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청운대(靑雲臺)를 가보지 않고는 팔공산을 다녀왔다고 말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청운대의 정경이 빼어남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리라.
청운대를 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팔공산의 북쪽인 군위에서 올라야만 수월하다.
팔공산은 대구, 경산, 영천, 군위에 걸쳐 있지만 군위쪽으로 난 산길은 산꾼들에게 생소하다.
그런 군위쪽 산길을 '군위 제2석굴암'과 대율리 '한밤 전통마을'을 연계하여 당일 코스로 계획을 잡았다.
팔공산 북쪽 군위군 부계면에 원효 스님이 득도했다는 오도암 ‘원효 구도의 길’이 2015년 준공됐다.
팔공산 비로봉이 개방되고, 또 하늘정원이 열리면서 오도암에서 하늘정원을 통해 주능에 올라 주변 봉우리들까지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게 됐다.
팔공산 오도암은 원효굴, 좌선대 등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기도를 하고, 원효 스님이 득도한 장소로 유명하다.
원효 스님은 617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여 15세에 출가해 수도에 정진했다.
34세에 당나라 유학도중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라는 깨달음을 터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삼국 시대 고려 태조가 후백제군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만나 포위를 당했다.
그 때 신숭겸이 태조로 가장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함으로써 태조가 겨우 목숨을 구했으며,당시에 신숭겸과 김락 등 8명의 장수가 모두 전사해 팔공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산행후 답사하는 ‘군위 제2석굴암 삼존석불’은 국보 제 109호로 신라 불교의 초기때인 소지왕 15년(493) 극달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20m의 높이의 화강암 자연암벽 단애 자연석굴에 팔공산 상상봉을 바라보며 삼존석불이 안치돼 있다.
석굴 중앙엔 본존인 아미타불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 왼쪽엔 관세음보살이 자리하고 있으며, 후광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군위 제2석굴암 삼존석불’은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세기 정도 앞선다.
제2석굴암 조금 아래 대율리에는 '육지의 제주도'라 불리는 한밤전통마을이 있다.
이 곳은 골목마다 고풍이 감도는 돌담이 있어 흡사 산청의 '남사예담촌'을 닮아 있다.
특히 이 마을은 부림 홍씨 집성촌으로 250년 전 건립된 남천고택 또는 상매댁(上梅宅), 쌍백당(雙栢堂)이라 불리는 전통가옥이 있다.
대율사에는 ‘대율사 석불입상’(보물 제988호)이 있다.
산행궤적
가볍게...
고도 약 600m인 제1주차장에서 가볍게 올랐다가 내려왔지만 공포의 칠백계단은 아이구 무시라~
한티재를 넘어 팔공산 비로봉 북쪽 군위로 들어갔다. 차량이 드나는 곳에 '제2석굴암'과 대율리가 있다.
제2주차장을 지나...
차량통제지점 직전인 제1주차장까지 올라왔다.
차가 주차장에 닿으면 누가 일일이 안내하지 않아도...
산으로 빨려 들어간다.
'원효대사 구도의 길'이라 안내된 안내판을 지나...
우리는 아치형 구도의 문으로 입문을 한다.
초입의 산길은 편안하고 평이한 길이지만...
어느새 지그재그 가파른 길로 변한다.
더이상 각도를 주체할 수 없어 데크계단으로 난이도를 조절하더니...
청운정 육각정자를 오른다.
청운정(靑雲亭).
화장실을 지나자마자...
오도암 절집의 소박한 멋이 중생을 맞는다.
나처럼 참배목적이 아닌 사람들이 대단히 성가시게 하는 모양.
절집을 들어서자 조그마한 암자 뒤로 깎아지른 암봉이 불끈 솟아있다.
우측으로 방향을 조금 틀자 비로봉 북사면에는 몇일 전 내린 눈이 녹지않고 있다. 이 눈은 겨우내 녹지 않을 것이다.
작은 원효암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원효대사 안내판을 일별한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았으니 파계(破戒)승이였고, 대처승(帶妻僧)이였다.
오도암 앞의 이정표.
오도암을 나서자 공포의 칠백계단이 펼쳐진다. 정확하게는 714계단.
