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거와 현재의 그 사이에서 ---> 위선자의 최후 [1]
저기...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살.. 이겠지?....
하아.... 그럼 저기 닿는 부분마다 푹푹 꺼지는 땅은...
무게로 인한.. 거란 말이야?
나도 모르게 아연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거구의.... 여인이었다.
"... 하하..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삐질대는 남자. 쯧쯧... 남자가 저래서야 어디... 그런데 저 여자가 남자에게 '가가'라고 했던가?
흐음.... 역시 콩깍지는 무서운 것이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 거구의 여인은 자신의 몸에 붙은 수많은 지방 덩어리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딱 남자의 앞에 멈춰 섰다.
끼이이이익...!!!... 쿠쿠쿠쿠쿵...!!..
.....아니, 멈춰 서려 했었다.
하긴 저 정도의 몸이 그 정도나 되는 속력으로 달려왔으니..
"됐어요, 직접 물어보죠."
자신이 목표로 하던 곳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거구의 여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본 듯 했다.
- 살 속에 눈이 파묻혀 있어서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소협이 정말로 광룡문의 후계자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흥, 난 만녀문(萬女門)의 소문주예요!"
... 만녀문?...
내가 모른다는 듯이 멀뚱멀뚱하게 서 있자, 그녀는 화가 난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솔직히 찡그린지도 몰랐다.
"감히 만녀문을 잊었단 말인가요?!"
우으으으으윽!! 귀, 귀, 귀가....!!...
<마스터... 꽤 아프겠네....>
....요오..!!.. 요오...!!... 요오...!!
어디선가 아련히 들려오는 메아리.. 이런 허허벌판에서 메아리가 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물론 이곳도 완전한 평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 서있던 언덕은 이미 내가 무너뜨린 상태였다. 고로 이 근처는 평지.
산이 있다고 해봤자, 아주 먼 곳에,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곳에 겨우 산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메아리가 쳐 올 줄이야.. 그것도 내공이라곤 전혀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뭐라고 하셔도 전 모릅니다. 그리고 전 지금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절 건드리지 마시길."
난 아픈 귀를 부여잡고는, 애써 분위기를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경공을 사용해 이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뭐라구요?! 정말로 잊었단 거예요?!"
찌잉....!!.... 크윽.... 또다시.... 역시 상당한, 아니 엄청난 목청이다.... 젠장, 만녀문에서는 목청으로 소문주를 뽑나보지?
난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그 자리를 떠나려했다. 더 이상 상대해봤자, 시간 낭비일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 새 경공을 사용해 내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쳇, 정말 짜증나게 하는군..
"그냥은 갈 수 없어요! 난 선대의 문주께서 지신 빚을 갚으러 온 것이니까요!"
... 선대의 빚이라... 킥... 웃기는군. 난 지금 그런 일에 신경쓸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은데....
"만녀문의 32대 차기 문주, 나 진미화가 상대해 주겠어요!!"
...저벅, 저벅...
"이봐요!! 어딜 가는 거죠?!"
큭... 정말.. 더 이상은 안 되겠군. 난 나를 붙잡는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드래곤 피어를 실어서.
"절 더 이상 건드리지 마십시오. 선대의 빚이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제가 그 빚을 받을 의무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전 후예일 뿐, 문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깐 안색이 꾸겨졌다 펴지는 진미화. 저게 공포에 질린 얼굴인가....?...
"하, 하지만 문주이신 광현자께서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차기 문주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 그렇게 말해도, 난 그럴 수 없다.. 아직은.. 아직은..
그 분의 원한을.. 갚지 못했으니까..
난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날 붙잡지 않았다. 내게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겠지..?..
난 중원을 향해 내달렸다. 위선자의 탈을 쓰고 있는 그 자를 잡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분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성문. 저 앞에 보이는 것은 무림맹이란 곳의 집결지, '무림성'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단순한 방해물일 뿐.
파파파파팟!!
광룡무를 사용해 달려가며, 난 왼손을 들어 강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성문을 목표로 강기를 날렸다.
후웅..!!.. 콰쾅.....!!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그곳에서 뛰쳐나오는 문지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흥! 막을 수 있다면 막아보시지!!
"승천광무!!"
후우우우웅!!
내 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강기의 바람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모든 것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날아가는 문지기를 뒤로하고, 난 성의 중심부로 향했다.
저기군.. 성의 한 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들은, 그곳에 무림맹주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쿠구구궁...!!
문을 부수고 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속에 보이는 인간들.
