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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8일 (금) 촬영.
인천역에서 본 차이나타운 입구입니다. 조금 쌀쌀한 날이긴 했지만 모처럼 파란 하늘 아래의 붉은 페루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네요.
인천역에 인트 회원님들이 모였습니다.
금년부터 인천시티투어 버스가 처음으로 배에 실려 바다 건너 영종도까지 왕복한다고 하여 체험해 보려고요.
홍보가 안돼서인지 시티투어 버스에는 인트 회원 9명만 타고 첫번째 목적지인 월미공원을 향하여 출발 했습니다.
월미공원에 있는 양진당입니다,
본래의 양진당은 안동 하회 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풍산 류 씨의 대종가입니다.
양진당, 養眞堂 / 보물.
양진당은 북촌을 대표하는 종갓집으로 서예 유성룡의 친형인 검암 류운룡이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조성한 17세기 초의 건물이다.
'ㅁ'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앞면 동쪽에는 문간채가, 뒷면으로는 사랑채가 연결되어 3개의 건물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보이며
후원의 동북쪽에는 2채의 사당이 있다. 본 공원에서는 양진당의 대부분 건물과 담장, 삼문, 협문을 재현하였다. - 현지 설명문 내용 -
양진당의 사당 내부.
사랑채 앞에서
안채
다듬이 돌.
양진당 편액
월미공원을 나와,
월미 부두로 이동
Worldee(월디) 월미 관광특구 캐릭터.
영종도로 가는 배에 차를 실었습니다.
갈매기들이 따라오네요. 과자 달라고,
15분여 만에 영종도에 도착했습니다.
영종도 공원.
영종 역사관 앞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공덕비들.
영종진 화포 / 재현품.
영종진(永宗鎭)은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방비를 목적으로 1653년 남양도호부의 영종진에서 자연도(紫燕島)로 이전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자연도가 영종진이 되었고,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에 포대가 배치되었다.
영종진 포대에는 자연도로 이설 할 당시의 화포와 1869년 훈련도감에서 보내준 지자총통, 대포, 불랑기
그리고 1874년 운현궁에서 별도 제작하여 강화, 김포, 영종에 나눠 준 대포, 중포, 소포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1875년 일본의 포격에 의해 영종진이 파괴되고 화포 36문을 약탈 당하면서 현재는 그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종진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이곳에 복원하여 전시된 화포는 김포 덕포진 대포를 복제한 강화 초지진 철제 대포와 같은 것이다.
바다 건너 보이는 산이 월미산입니다.
역사관 내부에도 들어갔었습니다.
서긍이 기록한 섬, 자연도.
1123년 6월 9일, 송나라 휘종의 명을 받은 서긍이 사절단의 일행으로 3월 14일 중국 개봉을 출발, 8월 27일 중국 정해현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을 곁들여 40권으로 작성했는데 그 책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서긍은 고려 방문 기간 중 6월 9일과 7월 17일에 경원정에 머물렀으며, 광주 목사를 그 일정 중에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기능했던 인천 연안은 특히 중국과의 대외교역을 담당했던 사신들에게는
한 달 가까이 되는 긴 여정의 시작과 끝이었고, 이곳에서 그 여정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자연도에 설치된 경원정.
당시 송은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길에 '고려관'이라는 객관을 세우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하였는데,
고려에서도 송나라 사신과 상인이 통과하는 항로상에 객관을 설치하여 왕래하는 그들을 극진히 대우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의하면 흑산도에는 관사(館舍), 군산도에는 군산정(群山亭), 마도에는 안흥정(安興亭),
자연도에는 경원정(慶源亭), 예성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양주성 금속비, 梁柱星 金屬碑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9호, 건립 연도 고종 14년 (1877)
양주성 금속비는 영종 점철제사 양주성의 공덕을 기리는 비다.
