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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이런 事實(사실)아십니까??
<14년의 기다림 7분만의에 끝난 만남>
金丹(금단)아 金丹(금단)아 소리치는 아버지
14년만에 異國(이국)땅 東京(동경)에서 낯설은 땅에서
아버지 그동안 安寧(안녕) 하셨읍니까??
꿈인가요 生時(생시)인가요??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소
臺詞(대사)---“금단아! 이것이 꿈이냐 生時(생시)냐?
나는 自由(자유)의 품안에서 네 消息(소식)을 들었다
그래 北韓(북한)의 어머니 동생은 잘들있느냐”
“아버지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산소도 동생들과 같이 가보고 있어요”
“그래 하루속히 自由(자유)의 품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아버지 알았어요 떠나야할 몸 몸성히 安寧(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금단아!!”
“아버지!!”
監視(감시)의 눈초리 天倫(천륜)의 그하소말도 못하고 만나자 離別(이별)인가
7분간 귓속말
自由(자유)의 품안에 돌아오라 금단아
너도나도 울었다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소
上記歌謠(상기가요) <눈물의 辛金丹(신금단)>은 한복남 詞(사), 曲(곡)하고 歌手(가수) 황금심이 불렀습니다
Domido-record 발매 lp음반-눈물의 辛金丹(신금단)- 에 title 曲(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1963년, 1월23일 ioc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동,서독의 전례에따라 1964년 도쿄올림픽에 南北(남북)이 單一team-단일팀-을 구성할것을 要請(요청)합니다
이에 스위스 로잔 南北體育會談(남북체육회담)을 시작으로 이후 13차례의 會談(회담)이 열렸지만 南北韓(남북한)은 意見差(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單一taam(단일팀) 構成(구성)은 決裂(결렬)되고 맙니다
하지만 도쿄올림픽에서는 그 유명한”辛金丹父女相逢(신금단 부녀상봉)” 이 이뤄저 全國民(전국민) 들에게 痛恨(통한)을 되씹게 하는 契機(계기)가 됩니다
신금단은 北韓(북한)이 낳은 傳說的(전설적)인 女子陸上選手(여자육상선수) 였습니다
1938년 咸鏡南道(함경남도) 여원군에서 태어난 그녀는 선반공이었다가 1958년 9월부터 運動選手(운동선수) 生活(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즈나멘스기형 제상 國際陸上大會(국제육상대회) 800m 競技(경기)에서 世界新記錄(세계신기록)을, 平壤(평양)에서 열린 북한 중국 몽골 3개국
陸上大會(육상대회) 400m경기에서 또다시 世界新記錄(세계신기록)을 收錄(수록)하는 氣焰(기염)을 토합니다
그녀는 1963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회ganeo-가네포- 新生國競技大會(신생국경기대회)에서 육상여자 200m 와400m,800m를 席卷(석권)하며 3관왕에 오릅니다
400m 와800m의 紀錄(기록)은 當時(당시) 世界(세계)最高(최고) 紀錄(기록) 이었습니다
그러나 신금단은 도쿄올림픽에 출전할수 없었습니다
國際(국제)olympic-올림픽- 委員會(위원회)와 國際陸上競技聯盟(국제육상경기연맹)은 上記言及(상기언급)ganefo-가네포-에 參加(참가)한 選手(선수)는
1년간 Olympic-올림픽-과 國際陸上大會(국제육상대회)에 나갈수없다 고 決定(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2년 Asian games-아시안게임-을 開催(개최)하면서 臺灣(대만)과 이스라엘의 參加(참가)를 拒否(거부)했는데 이에대해 國際的非難與論(국제적 비난여론)이
일자 創設(창설)한 大會(대회)가 ganeo-가네포-였습니다
신금단의 出戰(출전)이 不可能(불가능)해지자 北韓(북한) 도쿄올림픽 開幕(개막)을 이틀앞둔 10월8일 大會不參(대회불참)과 日本(일본)에 와있던
選手團(선수단)의 撤收(철수)를 電擊發表-전격발표- 해버립니다
그런데 바로그날 신금단의 父親(부친) 신문준이 딸을 만나기위해서 seoul-서울-에서 Tokyo-도쿄-로 出發(출발)을 합니다
그녀의 父親(부친) 신문준씨는 신금단이 ganeo-가네포-에서 優勝(우승)했을 때 新聞(신문)에서 記事(기사)를 읽고 1950년, 12월 咸鏡南道(함경남도) 이원을 떠나 一四後退(후퇴)때 單身(단신)으로
越南(월남)하면서 헤어진 自身(자신)딸임을 確認(확인)했던 터였습니다
離散家族(이산가족)을 비롯한 全國民(전국민)들의 關心(관심)은 신금단의 Olympic 出戰(올림픽출전) 與否(여부)와 ‘父女相逢(부녀상봉)’으로 옮겨졌습니다
두사람이 만나야한다는 與論(여론)이 들끓자 北韓(북한)을 敵對視(적대시) 하는 反共國是(반공국시)로 國民(국민)들을 옥죄던 박정희쿠테타 政權(정권)도
北韓(북한) 傀儡政權(괴뢰정권)도 받아드릴수밖에 없게됩니다
1964년 10월 9일 오후4시 55분 신금단의 父親(부친)과 辛金丹(신금단)은 조총련회관에서 劇的邂逅(극적해후)를 합니다
신금단은 ”아바이”라고 울부짖었고 그녀의 부친은 ”금단아!”만을 되풀이 했습니다
反共ideologie-반공이데올로기-가 極性(극성)을 부리던 時期(시기) 傀儡政權下(괴뢰정권하의) 딸 금단이나 그에못지않은 군사쿠테타 政權下(정권하)의
그녀의 父親(부친)이나 어떻게 할말을 몸밖으로 내쏟을수 있으리요??
칼날처럼 시퍼런 監視(감시)의 눈초리가 지켜보는데--- 그저 時代(시대)의 犧牲羊(희생양) 뿐인 것을---
끌어안고 눈물만 흘리던 두사람의 14년만의 만남은 긴離別(이별)에 비해 너무나 짧은 7분만에 마치 꿈결같이 끝나고 맙니다
이무렵인 1964년 10월 10일자 東亞日報記事(동아일보기사)-----에는
“----------- 三八線(삼팔선障壁(장벽))은 國境(국경)보다 높았다
國境(국경)도 가르지못하는 父女(부녀)의 情(정)을 한칼로 잘라버리는 非正(비정) 금은 또하나의 悲劇(비극)을 낳아 世界(세계)를 울렸다
‘금단아!”---‘아바이’--- 南北(남북)을 가로막고 버티어선 그하나의 障壁(장벽)으로 말미암아 14년을 헤어져 살아온 女子陸上界(여자 육상계) 의 heroine-히로인-
北韓(북한)의 辛金丹 孃(신금단양) 은 南韓(남한)의 아버지 신문준씨를 만났으나 그리던 아버지품에 눈물 자국만 남겨놓은 채 할말도 못하고
다시 北韓行 列車(북한행열차) 에 실려갔다
그것도 단 15분동안,
남의땅 日本(일본)의 東京(동경)의 조총련 朝鮮會館(조선회관) 에서-------
9일오후 4시 55분 東京Olympic-동경올림픽-은 劇的 父女(相逢(극적 부녀상봉)의 15분을 마련해 주었지만 그 올림픽 터전에서 까지도 가로놓인 三八線(삼팔선)의 障壁(장벽)은 자지러지느는 듯 외쳐대는 말
金丹(금단)의”아바이 잘가오’ 소리만을 虛空(허공)에 남겨둔채 다시 언제 만날지 期約(기약)없는 離別(이별)로 끝나고 말았다------“
신금단은 헤어지면서 아버지 손을 잡고 다시 만날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만날것이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統一(통일)될거니깐” 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두사람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금단은 隱退後(은퇴후) “人民體育人(인민체육인)” 稱號(칭호)를 받고 鴨綠江 體育選手團(압록강 체육선수단) 등의 陸上指導員(육상지도원)을 지냈습니다
70이넘은 나이에도 選手(선수)들을 直接指導(직접지도)하는 모습이 北韓(북한) 화보지에 에 紹介(소개)되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앞서 說明(설명)드린 “父女(부녀)의 劇的相逢(극적상봉)”은 全國民(전국민)들의 心琴(심금)을 울렸고 이런 雰圍氣(분위기)에 특히 발빠른 洋服(양복)쟁이 歌謠人(가요인) 한복남이 이 好機(호기)를
놓힐리만무 황금심을 招待(초대)하여 上記曲(상기곡) <눈물의 辛金丹(신금단)>을 吹入(취입)시킨 것은 너무도 當然(당연)합니다
1394-이런 事實(사실)아십니까??
<누가그아이들을 죽였나??>
하늘로 솟았느냐 땅으로 꺼쪘느냐
개구리 잡겠다고 웃으면서 나가더니
痕跡(흔적)조차 없다더냐
臥龍山(와룡산) 산마루에 하루해가 또지는데
애들아 돌아오라 엄마품에
내아들아 어디로 갔느냐
헤아려 며칠이냐 손꼽아 며칠이냐
내親舊(친구) 개구리도 엄마품에 고이안겨
겨울잠을 잔다더라
옷이나 입고있나 밤이라도 먹고있나
애들아 돌아오라 엄마품에
돌아오라 엄마품에
내아들아 어디에 있느냐
上記歌謠(상기가요)<개구리 少年(소년)>은 박성미작사 김정일작곡으로 歌手(가수) 박성미가 불렀습니다
1991년 11월 반도레코드발매 lp음반-개구리소년 一名(일명) 돌아오라 엄마품에-title 曲(곡)으로 실려있습니다
이노래는 박성미를 알리는데 큰역할을하였고 이에 歌手(가수) 박성미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치지않고 失踪當時(실종당시)부터 數年(수년)동안 家族(가족)들과
함께 全國(전국) 곳곳의 驛(역)과 terminal-터미날-등을 돌며 아이들을 찾아다녔으며 自選公演(자선공연)에서 벌어들인 收益金(수익금)으로 失踪(실종)어린이 찾기 誠金(성금)을 내기도 합니다
그녀는 2002년 10월 臥龍山(와룡산) 遺骸發掘現場(유해발굴현장)을 直接(직접)찾기도 했는데 그녀는 이자리에서”살아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렇게 한줌의 흙으로 나타나 가슴이 미어진다”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1991년 3월 26일
이날은 5,16으로 중단된 地方自治制(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復活(부활)하여 全國(전국)에서 基礎議會(기초의회) 議員(의원)을 뽑는 選擧日(선거일)로 臨時公休日(임시공휴일) 이었습니다
大邱(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 學生(학생)이던 우철원, 조호연, 김영규, 박찬인, 김종식 등 5명의 아이들은 동네近處(근처) 臥龍山(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려 간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들중 누군가 偶然(우연)히 논에서 잡았던 도룡뇽이 햇볕에 酸素不足(산소부족)으로 죽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고 도룡뇽 알을 주우려 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事件發生初期(사건발생초기)에 개구리를 잡으려 간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개구리 少年(소년)”으로 불리게 됩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異常(이상)하게 여긴 父母(부모)들은 오후 6시쯤 臥龍山周邊(와룡산주변)으로 아이들을 차아 나섰습니다
隣近(인근)마을에 사는 學校親舊(학교친구)와 마을 住民(주민)들에게 目擊(목격)된 事實(사실)을 確認(확인) 했습니다
더 이상의 痕跡(흔적)을 찾지 못하자 속이탄 父母(부모)들은 派出所(파출소)로 달려갔읍니다
그러나”警察官(경찰관)들이 모두 投票(투표)하러 나갔다”며 도움을 받지못합니다
이번에는 臥龍山(와룡산) 附近(부근)에 駐屯(주둔)하고있는 50사단을 찾아가”searchlight-서치라이트- 좀 쓸수있게 도와달라”要請(요청)했지만 亦是(역시)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할수없이 그 어두운 밤에 父母(부모)들이 直接(직접) 찾아 나설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事件初期(사건초기) 警察(경찰)은 뚜렷한 根據(근거)도없이 5명의 아이들이 單純家出(단순가출)로 보고 消極的搜査(소극적수사) 로 一貫(일관)합니다
그러나 搜査(수사)가 長期化(장기화)되고 노태우 大統領(대통령)까지 나서 特別指示(특별지시)를 하자 警察(경찰)은 그때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집니다
大邱地方(대구지방) 警察廳次長(경찰청차장)을 本部長(본부장)으로 搜査本部(수사본부)를 構成(구성)합니다
政府(정부)는軍(군)을 大大的(대대적) 으로 投入(투입)해서 現場周邊(현장주변)을 샅샅이 뒤졌읍니다
全國(전국) 初等學生(초등학생)들이”大邱(대구) 개구리 少年(소년) 찾기 運動(운동)”을 펼치는 등 全國國家的(전국가적)인 事件(사건)으로 擴大(확대)되나 결국 “死後(사후) 藥方文(약방문)” 이었습니다
御用團體(어용단체) 全國(전국) 새마을 中央會(중앙회) 등 각종 社會團體(사회단체)들이 2억장의 傳單紙(전단지)를 全國(전국)에 뿌렸고
‘韓國(한국)담배人蔘公社(인삼공사)’와 企業體(기업체)들도 담뱃갑과 商品(상품)에 失踪(실종)어린이 寫眞(사진)을 印刷(인쇄) 하는등’개구리 少年(소년)’搜索(수색)에 同參(동참)해야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많이 求入(구입)하는 電話card-전화카드-나 초코파이 등 菓子(과자) 包裝紙(포장지)에도 아이들의 얼굴이 들어가는 廣告(광고)를 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努力(노력)들은 모두 虛事(허사)였습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kbs<事件(사건)25時(시) > 등 방송프로그램에 서로 다루면서 全國的(전국적)인 關心(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事件解決(사건해결)을 위한
실마리와 端緖(단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온국민들이 뒤늦게 한마음 한뜻으로 찾아나서 이잡듯 뒤졌어도 成果(성과)가 없자 “北韓工作員拉致說(북한 공작원 납치설)” ,”ufo 拉致說(납치설)”, “生體實驗犧牲說(생체실험희생설)” 등 온갖 所聞(소문)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실종 5년째인 1996년 1월에는 韓國(한국) 最初(최초)로 物理心理學博士(물리 심리학박사) 學位(학위)를 받은 kaist 敎授(교수) 김기완이
