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군대생활
2023.5.18
오늘은 군생활에 대해 회상해 본다.
군대갔다 온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이야기는 기억하기 싫어하지만,
친구들을 만난 술자리에서는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특히 제대 후 10년 까지는?)
돈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지만 사나이로 태어나서
국민의 3대 의무중 하나인 국방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하지 않을까?
3년에서 요즈음은 1년 남짓한 기간이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군대에서 배우는 것도 많다고 본다.
군생활의 장 단점은 차치하고
오늘은 나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을 이야기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대학생들이 머리가 희끗한 노 교수들과
잔디밭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상상을 하였는데
막상 대학 1학년 때는 고등학교의 연속으로 보였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고등학교 때 배우지 않은
제 2외국어, 음악등의 교양 과목을 공부하느라
허둥댔고 학점도 좋지않아 서머스쿨도 했다.
방학 때 나머지 공부를 한 것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짝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실연의 아픔,
덕우회 장학금을 받으러 다니며 선배들을 만나고,
막걸리 마시며 데모하는 등 대학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학사경고 바로 전 학점인 1.9점대를 받고는
2학년을 마치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복학시기에 맞춰 입대날자를 정하기 위해 지원병으로 입대키로 했다.
당시 군복무 기간이 34개월 였기에
대학 2년의 혜택인 2개월을 단축하면 32개월 근무해야 했다.
그래서 3월에 복학하려면 7월 전에는 입대를 해야했다.
입대 전까지는 시간이 많아
대학에 다니는 동창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당시 지원입대는 학원에서 3개월 수업을 들으면
타자병이나 챠드병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주특기도 700(챠드)이나 702(타자)를 받고 갈 수 있어
행정병으로 보직도 보장된다고 하여
타자학원에 등록, 3개월 수업을 듣고 5월 2일자로 입대했다.
5월 2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고 2~3일 대기중일 때, 즉 장정 신분일 때
내무반 별로 배식하는 큰 밥통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것을 잃으면 소대원 밥을 배식받아 올 수 없기에
어떻게든 다시 구해야 하기에 밤에 다른 소대에 가서 훔쳐왔다.
결국 하나가 부족하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계속 도둑질의 연속인 셈이다.
일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생각을 180도 바꾸지 않으면
고통의 연속이 군대생활이다.
그래서 “내가 사회에서는 안 그랬는데 왜 이럴까?”를
반복해서 복창하라고 선임병들이 시키는 것이다.
사회에선 모범생이 군대에서는 바보 멍청이가 되는 것이다.
높이가 1미터도 안되는 문이 달린 화장실에서는 모자를 뺏어가고
숟가락도 자기것을 챙겨야 밥을 먹을 수 있고
'식사 시작' 명령 후 '식사 끝' 하면
무조건 식기를 들고 잔밥통에 버려야 하는
기계적인 생활에 익숙치 못하면
밥도 반쯤 먹다 버리기가 다반사라
항상 배가 고파 px에서 빵을 사먹느라
가장 번잡한 곳이 매점이다.
나중에는 밥과 국을 말아서 후루룩 씹지도 않고 마시듯 먹어야
제 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했다.
입고 온 옷가지와 신발 등 사제 소지품을 집으로 보낼 때
가족에게 동봉할 편지를 쓰라고 했는데
“건강하게 잘있다”는 정도만 써야하는데
훈련소 주변 풍경등을 서정적으로 서술해서
통신보안에 위배된다고 빳다를 맞기도 했다.
이때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기 위해
논산을 출발해 의정부 101보충대에서 머물렀다.
며칠 머무르는 동안 연병장의 풀을 뽑는 등 사역을 하였는데
어느 날 식판을 식당에 잠시 맡기고 작업을 하고 나서 찾으러 갔다가
묻지마 뺨을 한 대 맞고는 고막이 터져 한동안 고생을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소대장 이상 간부들(교련)
2박 3일의 군사훈련을 받았던 6사단이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
그 곳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며 기다렸다.
드디어 가야할 사단의 호명이 시작되었다.
한참 후 6사단의 호명이 있었는데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3사단으로 발령을 받았다.