다른 자들은 분분히 일어나 무림의 평화를 위해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 물론 오해였지만 - 저들은 여기 앉아 희희낙락 하고 있었다는 건가..?.. 훗..
"저자는... 진광풍이 아닌가?"
"어떻게 여길 온 거지?"
웅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여기 있었군, 백리현소.
"여, 여긴 웬일인가?"
그가 내게 말했다. 그 더러운 입으로. 굉장히 침착한 놈이군..
벌써 당황함을 감추다니.... 좋아.. 그 더러운 가면을 네놈이 벗지 않겠다면.. 내가 벗겨주지.. 큭큭큭...
저벅... 저벅....
내가 한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서서히 갈라서는 사람들.
하긴.. 저들도 살아야겠지. 큭큭큭..
저벅... 탁...
그의 앞에 멈춰서며, 난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맹주."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소동을 벌이며 찾아오는 것인가?!"
"뇌화폭투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 뇌화폭투...?"
순간 섬찟해 하는 맹주. 그런 그의 모습은, 전혀 몰라 그러는 것이 아닌,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남에게 추궁당해 놀라는 모습이었다.
"뇌화폭투라니?... 그게 뭐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하아.. 그게 무엇이든 간에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구려.."
여기저기서 궁시렁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난 그를 바라보았다. 살기를 그대로 드러낸 체.
".. 모든 것을.. 다 알고 온 것인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 맹주. 그런 맹주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해 보였다.
"허허... 마교의 수뇌부들도 속인 내가... 네게 덜미가 잡힐 줄이야...."
허탈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는 맹주. 그런 그의 태도는 이곳의 어느 누구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교라니..?... 설마... 마교까지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말인가?
"맹, 맹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마교라니요?!"
군중의 한 사람이 맹주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그 대답을 끝내 듣지 못했다.
파..악..!!.. 풀썩...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날아 들어온 그림자가 그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기에.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놈 같은데...
"천마강시라네. 그것도 활강시를 이용해 만든, 최강의 강시지. 자네의 좋은 상대가 될 걸세."
그렇게 말한 맹주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지. 천마..강시라... 키킥...
단숨에 없애주지. 난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강시를 가리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크 볼트.]"
파지직!!
순간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색의 벼락. 그것은 천마강시의 몸을... 사라졌다?..
후웅!!
빌어먹을!! 뒤인가?!
"[실드!]"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내 몸의 주위로 둘러지는 마나의 막.
충분히 막을 수 있겠..
파각..!.. 퍼억!!
"크억!"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천마강시를 이길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 천마강시는 마교의 소문주로 만든 활강시를 이용한 것, 절대로 이길 수 없으리라."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백리현소 맹주는 중인들을 향해 다가섰다.
대부분의 중인들이 아직도 뭔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런 자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입을 열었다.
"도망가지 않을 텐가? 하긴.. 도망간다 해도 소용이 없겠지.. 이미 이 주위는 마교의 무리들로 가득차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분위기가 파악이 된 것일까? 중인들은 웅성대기 시작했고, 그들 중의 한명이 백리현소에게 말을 걸었다.
"맹주!! 당신이.. 당신이... 마교와 손을 잡았단 말이오?!"
"손을 잡았다는 것보다는 내가 마교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고 봐야겠소이다. 어리석은 구파일방의 지도자들이여."
"맹주! 그 말은 우릴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요?"
"적? 훗... 벌레만도 못한 자들이 내 적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소이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어느 새 백리현소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무공은 이미 다 섭렵한 나요. 그런 공격이 통할 것 같소이까?!"
콰쾅..!!
강기와 강기의 대결! 그것은 내공대결의 양상을 띄기 시작했고, 결국 뒷심이 부족했던(?) 남자는 쓰러지고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푸우....쿨럭.. 쿨럭..."
"후훗.... 잘 가시구려."
백리현소는 그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쿨룩...."
큭큭... 강하군.. 키킥... 강시라는 게.. 이렇게 강한 거였나?
젠장...
저벅.. 저벅..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는 강시가 보인다.
천마강시라.. 킥, 좋아. 네놈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시험해 보지.
"에이젤 화이어."
왼쪽 손목에 감겨있던 에이젤 화이어를 검으로 바꿔 들었다.
그러자 다시 내게 달려 들어오는 강시의 모습이 보였다.
"..네놈은...?!"
저놈이.. 왜 저기서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거지..?