” 5명의 失踪少年(실종소년) 중 한명인 종식이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집에 묻었다”고 느닷없이 主張(주장) 하자 어리석게도 경찰은 그말을 믿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掘鑿機(굴착기)와 곡괭이 등으로 집안 化粧室(화장실)과 부엌바닥을 파는 騷動(소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痕跡(흔적)도 나오지 않자 住民(주민)들은”精神病者(정신병자), 似而非(사이비)博士(박사)” 라며 욕을 퍼부어댔습니다
김가원은 이 事件(사건)으로 이듬해 被訴(피소)되어 罰金刑(벌금형)을 받은뒤 學校(학교)에 辭表(사표)를 提出(제출)해야 했고 韓國心理學會(한국심리학회)에서도 除名(제명)당합니다
그는 歲月(세월)이 흐른후 2005년 또다시<아이들은 山(산) 에 가지않았다>는 實話小說(실화소설) 를 펴냅니다
大統領(대통령)의 特別指示(특별지시)와 懸賞金(현상금) 4200만원 單一事件(단일사건)으로는 最大規模(최대규모)인 延人員(연인원) 35만명의
搜査人力(수사인력) 이 投入(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行跡(행적)은 찾지못합니다
결국 搜査本部(수사본부)는 1996년 5월 解體(해체)되고 그뒤에는 大邱(대구) 달서경찰서 刑事(형사)4반이 사건을 넘겨받아 提報(제보)에 의존하는 搜査(수사)를 펼칩니다
그러던중 !!! 失踪(실종) 11년 6개월만인 2002년 9월26일 4구의 遺骨(유골)과 신발 5컬레가 성산고교 新築工事場(신축공사장) 뒤편 500m 떨어진 臥龍山(와룡산) 중턱에서 發見(발견)됩니다
도토리를 줍기위해 와룡산에 올랐던 사람이 아이들의 遺骨(유골)을 發見(발견)하고 申告(신고)를 한것입니다
헌데 이번에도 警察(경찰)의 無能(무능)함이 또 되풀이 됩니다
당시현장에 달려갔던 나주봉 全國迷兒 失踪者家族(전국미아 실종자가족)찾기 市民(시민)의모임 회장은” 申告(신고)를 받고 出動(출동)한 警察(경찰)이 곡괭이와 삽으로 現場(현장)을
파헤쳐 놓았다--- 파다가 아차싶었던지 그때서야 國科搜(국과수)를 불렀다
그때 경찰이 現場保存(현장보존)만 잘했으면 뭔가 端緖(단서)가 나왔을것인데 정말 憤痛(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경찰은 遺骨發見(유골발견) 이틀만에 死因(사인)을 自然死(자연사)로 推定(추정)했습니다”아이들이 길을잃고 헤매다가 脫盡(탈진))해서 숨졌다”고
言論(언론)에 發表(발표)하는 無能(무능)함을 드러냅니다
發見當時(발견당시) 遺骨(유골)이 뒤엉켜있고 옷을 얼굴에 덮어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를두고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잃고 헤매다가 遭難(조난)당해 추위를 피하기위해 옷으로 온몸을 덮었을것이다라고 推測(추측)했습니다
그리고 ‘低體溫症死亡(저체온증사망)’으로 發表(발표)합니다
말도안되는 調査結果(결과) 였습니다
被害者父母(피해자부모)들은”臥龍山(와룡산)은 마을에서 멀지않은 野山(야산)이기에 불빛이 다보이므로 절대 遭難(조난) 당할일이 없다”며 抗議(항의)를 했습니다
失踪(실종)아이들을 鑑識(감식)했던 경북대 법의학팀의 判斷(판단)은 完全(완전)히 달랐습니다
綿密(면밀)히 分析結果(분석결과) 明白(명백)한 他殺(타살)로 決論(결론)을 내렸습니다
“두개골에 나타난 損傷痕跡(손상흔적)을 分析結果(분석결과) 소년들은 ㄷ자 모양의 銳利(예리)한 凶器(흉기)로 他殺(타살)된 것이 分明(분명)하다”고
檢査結果(검사결과)를 발표 警察(경찰)을 머쓱하게 만듭니다
以後(이후) 搜査(수사)는 進陟(진척)이없고 犯人(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2006년, 3월25일로 公訴時效(공소시효)가 만료되고 맙니다
어쨌던 이러한 全國民的(전국민적) 關心事(관심사)를 映畵界(영화계)에서는 가만두지 않고 映畵化(영화화)합니다
1992년 조금환감독 이 演出(연출) <come back frogboy-돌아오라 개구리 少年(소년)->이 開封(개봉)됩니다
장덕수, 변성현, 김현수, 김선우, 김동수 이요한등이 出演(출연)했습니다
2011,2월에는 앞서 言及(언급)한 김가원 <아이들은 山(산)에 가지않았다>를 原作(원작)으로하고 박용우, 류승룡, 성동일, 성지루, 김여진 出演(출연)으로
映畵化(영화화)해서 開封(개봉)합니다 題目(제목)은<아이들> 이었습니다
1395-이런 事實(사실) 아십니까??
<그해 여름 그들의 選擇(선택)이 世上(세상)을 바꾸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苦痛(고통)다한 후에
내 兄弟(형제) 빛나는 두눈에 뜨거운 눈물을
한줄기 江(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平和(평화)의 물결 넘치는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兄弟(형제) 그리운 얼굴 그아픈 追憶(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 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兄弟(형제) 긔운 얼굴 그 아픈 追憶(추억)도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 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上記歌謠(상기가요)<그날이 오면>은 문승현이 작사, 작곡 했고 노래모임 새벽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등에 실려있습니다
서울레코드발매 lp음반-솔아솔아 푸른솔아-를 title 曲(곡)으로하는 앨범에 실려있습니다
노래題目(제목)은 심훈의 시에서 借用(차용)했습니다
심훈의시<그날이 오면>은 日帝(일제)로부터의 解放(해방)에대한 剛烈(강렬)한 所望(소망)을 격정적이고 直說(직설)的(적)으로 表現(표현)한 抵抗詩(저항시) 입니다
<그날이 오면>은 民衆歌謠(민중가요) 노래패인”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大衆的(대중적) 成功(성공)을 거둔 album-앨범-인 2집에 수록되 있습니다
이 음반에는 1980~90년대 大學(대학)을 다닌 사람들 이라면 누구나 귀에익숙한 노래들인<솔아솔아 푸른솔아><廣野(광야)에서><사계>
< 이 山河(산하)에><잠들지 않는남도><마른잎 다시 살아나> 등도 함께 실려있습니다
“노찾사 2집”은 進步的(진보적) 노래運動(운동)의 成果(성과)가 商業的(상업적) 大衆歌謠(대중가요) 音盤市場(음반시장)안에 意圖的(의도적)으로 進入(진입)해
우리나라 大衆歌謠(대중가요) 史上最初(사상최초)의 紀念碑(기념비)的(적)인 音盤(음반)입니다
2집음반 出市後(출시후)<솔아솔아 푸른솔아><廣野(광야)에서><사계>는 當時(당시) 歌謠順位(가요순위) 프로그램 上位圈(상위권)에 同時(동시)에 rank-랭크- 되기도 합니다
特(특)히<사계>는 mbc 大學生quiz-대학생퀴즈- 프로그램인”quiz academy-퀴즈 아카데미-”의 title 音樂(타이틀음악)으로 使用(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음반은 發賣後(발매후) 1년만에 500만장판매를 突破(돌파)했고 이후 1990년 초중반까지 800만장 以上(이상) 팔렸다 합니다
“노찾사 2집”이후 안치환은 solo 活動(솔로활동)을 시작해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힛트시키며 人氣歌手(인기가수)
班列(반열)에 올랐고 권진원은 3집이후 솔로로나서<살다보면>등의 노래로 注目(주목)을 받습니
다
1985년,2월12일 總選以後(총선이후) 國民(국민)들의 民主化熱望(민주화열망)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정권의 民主化運動(민주화운동) 彈壓(탄압)은 如前(여전)히極甚(극심)했습니다
이러한 狀況(상황)에서 反轉(반전)의 契機(계기)를 가져온 것이 1987년초에 일어난 박종철 拷問致死(고문치사) 事件(사건) 입니다 一名(일명)”탁억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運動圈(운동권) 先輩(선배) 박종운의 行方(행방)을 캐묻기위해 박종철을 連行(연행)한 警察(경찰)들이 그에게 물拷問(고문)을 가한끝에 死亡(사망)하자
물 拷問事實(고문사실)을 隱蔽(은폐)할 목적으로 온갖 工作(공작)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稀代(희대)의 妄言(망언)”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입니다
그런데!! 박종철 사망후 剖檢(부검)을 實施(실시)해본 結果(결과) 屍身(시신)은 수많은 피멍과 물 拷問痕跡(고문흔적), 電氣拷問痕跡(전기고문흔적)이
瀝瀝(역력)했고 當時(당시) 剖檢醫(부검의)가 拷問(고문)에의한 死亡(사망)임을 定式(정식)으로 確認(확인)하면서 事態(사태)는 一派萬派(일파만파)로 커집니다
國民(국민)들은 憤怒(분노)의 表示(표시)로 警笛示威(경적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拷問警察(고문경찰)을 處罰(처벌)하는것로 事件(사건)은 一段落(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읍니다
한편 전두환은”改憲(개헌)論議(논의)는 곧 있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하자”는 4,13 護憲措置(호헌조치)를 發表(발표)하면서 大統領直選制論議(대통령직선제논의)를 默殺(묵살)했습니다
國民(국민)들의 民心(민심)은 激昻(격앙) 되었습니다
1985년부터 野黨(야당)인 신한민주당은 大統領(대통령) 間選制案(간선제안)에 대해”憲法改定(헌법개정) 1000만인 署名運動(서명운동)” 을
推進(추진)하는등 直選制(직선제) 改憲(개헌)을 主張(주장)하고 나섭니다
與黨(여당)인 민주정의당에서도 이를 無視(무시)할수없어 大統領間選制案(대통령가선제안) 에대한 交涉(교섭)을 進行(진행)하던 時節(시절) 이었습니다
신한민주당, 민주정의당이 제시한 改憲案(개헌안)은 매우달라 野黨(야당)인 신한민주당은 大統領中心制(대통령중심제) 與黨(여당)인민주정의당은 議院內閣制(의원내각제)를
주장했고 이런상황서 당시 野黨黨首(야당당수) 이민우가 의원내각제 추진에 호응하는듯한”이민우구상”을 發表(발표)하자 신한민주당은 分列(분열)되고 김대중, 김영삼씨가
一擧(일거)에 脫黨(탈당)을해 새로 통일민주당을 創黨(창당)합니다
이런 渦中(와중)에 天主敎(천주교) 正義求賢(정의구현) 全國司祭團(전국사제단)의 김승훈 神父(신부)가 5,18 民主化運動(민주화운동) 七週期(주기)
追募missa-추모미사-에서”박종철 拷問致死(고문치사) 事件(사건)이 縮小(축소) 隱蔽(은폐)되었고 拷問(고문)警察(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內容(내용)을
暴露(폭로)하면서 國民(국민)들의 憤怒(분노)에 불을 붙였습니다
正義求賢祭壇(정의구현제단)의 發表過程(발표과정)은 매우 劇的(극적)이었습니다
當時(당시) 拷問致死(고문치사) 事件主犯(사건주범)들은 事件(사건)의 縮小(축소),隱蔽(은폐)로 自身(자신)들이 모든罪(죄)를 뒤집어쓴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永登浦矯導所(영등포교도소) 監房(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偶然(우연)히 近處房(근처방)에 收監中(수감중)이던 在野人士(재야인사) 前(전) 東亞日報記者(동아일보기자) 出身(출신) 이부영이 듣게되어
안유 保安係長(보안계장)에게 問議(문의)했더니”박종철사건이 隱蔽造하는 集會(집회)作(은폐조작)되고 있다”는 衝擊的(충격적)인 事實(사실)이 흘러 나온것입니다
이부영은 크게 憤怒(분노)하여 關聯內容(관련내용)을 종이에 빼곡히써서 다른 矯導官(교도관)인 한재동을 통하여 외부(外部)에 내보냈고 이를받은
전 청와대(靑瓦臺) 사회교육(社會敎育)수석(首席)이었던 김정남이 正義求賢司祭團-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專達)하여 발표(發表)하게 된것입니다
김승훈신부에 의해 다시 날게된 監獄(감옥)에서 몰래보내는 便紙(편지)인 “비둘기”는 거대한 날개짓으로 世上(세상)을 바꿉니다
與論(여론)은 暴發(폭발)했고 在野團體(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고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民主憲法爭取(민주헌법쟁취) 國民運動本部(국민운동본부)가
結成(결성)되어 그간 分列(분열)되었던 民主勢力(민주주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시작합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10일 민주정의당 大統領候補(대통령후보) 指名大會(지명대회)날에 맞추어 박종철 拷問致死事件(고문치사사건) 隱蔽(은폐)를
糾彈(규탄)하는 集會(집회)를 전국 22게도시서 열기로 합니다
糾彈集會(규탄집회) 하루전 6월9일 전국(全國)의 각 대학생(大學生)들은 집회(集會)를 앞두고 事前集會(사전집회)를 엽니다
그중 연세대도 露天劇場(노천극장)서 集會(집회) 를진행하고 校門(교문)앞으로 이동하면서 事件(사건)이 또터집니다
학교밖으로 進出(진출)하려는 學生(학생)들에게 金朱烈死亡(김주열사망)때처럼 또 催淚彈(최루탄)을 發射(발사)했고 그중한발이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의 喉頭部(후두부)를 直擊(직격)해버립니다
이러한 無慈悲(무자비)한 전두환정권의 만행은 불난집에 기름을 부었고 전두환은 國民(국민)들의 平素(평소)같지않은 거센 抵抗(저항)에 결국 妥協(타협)을 택할수없게됩니다
김영삼과 만남이 이루어지나 “大統領直選制(대통령직선제) 選擇的國民投票(선택적국민투표) 拘束者釋放(구속자석방)”등 요구(要求)를 전두환이 거부
결렬(決裂)되고 한국국민당 이만섭을 만나자” 直選制(직선제)를 해서 동교동 상도동이 머리처박곡 싸우게하고 이쪽은 物價安定(물가안정),
올림픽가지고 審判(심판)받는게 좋다”고----- 과연(果然) 野黨黨首(야당당수)가 한말이 맞나싶을정도입니다
이에 김대중씨를 家宅軟禁(가택연금)에서 풀어줘 두 거목(巨木)의 다툼으로 野黨分列(야당분열)을 劃策(획책)한것입니다
예상(豫想)대로 漁父之利(어부지리)로 쿠테타 주역(主役 )노태우에게 대통령(大統領)자리를 내줘 쿠테타정권 연장(延長)을 해줘버려 民主勢力-민주세력-들은 또다시 통한(痛恨)의 눈물을 흘려야했읍니다------
1396—이런 事實(사실) 아십니까??
