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체르마트길을 트래킹하다
병신년 한 해도 저물어 가는 12월 25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은 날이다. 일 년 중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것이다. 나는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 큰 관심이 없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전날부터 마음을 졸인 것은 친구와 멀리 봉화에 있는 체르마트길을 걷는 것이었다.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고 호기심을 갖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외지로 여행을 한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동안 접어두었던 산행장비를 챙기느라고 이리저리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가 도움을 줘서 쉽게 준비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 혼자 준비를 하려고 하니 뭔가 서툴다. 옷가지를 넣을 보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지팡이도 찾으니 없고 선글라스도 찾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준비를 한다고 해도 결국 선글라스와 지팡이는 아내가 타고 간 자동차 안에 있기 때문에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지팡이는 아내가 딸에게 전화를 해서 친정에 갈 때 가지고 가라고 했는데 딸은 챙겨 놓기는 했는데 아들에게 정신이 팔려 그만 놓아두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도는 좋지 않은 지팡이를 챙기고 선글라스는 친구에게 부탁해 가지고 오도록 했다.
딸은 아들을 낳은 후 골반이 틀어져 바로잡는다고 마사지를 하고 사위는 자기 아들을 본다고 정신이 없다. 아내는 멀리 거제도에 놀러가 버리고 저녁밥을 지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밥을 짓고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식탁에 놓았다. 그리고 아내가 시장을 보면서 덤으로 싼 과메기도 내놓았다. 사위는 과메기를 참 좋아한다. 과메기는 원래 술 안주에 적합하다. 사위는 술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일 때문에 창원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좋아하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그냥 과메기만 먹었다. 장인이 차려 준 밥 한 술 먹고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창원으로 가고 나는 내일 트래킹 갈 준비를 했다. 내가 먹을 밥과 반찬을 담고 숟가락과 라면도 준비했다.
차를 타는 곳이 부산이라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친구와 만나 가기로 하였다. 잠을 많이 설치기도 하였다. 알람을 설정할 줄 알았더라면 이토록 몇 번씩이나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드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중얼거리면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연지역에서 만나 경전철을 타고 가 대저역에서 내려 부산 지하철에 환승을 했다. ○○역에서 내려 부민 병원으로 걸어가 우리가 타고 갈 산악회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타고 갈 산악회 차는 예정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차에 오르니 우리가 앉을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승차한 지 얼마 안 되어 산악회에서 나와 한다는 말씀이 아침 준비를 못했다고 너스레를 한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듣고 잠자코 갔다.
09시 30분쯤 봉화 분천역에 도착했다.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라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분비기 시작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1979년 여름날 이곳을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영주에서 처음 중앙선 기차를 타고 봉화를 지나 석보로 갈 때 잠시 기차가 머물렀던 역이다. 기차가 머문 이곳에서 물건을 파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해서 동행한 친구에게 물었다. 이른바 번개시장이라고 한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잠시 기차가 머무르는 사이에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처음 보는 장면이라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엄청나게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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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군 소천면에 있는 분천역의 모습>
차 안에서 안내하는 사람이 어느 곳에 모여라고 말만 던져 놓고 가버렸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산악회가 아니고 영업하는 느낌을 잔뜩 받은 나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니 그제야 인원파악을 한다고 부산을 뜬다. 여행객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군대식으로 발언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제까지 참고 왔던 내 성질이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어 한 마디 했다. 문제는 이 여행객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길들여진 양일까. 주객이 전도되어도 엄청나게 전도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약간의 안내가 끝나고 우리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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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소천면에서 흐르는 낙동강 본류의 모습>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곡 옆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 이 강물이 바로 낙동강 본류다. 강 양안에 펼쳐지는 비경을 바라보며 친구와 나는 즐겁게 걸으면서 비동승강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고 비동터널로 들어가는 철길 따라 조금 걸어서 터널 옆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올랐다. 이 길이 체르마트길이다. 즉 비동승강장에서 양원역까지 2.2Km가 되는 길이다. 산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아 걷는데 무리가 없었다. 낙동강을 따라 생긴 이 길을 가면서 오지 마을이 주는 경관을 보며 원곡동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친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친구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두 병 사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전날 내가 손수 지은 밥을 먹은 후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승부역으로 갔다. 주변의 경관을 보며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니 지루한 줄도 모르고 승부역에 도착했다. 승부역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갔기 때문에 이정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양원역과 석포 역 사이에 있는 역이라는 것을 알고 내 가슴에는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곳이 어디이랴? 잠깐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곳이 아닌가. 이 외진 곳에서 근무했던 역 승무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족과 떨어져 생계를 잇기 위해 외로움을 달래며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승무원이 쓴 시가 잘 대변해 준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분천역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이곳이 어디이랴? 한 역만 더 가면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는 석포역이 아닌가. 1979년 친구가 근무하는 석포중학교에 들른 적이 있다. 영주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기차 시간도 모르고 영주역으로 갔다. 마침 친구가 탑승하려고 줄을 서 있지 않은가. 함께 가본 곳이 석포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우와 진짜 골짜기구나! 하고 속으로 속삭이기도 하였다. 평야가 있고 나지막한 산이 있는 경남에서 공부를 하고 우리는 가짜 교사 사건으로 생각지도 않은 이 오지에 발령을 받았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서러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랴? 먹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던 곳이다. 친구에게 승부역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면서 글도 몇 자 적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임이 머문 곳
첩첩산중 아픔을 이기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곳
오늘 여기서 임을 생각해 본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또 다른 친구 병헌과 더불어”
우리는 승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분천역으로 향했다. 트래킹을 할 때 보지 못했던 광경을 기차를 타고 오면서 눈에 띄는 곳도 있었다. 양원역을 지날 때에는 왜 양원역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문은 계속 이어져 분천역에 와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가게를 하는 아줌마에게 분천역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 나 39년 전의 역의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하였다. 날은 저물어 저녁식사 시간이 다되었다. 인원이 많아 한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역 쪽으로 올라가 봉덕식당이라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앉은 자리 옆 벽에는 며칠 전에 식사를 하고 간 전두환 대통령의 흔적이 있었다. 그이 필적을 보고 어찌 씁쓰레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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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천역 봉덕식당에 전두환 대통령이 남긴 친필>
※ 코스 : 분천역–비동승강장-체르마트길–원곡동–양원역–평비경길-승부역(12.5Km 4시간)
♧ 체르마트길이란 우리나라와 스위스가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분천역과 스위스 체르마트역이 자매결연으로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 양원역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시절 낙동강 물줄기를 기준으로 나뉜 봉화 원곡마을과 울진 원곡마을, 즉 양쪽의 원곡마을이란 뜻으로 만들어졌다. 오로지 재를 넘어야 외부로 나갈 수 있었던 주민들의 고충과 의견을 모아 만들어진 역이 바로 양원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