은 갚았지만 은혜는 남아있습니다. 모두 나를 외면할 때 나를 믿어준 당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파스칼은 말했습니다.“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은혜를 잊었다는 뜻이다”우리를 사망과 어둠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은혜는 우리를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도록 격려하고 인도합니다. 그래서 광야 40년 하늘에서 매일 만나가 내리듯 은혜가 내려옵니다. 그 은혜를 받으며 예수를 닮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그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군되어 살았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우리도 주님의 일군으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08년 여름, 은성교회는 경매로 넘어간 충격을 지방의 교회들과 교인들의 사랑으로 회복하였습니다. 교회는 새 처소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김래현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교회를 합하고 싶다.”그 얘기를 듣고 기도하며 9월21일 은성교회와 예신교회가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뒤에 교육관 83평을 매입하여 6층 전체를 사용하게 되었고, 2018년 2억원을 들여 교회를 리모델링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중 코로나를 만났습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하며 한 순간 한순간을 지내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후회스러운 일도,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원망도 불평도 있었지만 이제 돌아켜 보며 고백합니다. 주의 은혜가 더 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부터 주의 은혜로 변화되고, 우리 모든 예신교회 교인들도 변화되어 그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교회로 새로워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 창립 22주년, 장로취임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