< 진실(眞實)은 침몰(沈沒)하지 않는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
나의 사진(寫眞)앞에서 울지마오 나는 그곳에 없소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위해 울지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 이 되었오
저넓은 하늘위를 자유(自由)롭게 날고 있죠
가을에 곡식(穀食)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래요
겨울엔 diamond-다이아몬드- 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래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께요
밤에는 어둠속에 별이되어 당신을 지켜 줄게요
나의 사진(寫眞)앞에 서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生角)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넓은 하늘위를 자유(自由)롭게 날고 있죠
상기 세월호-歲越號- 참사(慘死) 추모(追募)곡(曲)<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1932년 볼티모어의 주부(主婦) 메리 프라이가 지은 시(詩)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내무덤에 서서 울지마오-“에서 유래(由來)했습니다
프라이는 어머니를 잃고 상심(傷心)해있는 이웃을 위로(慰勞)해 주기위해 죽은사람이 오히려 산자를 위해 위로(慰勞)하는 내용(內容)의 시(詩)를 썼습니다
원전(原典)은아메리카 원주민(原住民) 사이에 전승(傳承)되던 작자미상의 시를 기원(起源)으로 봅니다
이시(詩)가 노래로 맨먼저 만들어진 곳은 아쉽게도 일본(日本)입니다
2003년 11월 일본의 소설가(小說家) 이자 가수(歌手)겸 작곡가(作曲家)인 아라이만이 영시(英詩)를 번안(飜案)하여 melody-멜로디-를 붙힌후”천의 바람이 되어”라는
제목(題目)의 single album-싱글앨범-으로 발표(發表)했습니다
이후 이곡은 많은 가수(歌手)들이 remake 해서 인기(人氣)를 끌었고 2007년 tenor-테너- 아키가와 마사후비가 불러 오리콘 싱글챠트 1위에 오른후
클래식음악 아티스트로는 처음으로 100만장이상 팔린 million seller-밀리언셀러-를 기록(紀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以後) 2009년 2월 popera tenor-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한국어(韓國語)로 번안(飜案) 및 개改詞-개사-하여 자신(自身)의 mini album-미니앨범-<my hero> 의
7번트랙에 수록(收錄)하여 한국(韓國)에 처음으로 발표(發表)합니다
Universal music 에서 발매(發賣)했습니다
이어서 歲 越號 沈沒事故 後-세월호참몰사고후-인 2014년 4월25일 세월호참사歲越號 慘死 公式 追募曲-공식추모곡-으로 헌정(獻呈)하였으며
음원(音源) 수익금(收益金) 전액(全額)을 기부(寄附) 하기로 합니다
獻呈直後-헌정직후 7개 음원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2014년 4월16일 안산 단원고 2학년생 325명을 포함한 승객(乘客) 476명을 태운 청해진해운 소속 歲越號-세월호-가 인천(仁川)을 출발(出發)해
제주도(濟州島)로 향하다 진도군(珍島郡)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沈沒)했습니다
단원고 학생들은 들뜬마음으로 제주도(濟州島) 수학여행(修學旅行)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통한(痛恨)의 세월(歲月)이 흐른후에도 진도(珍島)의 조그만 어항(漁港)이었던 팽복항은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가장 스르프고 비통(悲痛)한 항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고(事故)로 시신(屍身) 미수습자(未收拾者)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死亡)했으며 생존자(生存者)는 172명입니다
그토록 유족(遺族)들의 애를태운채 차거운 바다속에 묻혀있던 세월호가 인양(引揚)을 미뤄 오다가 참사(慘死) 1089일만에 부두(埠頭)위에 올라왔습니다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선체(船體)곳곳에 뚫린 구멍과 오랫동안 쌓인 개흙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있었습니다
세월호는 반잠수식 선박에 실려 동거차도 인근해역(隣近海域)을 출발해 2017년 4월9일밤 목포신항 부두에 완전히 거치됩니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4,16 세월호참사 진상구명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조사 위원회(特別調査委員會)가 활동했고 최순실의 국정농단(國政壟斷)으로인한 촛불집회로 2017년 3월10일
독재자(獨裁者)딸 박근혜가 헌법재판소(憲法裁判所)에 의해 한국역사상(韓國歷史上) 최초(最初) 파면대통령(罷免大統領)이되었고 자기부친(自己父親)이 충복(忠僕)의 총탄(銃彈)에 쓰러짐과 더불어
가장 비극적(悲劇的)인 부녀(父女)로 기록되는----- 가장 기억(記憶)하고싶지않은 역사(歷史)속 인물(人物)로 추락(墜落)합니다
세월호 침몰 초기대응(初期對應)은 아무리 이해(理解)하려해도 이해되지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세월호는 급선회(急旋回)로 배에 이상이 생긴이후(以後) 사고수역(事故水域)) 관할지(管轄地)인 vts-해상교통센터-가 아닌 제주(濟州) vts에 최초신고(最初申告)를 해 초기(初期) golden time-대응시간-을 허비(虛憊)하고 맙니다
더욱이 세월호가 진도(珍島)vst 관할수역에 4월16일 오전7시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진도(珍島)vst는 세월호 관할해역(管轄海域) 진입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역에 신고를 받고 사고해역(事故海域) 출동한 해경(海警)은 여객선(旅客船)안에 300명이상의 승객(乘客)이 남아있음에도 배밖으로 탈출했거나
눈에 보이는 선체(船體)에있는 승객들만 구조(救助)했을뿐 세월호 내부로는 진입하지 않는 소극적(消極的)구조(救助)로 일관(一貫)했습니다
더구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행동(行動)은- !!!---- 배의 선장(船長)은 인명구조(人名救助)등 비상상황(非常狀況) 발생시(發生時) 선내에서
총지휘(總指揮)를 맡아야 하고 승무원(乘務員)은 가자 역할역 맡아 탑승객구조(搭乘客救助)를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선장(船長)을 비롯하여 승무원대부분(乘務員大部分)은 침몰직전(沈沒直前)까지 무책임(無責任)의 극치(極致)를 보이며 탑승객(搭乘客)들에겐
객실에 그대로 있어라는 안내방송(案內放送)을 하고 자신(自身)들은 배밖으로 나와 해경경비정(海警警備艇)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됩니다
이에 국민들의 분노(憤怒)는 극치(極致)에 다다릅니다
특히 세월호가 침몰한곳은 한국에서 두번째로 조류(潮流)가 빠른다는 위험천만(危險千萬)한 맹골수도 였지만 이지역의 운항(運港)을 지휘한 사람은
입사한지 4개월째인 3등 항해(航海士)라로 드러났으며 더욱이 이곳을 통과시 선장은 조타실(操舵室)을 비운것으로 드러나 무책임의 극치(極致)를 보였습니다
해양수산부(海洋水産部)는 사고발생후 즉시 중앙사고수습본부(中央事故收拾本部)를 세우고 법무처 총괄업무를 시작했으나 곧 관련업무를 안전행정부(安全行政府)의 중앙대책본부에 넘겼습니다
하지만 중대본은 사고현장정보(事故現場)情報)를 제대로 파악(把握)하지 못한체 수차례 잘못된 정보를 발표하는 실수를 저지러고 맙니다
여기에 경기도교육청(京畿道敎育廳)도 세월호 침몰사고직후 학생들이 전원구조(全員救助)됐다는 잘못된정보 공지로 공분(公憤)을 일으킵니다
여기에 해수부, 교육부, 해양경찰청등이 별도의 사고대책본부를 꾸리면서 대책본부만 10여개에 달하자 총리실은 중구난방(衆口難防)이된 대책본부를
통합해 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를 수립해 업무를 총괄하겠다고 발표했다가 하루만에 철회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하면서
구조작업(救助作業)이 더뎌지는 박근혜정권의 무능한 민낯이 드러나며 탄핵(彈劾)을 부채질 합니다
이처럼 사고직후 초동대처(初動對處)부터 허둥댔던 정부의 허술한 재난대응(災難對應) 시스템이 여실히 노출되면서 정부책임론(政府責任論)에대한 비난과 질타가 쏟아집니다
그간 최초여성대통령(最初女性大統領)이라 칭찬하고------후에 신라선덕여왕이후 최고여왕(最高女王)이라는 삼척동자(三尺童子)가 비웃을 말을 내뱉은 사람들이 등장(登場)해 나라 망신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저 부친(父親)을 따라 대통령병(大統領病)에 걸린 한여성에 농락당한 일부 유권자(有權者)들이 아직도 존재(存在)하고 있음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박정희 향수병(鄕愁病)역시(亦是)도-----
1397—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죽음을 넘어 시대(時代)의 어둠을 넘어>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눈 맞으며 아픈맘 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世上萬事) 야속(野俗)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어이타고 이내 청춘(靑春) 세월(歲月)속에 묻힐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恨)맺힌 내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世上) 웃어보자
아개낀 아침에는 고독(孤獨)을 삼키고
바람불던 날에도 맘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世上萬事) 야속(野俗)타고 주저앉아 있을소냐
어이타고 이내 청춘(靑春) 세월(歲月)속에 묻힐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恨)많은 내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끝에서 이세상(世上) 웃어보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이 하늘끝에서 이세상(世上) 웃어보자
아~아~아~아~ 바윗돌
상기가요<바윗돌>은 1981년 현대레코드발매 lp음반-81년 mbc 대학가요제 2집-에 side b실려 발매 되었습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오월 광주(光州)”에 대한 노래를 이야기하라면<임을 위한 행진곡(行進曲)>이나”꽃잎처런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피---“로
시작하는 오월의 노래등 운동가요(運動歌謠)를 떠올리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대중가요중(大衆歌謠中)에도 5,18과 관련된 노래들이 있다는 사실(事實)을 아는이들은 많지 못합니다
<바윗돌>이 그중 한곡입니다
1981년mbc 창사(創社) 20주년 기념(紀念)으로(魯)하게 열렸던 제5회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
당시 한양대학교(漢陽大學校) 경영학과 1학년 정오차는 자신(自身)이 작사(作詞), 작곡(作曲)한<바윗돌>로 당당(堂堂)이(李)대상(大賞)을 거뭐쥡니다
광주출신(光州出身)인 그는 그는 광주일고(光州日高) 졸업후 군복무(軍服務)를 마친 복학생(復學生)이었습니다
뭔가 답답하고 우울했던 젊은세대(世代)의 마음을 대변(代辯)하듯 시원하고 powerful-파워풀-한 가창력(歌唱力) 압권(壓卷)이었ejs 그의 노래는 꽉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청량제(淸凉劑)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노래는 대학(大學) 가요제(歌謠祭) 사상최초(史上最初)로 시대적상황(時代的狀況) 때문에 금지곡(禁止曲) 이된 불행(不幸)한 곡(曲)으로 기록(紀錄)됩니다
저오차가 부른<바윗돌>은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 대상이후(大賞以後) 한달정도 방송에서 줄기차게 나오다가 어느 radio프로그램 출연이후(出演以後) 한순간에 사라저 방송금지곡(放送禁止曲)이 됩니다
당시(當時)진행(進行)을 맡았던 아나운서가<바윗돌>이란 노래제목이 무엇을 의미(意味)하냐고 묻자 정오차는” 광주(光州)에서 죽은 친구(親舊)의
영혼(靈魂)을 달래기위해 만든노래이고<바윗돌>은 친구(親舊)의 묘비(廟碑)를 의미(意味)한다”라고 대답(對答)합니다
그시기는 전두환 쿠테타정권의 암울(暗鬱)한 시절(時節)었으니 온통 군바리가 모든걸 장악(帳幄)하고 이었으니---
방송이 나간후 정보(情報)기관(機關)과 방송국에는 호떡집에 불이난듯 소란스러워 집니다
다음날 이노래는 “불온사상(不穩思想)내포(內包)”라는 그들의 일방적(一方的)인 주장(主張)으로 바로 금지조치(禁止措置)가 내려졌습니다
시대(時代)의 아픔을 은유적가사(隱喩的歌詞)와 우렁찬 창법(唱法)으로 노래했던 이노래는 대중(大衆)들에게 잊혀짐을 강요(强要)당합니다
대학졸업후(大學卒業後) 은행에 입사 국민은행 지점장을 지내는등 금융인(金融人)으로 변신(變身)한 정오차는 직장행사(職場行事)등에서 이노래를 부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습니다
또 대학가요제 입상자모임을 결성에 꾸준히 무대(舞臺)에 오르며 음악의꿈을 놓지않고 있읍니다
5,18을 노래한 가요는<바윗돌>말고도 또있습니다
바로 김원중의<바위섬>입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 당시 김원중은 전남대 2학년이었지만 “운동권(運動圈)”은 아니었습니다
공부보다 guitar 치고 노래부르는게 좋았습니다
그의 말대로”속없는 학생(學生)” 이었습니다
그런 김원중이 5,18 현장(現場)에 있었습니다
그는”그상황(狀況)을 눈으로 봤다면 누구나 동조(同調) 했을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김원중은 지역(地域) 선후배(先後輩)들과 만든 그룹사운드”로터스”에서 활동 했습니다
5,18이 지나고 군(軍)을 제대한 그는 복학(復學)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함께 어울리던 조선대생(朝鮮大生) 배창희가<바위섬>이란 노래를 들고왔습니다
배창희는 전남(全南) 고흥 소록도(小鹿島)에 갔다가 가사(歌詞)를 쓰고 곡(曲)을 만들었습니다
그 고립(孤立)된 섬의 모습이 마치 5,18당시(當時) 광주(光州)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전두환정권의 계엄군(戒嚴軍)은 외부로부터 광주를 철저히 고립(孤立)시키는 작전(作戰)을 폈습니다
민간인(民間人)들을 상대(相對)로 마치 적군(敵軍)과 싸우듯 군사작전(軍事作戰)하듯 한것입니다
해서 광주(光州)에서 나갈수도 광주(光州)로 들어올수도 없었습니다
김원중도 배창희의 말에 공감(共感)하며 이노래를 불렀습니다
당시(當時)만해도 서울이 아니면 음반(音盤)을 만들기가 어러웠습니다
기획(企劃)부터 제작(制作)까지 음반에 관한 모든 것은 서울로 통했습니다
허나 김원중과 그의 동료들은 광주에서 음반을 만들기로 작정합니다
‘왜 지방(地方)에서는 음반(音盤) 만들수 없을까’ 라는 생각(生角)에서 출발(出發)했습니다
1984년 김원중을 비롯하여 광주(光州)에서 ‘노래좀한다’는 이들이 모여 ’예향(藝鄕)의 젊은 선율(旋律)’ 이라는 음반(音盤)을 냈습니다
Lp판 표지(表紙)까지 자신(自身)들의 손으로 그렸습니다
지역(地域)에서만든 최초(最初)음반(音盤)이었습니다
김원중은 이음반에 막내로 참가(參加)해<바위섬>을 불렀습니다
파도(波濤)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人跡)없는 이곳에
세상(世上)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날밤 폭풍우(暴風雨)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波濤)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바위섬아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나는 이곳 바위선에 살고 싶어라
그는 처음부터 가수(歌手)가 되려고 한건 아니었습니다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 무대(舞臺)에 오른적도 오른적도 없습니다
그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힘으로 음반(音盤)한번 내보자”는 거였습니다
일종(一種)의 기념음반(祈念音盤) 이었습니다
그런데<바위섬>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고 김원중도 덩달아 유명세(有名稅)를 타며 방송(放送)에까지 출연(出演)하는 등 대학생(大學生) star singer-스타가수-가 되버립니다
김원중은 방송에서<바위섬>이” 5,18 광주”를 의미(意味)한다고 쉽게 말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접적(間接的)으로 방송에 나가면”나는 광주(光州)출신(出身)이다”고 이곡을 알렸습니다
1398—이런 사실(事實) 아십니까??
