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하 시인>>
<<박용하 시인>>
* 1963년 강원도 사천에서 출생.
* 강원대 국문과를 졸업.
* 198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문예중앙』 신인상 당선.
* 1992.~1998.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근무.
* 시집 :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26세를 위한 여섯 개의 묵시』,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 『영혼의 북쪽』,
『견자』, 『한 남자』,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 시와반시문학상 수상.
<<박용하 시인>>
여름밤/박용하
열대야에 가만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이 한여름을 나고 있는
지난해마냥 부채에 의지해 이 여름을 나려는 납량 엽기 가족이여
그 가족 중에
바람 한 점 없는 열기 속에 시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
불굴의 시를 원하는 자가 있다
팔꿈치에 괴는 땀을 훔치며
날벌레들의 난무를 조용히 지켜보며
바람 한 점 없는 열기를 지키는 일이 사치라는 것을
고압의 비애라는 것을
고장 난 사람의 짓이라는 것을
사랑의 절정에서 사랑한다고 말할 때처럼 덧없는 짓이라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시로 말해지지 않는 짓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이 세상에 따스하거나 더운 정신이란 말이 없듯이
땀에 전 러닝셔츠에게 말하듯이 또 물어본다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시가 필요할까
시로서 염원할 그 무엇이 있을까
등줄기에 줄줄 땀이 채고
몸 닿는 곳마다 짜증스런 밤에 시를 쓰겠다고 덤비는 사람이
그 어느 시절 승부욕에 휩싸여 적개심과 위악을 감행하고
울분깨나 쏟아붓던 악동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2등은 이미 진 거라며 혈서를 쓰기도 했던 사람은
어쩌다 시詩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지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 자주 지는 사람이 되어 있고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열대야에 조용히 물어본다
너는 무엇을 소원하느냐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북쪽으로 2백 킬로미터도 갈 수 없는 나라에서
남북으로 찢기고
동서로 갈리고
신분과 계급으로 똘똘 뭉친 나라에서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풀잎/박용하
색과 근육의 공화국에서 풀잎이, 무슨?
살아 있는 신호라도 되겠는가?
우리는 고민보다 비디오를 즐기는 세대다
문제는,
우리가 그냥 주말의 프로 야구나 보고
쇼나 보도록, 길들게 한
그래, 저, 저, 공룡들이 아니다
바로 우리다 나다
이 작은 것들이
이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끈질기게 끈질기게 하루의 가장 어려운 시간을 마감하고
보일 듯 말 듯
쓰러질 듯 말 듯
이 누이 같이 사소한 삶이
이 허허벌판을 안쓰러이 안쓰러이
사랑의 푸른 날개를
수평에서 수평으로 수직에서 수직으로
흔들리며 더 깊게 이 땅에 뿌리 내린다는 것을
알아다오 제발 느껴다오
하지만 죽어도 위로하지는 말아다오
우리 이 들판의 작은 풀잎이라는 말 속엔
무수한 아픔이 교각처럼 시대의 아픔을 구축하고 있음을
너희들 공룡 대가리를 닮은 관료들이여 보아달라 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 최후의 새벽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이슬을 맺는다
이 땅 풀잎들은 아무 것도 아닌 듯이 흔들리다가
한꺼번에 들판을 불태운다
춘천 悲歌 . 1/박용하
비는 내리지 않을 비를 뿌리듯 내린다
깊이 없이 나뭇잎은 떨어져 일년을 헛산다