하늘에 이르는 길은 아주 힘드는 과정으로 그야말로 구도의 길. 위를 쳐다보면 더 힘드니 등산화 앞코만 쳐다보고 걸을 일이다.
각도가 적절한 암벽은...
암벽 등반꾼들이 붙는 곳이지만 전면 금지하고 있다.
시자굴 안내판 위로 올라가 보았지만 시자굴은 스토리텔링화한 그저 그런 곳.
좌측 암벽위에서...
간큰 미옥씨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좌측 암벽 바위 틈새로...
밧줄을 연결한 곳은 원효굴 올라가는 곳.
계단 난간을 타넘어...
돌아보며...
제법 호기있게 접근을 하였지만...
아이쿠야~ 발디딤 아래쪽으로 낭떠러지다.
안전하게 세미클라이밍으로 못오를리 없겠으나 자꾸만 방정맞은 생각들이 기어코 필자를 주저 앉히고 만다.
다녀 오고는 싶고, 간은 작아 그 자리에 멍때리고 있으려니 미옥씨가 자랑스럽게 다녀온다.
에고~ 부끄러버라이~~
산아래로 굽어보이는 한티재 방향 팔공산의 주능을 돌아보고 나면...
이제 금방 계단은 끝이나고...
청운대를 향하다 돌담이 둘러쳐진 곳을 지난다. 돌담은 꽤 오래된 듯하고, 안으로 기웃거려보니 기도터인 듯, 무슨 제단인 듯.
깎아지른 암봉 도드라진 곳으로 비로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정원 시설물들이 보인다.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정좌하면 득도를 할 것 같은 바위 벼랑에서 팔공산 주능선을 바라본다.
그 새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암봉에 오른...
간큰 미옥 씨.
하늘에 닿은 저곳은 사방이 뻥 뚫려있을 것.
이제 벼랑쪽으로 더 내려왔다. 하늘다람쥐마냥 바위를 디딤돌로 껑충껑충 건너다니더니...
벼랑 아래까지 내려섰다.
암봉 틈새 기품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한마음 꽃들이 포즈를 취한다.
청운대를 올랐으니 이제 팔공산 다녀왔다는 자랑을 해도 좋을 것.
홍여사는 내내 사진찍기에 올인해 있고...
옥분 씨는 청운대를 못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림이 그려진 담벼랑을 따르다가...
우측 커다란 마당바위가 펼쳐진 곳으로 올라...
비로봉이 올려다 보이고...
청운대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데크에 올랐다.
멀리 출렁거리는 산물결.
당겨본 그림을 어림잡아보니 가산과 유학산, 그리고 멀리 금오산인 듯하고...
한티재 방향 주능선.
천 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 이렇게 널따란 평원이 펼쳐져 있으니, 이를 일컬어 하늘정원이라 했던가?
담벼랑 양지바른 곳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일어서자 그만 벽화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떡바위 방향으로 가기위하여 비로봉을 오르다 팔공지맥으로는 길이 막혔다고해서 반대방향으로 접근을 하기 위하여 내려선다.
"사진찍지 말라"는 경고음 방송이 반복되는 곳에서 목계단을 타고 내려선다.
마이크에서 똑같은 말이 반복되는 이 지점의 이정표.
계단을 타고 내려가...
떡바위 방향으로 조금 오르다.
<이 지점의 이정표>
<안내판>
<안내판>
시설구역으로 좌측 산길로 접근하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좌측 산길 진입로.
내려가며...
아까 우리가 계단을 통해 내려온 지점을 지나고...
이제 임도를 버리고 곧 좌측 헬기장으로 올라선다.
대장군바위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저쪽 건너 갑옷을 입은 듯한 늠름한 모습의 대장군바위.
역광으로 빛이 반사되는 곳을 살짝 당겨 보았다.
헬기장을 가로질러 다소 거친 산길을 내려서다 좌측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암릉을 올라선다. 작은 청운대라 불렀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곳.
우리는 이곳에서 한동안...
망중한을 즐기다...
내려선다.
이곳에서의 조망은 뻥 뚫려있다.
천성산님이 도착하더니...
에게게~ 이 무슨 포즈다요?
다시 만난 전망대에서 미옥 씨가 또 전망 포인터에 섰다.