<정수라의”대한민국” 정태춘의”대한민국”>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遊覽船)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幸福)이 언제나 자유(自由)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四季節) 있기에 볼수록 정(情)이드는 산(山)과 들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理想)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도시(都市)엔 우뚝솟은 building-빌딩-들 농촌(農村)엔 기름진 논과밭
저마다 자유(自由)로움 속에서 조화(調和)를 이뤄가는 곳
도시(都市)는 농촌(農村)으로 향하고 농촌(農村)은 도시(都市)로 이어져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世界)로 뻗어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恩惠)로(魯)운 이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江山)을 노래 부르네
아~아!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
아~아~ 영원(永遠)토록 사랑 하리라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 아~아! 우리조국(祖國)
아~아! 영원(永遠)토록 사랑하리라
상기가요(上記歌謠) <아!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박건호작사 김재일작곡 정수라가 노래했습니다
Jigu-record 발매 lp음반-즐거운 우리들의노래-에 장재현과 duet듀엣-으로취입 한 음원으로 실려있읍니다
그리고 후일 정수라 독집에 솔로로 재녹음 실리기도 합니다
이곡은 전두환쿠테타 정권시절 “바르게 살기 운동(運動) 중앙(中央)협의회(協議會)”의 전신(前身)”사회정화위원(社會淨化委員)”의 요청(要請)에따라
건전가요(健全歌謠)로 작사 한것으로 결과적(結果的)으로 이곡을 작사함으로써 그간그가 쌓아온 작사가(作詞家)서의 명예(名譽)는 만신창이(滿身瘡痍)
가되어 추락(墜落)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건전가요(健全歌謠)로 작사하기는 했지만 특정정권(特定政權)에 아부(阿附)하기위하여 쓴 작품은 아니었고 이상적(理想的)인 국가(國家)에대한
본인(本人)의 바람을 솔직히 쓴것뿐”이라고 항변(抗辯)하나 그저 공허(空虛)할 뿐입니다
어쨌던 이곡은 정통성이 취약한 전두환정권의 체제(體制) 홍보(弘報)용으로 널리쓰이도록 특히 전두환이 관심(關心)을 가지고 장악한 언론(言論)을
통하여 집중방송(執中放送)토록 강요(强要)하면서 힛트곡이 됩니다
특히”원하는 것은 무어이든 얻을수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수가있어” 대목이 전두환이 정치를 잘해서 그렇다는 자기(自己)최면(催眠)에 걸린것처럼 보였습니다
1970~80년대 가수(歌手)가 발표(發表)하는 음반(音盤)에는 마지막곡으로 군가(軍歌)나 건전가요(健全歌謠)가 의무적(義務的)으로 수록(收錄)되있어야 했습니다
해서 레코드계에서 어쩔수없이 끼워넣어야 했던 건전가요(健全歌謠)는 대부분(大部分) 대중(大衆)들의 관심(關心)을 빗겨갔으나 이곡은 전두환의
강요(强要)에의한 것임을 까마득히 모르는 대중(大衆)들의 사랑을받아서 상업적(商業的)으로도 성공하나 후일 이곡을 부른 정수라는 큰곤욕을 치르야했습니다
신군부(新軍部)는 취약(脆弱)한 정통성(正統性)에 대한 불안(不安)으로 국민들의 정치에대한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기위해서 이른바 3s 정책(政策)에 매진합니다
즉 sport-스포츠-, screen-스크린-, sex-섹스-에 의한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종(一種)입니다
전두환정권은 sport-스포츠-의 위력(威力)을 잘알고 있었고 어느정권(政權)보다도 치밀(緻密)하게 이용(利用)합니다
선진국(先進國)에서만 가능하다던 pro野球(프로야구)가 1인당 국민소득(國民所得)이 2000달러도 안되던 한국(韓國)에 탄생(誕生)한데는 이유(理由)가 있었습니다
프로야구에 가장 열광적(熱狂的)인 반응을 보인곳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전두환에 가장 직접적고통(直接的忍苦)을 당한 광주(光州)였습니다
그들은 야구장(野球場)에 모여 마음놓고 환호(歡呼)하고 울분(鬱憤)을 토할수 있었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해태의 승리는 곧 광주의 승리로 여기고 광주의 한과 설움을 해태의 우승(優勝)으로 풀러했고 광주(光州)의 한(恨) 과 설움은 해태 우승(優勝)의 동력(動力)이 됩니다
해태의 승리(勝利)는 광주(光州)의 분노(憤怒)를 야구장(野球場)으로 결집(結集) 시킨 힘이됩니다
그러나 해태 열풍(烈風)은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전두환의 프로야구의 정치적의도(政治的意圖)가 성공(成功)하는데 가장 큰기여(其餘)를 한셈이되어서 뒷맛이 씁쓸함은 어쩔수 없습니다
졸속출범(拙速出凡)이라는 비난(非難)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 열풍은 전국(全國)을 강타(强打)합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프로야구는 전두환정권에게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效果)를 안겨주었다는 글이 보입니다
광주(光州)의 분노(憤怒)와 끓어오르는 민심(民心)을 야구장(野球場)에 묶어두었고 프로야구 열기(熱氣)를 통하여 국민들 사이에 sport boom-스포츠붐-을
달성(達成)하는데 성공(成功)했다고 뒷글을 잇고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게는 단시간 내에 일어날 스포츠붐이 절실(切實)하게 필요(必要)했습니다
이는 그정권이 올림픽을 유치 했기때문입니다
정수라는 전두환 시절을”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理想)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이라며 대한민국(大韓民國)을 paradise-파라다이스-라고 노래했지만
정태춘은”지상낙원(地上樂園)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반어(反語)적(的)으로 조목조목(條目條目) 반박(反駁) 합니다
정수라는”저마다 누려야할 행복(幸福)이 언제나 자유(自由)롭다”고 목청을 놓였지만
정태춘은”최저임금(最低賃金)도 받지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공순이들은 말고”라고 자조(自嘲)했습니다
우린 여기함께 살고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純潔)이 넘쳐 흐르는 이땅
새악시 하나 얻지못해 농약(農藥)을 마시는
참담(慘憺)한 농촌(農村)의 총각(總角)은 말고
특급 호텔-(特級) hotel lobby-로비-에 득실거리는
매춘관광(賣春觀光)의 호사(豪奢)한 창녀(娼女)들과 함께
우리모두 행복(幸福)하게 살고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기름진 음식(飮食)과 술이 넘치는 이땅
최저임금(最低賃金)도 받지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힘없는 공순(工順)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략(享藥) 의 화대(花代)로 일cjsaks(一千萬)원 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財閥)의 아들과 함께
우린모두 풍요(豊饒)롭게 살고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滿足)하게 살고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大韓民國) 아~ 우리의 공화국(共和國)
산문적(散文的) 인 어조(語調)로 나지막 하게 시대(時代)의 모습(貌襲)을 담아내고 있는 정태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정수라의 <아!대한민국(大韓民國)>의 또다른 그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국(祖國)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정수라의 노래처럼 천국(天國)도 아니지만 정태춘의 노래처럼 지옥(地獄)도 아니다” 라고 항변(抗辯)하는 글도 보입니다
여러분 생각(生角)은 요 ?? 댓글로 표현(表現) 해보시구료
1399- 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그들이 꿈꾼세상(世上)>
당신은 휴일(休日)같이 편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휴일(休日)같이 편한
당신은 휴일(休日)같이 편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휴일(休日)같이 편한
그것은 가치(價値)있는 일입니다
꼭두각시 놀음으로 당신을 웃게 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이 그 놀음에 웃지않아 돌을 던질지라도 말입니다
당신이 그놀음에 웃지않아 돌을 던질지라도 말입니다
돌을 던질지라도 돌을 던질지라도
오! 그것은 흥미진진(興味津津)한 놀음입니다
그 놀음이 언제나 똑같다고 믿지는 마세요
방금 뱉은말도 생각(生角)나지 않을수 있어요
내 머리를 쉬게 해주세요<holiday-지강헌 살인사건(殺人事件)>
상기가요<holiday>는 the bee gees의 음반(音盤) ”the bee gees”에 실려있는 곡입니다
1967년,9월 그룹 bee gees 가 발표(發表)한 앨범에 실려있고 barry 가 작곡해서 barry ,rabin gibb가 형제(兄弟)가 vocal-보컬-을 했습니다
1988년 10월16일 국민(國民)들은 핏발선 눈으로 권총(拳銃)을 머리에 겨눈채 절규(絶叫)한 남자(男子)의 말을 되뇌며 전율(戰慄)했습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그의 말보다 더 한국사회(韓國社會)의 불평등(不平等)을 굵고 짧게 나타낸 표현(表現)이 있을까??