우리들이 서 있는 한 지점으로부터
너무나 먼 곳에서 바람은 폭풍을 먹고 와
우리들을 더 먼 세계로 날려 보낼 것이다
그래, 우리는 먼지로부터 태어나 먼지로 사라질 세대
악마의 수레바퀴들, 그 바퀴들의 회오리, 流謫과 홍수
이제 생은 후회되지 않고 망해 버릴 뿐이다
인간은 사라지지도 않고 죽어지지도 않고 팽개쳐져
빌딩의 긴 그림자 속에 파묻힌 나무들의 둥글고 긴 그림자만이
오래 어둠을 응시하리라, 어디론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
결국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회환, 외로움의 연기들이
이 안개성에서 쓸쓸하게 노을로 저무는 것일까
그리고 어느 날 우리들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속으로
걸어가 몇 장의 편지를 불태워 버릴 것이다
보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추억은 이미 식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계절은 너무 빨리 우리를 추위 앞에 갖다 바치고
지금 서러운 사람은 외투가 없는 나무들 뿐이다
쇠기둥처럼 서 있는 가을에서 겨울로의 나무들 사이로
새들은 지폐처럼 날아가다 둥지로 힘겹게 흩어진다
잘 있거라, 언어를 망친 세대들이여
잘 있거라, 좋은 세계에서 살기 틀린 세대들이여
태백 준령 깊은 곳에서 바람은 스르르 흘러와
최후로 남은 나뭇잎을 콱 할퀴어 버린다
생은 계속 되어지지 않는다
생은 계속 죽어갈 뿐이다
비/박용하
비는 지붕 위에서 시작되어, 바다에서
다시 시작되어 하늘로 상쾌하다 상승한다
시커먼 구름 뒤의 뭉글뭉글한 햇살로 올라가
여름 下午 폭풍의 아들로 내린다.
비는 내린다 올라갈 만큼 멀리 올라간
하늘의 구름 뒤에서 시대의 가장 큰 어둠을 뒤집으며
또다시 지상에 내리어 빛의 물방울을 낳는다
비는 가장 작은 물로 내려
지상의 가장 큰 한발을 소리도 없이 차곡차곡 적시며
사랑의 몸짓이듯 때론 격렬하게
어둠에 불타고 있는 나무와 풀과 도시와
인간의 집들을 적시며 파랗게 불빛 일으키며
여름 벌판에서 겨울 벌판까지
지상의 죽어가는 모든 풀꽃을 일으키며
불타오른다. 이 비는 거의 꺼질 것 같은 나뭇잎의 등불처럼
자신을 지상에 파열하여 사랑의 불꽃을 일으킨다
오! 비는 하나의 거대한 불의 塔
생의 기둥을 쾅쾅 박으며 하늘로 치솟는 나무처럼
지상으로 내려오며 생명의 에너지를 뿌린다.
비는 멀리에서 멀리로 흐르는 바다처럼
깊고 높게 자신을 던지며 박토의 땅을 적신다
삼십 세/박용하
너무 깊은 곳으로 밀려온 물들이 불탄다
이제 나는 삶이라는 현실을 통해
꿈이라는 죽음을 살아야 하리
나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마음 고운 그대 빛나던 江가에 오래 서서
죽음으로 몰려가는 누추한 낙엽들을 내내 추위 떨리
구역질나는 내 인생은 내 육체를 버리니
어디에서 내 빈손 내밀어 허공을 숨쉴까
길이 나를 데려가 주지는 않는다
서서히 서서히 광기를 향하여
나는 나를 연소시키리니 넌더리나는
날들이여, 우리가 도망갈 곳은 먼지 아니면
자본밖에 없으니
야만의 달이여 죽은 가슴이여
천천히 흘러드는 이 빗방울의 흙 속으로
생은 얼마나 어둡게 눈뜨는가
꿈이 나를 비추어주지는 않는다
절벽 위의 나무 위의 검고 횟빛 구름
속의 벼락치는 마약의 번개들
언제나 절벽은 뛰어내릴 수 있어 경이롭다
너무 일찍 문닫힌 벽들이 불탄다
아, 세상을 살기에 나는 너무 예민하다
강아지의 힘/박용하
아이는 강아지를 보면 경악한다
그게 그의 감탄법
하루는 흰 강아지를 데려왔다
바라보기만 했는데 내 눈에 다른 빛이 돌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데려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뿐인데
화가 숨고
분노가 증발하고
패고 싶은 녀석들이 줄어들었다
강아지에게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평생에 걸쳐 바뀌어야 할 내가
바꿔가야 할 내가
순간순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그것도 모르고
시간이 다른 시간이 되었고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쯤 되면
강아지의 힘이 아니라
강아지의 권력이라고 해도 되겠다
내가 언짢아하는 말 중에
개 키운다는 말이 있다
키우긴 뭘 키워!