고종 12년(1875)에 초지진을 포격하고 돌아가던 일본 군함 운요호가 영종진을 포격한 후 점령하자 이에 조정에서는 인천부를
방어영으로 승격시키고 홍문관 제학이던 양주성을 영종 첨절제사로 임명하였다.
양주성은 재임 기간 동안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운요호의 포격으로 불에 탄 관아를 복원하고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가 떠나자 주민들이 그 뜻을 기리고자 놋그릇을 모아 고종 14년(1877)에 이 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양주성 금속비는 위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진 긴 직사각형 모양이다. 원래는 곤돌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었으나 1990년대 초에
영종동민회관(현 영종동 경로당) 앞으로 옮겨졌다가 2020년에 다시 영종역사관으로 이전하였다.
3층에서는 특별기획전으로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의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습니다.(2024년 5월 31일까지)
전시를 열며
40여 년 동안 총 20회의 세계여행. 160여 개의 나라, 100여 민족, 2,000여 가정과의 만남, 이는 마치 지구를 32바퀴 돈 것과 같고,
시간으로 치면 14년,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金燦三, 1926~2003)의 여행 기록입니다.
김찬삼이 한국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 해외여행사에 길이 남을 업적입니다. 그리고 세계여행이 어려웠던 시절,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못했던 불가능할 꿈을 행동으로 옮겨 마침내 이루어 냈다는 사실은 전 국민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지리학자 김찬삼에게 여행은 인생수업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해하고 그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고 성장하며
완성해가는 빛나는 여정이었습니다. 김찬삼이 성장하고 말년의 안식처가 되었던 인천, 그리고 영종과의 인연을 조명합니다.
1, 세계를 꿈꾸다.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34년 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이사를 오면서 김찬삼은
인천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939년 3월 인천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인천 공립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인천에 살면서 여행을 좋아하게 된 김찬삼은 선원학교 진학을 희망하기도 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45년 3월 해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김찬삼은 황해도 재령의 국화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전신)에 진학해 지리교육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숙명여자 중, 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에서 지리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세계 구석구석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던 김찬삼은 1958년 9월 18일 가족의 허락을 받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미국 유학을
세계여행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 1년의 유학 생활 동안 여행 자금을 모으고, 영어와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세계여행을 준비했다.
2.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의 세계일주 첫 여행지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알라스카였다. 이어 미국 서부에서 동부,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유럽까지 김찬삼은 2년 10개월에 걸쳐 세계의 곳곳을 누볐다.
그는 카메라, 지도, 'KOREA'를 커다랗게 붙인 배낭을 가지고 여행했으며,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쟁의 상처가 다 가시지 않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을 알리는 데 힘썼다.
세계 여러 나라를 카메라에 담아 1961년 6월 22일 귀국을 했을 때, 김찬삼은 전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 사진전, 강연회 등을 통해 직접 돌아본 세계 각지의 생생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상세히 전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의 제1차 세계일주 이래,
40여 년에 걸쳐 3회의 세계일주와 17회의 배낭여행으로 160여 개국, 1천여 개의 도시를 여행했다.
3. 만인의 스승 김찬삼
세계여행을 다니며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만지며 배워온 경험을 바탕으로 김찬삼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지리학을 가르치며,
세계 지리, 민속 등 다양한 주제의 외부 강의 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수많은 강의를 통해 세계 각 나라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여행과 저술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러나 67세이던 1992년 떠난 실크로드와 서남아시아, 유럽 전역을 도는 18차 여행 중 인도, 터키에서 사고로 머리와 갈비뼈를 다쳤다.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병상에 머물면서도 19차, 20차까지 세계여행을 지속하는 한편,
20차에 걸친 세계여행 관련 기록들을 모아 2001년 영종도 중산동에 '세계여행문화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꿈
인천에서 성장하며 꿈을 키운 김찬삼은 인천항과 바닷길이 한눈에 보이는 영종도에 말년의 안식처이자 그가 소장한 기록의 보존소를
마련했다. 1973년 매입해 두었던 인천광역시 중구 중산동 산 75번지 일원의 '꽃산농장'에 서재, 숙소동을 건축해
2001년 5월 '세계여행문화원'을 개관한 것이다. 이곳에는 그가 평생 모은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 관련 서적, 화보집, 각종 여행 전집과
잡지류, 세계 각국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기록들을 비치했다.