권총(拳銃)을 든 남성(男性)이 bee gees-비지스-의 holiday-홀리데이-를 들으며 죽음을 선택(選擇)하는 장면(場面)은 할리우드 gang映畵-갱영화-나
hong kong noir-홍콩 느와르-를 연상(聯想)시켰습니다
권총(拳銃)을 든 남자(男子)의 이름은 지강헌, 당시 34살 이었습니다
1988년, 10월8일 영등포교도소(永登浦矯導所)에서 공주교도소(公州矯導所)로 이송(移送)되던 지강헌등 12명이 탈출(脫出)해 서울시내로 잠입(潛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호송교도관(護送矯導官)은 권총(拳銃)을 탈취(奪取) 당했습니다
이들은 형기(刑期)를 마쳤지만 보호감호(保護監護)처분(處分)으로 풀려나지 못하고 또다시 옥(獄)살이를 하는것에 불만(不滿)을 품고 세상(世上)밖으로 뒤쳐나온 것입니다
지강헌의 경우 상습범(常習犯)이지만 556만원을 훔친죄로 징역(懲役)7년 보호감호(保護監護) 10년등 총 17년형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눈앞이 캄캄하고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반면 73억원을 횡령(橫領)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에게는 불과 징역(懲役)7년의 선고(宣告)가 내내려진 것 분노(憤怒)했습니다
이중 7명은 추가범죄(追加犯罪)를 저지르거나 roomsalon-룸살롱-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향(故鄕)집을 찾던중 붙잡히거나 자수(自首)를 하면서’짧은 자유(自由)’레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지강헌일당의 인질극(人質劇)에 동참(同參)하지않은 김길호는 홀로 도주(逃走)해 숨어 지내다가 탈주(脫走)한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1일 경찰(警察)에 체포(逮捕)되었습니다
조기(早期)에 체포(逮捕)되지않은 5명중 지강헌, 안광술, 강영일 한의철 등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내를 전전(轉轉)하다가
10월 15일 밤 9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 북좌동 고모씨의 가정(家庭)집에 침입(侵入)하여 가족(家族)을 인질(人質)로 잡았습니다
당시 탈주범(脫走犯)들이 침입(侵入)해 공포(恐怖)에 사로잡혔던 고씨 가족(家族)들은 침착(沈着)하게 대응(對應)하며 긴장(緊張)을 완화(緩和) 시켰습니다
그덕에 인질범(人質犯)들도 안정(安定)을 찾아 마치 친구(親舊)나 친척(親戚)집에 온것같이 편안(便安)하게 식사(食事)하고 대화(對話)를 나누고 밀린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이들의 태도(態度)가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不安感)을 느낀 아버지 고씨가 인질범(人質犯)이 잠에 빠져 감시(監視)가 소홀한 틈을타서
16일 새벽 4시쯤 탈출(脫出)하여 인근(隣近) 파출소(派出所)에”권총(拳銃)을 든 탈옥수(脫獄囚)들이 가족(家族)을 인질(人質)로 잡고있다”고 신고를 합니다
곧바로 경찰병력(警察兵力) 1000여명이 집을 포위(包圍)하면서 새벽4시 40분부터 지강헌일당과 대치(對置)에 들어 갔습니다
그들은 마치 terrorist-테러리스트-처럼 자신(自身)들의 주장(主張)을 tv 생중계(生中繼)를 해달라 요구(要求)하게 되고 경찰(警察)은 그 요구(要求)를 들어줄수밖에 없었습니다
몰려든 방송사(放送社)의 카메라와 마이크는 사상초유(史上初有)의 인질극생중계(人質劇生中繼)를 하게됩니다
“갑자기 거물(巨物)이 된듯한 인질범(人質犯)들은 공명심(公明心)과 과시욕(誇示慾)이 고조(高潮)된 가운데 탈주극(脫走劇)을 벌이게된 원인(原因)인
억울함을 정제(精製) 않은 말로 쏟아냈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글이 보입니다
그가운데 지강헌이 자신(自身)의 삶에대해 늘어놓은 독백(獨白), 특히 어린시절(時節) 시인(詩人)을 꿈꿨다는 이야기 등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유명(有名)했던 말은 지강헌의”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였습니다
지강헌은” 돈없고 권력(勸力)없이는 못사는게 이 사회(社會)다
전경환의 형량(刑量)이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안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비리(非理)를 밝히겠다
돈이있으면 판검사(判檢事)도 살수있다 유전(有錢無罪) 무전(無錢有罪) 우리 법(法)이 이렇다”고 울부짖었읍니다
“유전(有錢)무죄(無罪) 무전(無錢)유죄(有罪)” 이말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현재(現在)까지도(指導)돈있고 힘있는 사람들은 죄(罪)를 저질러도 큰 벌(罰)을 받지않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조그만 잘못에도 큰벌(罰)을
받는 공평(公平)하지않은 사법현실(司法現實)을 풍자(諷刺)하는 표현(表現)으로 널리 사용(使用)되고 있음은 별로 달라진게 없다는 반증(反證)입니다
대치(對置)를 이어가던 16일 정오무렵 지강헌은 강영일에게”밖에나가 경찰(警察)이 약속(約束)한 도주(逃走)용(用) 승합차(乘合車) 가 준비(準備)되었는지 확인(確認) 해보라”고 지시합니다
밖에나온 강영일이 승합차(乘合車)가 준비(準備)되지않은 사실(事實)을 확인(確認)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지강헌은” 내가주는 마지막 선물이다”며 방바닥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후배(後輩)인 강영일에게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오지말고 자수(自首)해서 너만이라도 살라고 강권(强勸)했던 것입니다
끝까찌 함께 하겠다며 자수(自首)하기를 거부(拒否)했던 강영일은 결국 지강헌의 뜻을 받아드려 자수를 하게되고 4명중 유일(唯一)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됩니다
그사이 안광술과 한의철은 지강헌에게서 총(銃)을 가져간뒤 차례(次例)로 자살(自殺)을 선택(選擇)합니다
이를 지켜본 인질(人質)들이 비명(悲鳴)을 질러댔고
두명이 자살(自殺)한뒤 자포자기(自暴自棄)가된 지강헌은 경찰(警察)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bee gees-비지스-의<holiday> 노래가 실린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합니다
지강헌은 <holiday>를 들으며 창문(窓門)을 깨만든 유리조각으로 목을찔러 자살(自殺)을 시도(試圖) 했고 이를 지켜본 인질(人質)들이 비명(悲鳴)을 질러대자
경찰특공대(警察特攻隊)가 인질(人質)이 위험(危險)한것으로 판단(判斷) 즉각(卽刻)진입(進入)하여 지강헌의 다리와 옆구리에 총(銃)을 발사(發射)합니다
세브란스 병원(病院)으로 실려간 지강헌은 몇시간뒤 과다출혈(過多出血)로 절명(絶命)합니다
탈주범(脫走犯) 지강헌이 인질극(人質劇)을 벌이며 마지막 순간(瞬間)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달라며 요청(要請)한곡으로 유명(有名)해진곡이요
죽음의 광시곡(狂詩曲)이 된 <holiday>는에 관해서 오랫동안 추측이 난무(亂舞)했습니다----후략-----
1400-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비가오면 생각(生角)나는 그사람
언제나 말이없던 그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사람 못잊어서 울던 그사람
그어느날 차(車)안에서 네게 물었지
세상(世上)에서 제일(第一) 슬픈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情)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사람
외로운 병실(病室)에서 guitar-기타-를 쳐주고
위로(慰勞)하며 다정(多情)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安寧)이란 단 한마디 말도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幸福)할까
어쩌다 한번쯤은 생각(生角)해줄까
지금도 보고싶은 그때 그사람
외로운 내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도 감싸주던 다정(多情)했던 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되겠지
다시는 원망(怨望)해서도 안되겠지
철없이 사랑인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 그사람
이제는 잊어야할 그때 그사람<10,26 사태(事態)>
상기가요<그때그사람>은 심민경사, 곡으로 심민경이 불렀습니다
1979년 jigu-record 발매 lp음반-심수봉 그때그사람-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노래<그때 그사람>은 가수(歌手) 심수봉에게 영광(榮光)과 좌절(挫折)을 동시(同時)에 안겨준 영욕(榮辱)의 노래일수 밖에 없습니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大學 歌謠祭)에 참가(參加)한 당시(當時) 명지대에 3학년 심민정은 자신(自身)이 직접(直接) 작사(作詞), 작곡(作曲)한
노래<그떄 그사람>으로 무대(舞臺)에올라 활주로의 배철수, 노사연, 임백천 등 쟁쟁(錚錚)한 참가자(參加者)들과 경쟁(競爭)했습니다
folk-song-포크송-과 rock-music-록음악-이 대세(大勢)였던 당시(當時)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에서 창작트로트곡(創作trot曲)으로 출전(出戰)한
여대생가수(女大生歌手)의 첫등장(登場)은 가요제관객(歌謠祭觀客)들과 이를 tv로 지켜보던 시청자(視聽者)들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접연주(直接演奏)한 경쾌(輕快)한 피아노반주-piano伴奏-에 맞물린 애절(哀切)한 노래는 청중(聽衆)의 열광적(熱狂的)인 반응(反應)을 이끌어내는데 성공(成功)합니다
이제껏 들어본적이 없는 전혀 다른 감각(感覺)의 창작트로트-創作trot- 였습니다
관객(觀客)들의 반응(反應)에 심수봉은 내심 좋은성적(成績) 을 기대했을것이나”가창력(歌唱力)은 돋보였으나 곡(曲)의 rhythm-리듬-이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의 순수(純粹)한 성격(性格)에 맞지않는다”는 이유(理由)로 수상(受賞)에 실패(失敗)합니다
한마디로 trot曲-트로트곡- 천시경향(賤視傾向)이 대학가(大學街)에도 만연(漫然)해 있었던 결과(結果)입니다
허나 이노래는 대학(大學) 가요제(歌謠祭)에서 입상(入賞)을 하지는 못했으나 대상수상곡(大賞受賞曲) 부산대 중창단썰물의<밀려오는 파도(波濤)소리>나
금상(金賞)을 받은 단국대의 노사연의<돌고 도는길> 은상의항공대 활주로의<탈춤>보다 더 떴습니다
<그때 그사람>은 이듬해인 1979년 최고힛트곡(最高 hit曲)으로 떠오르면서 당시(當時) 가요제(歌謠祭) 심사위원(審査委員)들을 머쓱하게 만듭니다
곡을 부른 심수봉은 1955년 충남(忠南) 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때부터 이미자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 동네스타였던 그녀는 1972년 판소리 국악(國樂)소리가로 debut-데뷔-했습니다
1974년 미8군무대 rock-music-록뮤직- 드러머로 활동했고 1978년<여자(女子)이니까>라는 노래로 정식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했다는 글이 보입니다
그녀의 집안은 유명한 소리꾼 가문(家門)입니다
증조부 심팔록은 피리와 가야금(伽倻琴) 명인(名人), 조부는 심정순은 가야금(伽倻琴) 명인(名人)이자 판소리 명창(名唱), 부친 심재덕은
민요채집가(民謠採集家)로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서 국악강의(國樂講義)를 하기도 한 예인(藝人)입니다
또 당숙 심사건은 판소리 인간문화제(人間文化祭), 고모 심화영은 충남(忠南)지정(指定) 무형문화제(無形文化祭) 제27호 서산승무 예능보유자(藝能保有者)입니다
알려진것처런 심수봉의 대통령(大統領)술자리 동원(動員)은 10,26사태(事態)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그녀는 1979년 10,26사태(事態)이전 1976년 대학가요제 출전이전에 처음으로 대통령연회에 말이 초대(招待)지 강제동원되어 빅정희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했습니다
이후심수봉은 몇차례 더 대통령연회에 동원됩니다
그러다가<그떄그사람>이 big-hit-빅힛트-후인 1979년10월26일 궁정동 연회장에 동원되어 노래를 부르다가 10,26사태(事態)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녀의 시련은 박정희의 처참한 죽음후에 시작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保安司令官)이 본부장인 합동수사본부(合同搜査本部)의 조사(調査)를받고 무혐의(無嫌疑)로 풀려났지만 시대적상황(時代的狀況)때문에
방송금지(放送禁止) 조치(措置)를 당하고 정신병원(精神病院)에 감금(監禁)되는 핍박(逼迫)을 당해야했습니다
“1979년 10월26일 저녁 7시45분 서울 종로구(鍾路區)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울린 한발의 총성(銃聲)이 역사(歷史)를 바꿨다”는 글이보이나 바꿘건 없습니다
만찬장이던 나동 안방에는 당시 유신정권(維新政權)의 수뇌부(首腦部)가 집결(集結)해있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 비서실장(秘書室長) 김계원, 경호실장(警護室長) 차지철,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 등이 그들입니다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둔 경호원(警護員) 대기실(待機室)에는 경호처장(警護 處長) 정인형 경호부처장(警護部處長) 안재송과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의전과장 박선호가, 밖의 제미니 승용차(乘用車)에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대기했다
50m떨어진 본관1층 회의실에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를 대신한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식사를 하고있었습니다
연회가 시작된지 한시간쯤 지나 김재규는 옆 건물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정승화에게 갔습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대통령의 식사가 곧 끝나니 조금더 기다려달라고 말했습니다
김재규는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꺼내온뒤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관 박흥주를 불러 엄청난 얘기를 꺼냽니다
“시국(時局)이 위험하다 나라가 잘못되면 우리도 다 죽는다
오늘저녁 해치우겠다 방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警護員)을 제압(制壓)하라 불응(不應)하면 발포(發砲)해도 좋다”
둘이 당황한 기색(氣色)을 보이자 김재규는”육군참모총장과 우리 2차장보도 와있다”면서
“각오(覺悟)는 되어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박선호가 얼떨결에” 각하(閣下)까지입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응”하고 대답했습니다
박선호가”경호원이 7명이나 되는데 다음기회로 미루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오늘 하지않으면 보안이 누설(漏泄)된다 똑똑한놈 세명만골라서
나를 지원(支援) 하라 다 해치운다”고 단호(斷乎)하게 말했읍니다
박선호는 30분만 여유를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날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는 왠지 분위기(雰圍氣)가 다른날과 달랐습니다
술상위에는 여러가지 안주(按酒)와 함께 박정희가 즐기는 양주(洋酒) ”시바스리갈”몇병이 놓여있었읍니다
이자리에서 정치(政治)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명(除名)당한 김영삼이야기가 나오자 박정희는”김영삼을 구속기소했어야하는데 마음약한 유혁인
정무수석이 말려서 그만두었드니 후유증(後遺症)이더크다”며 얼굴이 순간(瞬間) 일그러졌습니다
누군가가 분위기(雰圍氣)를 좀 풀어보라며 심수봉에게 노래를 시켰습니다
그녀는 guitar-기타-를 치며 자신(自身)의 힛트곡<그때 그사람>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말도안되는 자리에서 부를려고 만든노래가 결코 아닐진데 매우 굴욕적(屈辱的)이고 곤혹(困惑)스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좌중에 술잔이 몇배돌았고 이어서 차지철이 를불렀고 차지철의 지명으로 model-모델-로 활동하던 대학생(大學生) 신재순 차례가 되었습니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guitar伴奏)—기타반주-에 맞춰”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를 부르기 시작했고 박정희도 애상에 잠겨 노래의
후렴구(後斂句)인-“---예이예이예이---“를 나직히 따라 불렀습니다
이 순간(瞬間) 김재규가 오른손으로 옆에앉은 비서실장(秘書室長) 김계원의 허벅지를 툭쳤읍니다
그리고는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봅아 차지철을 겨냥해 를 당겼습니다
“탕!!”
총성(銃聲)과 함께 차지철이”김부장 왜이래?”라고 소리치며 팔을 움켜쥐고 일어났습니다
“경호원(警護員) 경호원(警護員)!”
경호원(警護員)을 불렀지만 대답(對答)은 없었습니다
”뭣들하는거야!”
박정희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김재규는 일어서며”각하 정치(政治)를 좀 대국적(大國的)으로 하십시요”라고 말하며 정좌한채 눈을감은 박정희에게 총을 쐈습니다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역사(歷史)가 증명(證明)할 것 이다”라며”내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며 죽어가면서도 독재(獨裁)와 공포(恐怖) 시달리던
국민(國民)들에게 반성(反省)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총이 고장나 뛰어나온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방금친구를 쏜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을 낚아채고 돌아와 차지철을 쏜뒤 쓰러진 박정희의
머리 50cm까지 총구(銃口)를 들이대고 야수(野獸)의심정(心情)으로 그간 독재(獨裁)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분노(憤怒)를 대신(代身)해서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1401—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언제 돌아오나 죄(罪)도없는 어린목숨>
두형아 내동생아 너있는곳 어데냐
너를잃은 부모(父母)님은 잠못들고 운단다
네가없고 서(西)에가도 너 없으니
낯선사람 정(情)을붙여 엄마생각(生角) 잊었느냐
대사(臺詞)---여보세요 제발 애원(哀願)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 천진(天眞)한 어린 것을 제품에 꼭돌려 보내주세요 네??