돌보면 알아서 자라는 거지
자식 키운다는 말은
개 패듯 팬다는 말처럼 건방진 말인 거지
겨우 돌보거나 지켜볼 뿐인 거지
아이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
입에 빛이 켜진다
그게 그의 관심법
하루는 흰 강아지를 데려왔다
내 시간이 줄어들자 생각이 돋아났다
데려오지 말 걸!
강아지를 데려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뿐인데
슬픔이 일어나 앉고
미소가 돌고
나는 줄어들었다
그는 가끔 늑대처럼 아우우우우 울었고
다채롭게 꼬리를 흔들었으며
천둥소리에 겁먹고 그랬을 뿐인데
나는 자주 무장해제 되었고
비무장 동물이 되었다
이쯤 되면
강아지가 나를 돌보는 거다
세상의 나무가 나를 돌보듯이
마당에 강아지를 묶어놨더니
내게도 묶이는 힘이 생겼다
그가 와서 가르친 것도 아니고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네 다리 쭉 뻗고
낮잠을 자고 있다
지구/박용하
달 호텔에서 지구를 보면 우편엽서 한 장 같다.
나뭇잎 한 장 같다..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
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 별이 아직은 은하계
의 오아시스인 모양이다. 우주의 샘물인 모양이
다. 지구 여관에 깃들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만원이다. 방이 없어 떠나는 새 · 나무 · 파도 ·
두꺼비 · 호랑이 · 표범 · 돌고래 · 청개구리 · 콩
새 · 사탕단풍나무 · 바람꽃 · 무지개 · 우렁이 ·
가재 · 반딧불이…… 많기도 하다. 달 호텔 테라스
에서 턱을 괴고 쳐다본 지구는 쓸 수 있는 말만
적을 수 있는 엽서 한 잎 같다.
돈/박용하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박용하
화를 옮기지 않는다
- 논어
별거 아닌 일로 딸아이에게 화를 낸다
딸아이에게 화를 내기 전에
이미 배우자한테 화가 나 있다
배우자한테 화를 내기 전에
나 자신한테 화가 나 있다
별거 아닌 일로 학생에게 화를 낸다
학생에게 화를 내기 전에
이미 음악 선생한테 화가 나 있다
음악 선생한테 화를 내기 전에
체육 선생한테 더 화가 나 있다
무엇보다
이웃 주민한테
일가친척한테 단단히 화가 나 있다
옛말에 군자는 화를 옮기지 않는다 했는데
나는 옛날 사람도 아니고
군자는 되고 싶지도 않고
감정 위아래의 사람이어서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람이어서
피부병 옮기듯
정신병 옮기듯
화를 옮긴다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동물을 공격하고
별거 아닌 일로 이웃이 되고 원수가 되고
별거 아닌 일로 집안을 거덜 내고
한 나라를 밥 말아먹듯 말아먹는다
마치 분노의 나라에서 지금 막 도착한 사람처럼
쓰레기 투기한 이웃 주민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거들먹거리는 전직 신문기자였던 방송기자에게 재떨이를 날린다
그림을 찢고 악기를 부수고
친구와 결별하고
애인과 나를 말아먹는다
화를 다스리듯이
한 나라를 다스리고
화를 놓아주듯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을까
화를 옮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군자와 친위대원의 차이만큼이나 거대하리라
한순간이다
천지를 다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
손가락 하나 들이밀 데가 없게 되는 순간이
화의 신통방통함이여
화의 구제불능이여
화를 버리기보다 박살내려는
나한테 지기 어려운 나여
그 사람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보복하지 않았다
적설積雪/박용하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
너, 견디고 있구나
천국엔,
세금과 고통이 없어서 싫다는 이 한 몸
<끝까지 견뎌야
사랑이다>
검은 기중기의 눈발이 계속 쏟아진다
희망/박용하
누가 성층권 따위에
관심과 세금을 내겠는가
유사 이래
이제까지의 희망은
지구 안에서의 희망이다
망한다면,
시인의 직관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람이야 말로
지구의 매독이다>
이 매독이야말로
지구를 비닐로 미장할 것이다