그는 언젠가 '세계여행박물관'을 건립해 운영하게 되기를 바랐으나, 여행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2003년 7월 2일 (78세) 세상을 떠나
마지막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영종하늘도시 개발계획에 '세계여행문화원' 부지가 포함되어 그 운영은 2013년 11월 종료되었고,
그 터에 영종진공원과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2008년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가로 기념비적 발자국을 남긴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재현해 놓은 서재.
에필로그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야 하는 광야와 같았던 시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절,
김찬삼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세계일주의 꿈을 실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쉽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기에, 김찬삼의 여행 그 자체와 여행지를 대했던 태도를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행을 '인생수업'이라고 말한 김찬삼의 삶은 인간에 대한 배움과 가르침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국 최초, 세계여행의 선구자라는 업적
그 이면에 김찬삼이 중시했던 인간적인 면모를 생각해 봅니다. 자연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과 인종 및 언어는 다르지만
웃음으로 하나가 되는 인류애를 실천하던 모습은, 우리가 삶 속에서 놓치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인천항을 오가는 선박들을 바라보며 세계여행을 꿈꾸고 교사가 되어 인천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육재단의 이사장이 되어
봉사를 하고, 여행의 모든 기록물을 모아 세계여행문화원을 운영하던 김찬삼
그의 삶 속에, 인천 중구는 그가 성장하고 걸어간 인생수업의 배경이자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만난 봄까치꽃.
봄까치꽃 / 이해인
까치가 놀러 나온
잔디밭 옆에서
가만히 나를 부르는
봄까치꽃
하도 작아서
눈에 먼저 띄는 꽃
어디 숨어 있었니?
언제 피었니?
반가워서 큰 소리로
내가 말을 건네면
어떻게 대답할까
부끄러워
하늘색 얼굴이
더 얇아지는 꽃
잊었던 네 이름을 찾아
내가 기뻤던 봄
노래처럼 다시 불러보는
너, 봄까치꽃
잊혀져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나도 너처럼
그렇게 살면 좋겠네
점심 먹고
작약도(물치도)가 보이는 바닷가를 서성이다가,
몰아치는 바람이 너무 추워서,
평상인 제빵소로 피신했었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언 몸을 녹이며, 한 입 베어 문 순우유빵의 달콤했던 순간이 벌써 추억이 되었네요.
함께 했던 모든 분들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겠죠. 아프지 말고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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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감동입니다
사진과 글이 어쩜 이리 멋지고 정성스러운지요
전문가의 사진과 지식백과사전을 옮겨다 놓은 듯
넘 멋집니다
이해인 수녀님 시 소리내서 낭송했더니 봄이 옆에와서 웃네요^^
함께 한 발걸음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시고 다음에 길위에서 뵙겠습니다~♡
아..어쩜..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네요
역사공부 부터 정성가득한 글과 사진 정말 잘 봤습니다
함께 다녀온듯 생생하네요 감사합니다~♡
역시 바위솔님
사진과 글이 올라와야
빛난 완전체가 됩니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셨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아쉬웠어요
함께 해주셔서 좋았고 감사했습니다.
바위솔님
어서 쾌차하셔서
저희랑 많이 오래,
같이 다니셨으면 좋겠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것은 배의 3층에서 찍은 것이 옵니다
와우~
평화의 태극기~! ㅎㅎ
오랜만에 두 분 뵈어서 정말 반가웠어요.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길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이번 여행에선 영종도의
변화된 과정을 공부 하였습니다 역사선생님 이시고 사진작가 이자 만물박사님 이신 바위솔님을 통해서 더더욱 확실하게 ~~
반가웠습니다 자주자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