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보원사지, 보원사, 마애여래삼존상 ■
《유튜브는 문화재마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
●서산 보원사지 ●
사적 제316호로 1987. 07. 18.지정되었습니다ㆍ
「서산 보원사지」는 상왕산(象王山, 307m) 서족 계곡의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로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었고 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어 오래되고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 보원사지 석조 등 5점의 보물급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에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국보 84호)' 등 불교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입니다.
통일신라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원사지'는 매우 넓은 규모이며, 5점의 보물이 남아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인 '보원사가 있습니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보원사지에 있는 지정된 문화재로는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보원사지는 보원사 상왕산(象王山, 307.1m) 서남쪽 계곡의 보원마을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습니다.
서산 마애삼존불까지 찾아온 다음에야 보원사지를 들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용현계곡을 따라서 더 들어가 보면 비교적 넓은 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상황산 서남쪽 계곡에 자리한 운산면 용현리의 보원사지입니다.
상왕산과 가야산은 한 자락으로 이어져 있고, 뜻으로도 상왕산이나 가야산이 모두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한 맥에 닿아 있습니다.
《석조 보물 제102호》
《당간지주 보물제103호》
《오층석탑 보물 제104호》
《법인국사탑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탑비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보원사●
서산 보원사지에 있는 서산 보원사는충남 서산군 운산면 가야산 줄기의 상왕산 동편 계곡에 조성된 서산마애삼존불이 위치한 곳에서 강당계곡을 따라 1.5㎞ 떨어진 지점인, 용현리 사적 제316호(지정연월일 1987. 07. 10)로 지정된 보원사지내 144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덕숭총림 수덕사의 말사입니다.
현 보원사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창건연대와 폐사된 시기를 알 수가 없습니다ㆍ
그러나 보원사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이 있고 사역의 남쪽에서 백제시대에. 조성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백제시대에 창건 되었고 통일신라 시대를 거쳐 고려 초기에 중창되었습니다ㆍ
이후 선조10년(1577년) [예수십왕생칠제의찬요]가 보원사에서 간행된 사실, 1619년에 편찬된 [호산록]에 기록된 것, 그리고 숙종 8년(1682년)에 제작된 [동여비고]에. 보원사가 표시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천년이상의 법맥을 유지한 큰 가람이었습니다
보원사는 언제 폐사 되었는지 모르는 채 세월의 덮개에 묻혀있었으나 개별적으로 눈 밝은 납자들이 외로이 주석 하였습니다ㆍ
그러던 중 2004년12월9일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로 등록하였고, 현 보원사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ㆍ
현재 이곳은 2006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가 마무리되어 대중의 탐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ㆍ
서산 보원사는
백제가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겨 버리고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로 천도한 이후에 당진과 태안지역은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 곳 태안반도를 거쳐 해미현으로 이르는 바닷길은 당시 중국과 교류하는 무역항로 였습니다.
서산 → 운산 → 예산 → 백제의 수도인 공주나 부여로 이어지는 육로는 중국과의 중요 교통로로, 서산은 중요한 교역항이었습니다.