연어 천/박용하
푸른 바닷속, 고향집에 가면
이제 보인다
그 동안 나무와 파도에 미쳤던 이 탕아의 눈에도
집으로 가는 길이
눈물 마르는 삶의 협곡처럼
감꽃 속, 그 화아라한 불빛이
마음을 밝히던 시절에도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내가 가서는 안 되는 삶의 후퇴 같았던
스산한 골목 헤매는 바람이었던
내 두 눈에도
놀랍도록 이제는
슬픔의 주름살처럼 세월의 강을
거슬러 거슬러 마음의 뼈만 남은
겨울 동해안 연어의 모천에서
늙어가는, 꺼칠한 어머니 얼굴이 보인다
미모사 잎처럼 흔들리는
아직도 바람이나 산책하려는
광기의 아들을
명태 눈처럼 아득하게
아직은 아니라는 듯이 까마득하게 떠나보내는
속옷을 기워 입던
내가 너무 멀리서만 보려했던
부엌의 어머니가
이제는, 그리움도 없이 보인다
‘나’라는 슬픔/박용하
주문한 시집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낸다
개의 다친 앞다리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지낸다
하루하루는 유일무이한 하루하루
어떤 하루도 대체 불가의 일생 같은 하루여서
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평범한 하루여도
저녁엔 저녁의 마음이 있고 아침엔 아침의 몸가짐이 있다
누구나 살러 왔건만 잠시도 쉬지 않고 죽어간다
누군가는 벌써 유일한 시간이 되었고
눈빛은 순환하지 않는다
비슷해 보일지라도 세상에 똑같은 이파리는 없고
사람은 누구나 한 사람이다
눈물의 종류를 보면서
인간의 눈물을 경멸한 적이 있다
저렇게도 우는 구나
저렇게 우는 척을 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다
집단 눈물 쇼도 가능하구나 싶어서다
도서관에 가면 세상이 책 읽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고
술집에 가면 세상이 술 먹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고
병원에 가면 세상이 아픈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절판된 시집이 복간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낸다
절단 난 인간관계가 회복 불가인 채 지낸다
잎을 무너뜨리는 십일월의 나무와 함께
유리창에 부딪혀 죽어가는 새의 감기는 눈을 지켜보며 지낸다
그대,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나’라는 슬픔 바깥으로 나가 보고 싶어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너’라는 낭떠러지
‘너’라는 비행기
‘너’라는 행성
거기서 인간의 종류가 각양각색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 밖으로 걸어 나간 눈물처럼
내 피부를 뚫고 들어와 내가 되었던 어느 날의 네 눈물처럼
나를 데리고 나 아닌 곳에 도착한다
먼 이곳에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박용하
별은 멀고 인간은 가엾다
별은 깊고 가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빛난다
높은 것은 깊은 것
손 댈 수 없이 높은 것은 입 댈 수 없이 깊은 것
별은 너무 깊어 겸손을 모르고
별은 너무 높아 부끄러움을 모르고
인간은 여전히 오만하다
많이 건방지다
그가 사는 행성에서 문제는 인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문제적 동물은 인간이라는 동물
그럼에도 우리는 해의 자식들
달의 후손들
별의 조상들
우주 먼지의 후예들
해의 눈부신 시선과
달의 그윽한 호흡과
별의 눈부시지 않은 서광과 함께
한 없이 높은 것은 원 없이 깊은 것
별은 너무 멀고 인간은 너무 가깝다
별은 깊은 곳을 넘어 깊고
나는 곁에 있는 인간에게도 닿을 수 없고
인간은 아무리 멀리 날아도
자신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조막만 한 그림자조차 벗어던지지 못한다
행성의 공기를, 물과 불과 흙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제 발바닥 밑의 속세와 머리카락 위의 세속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꿈꾸는 동물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들의 상상력을 체포할 수 있겠는가