트럭 뒤에 앉아 먼지를 마시며 자대로 가는데
포천을 지나 낯익은 철원을 거쳐서 계속 갔다.
그 때부터 불안한 생각이 들어 걱정을 하면서 가는데
드디어 어느 위병소 앞에 섰다.
위병소에는 정문 양 옆에 큰 돌 2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는 백골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인사를 하는데 ‘백골!’이라고 외쳤다.
불길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내려 기관병의 말을 들었다.
우리 사단은 6.25때 제일 먼저 압록강 물을 마신 사단이며
당시 사단기를 빼앗겨 최전방에 근무한다는 말,
잠을 잘 때 백골을 베고 잔다는 말,
바로 산 넘어가 북한으로
지금 들리는 포소리는 북한에서 쏘는 것이라는 말 등을 하여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곳은 신병교육대로 며칠 머무르다 연대로 갔다.
본래 타자병은 사단 본부 이상에 복무한다고 하였는데
연대까지 내려간 것이다.
연대에서 다시 대대, 중대, 소대 소총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3명이 함께 자대 배치를 받았다.
신고식을 해야 하는데
중대가 교통호 작업을 하기위해 야전에 텐트를 치고 생활했기에
그곳으로 안내를 받고 갔다.
모두 작업하러 나가 몇 명의 하사관 만이 텐트촌에 있었다.
물론 중대장도 없었기에 주번 하사가 잠시 쉬게 한 후,
신고식 연습을 시켰다.
몇 번의 신고연습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주번하사는 우리를 데리고 산 밑으로 내려가
논에 물을 대는 보에 들어가 미꾸라지를 잡아 오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우리 3명을 보에 밀어 넣고는 위에서 워카발로 눌렀다.
진흙이 군복에 범벅이 된 상태로 다시 신고식 연습을 시킨후
그제서야 작업나간 부대가 들어올 때까지 쉬라고 하였다.
정말 3년 생활할 자대까지 오는데
너무나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고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저녁 때가 되자 부대원들이 돌아왔고
중대장에게 신고식을 한 후 저녁을 먹었다.
먹자 마자 집합을 하라고 하여 가보니
병장들이 주동이 되어 하사관을 제외한 모든 병들이 모였다.
알고보니 단기 하사(단풍하사)와 병장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
매일 저녁 싸운다는 것이다.
자대에 오면 포근한 느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첫날부터 고통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은 흘러갔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지겹고 언제 제대할까 막막할 뿐이었다.
6개월쯤 지나서 중대 본부 서무계로 발령을 받았다.
행정업무를 보기에 몸은 편했다.
월급주는 일, 휴가서열 짜는 일 등이 주 업무로
1달에 한 번은 연대에 공용완장을 차고 출장도 갔다.
그 때는 사제 라면도 사 먹을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우리 대대에는 4개 중대로 서무계도 4명이 함께 행동했기에
의기투합만 하면 하룻밤 외박도 할 수 있었다.
그땐 연대 서무계에게, 중대 서무계들의 일이 많아
연대에서 하루밤 묵어야 되겠다는 전화를 부탁하고
우리는 민가에서 라면과 술을 마시며
사제 밥과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다.
한 번은 이를 눈치챈 중대 주번사령(중사)에게 발각되어
모두 연대 영창에 갇히기도 했지만
중대 인사계들의 도움으로 하룻밤만 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화가난 인사계가 나에게 화장실 똥을 푸라는 벌을 주어
하루종일 똥을 펐는데 똥물이 튀어 전투복을 빨아도 냄새가 나서
며칠 동안 내무반에 냄새를 풍겨 부대원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중대 본부에 근무하면서 매일 저녁 집합이었다.
보급창고나 병기고 창고가 집합장소였다.
취침나팔을 듣고 10분쯤 후 잠이 들려할 때
총 개머리판으로 이마를 긁고 지나가면 집합하라는 신호였다.
집합을 하면 컴컴한 데서 말소리만 들리는데 집합이유도 다양했다.
오늘은 달이 밝아서, 마음이 울적해서 등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집합을 시킨 후 줄 빳다를 쳤다.