세상(世上)에 부모(父母)마음은 모두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정말 애원(哀願)이예요
고사리 어린손아 노래하던 재롱아 너와함께 놀던동무 너를 찾아
오는데 어느때나 돌아오리
죄(罪)도없는 어린목숨 애타는 엄마품에 두형이를 돌려줘요 <조두형 유괴사건(誘拐事件)>
상기가요(上記歌謠) <두형이를 돌려줘요>는 반야월사. 나음파곡으로 가수(歌手) 이미자씨가 불렀습니다
아세아레코드 발매(發賣) 1인치 음반(音盤) 두형이를 돌려줘요-에 title曲-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두형이를 돌려줜요>는 당시 아세아 레코드 사장(社長)이요 가요(歌謠) “大田blues-대전블루스-“ 작사자(作詞者)이기도 한 최치수의 기획(企劃)으로 제작(制作)되었습니다
1962년 당시 실종(失踪)된채 행방불명(行方不明) 상태인 네살 어린이 조두형을 찾는데 도움이 될수있다는 생각(生角)으로 음반(音盤)을 기획(企劃) 한것입니다
이음반-音盤-에는 총 8곡이 실려있는데 이미자의 노래가 절반이고 나머지는 남상규,차은희, 박재란, 황금심의 노래로 구성(構成)된 compilation-컴필레이션- 음반(音盤)입니다
Title曲-타이틀곡-<두형이를 돌려줘요>는 1958년<무명초(無名草)><미련(未練)에 우는 여인(女人)>등 4곡을 sp음반으로 universal-record 서 발표(發表)하며 가수데뷔-歌手debut-를 한
이미자는 이노래<두형이를 돌려줜요>를 대한뉴스에 등장(登場)해 부르면서 인기가수(人氣歌手) 반열(班列)에 올라섭니다
이후(以後) 그녀는 별기대치않은 가요<동백(冬柏)아가씨>가 곡을 작곡한 백영호씨의 부지런한한 홍보(弘報)덕분에 한국가요사(韓國歌謠史) 의 기념비적 가요(記念碑的歌謠)로
big-hit시키면서 마침내 이미자 시대(李美子時代)를 엽니다
그 시기(時期) “queen of elegy-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기 사작한 이미자(李美子) 의 슬픈음색(音色)은 1,2절사이의 부모심정(父母心情)을 담은 흐느끼는
대사(臺詞)와 함께 듣는이들의 눈물샘을 자극(刺戟)했습니다
Street of seoul-서울의거리-와 전국(全國)의 record store-레코드가게-에서 거의 매일 이노래가 흘러나왔고 이에 길가던 시민(市民)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가사(歌詞)속의 두혀이의 부모(父母)를 생각(生角)하면서 모두 한마음으로 슬퍼하며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祈願)했습니다
돈 때문에 4살짜리 아이를 유괴(誘拐)했다는 사실(事實)은 당시사회(當時社會)에서는 충격(衝擊)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當時)에는 육이오전쟁(六二五戰爭)의 영향(影響)으로 어린이를 버리면 버렸지 유괴(誘拐)하는일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각종언론(各種言論)을 포함(包含)한 많은 단체(團體)에서 두형이를 찾기위하여 범국민적(汎國民的)인 운동(運動)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운동(運動)이 가요계(歌謠界)까지 번지면서<두형이를 돌려줘요>같은 노래가 나온게 된것입니다
이곡외에도 동요(童謠)<산토끼>를 sampling-샘플링-한 노래<두형아!>도 함께 발매(發賣)됩니다
<두형아!>는”추풍령(秋風嶺)””동백(冬柏)꽃 피는 고향(故鄕)”으로 유명한 가수(歌手)남상규씨가 8명의 합창단원(合唱團員)들이 함께 노래했습니다
이곡은 1절이 끝나면”두형아 울지마라 응? 착한아기지 울면 바보야 아저씨 아줌마 말잘듣고 엄마 아빠 보고싶거든 네가 잘부르는 노래있잖아?
응? Guitar boogie-키타부기- 있잖아 말이야”라는 두형이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呼訴)가 이어집니다
이노래들을 기획한 아세아레코드 사장 최치수는 어릴 때 양친(兩親)을 잃고 14년간 철도검차원(鐵道檢車員)을 으로 일하다 record 業界-레코드 업계-에
진출(進出)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人物) 입니다
그는 두혀군 유괴사건(誘拐事件)을 노래로 만든 이유(理由)를 세가지로 설명(說明)했습니다
첫째, 지방(地方)에는 유성기(留聲機)가있는 집에 사람들이 모인다는점, 둘째는 amp施設-앰프시설-이 광범위(廣範圍)하게 소식(消息)을 전한다는 점
셋째, record 地方普及)—레코드지방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그이유였습니다
<두형이를 돌려줘요>는 후대에도 계속(繼續) 불려집니다
<처녀농군(處女農軍)>< 일편단심(一片丹心)><고향산천(故鄕山川)>등을 부른 최정자씨가 remake 한음원이 있고 신수인도 2007년”옜날노래”에 이곡을 실었읍니다
이미자씨도 1981년”추억의 유랑(流浪)극단(劇團) 제7집”등 자신(自身)의 음반에 이곡을 여러 번 remake 합니다
1962년, 9월10일 두형이는 아침8시30분경 자택(自宅)에서 약 200m 떨어진 초등학교에 등교하던 누나를 따라 집을 나섰고 오전 9시경 또래친구(親舊)인
이정섭과 동네 놀이터에서 어울려 놀다가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됩니다
이후 소식(消息)이없자 두형이 부모(父母)는 경찰(警察)에 신고(申告)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길을 잃은줄알고 미아신고(迷兒申告)를 합니다
이후(以後) 단순실종(單純失踪)이 아니라고 판단(判斷) 다음날인 9월11일 신문(新聞)에 후사금(厚謝金) 2만원을 걸고 광고(廣告)를 냅니다
두형이는 마포(麻浦)에서 사업을해서 부유(富有)했던 조씨집안의 2대독자(二代獨子))였습니다
신문광고(新聞廣告) 를낸 당일(當日午後) 7시경 용산에 거주하는 한여성에게서 전화(電話)가 걸려왔습니다
그여자는 두형이의 인상착의(人相着衣)를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으며 다음날인 9월12일 아침 9시에 다시 전화를 걸어”우리집에 있는 아이가
틀림없는 두형이다 계속 울어대서 귀찮으니 데려가라”고 전했으나 이후 연락이 두절(斗絶)됩니다
지금이야 전화위치추적(電話位置追跡)이 가능하지만 당시로서는 위치추적(位置追跡)이 불가능(不可能)했던 탓에 발신지(發信地) 수사(搜査) 도 불가능(不可能)했습니다
신문광고(新聞廣告)를 낸지 사흘만인 9월13일 두형이의 자택(自宅)에 협박장(脅迫狀)이 도착합니다
협박장(脅迫狀)에는 서대문우체국(西大門郵遞局)의 소인(消印)이 찍혀있었습니다
“아이를 찾으려면 협상(協商)을 하자 현금 20만원을 준비하지 않으면 본의(本意)아닌 비극(悲劇)이 생길것이다”라는 내용(內容)이었습니다
당시(當時)의 20만원은 현재물가(現在物價)로 치면 엄청난 금액(金額)입니다
기록(紀錄)에 의하면 삼양라면 가격이 10원이었고 짜장면이 15원정도 였습니다
이를 근거(根據)로 당시의 20만원은 지금의 5000만원 정도로 추산(推算)됩니다
계속해서”현상금(懸賞金) 20만원을 건다고 광고(廣告)를 내라”, “16일오후 5시까지 장위동 경원선9-1호 전선주앞에 돌을 쌓아두었으니
20만원을 갖다두어라” 아이는 10시간후 돌려보내겠다”는등 협박장이 도착하자 광고(廣告)를내고 경찰은 가짜돈을 놔두고 대기했으나 범인(犯人)은 나타나지 않았읍니다
19일, 22일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런가운데 마포경찰서(麻浦警察署) 앞으로 보낸것으로 보이는 괴편지(怪便紙)가 도착(倒着)하는가 하면 대구(大邱)에서 두형이와 비슷한 아이를
목격(目擊)했다는 제보(提報)가 들어와 경찰(警察)이 출동(出動)했으나 모두 허탕(虛蕩)이었습니다
신문(新聞)등 각종매체(各種媒體)에 두형이를 찾기위한 범국민적(汎國民的)운동(運動)이 일어납니다
내무부(內務部) ), 체신부(遞信部), 문교부(文敎部), 한국전력(韓國電力), 여성단체(女性團體)까지 두형이를 찾기위하여 애를 썹니다
체신부(遞信部) 우편배달원(郵便配達員)은 두형이 사진전단(寫眞傳單)을 돌렸고 교통부(交通部)는 기차승객(汽車乘客)들에게 신고(申告)를 부탁하는 협조방송(協助放送)을 내보내기도 합니다
심지어 영화관(映畵管)에서 영화상연전(映畵上演前)에 방영(放映)했던 대한뉴스-大韓 news-에서까지 이미자(李美子)가 출연하여 이노래를 부르는 장면(場面)을 내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노래가 흘러나오면 영화를 보려왔던 관객(觀客)들은 이미자의 애절(哀切)한 목소리에에 본영화(本映畵)를 보기도전에 먼저 울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허자 독재자(獨裁者) 박정희도 가만히 있을수 없었습니다
해서” 조두형을 유괴(誘拐)한자는 한시빨리 자수(自首)하기 바란다
자수(自首)하여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관대(寬大)한 처분(處分)을 내리겠다” 고 담화(談話)를 발표(發表)합니다
더불어 당시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이었던 박경원에게 두형이를 찾기위하여 수단(手段)과 방법(方法)을 가리지 말라고 특별지시(特別指示)를 내리는 강약(强弱)작전(作戰)을
펴나 단서(端緖不足), 허위제보속출(虛僞提報續出)등의 이유(理由)로 수사(搜査)에 난항(難航)을 겪은 끝에 끝내 두형이를 영영(永永) 찾아내지 못하고 맙니다
1402— 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 해공 신익희의 추모곡(追慕曲)이 되어버린”목이메인 이별가(離別歌)”>
목이메인 이별가(離別歌)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에
헤어지던 그 인사(人事)가 야속(野俗)도 하더란다
다시못올 그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을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罪)도많은 청춘(靑春)이냐 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에
떠나가는 열차(列車)마다 원수(怨讐)와 같더란다
상기(上記歌謠) <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는 손로원사 박춘석곡으로 가수(歌手) 손인호가 불렀습니다
Oasis-record 발매 sp음반으로 발매(發賣)되었습니다
타면(他面)에는 백일희의<america blues-아메리카 블루스->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우라나라 선거(選擧) 역사상(歷史上) 가장 힛트한 선거구호(選擧口號)입니다
이처럼 유권자(有權者)들의 귀에 착달라 붙는 선거구호(選擧 口號)가 있었을까?
당시 민주당이 내건”못살겠다 갈아보자” 구호(口號)는 국민들의 가슴속 체증(滯症)을훑어주는 소화제(消化劑)같은거 였습니다
1956년 대통령선거(大統領選擧) 민주당의 이 구호(口號)에 맞서 이승민독재의 자유당(自由黨)은 뻔뻔스럽게도 ”구관(舊官)이 명관(名官)”를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민심(民心)은 이미 민주당 대통령(大統領)후보(候補) 신익희를 향해 있었습니다
30만명의 군중(群衆)이 운집(雲集)한 한강백사장(漢江白沙場) 유세(遊說)의 엄청난 열기가 이를 방증(傍證)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나라를 시샘했는지 호남유세(湖南遊說)를 떠난 심익희는”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에서 급서(急逝)를 하고맙니다
이에 세상(世上)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건 분명(分明) 자유당(自由黨)의 소행(所行)이다?”