대항해 시대처럼 우주의 대양을 누비며
낯선 행성에 첫 발자국 내리는 인류를 상상해요
누가 알겠어요
희망의 날갯짓이 절망의 발자국이 될지라도
상상력이 현실력이 되는 초유의 사태와 사건을
한 세기 전, 그 행성에서 초보 날갯짓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력을 벗어나게 될 줄 꿈이나 꾸었겠어요
그건 화성에서 차 마시는 일처럼 허황된 일
그러나 세상일은 모를 일
상상이 현실이 되기도 하지
한 세기 전, 우주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한 인류가 있었다지
한 세기 후, 그걸 증명한 인류도 있다지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제 욕망, 제 이기심, 제 허영심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아집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탐욕과 폭력과 광기의 화신
그건 인간을 가리키는 말
편견과 무관심과 몰이해의 절정
그것 또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
이중성과 양면성의 복잡계
식욕과 성욕과 권력욕 위에 세워진 왕국
그건 인간이라는 동물을 가리키는 말
때론 비겁하고
때론 야비하고
가까스로 사랑이라는 별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언어 하는 동물
그것 역시 인간을 가리키는 말
여전히 별은 멀리 있고, 눈 닿을 듯 멀리 있고
나는 여기서 죽어가고
죽어가기 전에 살아가고
살아가기 전에 살아남아야 하고
죽어가는 것들은
그 무엇보다 살아가는 것들이므로
지금 이 순간 영원처럼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므로
왜 갈등하나
왜 아등바등하나 물어도 소용없다
인간이니까
왜 감정하나
왜 일희일비하나 시비 걸어도 소용없다
인간이니까
천체의 운행이 어떻게 되든 천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
우주 잡는 소리 할 바엔
곁에 있는 죽음에 몰두하리
죽어가는 강아지의 죽음에 몰두하리
그러기 전에 죽어가는 내 죽음에 골몰하리
죽어가는 세 번째 행성에 골몰하리
손 댈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깜박이고
발 닿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반짝인다
머무는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흩어진다
결국 다들 퇴장하게 된다는 것
하지만 살아 있다
버젓이 살아서 계산서를 뽑고 있다
누가 해와 달과 별의 노래 따위에 관심을 두겠는가
눈앞의 사업에 골몰하기에도 하루가 짧고
그가 이익이 되는지
그가 배신을 때리지나 않는지 골몰한다
삶은 끼니 앞에 놓여 있고
달콤한 꿈보다 곯아떨어진 잠이 더 달콤하고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고 있을 뿐
해와 달과 별의 후광 아래
일상을 먹고 일상을 게운다
그렇다고 상상하는 힘을 그만 두기야 하겠는가
꿈을 폐기하기야 하겠는가
언젠가 그가 살던 행성 밖에서
그가 살던 행성을 바라본 적이 있다
생명과 죽음의 잔치가 한창인 세 번째 행성을
행성에서 멀어질수록 그것은 별처럼 아스라했다
가녀린 한 점 빛이었다
안위가 걱정됐다
별은 여전히 멀고 인간은 너무 가깝다
별의 향기는 너무 멀고 인간의 냄새는 너무 가깝다
인간은 아무리 멀리 가도
제 발바닥 밑을 오려내지 못한다
아무리 우주를 탐험하고 고상 떨어도
발바닥 위에서 사랑하고
머리카락 아래에서 죽어간다
여기서 죽어간다
하루를 죽어가듯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고
밥을 벌어야 하고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고
일당을 벌어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
별은 자중자애 할 필요 없이 높고
치욕 당할 필요 없이 깊고
인간은 일상이라는 천체에서
미움과 증오를 발산한다
인간은 아무리 멀리까지 날아도
자신의 입과 항문, 성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화장실과 부엌, 침실을 달아나지 못한다
여기서 이백삼십만 광년 떨어져 있는 은하?