그녀들은 한마음이 불러 주었을 때 우리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 -김춘수님의 '꽃'을 패러디-
내려다 보는 조망.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산길은...
바위와 소나무의 명경산수.
지루할 틈 없이...
내려서는 명품 산길은...
시원한 조망을 선사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선답자의 희미한 흔적을 좇아...
포장도로에 내려서서...
돌아본 빨간 화살표.
우리 차가 대 있는...
제1주차장에 닿아 산행이 종료된다.
안내판.
뒷풀이를 마친 뒤 계획했던 대로 대율리 '한밤전통마을'을 찾아간다.
'한밤전통마을'이라지만 ‘한밤중’을 뜻하는 건 아닐 테고, 행정지명이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大栗里)이니 토실토실 알밤이 많이 나는 마을이 아닐까?
대율리를 우리말로 풀어쓰니 '한밤마을'로 변했으리라.
땡♬~ 아니였다. 한밤중이 맞단다. 팔공산 자락이라 해가 빨리 떨어지고 어둠도 일찍 찾아오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리는 이름이란다.
대율리는 행정지명을 개편할 때 한글(한밤)을 한자(大栗)로 옮기면서 순화한 이름이다.
그러니까 한문을 한글로 옮긴 게 아니라 한글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밤(夜)이 밤(율栗)으로 변했으니 여차했으면 한밤인 심야리(深夜里)가 될 뻔했다.
주민들은 또 ‘한빼미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한빼미'는 논을 말할 때 '논배미'라는 갱상도 사투리에서 유래된 듯하고, 다른 논과 구분되는 하나하나의 구역을 말한다.
대율보건진료소 앞에 차를 멈췄다. 약 1.5km를 30분정도 소요됐다.
먼저 남천고택을 들렀다가 돌담길을 걸으며 대율사로 향한다.
좌측 담넘으로 동천정이 있어 고개를 뺐다가 카메라로 물계정사(勿溪精舍) 편액을 당겨 잡았다.
동천정 물계정사는 개방하지 않아 담넘어로 카메라만 갖다댔고, 자료를 찾아봐도 내력을 알 수 없었다.
돌담 골목을 지나...
남천고택
대율동중서당에 섰다.
한밤마을 상매댁 바로 옆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1991년 지정)로 지정된 대청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 초기에 부림 홍씨 문중에서 건립한 서당으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창돼
학사(학문을 닦는 곳)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후 두 번 중수되었다가 최근(1992년)에 완전 해체 보수를 했다.
대청에 내걸린 '대율동중서당' 현판은 110여 년 전에 완성군이 쓴 친필의 탁본이고, 친필은 분실을 우려해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기단도 보수되어 현재는 마을 경로당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율동중서당(大栗洞中書堂)' 노래헌(老來軒)현판.
대율동중서당 낙관엔 '광무10년 안성군서(安城君書)'라고 적혀있다. 광무(光武)10년이면 1906년이다.
건축물의 내부 천정의 모습.
입구에 세워진 달구지에 눈이 간다.
소박한 대문이 인상적인 남천고택은 경북문화재자료 357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부림 홍씨의 집성촌인 대율리에서 가장 큰 규모와 역사를 자랑한다.
조선 헌종(재위 1834∼1849) 때 지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홍우태(洪禹泰) 선생을 비롯한 11대 후손들이 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부림홍씨종택 입석.
부림홍씨종택 대문.
대율사를 찾아간다.
대율사에는 보물 제988호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민가처럼 생긴 조그만 절집 입구 능인전에 모셔져 있는 입불상.
신라시대에는 화랑(花郞)을 미륵(彌勒)의 화신으로 여겼다.
대율리 석불입상(미륵불 보물 제988호)은 한밤마을에 머물면서 팔공산에서 김유신을 따르던 화랑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자 귀의처가 되었으리라.
대율리 대율사(大栗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군위대율동석불입상(軍威大栗洞石佛立像 보물 제988호)이다.
높이가 265cm인 이 석불입상은 대율사의 능인전(能仁殿)에 주존불로 안치되어 있다.
오른손은 외장(外掌)하여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으나 왼손은 내장(內掌)하여 가슴에 대고 있어 특이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다소 경직된 인상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자연석 둥근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데 석불의 광배(光背)는 떨어지고 없으나, 불신(佛身)은 잘 보존되어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낮고 넓은 육계(肉髻)가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작고 아담한 눈과 입, 굵게 표현된 코 등을 매우 세련되게 처리하였다.