흥분(興奮)한 국민(國民)들은 이승만 정권(政權)에의한 독살(毒殺)이 아니냐는 짙은 의혹(疑惑)을 품었읍니다
의심(疑心)은 고리에 꼬리를 물고 확산(擴散)됩니다
1956년 5월5일 4시경
신익희의 유해(遺骸)가 seoul-station-서울역-에 도착(倒着)합니다
비는 국민(國民)들의 슬픔인양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대학생(大學生)들을 중심(中心)으로한 시민(市民)들은 유해(遺骸)를 밀며 경무대(景武臺)로 향했읍니다
이승만의 앞잡이 기마경찰대(騎馬警察隊)가 시위대(侍衛隊)를 제지(制止)하려했지만 성난 군중(群衆)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경무대(景武臺)앞에서”이승만은 물러가라””못살겠다 갈아보자”등의 구호(口號)가 울려 퍼졌읍니다
허나 이미 권력욕(權力慾)에 만취(漫醉)되었던 이승만 정권(政權)이 물러설리 만무 했습니다
그리고는 최악(最惡)의 선택(選擇)을 하고맙니다
급기야(及其也) 경찰(警察) 의 발포(發砲)로 10여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났고 700여명의 학생(學生)과 시민(市民)이 체포(逮捕)해버립니다
그런다고 떠난사람이 돌아올수 없는법
국민(國民)들은 애통(哀痛)한 마음을 몇달전 발표(發表)된 대중가요<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에 담아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비나리는 호남선(湖南線)>이 곡을 창작(創作)한 작곡가(作曲家)박춘석 이나 취입(吹入)한 손인호의 의도(意圖)와는 상관없이 신익희의 추모곡(追慕曲)이 되어버립니다
이에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은 바짝 긴장(緊張)하며 이노래 아무 죄(罪)도없는 작가진(作家陣)에 화풀이를 합니다
곡을 작사한 손로원, 작곡한 박춘석 노래한 손인호까지 강제(强制)로 끌려가 줄줄이 조사(調査)를 받는 곤욕(困辱)을 치러야 했습니다
“실제로 가사를 쓴사람이 신익희의 미망인(未亡人)아니냐”등 강압적인 추궁을 당했습니다
허나 이노래가 심익희 타계전에 이미 발표되었음을 박춘석이 당시(當時)신문발표(新聞發表)등 물적증거(物的證據)를 제시(提示)하면서 조사관(調査官)들은 물론 자유당 정권 앞잡이들을 머쓱하게 했습니다
해서 이노래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호남찬가(湖南讚歌)였던<목포(木浦)의 눈물>에 이은 “제2의 호남찬가(湖南讚歌)””제2의 목포(木浦)의눈물” 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1982년 김수희<남행열차(南行列車)>가 후속타가 되었다는 글도보입니다
신익희박사가 장면과함께 중앙당사를 떠나 서울역으로 향한 것은 5월4일 밤 9시경이었읍니다
이윽고 10시 여수행 55열차는 신익희 일행을 태우고 서울역 platform-플랫폼-을 빠져나갑니다
조병옥등 당간부(黨幹部)들이 신익희일행을 전송(餞送) 했습니다
열차(列車)에 몸을실은 신익희, 장면은 침대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벽 도착(倒着)때 까지라도 눈을 좀붙이기 위해서 였습니다
1등차 7번하단 침대(寢臺)에는 신익희박사가 상단 침대에는 장면이 자리를 펴고 누웠습니다
그들은 곧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마치 곧일어날 비극(悲劇)을 예고(豫告)이나 하듯이 차창(車窓)에 밤비가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새벽 5시 25분경 열차(列車)는 함열역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잠을깬 신익희박사가 침대(寢臺)에 걸터앉아 넥타이를 메고 있었습니다
그순간(瞬間) 신박사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그리고는 전신이 마비된 사람처럼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이에 비서(秘書) 신창현이 그의 손을들어 맥을 짚어보았으나 이미 심장(心腸)의 고동(鼓動)소리 가 가늘어지고 있었습니다
“열차(列車)의 속도(速度)를 더내라고 해!! 빨리 이리역으로 가야해!!” 누군가 소리치자 수행원(隨行員)한사람이 기관실(機關室)로 달려갔습니다
신박사의 위독(危篤)을 알리자 열차는 이리역을 향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한 시간은 5시50분 환하게 동이 트기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완전(完全)히 혼수상태(昏睡狀態)에 빠진 신박사는 이리역에서 가장 가까운 호남병원의 응급실(應急室)로 옮겨졌습니다
청진기(聽診器)를 쥔 담당의사((擔當醫師)의 소니 가늘게 떨렸습니다
“심장마비(心腸痲痺) 같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옆에서있던 장면은 눈을 스르르 감았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民主主義)는 하늘로부터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맙니다
아침 6시 응급실(應急室) 창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엇습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의 갑작스런 타계(他界)로 야당(野黨)으로의 평화적(平和的) 정권(政權)교체(交替)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국민들은 또다시 자유당(自由黨)의 독재(獨裁)에 고통(苦痛)을 더받아야 했습니다!!!!!
1403—이런 사실(事實) 아십니까??
<잃어버린 세월(歲月) 30년 일만명의 뜨거운 눈물>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世上)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江)가에서 맹세(盟誓)를 하던
이 여인(女人)을 누가 모르시나요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
부드러운 정열(情熱)에 화사(花絲)한 입
한번 마음주면 변함이 없이
꿈따라 님따라 가겠노라고
내품에 안기어서 맹세(盟誓)를 하던
이 여인(女人)을 누가 모르시나요<이산가족(離散家族) 찾기 특별(特別) 생방송(生放送)>
상기가요는<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는 한운사 작사 박춘석작곡으로 가수(歌手) 곽순옥이 불렀습니다
Oasis-record 발매 lp음반-영화”남과북” 주제가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에 title 曲-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1962년 hlka-서울중앙방송국- 인기(人氣) radio連續劇-라디오 연속극-남(南)과 북(北)의 주제가(主題歌)였던<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는 당시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습니다
Radio連續劇-라디오 연속극- 주제가(主題歌)는 1964년 oasis-record 발매 lp음반-” 郭順玉 hit-song parade- 곽순옥힛트송 퍼레이드-”에
실려서 발매되큰 인기(人氣)를 얻었고 이러한 인기(人氣)를 영화계(映畵界)에서 가만둘리만무 김기덕 감독 신영균, 최무룡, 엄앵란 남궁원씨등
당대 최고배우(最高俳優)가 출연(出演)해서 영화화(映畵化) 됩니다
그리고 세월(歲月)이 흐른후 신일용 원미경 출연으로 remake 되기도 합니다
이영화는 광복직후(光復直後) 남하(南下)한 애인(愛人)을 찾아 귀순(歸順)한 북한군(北韓軍) 대대장(大隊長)의 실화(實話)를 바탕으로
역사적(歷史的) 시대적(時代的) 비극(悲劇)으로 담아내며 전국(全國)을 눈물바다로 만들면서 흥행(興行)에도 성공(成功)합니다
이인기에 힘입어 이영화는 제12회 아시아 영화제 비극상(悲劇賞), 제3회 청룡상 남우주연상(男優主演賞),과 시나리오상 등 국내외(國內外)
영화제상(映畵祭賞)을 수상(受賞)하면서 작품성(作品性)을 인정(認定) 받습니다
주제가(主題歌)을 부른 곽순옥(郭順玉)은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중(中)인 1951년 미8군무대에서 데뷔한후 김광수악단과 외국팝송 번안곡(外國 pop-song 飜案曲)을 부르며<shoeshine boy-슈사인보이-><아리랑 목동(牧童)>의 힛트곡을 발표한 왕년의 명가수(名歌手) 박단마가 운영(運營)하는 grand show-그랜드쇼-단의 일원(一員)으로 활동(活動) 하기도 했습니다
1958년 시민회관(市民會館)에서 열린’세계의휴일’ 무대(舞臺)를 계기로 대중(大衆)앞에서서 노래하기 시작했고 육감적(肉感的)인 몸매와 힘차고 세련(洗鍊)된
고음(高音) 섬세(纖細)한 감정처리(感情處理)등으로”정열(情熱)의 가희(歌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상기곡 외에도<여자가 고개를 넘을떄>등을 불러 주목을 받은 그녀는 홍콩에서 night-club-나이트클럽- korea-garden-코리아가든-을 운영(運營)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는 1983년 kbs 특별생방송(特別生放送)”이산가족(離散家族)을 찾습니다”가 불길처럼 번지며 생방송(生放送)이
연장(延長)에 연장(延長)을 거듭할 때 배경음악(背景音樂)으로 사용(使用)되며 국민가요(國民歌謠)로 부활(復活)합니다 당시(當時)에는 원창(原唱)
곽순옥의 음원(音源)이 아닌 patti kim-패티김-의 음원(音源)으로 전파(傳播)를 탔습니다
영화(映畵)<국제시장(國際市場)>의 한장면
주인공 황정민이 어린시절(時節) 흥남철수(興南撤收)때 헤어졌던 아버지 정진영과 막내 여동생 막순이를 찾기위해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합니다
처음 아버지와 연결(連結)되었을떄는 다른사람 이어서 굉장히 실망(失望)하지만 그후 여동생으로 추증되는 사람의 전화(電話)를 받습니다
다시 tv앞에 모인 가족(家族)들
통역사(通譯士)와 함께 la 로 화면(畵面)이 연결(連結)되고 화면에는 윤막순의 모습이 비칩니다
처음에 황정민이”내가찾는 사람은 동생 막순이”라고 하자 영어(英語)로 대답(對答)하는 막순,
황정민이”막순이는 귀뒤에 사마귀가 있다”고 말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귀를 봉주는 막순,
그녀는 다른건 기억(記憶)못해도 오빠가 자신(自身)을 혼낼 때 했던말을 기억한다며 더듬거리는 한국어(韓國語)로 말을 합니다
“여기. 운동장 아이다 놀러가는 것 아이다 오라비 손을 놓지마라”
그리고 잠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배냇저고리를 꺼내며” 오빠 나를 왜버렸어요””엄마 보고싶어요”등을 영어(英語)로 말합니다
흥남부두(興南埠頭)에서 헤어진 황정민과 막순이는 이렇게 다시 만납니다
Kbs “이산가족(離散家族)을 찾습니다”는 1983년 6월30일밤 10시15분에 첫방송을 내보냈습니다
당초(當初)기획(企劃)했던 방송시간(放送時間)은 95분 이었습니다
첫방송이 시작되는 시간에 kbs 본관공개홀-本官公開)hall-의 main studio-메인 스튜디오-에는 “스튜디오 830”의 콤비 진행자(進行者) 인
유철종 이지연이 공개홀-公開hall- 객석(客席)에는 이산가족(離散家族) 출연자(出演者) 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공개홀 밖의 중앙홀-中央 hall-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이산가족(離散家族)들과 출연(出演)을 마친 이산가족(離散家族)들로 크게 붐볐습니다
진행절차(進行節次)는 간단했습니다
우선 공개홀에 입장(立場)한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자신(自身)의 신상명세(身上明細)를 적은 메모판-memo 板- 을 가슴에들고 서면 아나운서가 그내용(內容)을 소개(紹介)하는 것입니다
소개된 내용이 전국에 방송(放送)되면 찾고있는 당사자(當事者), 또는 주변(周邊) 사람들이 방송사(放送社)로 전화(電話)하거나 직접(直接)찾이오면
확인(確認)을 거쳐 스튜디오에서 상봉(相逢)을 주선(周旋)을 하게됩니다
지방(地方)에사는 연고자(緣故者)는 kbs 지역국(地域局) 라인을 연결(連結)해 화면상봉(畵面相逢)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tv 만이 해낼수있는
이점(利點)을 최대(最大)한 활용(活用)한 것입니다
첫 상봉(相逢)은 일사후퇴-一四後退- 혼란(混亂)통에 부산(釜山)에서 헤어졌던 사촌남매(四寸男妹) 8명을 다시 만난 신영숙씨 였습니다
이산가족(離散家族)만남 장면(場面)은 파도(波濤)처럼 이어졌고 이 생방송(生放送)으로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알게된 또다른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kbs 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첫방송이 나간날 4시간 45분 생방송(生放送)되는 동안 850가족(家族)이 출연(出演)해 36건의 상봉(相逢)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첫상봉(相逢)의 분위기(雰圍氣)를 “한국방송 70년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읍이니다
-----만반의 준비(準備)를 갖추고 방송을 시작한후 시간이 흘러가도 상봉(相逢)의 극적장면(劇的場面)은 터지지 않았다
과연 어떤 결과(結果)가 나타날지 kbs 임직원(任職員)을 비롯한 제작진(製作陣)은 중앙홀 쪽으로 온 신경(神境)을 쏟고 지켜보고 있었다
태풍전야(颱風前夜)의 막, 그런 긴장(緊張)된 순간(瞬間)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瞬間) 별안간 중앙홀 바깥이 떠들썩하더니 5~6명의 중년남녀(中年男女)드리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들었다
목이메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이들을 진정(鎭靜)시킨후 확인반(確認班)이 그들을 홀안으로 안내(案內)하는 순간(瞬間) 출연자(出演者) 한사람이
홀안쪽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주 달려갔습니다
포옹(抱擁) 통곡(痛哭), 서로 얼싸안고 다시 이름을 부르며 만남의기쁨으로 눈물을 쏟는 모습---“
40년 가까운 세월(歲月)을 생사(生死)조차 모르던 혈육(血肉)을 다시만난 그 벅찬 반가움과 헤어져 살았던 서러움이 한데 뒤엉켜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장면(場面) 그것은 어떤 drama-드라마-의 극적장면(劇的場面)보다도 감동적(感動的)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면(畵面)을 지켜보던 모든 시청자(視聽者)들에게 벅찬 감동(感動)을 안겨준 것은 말할것도 없었습니다
제작진(製作陣)도 울었고 시청자(視聽者)들도 흐느꼈습니다
이러한 광풍(狂風)에 6월30일 자정까지 접수된 것만을 출연(出演)시키려던 당초계획(當初計劃)을 바꿔서 계속방송(繼續放送)해야 했습니다
방송(放送) 기간(期間) 138일간 5만3536건의 이산가족(離散家族)사연(事緣)을 소개(紹介)했고 그중 1만 189건의 상봉(相逢)이 이루어졌읍니다---------후략-----더상세한 것은 해당<종횡무진가요사>를 참조바랍니다
1404-이런 사실(事實) 아십니까??