어쩌라고!
우리는 여전히 지구계에서 산다
여전히 해가 뜨고 해가 진다
껴안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깜박이고
쓰다듬을 수 없는 나라에서 별은 반짝인다
별은 가 닿을 수 없는 그 사람처럼 아득하고
저 하늘에 무한을 두고 여기서 유한을 살찌운다
무한 너머 유한으로 살러 온 삶이여
유한을 탐닉하는 삶이여
오늘이라는 우주에서 살아가고
생활이라는 천체에서 죽어간다
해가 가기 전에
달이 가기 전에
날이 가기 전에
지금 이 순간이 가기 전에
인간이 싫은 날/박용하
대부분의 날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기야 하겠어요
그래서 더욱 살맛이 납니다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맘에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살게 됩니다
악착같이는 아니어도 번개같이
변심을 일깨우는 그 저녁의 겨울비같이
스산함을 꼭 껴안게 됩니다
인간이 싫은 날은 내가 싫은 날입니다
싫은 걸 어쩌겠습니까
자연도 어쩌지 못하는 이 인간 감정의 무한 회전 속에서
인간이 싫은 날에 인간이 보입니다
내가 내 맘에 안 들어서 살듯이
인간이 싫은 날이 인간을 살게 합니다
사람이 저만큼 오고 있는데
빛이 오고 있구나 경악한 적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온기와 열기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갈수록 더합니다
사물이 지나가도 이보다는 낫겠습니다
싫어하는 인간 가까이에
한 명의 돌
세 명의 나무
열 명의 진눈깨비가 살고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맘에 안 드는 나 가까이에
한 명의 강아지
세 명의 길고양이
열 명의 돼지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이웃이라는 이름의 가면이 싫은 날이고
입에 발린 소리 칠한 패거리들이 더욱 싫은 날입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처럼
내 형제들이 싫은 날입니다
내가 사랑할 때처럼
내 친구가 싫은 날입니다
내가 사랑할 때처럼
내 친구가 싫은 날입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키우고
변명이 변명을 새끼 치고
인맥이 없으니 사는 맛이 배가 됩니다
내가 싫은 날입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싫은 날입니다
그건 내가 그만큼 굶주리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만큼 당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겁나는 날입니다
인간이 겁먹은 날입니다
인접한 인간이 싫은 날입니다
인간이 싫은 날이 인간을 더욱 살게 하는 날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남의 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삼월의 마음/박용하
삼월에 나는 죽어요
새 학기, 새 학생, 새 선생
삼월에 나는 간신히 지내요
날 선 마음, 날 선 몸, 날 선 말
나무칼로 사람을 찌르고
나무 톱으로 복부를 질근질근 톱질하는 느낌과 함께
삼월이면 어김없이 죽어요
낯 선 책상, 낯 선 얼굴, 낯 선 공기
그렇다고 낯익은 인간들이 좋기야 하겠어요
사월에 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월에 나는 신입이 되었어요
바람의 방향이 돌변하고
낯 선 날씨가 바람을 살찌워요
잘 살 줄 몰라서 살게 되는 마음과 함께
삼월에 나는 죽어요
새 동료, 새 상사, 새 사장
삼월에 나는 겨우 겨우 지내요
벽과 창과 문과 천장을 껴안고
삶의 전의를 극대화 하며 지내요
삼월에 나는 유독 인생을 살아요
삼월에 나는 황량함을 배가하며 살아남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거들떠보지 않는 죽음/박용하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옛날에 죽은 줄 알았던 내가 들고 일어난다