6. 은발 머릿결의 처녀 (?) ---> 결국은 찾아 나섰다. [1]
웅성웅성...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크레이드 제국의 수도, 카나스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장소를 아주 소박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름하여 '카나스 시장'.
사건의 발단은 한 여인이 자신의 아름답고 긴 은발을 휘날리며 시장으로 들어설 때부터였다.
아름다운 모습의 그녀가 시장 안에 들어서면서, 거의 모든 남성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다음 순간 간간히 옆구리를 싸잡아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봐, 저기 좀 봐..."
".....!!..."
"어이? 왜 말이 없.... 녀석... 맛 갔군.."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말의 미사어구만 바뀐 체, 위와 거의 똑같은 내용의 말이 들려왔다.
시장의 여기저기를 살피던 은발의 여인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왼손바닥에 내려치고는 과일 가게로 다가가 멈춰섰다.
그리고 그 주인을 향해 생긋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
그 가게 주인은 오늘 자신의 수입을 다시 한번 꼼꼼히 세어볼 요량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세고 있던 탁자위의 금화들을 금방 앞주머니에 밀어 넣으면서, '혹시 흘린 것 없을까?' 하는 눈으로
바닥을 한번 훑어보며 대답했다.
"네, 뭘 원하십니까? 아가..씨.... 하아...."
바닥에 금화가 더 이상 없음을 확인한 그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카나드라인 아카데미는 어디로 가야하나요?"
"아, 거기 뭔가 볼일이라도 있나보죠?"
분명히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입을 여는 가게 주인.
덕분에 그는 다음 날 옆구리가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
"네,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이리로 쭉 가시다보면 커다란 문이 하나 나옵니다. 그곳에 서있는 경비에게 말하면 들어가실 수 있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렇게 정보를 손쉽게 수집한 은발의 여인은 곧장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문과 그 옆에 서 있는 경비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문의 왼쪽 기둥에 적힌 세로 글자들을 바라보며, 여인은 중얼거렸다.
"흠..... 카나드라인 아카데미.. 확실하네."
그리고는 오른쪽 기둥에 서있는 경비병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 안에 좀 들어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햇빛... 만물에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그 절대적인 생명의 -
혹은 절대적인 멸망의 -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는 잔디밭에.
"그러니까... 리오스가 이곳을 3년 뒤에 멸망시키겠다고 했단 말인가요? 크로드씨?"
도대체 몇 번을 묻는 것인지.... 이미 몇 번인지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되물어보는 그녀의 태도에 질릴만도 하건만, 크로드는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격언을 실천이라도 하듯, 여전히 친절하고 깍듯한 태도로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그녀석은 배은망덕하게도, 그토록 친하던 절 배신하고, 자신을 그토록 잘 대해주던 황태자 전하의 손을 태웠습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은발의 여인은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곧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나라에서는 정당방위도 배신에 들어가는군요?"
".... 그, 그건...."
갑작스런 은발 여인의 말에 놀라는 크로드. 찔리는 것이 있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마력검에 허락 없이 손을 댄 것도 모두 상대편이 해를 입힌 것인가요?"
"아, 그게...!!.."
"됐습니다. 더 이상 이런 곳에 오래있고 싶지 않군요."
그렇게 상대방의 말을 끊은 여인은 자신의 은발을 출렁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에서 자신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자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내 의지로 내가 향하고자 하는 곳을 향할지니. 열려라, 공간의 문. [워프.]"
순간적인 빛과 함께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 갑작스럽게 주위에서 가지각색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왜일까?
"도대체.... 리오스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크로드도, 결국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길. 인간이 숲을 지나면서 생겨난 길 위에서,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여인은 마치 누군가를 죽일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간간히 멈춰 서서 자신의 뒷쪽을 향해 주먹을 힘껏 치켜올리며 중지 손가락을 세우기도 하였다.
"흥, 감히 날 속이려 하다니!! 그 자식들을 그냥!!"
또 한 번 뒤를 돌아보며 중지 손가락을 힘껏 세우며 그렇게 소리치던 그녀는 다시 앞으로 돌아서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당장에 날려버리고는 싶지만.. 리오스가 그렇게 말을 했다니.. 어쩔 수 있나... 참아야지..."
그렇게 걷던 여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근엄하다 못해서, 엄청난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며, 조용히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런데 그녀는 누굴 향해 그렇게 말한 것일까?
분명히 그녀의 주위로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스슷....
갑작스럽게 나무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한 인간이 있었다.
쿵!