요즘말로 묻지마 폭행이었다.
집합시킨 최고참이 한 대씩 때린후
두번째 고참이 한 대씩 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제일 졸병은 7대를 맞게 된다.
이러한 일이 너무 자주 있다보니
엉덩이 부근이 검붉게 부어올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계속 맞다보니 피멍이 든 상태로 계속 생활해야 했다.
정말 지옥 같은 일등병 생활이었다.
어머니와 형 매형이 면회를 왔을 때 내가 제대로 앉지를 못하자
눈치챈 어머니가 피멍든 내 몸을 확인하시고는
걱정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상이 걸렸다.
나는 서무계로서 전령역할을 했기에
영외 거주하는 장교와 장기 하사관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귀대할 것을 전달해야했다.
단독군장 차림으로 위병소를 나와 연락을 하고는 돌아오는데,
같은 중대에 면회온 병사가 가게에서 술을 먹고 있기에
인사를 하자 함께 한 잔 하자고 했다.
비상이라 안 된다고 거절을 했지만 딱 한 잔하고 들어가라고 해서
한 잔 한다는 것이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부대에 간다고 인사를 하고는 그 길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참 후 정신이 들어 둘러보니 야외에 누워있었다.
부대로 들어가려고 일어나 가는데 아직도 술이 덜 깨
비틀거리며 위병소에 도착하자
보초를 섰던 군인들이 머리에 피가 난다며
철모와 총은 어디에 있느냐고 해
그 때서야 지금이 비상사태로 내가 영외에 나갔던 사실이 생각났다.
내무반에 들어와 중대본부 동료들에게 조용히 사실을 말하자
모두 일어나 랜턴을 들고 총을 찾으러 나갔으나
캄캄한 밤에 찾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인사계에게 말하자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다시 대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지휘관은 평소의 내 행실로 보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급부대인 연대에 하루 지나서 보고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그날 하루는 훈련과 작업없이
전 대대병력을 풀어 총을 찾는데 전력을 기울였지만
저녁 해가 기울 때까지 찾지를 못했다.
그러자 매일 밤 집합시키던 고참이 최면을 걸줄 안다고 하면서
밭두렁에 앉아 나를 자기 무릎에 앉히고 최면을 걸었지만
정신만 말똥말똥했다.
그 때 어떤 아저씨, 알고보니 밭주인이 나타나
밭에 심은 벼를 어떤 놈이 쓰러뜨려 놓았다고
한참을 욕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가시고나서 쓰러진 밭벼에 남긴 발 자국을 쫓아가보니
보초서는 동산으로 발자국이 나 있었고 미끄러진 자국이 있었다.
그곳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에 총, 헬멧, 탄띠 등이 함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시한내 총을 찾아서 큰 벌을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대에서의 문책과 구타는 예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대장부터 중대장에 이르기까지
훈계만 하고 다른 벌이나 문책은 하지 않았다.
당시 새로 지급된 M16을 잃어버린 워낙 큰 사건인 지라
나에게 벌을 주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인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후 나는 부대에서 유명해졌고
군 생활도 전보다는 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고참들로부터의 괴롭힘이 많이 적어졌다.
그들은 내가 실수한 것을 성깔이 있는 놈으로 본 것이다.
*소태 중대장은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름도 쓰다는 소태라 우리는 중대장을 놀려대곤 했는데
그는 육사나 삼사 출신이 아니라 승진 등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현직에 있을 때 권한을 최대한 누리려 하였다.
보급계는 수시로 중대장실에 불려가
새로나온 보급품을 안 바치면 얻어 맞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어느날 중대장이 나에게 말하길
"서무계,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하고 묻길래
한참을 생각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서무계가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고는
자기 부인 생일이니 양주 1세트만 구해오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최전방으로 양주를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돈도 없기에
고참들에게 말하고 의견을 구하자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다음날 중대장에게 구하지 못했다고 하자
중대장실로 나와 보급계를 불러
종전처럼 화를 내며 명패를 집어 던지는 등
화를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조인트를 까려는 듯 보였다.