그녀는 가시 달린 피와 함께
잠 속으로 행군한 사람
햇빛으로 나뭇잎을 할퀴고
담배 연기로 시간을 긁어대던
격정이 눈보라치고 눈물이 번개 치던 그녀는
아주 훗날까지 내 기억을 갈라 놓는다
내 추억을 미래로 끌고 간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언제나 죽고 있었고
여전히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누군가 죽어서야 겨우 기억하고
그마저도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망각의 특수부대원들
우리는 편파 기억의 친위대원들
우리 시대는
버리기 전에 버려지고
죽기 전에 죽고
잊기 전에 잊힌다
죽은 줄도 모르고 있던 그녀의 죽음과
애도를 건너 뛴 삶이
지금의 나를 말한다
고통 업은 생활과 함께
그녀는 피 아픈 사람이었지
겨울비가 겨울나무를 불 밝히고
알코올로 자정을 불 지르던 그 젊은 밤
우리는 피와 피로 만나
언어의 뼈를 팠지
서로의 심장을 꺼내 들고
서로의 얼굴을 비추었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 돌들
우리는 언젠가 모르지 않는 우주 먼지들
별빛 가라앉은 하늘에서 깨어나
지상을 데우는 함박눈의 힘조차
하얗게 잊고 있었던
너는 언젠가 나였고
여러 나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언젠가 너의 나였고
여러 너의 나였다
죽음은 나를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너의 죽음은 죽어가고
나에게/박용하
그림자하고 있어도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
표정 관리하고 있어도 욕보인 것은 욕보인 것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이 다가오듯이
하루도 잊지 않고 죽음에 다가가듯이
말과 글이 일생을 따라다닌다
그날 밤 사소한 태도 하나조차도 따라다닌다
증오는 녹슬지 않고
복수는 용서보다 힘이 세고
일생을 걸어도 바뀌지 않을 나와
일생을 걸고 바꿔가야 할 내가
식탁과 침대를 오가고
햇빛과 달빛을 오간다
내가 죽어야 바뀔 내가
어김없이 오늘도 죽어가고
죽어가기 전에 살아가고
죽을 때까지 살아남아야 하고
정치와 사회를 오가고
사물 같은 사람들 사이를 횡단한다
하루도 잊지 않고
풍경은 내 편이 아니고
자연은 누구의 편이 아니고
내 양심은 혼자 있어도 나를 찌르고
내 생각을 바꿔놓는 타인들과
내가 바꿀 수 없는 타인들의 생각 사이로
호흡과 시선의 나라가 투쟁하고
그들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란
내 생각이 얼마나 한심한 내 생각이었는지
환상을 모르는 정신으로 걸어간다
평생을 잊어 가야 할 사건과 함께
평생을 놓아줘야 할 시간과 함께
나는 다른 사람에 있었고
다른 장소에 있게 되었다
강아지하고 있어도 거짓인 것은 거짓인 것
돌멩이하고 있어도 비굴한 것은 비굴한 것
두 번이 아니기에
이 번 만이기에
그림자하고 있어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것
혈육이라 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내 밖으로 걸어 나간 눈물이 나를 본다
내 밖으로 뛰쳐나간 핏방울이 풍경을 일으켜 세운다
나의 과오/박용하
그 책을 내는 게 아니었다
얼굴에 색칠한 책
얼굴에 허영심 쳐바른 책
비행사적인 내가 행사에까지 참석하고
수작에 놀아난 나를 두고두고 꺼내보게 한 책
사교 모임에 들러리 서는 것도 모르고
몰랐다 해도 그건 내 생활의 일부고
과오는 절반 이상 나의 과오라오
아버지가 죽고나자 슬픔은 커녕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빛이 빛나기까지 했다
남미의 한 시인은
혈육이 너무 그립다고 썼는데
그립기는 커녕
모르게 지내는 게 더 나은 혈육이라고 쓰게 되었다오
남보다 나을게 없는 혈육이라고
시민 보다 나을게 없는 부모 형제라고 새기게 되었다오
그 책을 내는 게 아니었다
두고두고 후회를 덮어쓰게 된 책
구역질 나는 팔자 선정
정신에 색칠한 책
내 얼굴에 네 인맥을 쳐바른 책
혼자 놀지 못하는 책