상당한 충격을 동반한, 무리한 동작을 연출하던 그 복면인은 무릎을 꿇은 채로 나무 위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 충격은 중력의 가속이 엄청난 이 별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땅에 무릎을 댄 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 마, 마스터를... 뵙습... 니다..."
"쯧쯧.. 그러길래 누가 무리 하랬냐? 그런데... 무슨 일이냐?"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며 되묻는 여인을 향해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마스터가 시켰지 않습니이이이이~ 까아아아아아~?!'
하지만 이것은 비밀로 묻히고 만다.
"네, 마스터. 실은....."
이것은 어느 여름날, 아주 무덥지만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6. 은발 머릿결의 처녀 (?) ---> 결국은 찾아 나섰다. [2]
"하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소리. 아주 아름다운 미성의 그 소리는 숲에 한가득 울려퍼졌다. 하지만 아주 아쉽게도, 그 주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다만...
사사사사사삭...!!..
"응?"
부스럭..!!..
"취익, 인간이다, 취익, 예쁘다, 잡아가자! 취익!"
"예쁜 인간이다! 취익!!"
... 몬스터와 오크들은 바글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크들. 그 녀석들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아주 아름다운 은발의 여인을 보고는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그 상대의 정체는 전혀 안중에도 없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말 한마디. 그것은 아주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블리저드 스톰]."
[블리저드 스톰]. 본래 6 사이나스의 마법인 이 마법은 5 사이나스의 [블리저드]와 [스톰]의 결합 마법이었다.
그 옛날, 고위 마법을 창안해 내기 위해 고심하던 이름 모를 한 대마법사가 만들어냈다고 전해지는 마법이기도 했다. 물론 드래곤들은 그 이전부터 그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후웅..!!..
순간 몰아치는 잔인하리만치 매서운 추위를 동반한 폭풍.
그것은 정확하게 달려들던 오크들만을 꽁꽁 냉동시켰다.
"흥, 감히 날 노린 댓가야."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오크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내리던 침마저 떨어지지 못하고 얼어붙은 오크들의 모습은 훗날, 근처를 지나는 여행자들의 경각심을 돋궈주었다고 전해진다.
콰쾅!!
은발의 여성이 향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불기둥. 아마도 또 다른 몬스터가 멋모르고 그녀를 공격한 모양이었다.
"오호호호홋!! 잘 걸렸어!! 이렇게 된 바에야, 스트레스나 해소해야겠군!! 오호호호호호!!"
숲에 퍼진 그녀의 목소리. 그 속에는 많은 한(?)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숲. 큰 나무들과 작은 풀들이 옹기종기 모인 그 곳은 엘프의 영역이었다. 인간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 그곳에서 엘프를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숲 속의 엘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가 많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헉.. 헉.. 헉.."
그런데 지금, 한 엘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엘프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달려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반드시.. 그 분께... 그 분께... 가야 해... 그 분께..."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 양, 그런 말을 자신에게 중얼거리며 그 엘프는 계속해서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엘프. 도망가지 못한다."
뒤에서 날아드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 목소리는 엘프의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프를 향해 날아드는 불덩어리.
"운디네!"
엘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급격하게 마나를 유동시켰고, 덕분에 정령계에서 잘 놀고 있던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는 인간계로 소환되어 왔다.
공중에 맺힌 물방울의 작은 소녀는 자신의 소환자의 의지에 따라 불꽃을 향해 부딪혀 갔다.
퍼엉!!
부딪히는 불꽃과 운디네. 곧 불덩어리는 수증기로 화해 사라졌고, 운디네는 자신의 몸을 유지할 마나가 공급되지 않아 정령계로 돌아갔다.
"헉.. 헉...."
엘프는 다급하게 달려 깊은 숲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춰갔다.
그리고 엘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엘프의 뒤를 쫓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이 보였다.
"쿡쿡.. 꼴에 엘프라고 조금 하는군. 하지만.. 넌 여기서 죽는다."
그렇게 중얼거린 검은 그림자는 다시금 엘프를 쫓아 숲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둠속에서 사냥감의 뒤를 쫓는 야수 같았다.
숲. 밤 하늘에 떠오른 3개의 달이 빛을 비치고 있는, 검게 타버린 그곳은 갖가지 몬스터들의 시체들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후우...."
그 몬스터들의 시체의 중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는 한 여인이 있었다.
"베이너스... 어디에 있는 거야...?"
아주 작게, 너무나도 작게 중얼거리는 여인의 말에는, 리오스란 인간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들어있었다. 바로 그의 본명이.