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닿아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어 근엄한 인상을 준다.
양어깨를 감싼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얇게 표현하였는데 가슴과 배를 지나 무릎까지 반복된 ‘U’자형의 주름을 이루며 매우 사실적으로 처리되었다.
안내판
골목길를 벗어나...
귀품있는 소나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성안숲으로 향한다. 이 솔숲 중앙엔 높다란 비석 두 기가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천성 수복에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의 추모비(追慕碑)와 군위지역 정대장으로
홍천뢰 장군과 함께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던 혼암(混庵) 홍경승(洪慶承) 장군의 기적비(紀蹟碑)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1592년 일본군이 대거 조선에 침입하여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국토수호의 중책을 지닌 수령들은 대부분 임지를 버리고 도주한 가운데 나라의 위급함이 실로 풍전등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29세이던 홍천뢰는 부모봉양을 두 동생에게 부탁한 다음 조카뻘인 홍경승과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불과 100여 명으로 구성된 소부대였으나 나중에는 그의 뒤를 따라 모여드는 의병의 수가 1,300명을 넘었다.
홍천뢰 장군은 영천 신녕(新寧)의 권응수 및 인근 각지에서 온 의병장들과 더불어 영양(永陽)에서 단을 쌓아 하늘에 맹서하고 ‘창의정용군’을 편성한 다음
스스로 그 선봉대장이 되었다.
그는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특히 그해 7월에 일본군 부대가 집결하여 준동하고 있던 영천성을 공격함에 있어 돌격전의 선두를 맡았다.
당시 일본군은 그를 가리켜 ‘천강홍장군(天降洪將軍)’, 즉 하늘이 내린 홍천뢰 장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도 또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그 공로로 ‘훈련원정’이라는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에 사직하고 귀향하여 은거하다가 51세에 생애를 마쳤다.
1973년 5월에 건립된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장군 추모비(追慕碑)의 전면글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대율리 한밤전통마을을 답사한 후 군위 제2석굴암을 향한다.
팔공산 석굴암 표석을 지나니...
바위 암벽 둥근 구멍에 자리한 석굴이 보인다. 이 석굴은 1962년 9월 22일에 발견되었다.
입구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좌불상(坐佛像) 한 구가 계신다. 공식 명칭은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좌나불좌상'이다.
삼존 석불이 모셔진 이후 9세기경에 만들어졌다 한다.
비로전 옆 암벽 둥글게 파여진 굴안에 모셔진 세 구의 불상....
공식 명칭은 국보 제109호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이다.
석굴 안에는 본존불인 아미타불(2.18m)이 가부좌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고 양옆으로 대세지보살(1.8m), 관음보살(1.92m)이 자리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선 서기 7세기께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군위삼존석굴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되지 않은 1927년에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속칭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경주 석굴암 보다 앞서지만 명성에서는 뒤지다보니 '두 번째' 석굴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삼존 석굴 모전석탑(문화재자료)은 무너진 탑을 복원한 것.
안내판
나무 밑엔 아무렇게나 모아둔 석재들이 있다. 온갖 석물들의 기단이나 주춧돌로 보인다.
안내판.
참고로 보관하고 있던 오래전의 경주 석굴암 사진을 올린다.
일제 강점기 때 복원한답시고 원형을 변경시킨 건 아니었을까?
대기 중인 버스에 오르면서 오늘의 일정이 끝이난다.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
추위와 무기력함으로 의기소침해 있자니 이런 데 저런 곳에서 송년회 초청을 한다.
산악회 일정과 겹치면 무조건 켄슬(Cancel)이다.
내가 지금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무얼까?
그게 있다면 나는 즐겁게 그 일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늙어가고 싶다.
첫댓글 우리의 대장님 화이팅모습 수고하셨데요~같은 A그룹의 산행실력이지만(?) 하늘과 땅차이만큼~풀리수없는 방정식으로 남겨두고~꼼꼼이 가슴에 꼭~안고 갑니다~올도 차디찬 지면위에서 역사의 의미를 만끼하고 퇴청하올까 합니다~고맙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