두고두고 심장을 꺼내들게 한 책
그때 왜 그런 짓을 하고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지만
그건 그런 내가 내 속에 있다 기어나온거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또 다른 무리들은
때만 되면 뛰쳐 나오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씻을 수 없는
씻기지 않는
나의 과거는 나의 과오
미래의 얼룩
내가 나를 다시 읽으면서
나를 조금이라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서
하루를 다르게 살게 되었고
의심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이들을 구하며 살게 되었다
피와 관계없이
배로 갚아줘야 할 선행이 있고
배로 보복해야할 위선이 있다오
시민보다 나을게 없는 시인이 역겹다오
필사하는 시대가 찍어내는 시대가 되고
찍어내는 시대가 퍼나르는 시대가 되어도
널린게 글이고 깔린게 책인 시대가 되어도
과거가 될 수 없는 나의 과오
나의 글쓰기 행동
남을 발가벗기기 전에 나를 발가벗기는 용기가 필요했고
나를 고발하는 용기 이전에 나를 해부하는 용기가 필요했다오
대학로에는 이미 나쁜 풍문이 돌고 있었다오
그의 손에서 리스트가 돌고 있었다오
순진하게도 나만 모르고 있었다오
과거는 끝난게 아니라 줄서 기다리고 있다오
과거는 두고두고 흘러온다오
과거는 두고두고 미래를 침략한다오
결별의 나라에서/박용하
기교파 시인은 오늘이 가기 전에 기교파 시인
말장난 시는 어제가 가도 말장난 시
뜬구름 잡는 소리는 내일이 와도 헛소리
생활이 없는 시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림자 없는 언어를 경원하듯
정치적이지 않은 말을 반쯤 감기는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삭발도 장발도 액세서리로 보인다
승복도 예복도 제복으로 보인다
기교파 복서는 어딜 가도 기교파 복서
스타일리스트는 아무리 잘 싸워도 스타일리스트
목숨이 없는 말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난해를 조제하는 현대 암호들도 부질없었다
미문(美文)은 나의 적
수사학은 오랜 연적이자 정적
적의 꼬드김은 도를 넘으려 드는데
적의 유혹은 뇌를 녹이려 드는데
도덕도 윤리도 시민의식도
하루살이만하고 동아리만한 나라에서
하루를 기어야 하루를 드나드는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나라에서
알아서 굽실거리거나 알아서 몸으로 때워야 하는 나라에서
남을 향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악수나 하며 돌아치고
마이크 앞에서 눈물이나 찔끔거리며
과시와 공손을 뒤집어쓰고
목도리나 벗어주며 다니지 않는다
이미지로 돌아치지 않는다
죽은 듯이 쥐 죽은 듯이 골목을 드나들고 있다
법적인 노략질과 합법적인 패악질의 나라에서
내세울 게 의심밖에 없게 되었지만
기댈 게 자신밖에 없었던 세상에서
자신의 바닥조차 허공이었던 세상에서
양심은 갈등과 번뇌를 먹고 자라났다
사방을 둘러봐도 제 정신으론 살 수 없는 나라인데
다들 노예가 아니란 표정이다
이 무표정 앞에서 질린다
신앙심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모욕과 분노를 저축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해고/박용하
학교에서 내가 배운 건
배울 게 없다는 거였고
그걸 알게 된 건 학교 밖에서였다
학교 밖이 학교였다
세상이라는 대학
직장에서 내가 배운 건
직장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는 거였다
하천에선 연어가 뛰었고
뱃속에선 태아가 뛰었다
화창한 봄날에 결혼하고
볕 좋은 가을날에 실직한다
연봉도 안 되는 퇴직금
깨버린 국민연금
기저귀 실업수당
꿈꿀 수는 있어도
생활할 수 없는 꿈 앞에
감당 불가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광야가 아니고 황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