서산은 서해를 사이에 둔 중국과의 교역로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항해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면서 보원사와 서산마애삼존불을 모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ㆍ
《석조여래좌상 》
《경판》
《금동여래입상》
●보원사 기도처 서산마애삼존불●
국보제84호로 1962년 12월20일에 지정되었습니다 ㆍ
우리에게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 (용현계곡)입구 왼쪽 층암절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삼존불은 가운데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으로 추정되는 보살이 있습니다 ㆍ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현재)와 미륵(미래), 제화갈라보살 (과거)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ㆍ
이곳은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므로, 향해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애불을 조성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ㆍ
서산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불상으로 1958년 발견되었습니다ㆍ당시 해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표정으로 바뀌어 "백제의 미소" 라 불리우던 서산마애삼존불은 보원사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ㆍ
이후1974년 풍화방지를 위해 설치한 보호각으로 인해 자연채광에 의한 "백제의 미소"는 볼 수 없게 되었고, 안내자의 인공 채광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ㆍ그 사이 보호각으로 인해 마애불의 백화현상 등이 일어나자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해 보호각을 개방하여 통풍과 자연채광 효과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2006년 2월 28일 보호각의 일부만 남긴 채 32년만에 해체하였습니다ㆍ 또한 빗물을 막으려고 남겨두었던 전각 지붕도 삼존불의 표정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2007년 12월28일 보호각을 전면 철거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ㆍ
※백제의 미소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시간은 하절기 오전 10시~15시30분경이라고 합니다ㆍ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가야산 절벽에 새겨진 백제 후기의 마애불◇
"유적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는 말처럼 아래 설명문을 보고나니 더 다르게 느껴집니다 ㆍ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국보 제84호입니다ㆍ
마애여래삼존상을 바라볼 때, 중앙에 석가여래 입상을 기준으로 왼쪽에 제화갈라보살 입상, 오른쪽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 백제 후기의 마애불입니다.
마애불은 자연 암벽에 선을 새겨 넣거나 도톰하게 솟아오르도록 다듬어 만든 불상을 말합니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를 들고 있는 입상 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 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입니다ㆍ
이 불상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2.8미터의 거대한 불상으로, 단정하고 유연 하게 조각된 솜씨에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중용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자리한 이곳 충남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 반도를 거쳐 백제의 수도 부여로 가던 길목이었습니다.
6세기 당시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하던 곳으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백제의 불상은 균형미가 뛰어나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귀족 성향의 불상과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서민적인 불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민적인 불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다.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발견에 대한 일화◇
*옛이야기*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1959년,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발견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 홍사준 박사가
현장조사 중, 지나가던 한 나무꾼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나무꾼에게는 암벽중앙의
본존불이 산신령으로 보였고, 본존불 우측의 보살은 본마누라, 좌측의 다리를 꼬고
턱을 괴고 앉은 반가사유는 작은 마누라로 보였던 것이지요.
나무꾼의 생각이 참 재미있네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아름다운 미소를 뛰고있어요. 오랜세월 수풀에 파묻혀 잠들어 있다가 1958년에 발견되었고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빛의 각도에 따라 미소가 오묘하게 변하는데 아침 햇빛에 비취는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죠. 백제인만의 세련된 기술로 부드럽게 조각되었고, 80도로 기울어진 채 조각되어 있어 비 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게 한 점은 과학적으로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국보 84호/크기 : 본존불 280cm, 미륵보살 166cm, 제화갈라 170cm
절벽 안쪽 환하게 웃고있는 삼존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가운데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쪽 부처님 중 오른쪽 부처님은 서 있었고, 왼쪽 부처님은 다리를 포개어 앉아 있었습니다.
가운데는 석가여래 입상,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 입상,
왼쪽에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의 특이한 배치입니다.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삼존상은 볼이 통통했습니다. 모두 둥글둥글한 얼굴을 하고 눈은 부리부리했으며 빵빵한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석가여래 입상은 장쾌하고 넉넉한 미소를, 제화갈라보살 입상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미륵반가사유상은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품고 있다고 쓰여있었습니다. 이 온화한 미소들는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움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삼존상의 미소는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데,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햇빛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삼존상이 새겨진 돌이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아
미적 우수함과 과학적 치밀함을 모두 갖춰 감탄을 자아냅니다.
내가 다음에, 다음에 왔을 때도 지금처럼 변함없는 미소로 맞이해 주었으면 싶었습니다.
오래오래 보존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산신각 》
🔶️서산 보원사지, 보원사, 마애여래삼존상 🔶️해운대반야선원🔶️2023년9월17일순례1🔶️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https://youtube.com/watch?v=KwSEc4U5DKI&si=ZRjXLr-_BLl6j9EQ
첫댓글 꼼꼼한 설명과 현장감있는 사진과함께 잘보고갑니다. ()()()
감사합니다 ㆍ
많이 부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