".... 하아.... 벌써... 일 년이나 지났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여인. 그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몬스터의 시체를 이리저리 피하며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 * *
"그런... 하지만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은 남아 있잖아요?!"
"세실리아드.... 그만 하거라.."
"하지만 엄마.."
"그녀의 마음도 헤아려주거라.."
"하지만... 하지만..."
울먹이던 은발의 여인은, 곧 자신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
기껏해야 한, 두 살밖에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지 않지만 -
여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목놓아 울어버렸다.
"와아아아앙!!"
"후우....."
역시 아직은 어린 아이라는 생각을 되뇌이며, 세리시아는 자신의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달래려 했다.
며칠 전, 마족의 왕 '마그너스 다이니시스'와 함께 온 그의 부관이자, 심복, 대리인인 최상급 마족, '스케이져'가 모든 레드 드래곤과 드래곤 로드, 자신의 딸, 그리고 자신이 모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돌아갔다.
자신들의 의뢰를 받은 일이, 베이너스와 관계되었던 것을 몰랐다고 하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그를 바라보며, 여러 드래곤들은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미 베이너스는 성룡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뭐, 덕분에 레드 드래곤들의 레어의 주위에 사는 몬스터들만 죽어났다고 한다. - 실버 드래곤 한 마리도 물론 포함한다.-
이미 차원의 틈새에 빠져버렸다면, 베이너스가 돌아올 확률은 극히 미비하다. 아니,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마도 7000년 후 쯤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어린 드래곤이기에.
비록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다. '크레이드 제국' 이라는, 인간의 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베이너스는 수명이 다 되어 죽을 때까지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드래곤이란 존재에게 신에 필적할만한 힘이 주어진 것에 대한 조건부와 같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던 세리시아는 자신의 품에 안겨 울먹이는 세실리아드를 2층의 침실로 데려다 놓았다.
"흑흑....."
세실리아드의 흐느낌이, 조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소리는 완전히 그쳤다.
"하아.... 그 아이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
세실리아드의 방을 나오며 세리시아는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다음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시아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그 이유인즉슨, 세실리아드의 잠자리라고 만들어둔 침대에 세실리아드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덩그러니 쪽지 하나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나 베이너스 찾아볼게요. 혹시라도 다른 대륙의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 세셀리아드 - '
쪽지를 다 읽은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말...... 어리다니까...."
* * *
"후우.. 도대체 왜 베이너스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 걸까?..
아니, 안 보이는 게.. 정상인가...?... 응?..."
길을 걸으며 혼잣말에 빠져있던 세실리아드는 뒤를 돌아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지만, 자신의 미모에 반해 쫓아온 사람이라고 애써 부인하며 다시 길을 재촉하려 했다. 하지만....
"세실...리아드... 님... 쿨룩..."
...숲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이리어...?.."
".. 네.. 그렇습니다.. 영원한.. 우리의 친구시여..."
".... 왜 그런 꼴로 그렇게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쿨룩.. 친구로서...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친구로서의 부탁. 대략 100년 전, 분명히 그녀는 자신의 성룡식이 끝나고 50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같이 여행을 다니던 두 명의 엘프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당신들이 친구로서 내게 부탁을 한다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들어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빨리, 엘프들이 부탁을 해올 줄이야..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실리아드는 그에게 물었다.
"... 뭐지? 그 부탁이라는 것은?"
"..... 에니아를.... 제 동생을.. 구해주십......"
풀썩...!!..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이리어. 그런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한줄기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이런.. 어차피 죽을 놈이 그냥 죽지, 뭐하러 자신의 친구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쯧쯧..."
"..... 네 놈이냐?"
세실리아드는 이리어의 뒷편에서 나타난 한 복면인에게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여유롭게 대답했다.
"후후.. 저 놈을 죽인 것이 나라고 묻는다면...."
".... 대가를 치르리라....."
유들유들 대답하는 복면인을 바라보며 세실리아드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복면인은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체, 다시 그녀에게 되물었다.
"호오... 대가라... 그래, 어떻게 치르게 할 건데?"
"나, 실버 드래곤 세실리아드의 친우를 다치게 한 자! 그 죄 죽음으로 면하게 할 것이고! 그 친우에게 해를 끼친 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과 더한 공포로 살아가게 해주리라!!"
며칠 뒤, 이 숲 근처의 마을에서는 한동안 실버 드래곤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덤으로 얼어붙은 오크와, 몬스터들의 시체 더미, 그리고 처참하게 난자당해 죽은 한 남자의 시체에 대한 소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