자주 당하던 보급계는 나에게 눈짓을 하며
중대장에게 본때를 보이자고 해
우리는 중대장을 넘어뜨리고 마구 밟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중대장은 '어어 왜이래!' 하면서
당혹해 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그 후속 조치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벌 받을 것을 예상했지만….
이후 중대장의 태도도 많이 변했던 것 같다.
한번은 장기하사가 술을 먹고 와서는 취침중인 나를 깨워
왜 휴가서열을 뒤로 미루었냐고 화를 내며 총을 나에게 겨누었다.
휴가서열 변경은 중대장의 지시였다.
전방이라 항상 실탄을 갖고 있었기에 말리는 병사들을 뒤로 하고
팬티 바람에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다른 중대 내무반에서 밤을 보낸 적도 있다.
일등병 시절 남대천에서 중대별 스케이트 대회가 있었다.
선수로 뛰게 되면
스케이트 가지러 집에 휴가를 3일간 보내준다고 했다.
나는 신청을 했고 2박 3일 달콤한 휴가를 갖기도 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당시는 하루라도 부대를 벗어나고 싶었고
집에 가고 싶었던 때라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다.
파란 만장했던 군 생활 마감을 한 달 앞두고
전역을 앞둔 병사들에게
산정호수에 쉬고 오라는 배려를 받았다.
단 음주만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같이 갔던 부대원들은
담을 넘어 술을 사가지고 마시다 적발이 되어
빳다를 맞기도 했다.
군에 입대 후 전역하는 마지막까지
빳다와 술은 나와의 가장 절친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살얼음판을 걷듯이 하루하루가 지나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체험이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자존심을 버려야 된다는 것,
잘난 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함께 힘을 모으면 불가능이 없다는 것 등
험난한 인생길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근무했던 곳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전역 후 후배들을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연대 RCT, 유격훈련,
전역자 싸움을 말리다 손을 다친 일,
철책 근무 시 지뢰밭 옆으로 술을 사러 다니던 일,
성추행 당한 일 등
에피소드가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군 제대 후에는 한 동안
군대에 재입대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얼마나 군생활이 어려웠으면...
나의 경우도 그렇다
군에서 내가 보초를 섰던 곳으로 공비가 넘어왔다는 꿈
총기를 분실하여 당황하는 꿈
전투하다가 총에 맞아죽는 꿈 등
세월이 지나면서 빈도는 점점 적어지지만
제대한 지 45년이 지났지만
몸이 피곤할 때는
요즈음도 간혹 군에 재입대하는 꿈을 꿔
놀라 깨곤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위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백(백그라운드)을 가진 사람들의 자제들은
군입대를 갖은 방법을 동원해 회피하려 한다.
물론 군복무 생활하는 기간이 자기 이력에 손해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조직생활을 피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병장으로 군생활을 하고 병역의 의무를 완성한 나는
힘들고 위험한 순간도 많았고 인생의 가장 황금기
3년을 아깝게(?) 군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내가 배운 점이 더 많다고 본다.
첫째, 내성적이고 순진했던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둘째, 융통성있는 인간관계를 배웠다.(타협과는 다름)
셋째, 몸이 허약한 체질이었던 나는 꼬박 세끼 밥을 챙겨먹고
열심히 훈련을 하여 건강체질로 바뀌었다.
넷째, '까라면 까라'는 군대명령에 따르다보니 불가한 것 같은 일도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다섯째, '**는 불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 는 말과 같이
이 어려운 군 생활도 '지나가 버리는 것' 이라는 것,
솔모몬의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는 것' 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여섯째,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다.
'어머니'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일곱째, 전우애가 솟아나 함께 생사고락을 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
자칫 이러한 일을 모른 채 청년기를 지니다 보면
홀로서기를 할 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더 나아가 사회물정을 몰라 왕성하게 헤쳐나갈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면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국가 지도자급의 인사들이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사실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런 분들이 국민을 위한 마음보다는
자신을 위한 욕심이 더 많은 것을 보면서
전우애, 국민과 함께 살아가는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첫댓글
남자들의 가장 멋진 인생 한 페이지
잘 봅니다
잊혀지지 안는 남자분들의 인생역사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