<떠나간 조 박사(博士) 백성(百姓)들이 울고있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아들 손을잡고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故鄕)에
못살아도 나는좋아 외로워도 나는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黃昏)빛이 젖어드네
세상(世上)을 원망(怨望)하랴 내아내를 원망(怨望)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와 행복(幸福)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없는 인생(人生)길은 몇구비냐
유정천리(有情千里) 꽃이피네 무정천리(無情千里) 눈이 오네
상기가요(上記歌謠)<유정천리(有情千里)>는 반야월작사 김부해작곡으로 가수(歌手) 박재홍이 불렀읍니다
1959년 Sinseki-record 발매 sp음반으로 발매(發賣)되었습니다
타면(他面)에는 반야월사 김부해곡으로 가수(歌手)안정애의<오늘도 너를 찾아>가 실려있습니다
1959년 남흥일감독의 영화(映畵) 유정천리(有情千里) ” 주제가(主題歌)로 만들어졌습니다
상기영화(上記映畵) <유정천리(有情千里)>배우(俳優) 김진규, 이민자, 박암, 안성기 등이 출연(出演) 했습니다
영화(映畵) story-스토리-는----고향선배(故鄕先輩) 소개(紹介)로 운전학원(運轉學院)을 다녀 taxi 技士-택시기사-가된 김진규는 새직업(職業)을 갖게된 기쁨을 아내 이민자와 함께 나눕니다
하지만 곧 교통사고(交通事故)를내고 감옥(監獄)에 들어가게 되는데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할 이민자는 男便taxi-會社-남편택시회사- 동료(同僚) 박암과
바람이나서 어린아들 안성기를 버려둔채 자취(紫翠)를 감추어 버립니다
아들은 부모(父母)모두와 헤어져 거리를 헤매는 거지소년(少年) 되고 맙니다
형기(刑期)를 마치고 출옥(出獄)한 김진규는 어느날 거리에서 아들과 극적(劇的)으로 만납니다
그간의 상황(狀況)을 알게된 김진규는 몹쓸아내를 원망(怨望)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굳세게 살살아갈 것 다짐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손목을 잡고 황혼(黃昏)이 비끼는 언덕길을 오르며 이렇게 외칩니다
“가자 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故鄕)으로”
이 영화는 많은 관객(觀客)들의 손수건을 흥건히작시게 만들며 많은 화재를 모았지만 영화보다도 더 유명-有名-해진 것은 동명(同名)의 주제가(主題歌) 였습니다
노래가사(歌詞)에는 1950년대 후반(後半)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을 겪은지 얼마되지않은 한국인(韓國人)들의 고달픈 삶과 막막하던 심정(心情)이 실감(實感)나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노래는 당시(當時) 민주당 대통령(大統領)후보(候補) 조병옥의 예기(豫期)치못한 병사(病死)와 함께 다시한번 대중(大衆)들의 주목(注目)을 받습니다
앞선 1956년 대통령선거(大統領選擧)에서 신익희 라는 유력(有力)한 후보(候補)를 내고도 신후신후보-申候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선(大選)을
차러보지도 모한 민주당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지않을수 없었습니다
민주당이 우여곡절(迂餘曲折)끝에 꺼낸 새로운 card-카드-는 일제(日帝)때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했고 해방후(解放後) 미군정(美軍政)
경무부장과 육이오동란시(六二五動亂時)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을 지낸 조병옥씨 였습니다
1959년 11월26일 서울시 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정부통령흐보(正副統領候補) 지명대회(指名大會)의 표결결과(票決結果) 조병옥은
총투표자 966명중 484표를얻어 481표를획득한 장면을 3표차로 누르고 대통령 후보가됩니다
부통령후보(副統領候補)로는 차점자(次點者)인 장면이 신익희후보 때처럼 또다시 뽑혔습니다
이에 자유당은 꼼수를 부려 3월조기선거를 추진합니다 표면상의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기위해서 라고 하지만 속내는 따로있었습니다
민주당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선거(選擧)를 강행(强行)함으로써 야당의 boom-붐 조성(造成)과 선거공세(選擧攻勢)에 시간을 주지않으려는
것임을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알수있습니다
더구나 조병옥박사가 신병치료(新病治療)차 도미(渡美)할 계회까지 하고있어서 만약 3월이전에 선거(選擧)를 강행(强行)하면 제대로된 유세(遊說)도 못할 형편 이었습니다
마침내 신병치료(新病治療)차 미국을방문하는 조병옥은 순진(純眞)하게도 도미인사(渡美人事)를 겸해 이승만을 방문 조기선거(早期選擧) 하지않토록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허나 사실상(事實上) 이 제안(提案)을 거부(拒否)당합니다
자유당(自由黨)의 치밀(緻密)하고 조직적(組織的)인 부정선거(不正選擧) 시도(試圖)가 노골화(露骨化)되는 가운데 조후보는 1월29일 부득이
신병치료(新病治療)차 미국(美國)으로 떠나고 우리겨레는 또다시 가슴을 망치로 내리치며 하늘을 원망(怨望)해야 했읍니다
그는 위장병(胃腸病)이 악화(惡化)되어 국내에서는 치료(治療)가 불가능(不可能)해지자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陸軍病院)에서 위수술(胃手術) 받기를 결심(決心)합니다
조병옥은 이번길이 마지막길이 될줄은 까마득히 모르는체 자유당(自由黨)이 어떤 조직(組織)인지 너무도 모른듯 도미(渡美)길에 오르면서
당간부(黨幹部)들에게 어떤일이 있어도 조기선거(早期選擧)만은 아되도록 최선(最善)을 다해달라고 당부하며 환송객(歡送客)들에게
”낫는대로 곧 달려오리다”라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러나 타락(墮落)할대로 타락(墮落)해버린 한국정당(韓國政黨)역사상(歷史上) 최악(最惡)의 정당(政黨)이었던 자유당(自由黨)은 민주당(民主黨)의 강력(剛力)한 반발(反撥)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예년(例年)보다 두달이나 앞당겨 3월15일 실시(實施)한다고 전격발표(電擊)발표해 버립니다
미국에서 이소식을 전해들은 조후보는”이것은 fair play-페어플레이- 정신(精神)을 망각(妄却)하고 뒤에서 총(銃)을 쏘는격”이라고
비난성명(非難聲明)을 발표(發表)하지만 이미 망령(妄靈)들고 집권욕(執權慾)에 사로잡힌 수괴(首魁)를 중심(中心)으로한 정치모리배(政治謀利輩) 집단(集團)이
되어버린 자유당(自由黨)은 서슴없이 결국(結局) 최후종말(最後終末)로 가는길을 택(擇) 하고맙니다
조병옥은 2월6일 개복수술(開腹手術)을 받고 결과가 좋아져 직접(直接電話)를 걸어 병세(病勢)가 좋아지면서 열흘뒤에 퇴원(退院)할수 있을것이는 소식(消息)을 전한뒤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허나 이번에도 하늘과 정의(正義)는 우리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도 무심(無心)하게도 2월15일 아침 심장(心腸麻痺) 로 급서(急逝)해 버립니다
민주당은 이로써 신익희에 이어서 또다시 선거(選擧)도 해보기전에 대통령후보(大統領候補)를 잃게되는 불운(不運)을맞고 우리겨레는
정권교체(政權交替)의 희망(希望)이 또 무너지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을---경험하게 되고 맙니다
국민(國民)들의 애통(哀痛)함은 너무나 컸고 이무렵 박재홍의<유정(有情千里)>노래가 대중(大衆)들에게 차용(借用)되어 국민(國民)들의 마음을 실은 개(改詞曲)으로 불려집니다
이부분은 종횡무진가요사 를 참조바랍니다
<유정천리(有情千里)>가요가 퍼지면 펴질수록 자유당은 이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막았고 경상도(慶尙道)를 중심으로 시작된 반자유당(반(反自由黨) 운동(運動)은
대구(大邱)의 2,28 봉기(蜂起)와 마산(馬山)의 3,15 의거(義擧)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참내 4,19 혁명(革命)의 불씨를 지피게 됩니다
결국은 민주당선거패배(民主黨選擧敗北)보다도 더 큰 사태(事態)인 자유당(自由黨)의 붕괴(崩壞)로 결말(結末)이 났다는 것 입니다!!!
대중(大衆)들의 <유정(有情千里>) 개사곡(改詞曲)을 들었으면 겸허(謙虛)하게 받아드려 개과천선(改過遷善)해야할 자유당은”이승만 찬가”와”이기붕 선생”이라는
지나가는 개조차 웃을 노래를 만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만행(漫行)을 서슴지않으며 민심이반(民心離反)을
자초(自招)하고 마침내붕괴(崩壞)의 길로 향해가기 시작합니다
서기(瑞氣)어린 태백산(太白山) 정기(精氣)를 받아
대한(大韓)의 하복판 기상에 나서
그이름 찬란(燦爛)하다 이기붕선생
이박사를 보필(輔弼)하실 애국자(愛國者)시네
일제(日帝)의 탄압(彈壓)을 물리치시고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을 이루었으니
그이름 찬란(燦爛)하다 이기붕선생
이박사를 보필(輔弼) 하실 애국자(愛國者) 시네
구차하신 가정(家庭)에 자라나시어
어려운 사정(事情)을 보살폈으니
인정(人情)도 많으셔라 이기붕선생
이박사를 보필(輔弼)하실 애국자(愛國者)시네
아무 근거(根據)도없는 이기붕에게”일제(日帝)의 탄압(彈壓)을 물리쳤다”고 독립투사(獨立鬪士)라 치겨세우는 노래 가사(歌詞)에 실소(失笑)를 금할수없고
노래 분위기(雰圍氣)가 북한(北韓)의 김일성 우상화(偶像化)를 생각(生角)나게 하는 comedy-코미디-입니다
이어진 학생(學生)들의 폭발(暴發)이 4,19 혁명(革命)으로 자유당(自由黨)을 몰락(沒落)당하고 <유정천리>는 다시한번 바뀌어서 불립니다
혁명(革命)의 성공(成功)으로 유정천리 개사곡이 폭발적(爆發的)인 호응(呼應)을 얻자 유정천리 발매회사 sinsegy-record 에서는 이를 상업적(商業的)으로 이어가고자 정식개사곡(定式改詞曲)음반(音盤)을 제작합니다
원곡가수(原曲歌手)인 박재홍이 또다시 초대(招待)되어 녹음(錄音)한<4,19와 유정천리>는 대중(大衆)들이 만든 개작가사(改作歌詞) 두절에 새로한절을 추가(追加) 3절로된 노래였습니다
개사곡(改詞曲)서”자유당에 꽃이피네 민주당에 비가오네”부분을”민주당에 꽃이피네 자유당에 비가오네”로 가사를 바꾸었습니다
허나 음반(音盤社)의 기대(期待)와달리 음반은 별다른 반응(反應)을 얻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노골적(露骨的)으로 혁명분위기(革命雰圍氣)에 편승(便乘)한 상업적기획(商業的企劃)이 오히려 거부감(拒否感)을 유발(誘發)했던 것으로 평가(評價)됩니다
1405—이런사실(事實) 아십니까??
<외로운 이 산장(山莊)에 쓸쓸히 살아가네>
아무도 날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山莊)에
단풍(丹楓)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世上)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몸
병(病)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再生)의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찾는 이없는 외로운 이 산장(山莊)에
풀벌레만 애처(愛妻)러히 밤새워 울고있네
행운(幸運)의 별을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追憶)을 더듬어 적막(寂寞)한 이한밤에
임뵈올 그날을 생각(生角)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상기가요(上記歌謠)<산장(山莊)의 여인(女人)>은 반야월작사 이재호작곡으로 가수(歌手) 권혜경이 불렀습니다
Oasis-record 발매 sp음반으로 발매 했습니다
타면(他面)에는 작사 작곡 <??>가 실려있습니다
<??>속답을 아시는분은 댓글로 표현해 보시지요!!
가요(歌謠) <산장(山莊)의 여인(女人)>에는 가수(歌手)이자 작사가(作詞家) 인 반야월(半夜月) 공연(公演途中) 만난 한 여인(女人)의 가슴아픈 사연(事緣)이 담겨있습니다
<꽃 마차(馬車)> <불효자(不孝子)는 웁니다><잘있거라 항구(港口)야><망향(望鄕)의 tango-탱고><넋두리20년>----등등 많은곡을 발표(發表)한 반야월은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당시(當時) 고향(故鄕)인 마산(馬山)으로 피난(避難)을 갔습니다
그는 마산방송국(馬山放送局) 문예부장(文藝部長)으로 일하며 서울의 가요인(歌謠人)들을 모아 방송국위문단(放送局慰問團)을 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하다가 국립 마산결핵요양소(馬山結核療養所)로 위문공연(慰問公演)을 가게됩니다
반야월은 요양소(療養所)의 환자(患者)와 의사(醫師), 직원(職員)들 앞에서 대표곡(代表曲) 인<불효자(不孝子)는 웁니다>를 열창(熱唱) 하고있었습니다
무대(舞臺)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그의 눈길이 어느순간(瞬間) 관중석(觀衆席) 맨뒤쪽에 멈췄읍니다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蒼白)한 그림자를 드리운 젊은여인(女人)이 노래를 들으면서 계속(繼續) 흐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후 반야월은“그 여인(女人)을 보는순간(瞬間) 아련한 쓰라림같은게 가슴에 와닿았다”라고 그 순간(瞬間)을 회고(回告)했읍니다
그때의 인상(印象)이 머릿속에 강렬(剛烈)하게 남아있던 반야월은 요양소(療養所) 직원(職員)에게 그여인(女人)이 울고있었던 이유(理由)를 묻지않을수 없었습니다
그의 짐작(斟酌)대로 여인(女人)은 사랑에 상처(傷處)를입고 결핵(結核)에걸려 소나무숲 우거진 산장병동(山莊病棟)에서 요양중(療養中) 이었습니다
폐결핵(肺結核)을 다른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도록 격리치료(隔離治療)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읍니다
이 얘기를 들은 반야월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태평(太平)레코드에서 같이 동거동락(同居同樂)했던 작곡가(作曲家) 이재호가
폐결핵(肺結核)을 앓고 있다는 생각(生角)이 났고 바로 노래 가사(歌詞)를 창작(創作)해서 이재호에게 곡을 붙여달라고 요청(要請)했습니다
가사(歌詞)를 받은 이재호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곡을 완성(完成)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운명적(運命的)으로 가수(歌手) 권혜경에게 전해졌고 음반(音盤)으로 제작(制作)되어 널리 사랑받는 명곡(名曲) 이 됩니다
강원도(江原道) 삼척에서 태어났지맘 세무공무원(稅務公務員) 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의정부(議政府)에 정착(定着)한 그녀는 서울 동구여상을 졸업(卒業)합니다
서울대 음대-音大-성악과(聲樂科)를 졸업(卒業)했다거나 중퇴(中退)했다는 기록(紀錄)이 보이나 확인(確認)이 어렵다는 글이 보입니다
조흥은행을 다니다 1956년 서울중앙국- 中央放送局-에서 모집(募集)한 전속가수(專屬歌手) 모집(募集)에 합격(合格)합니다
이때 입사동기(入社同期)가<비극(悲劇)은 없다><사랑이 메아리칠떄><청실홍실>등을 부른 안다성씨가 있습니다
운명적(運命的)인 곡(曲)<산장(山莊)의 여인(女人)>으로 일약(一躍) star-singer-스타가수-가 된 그녀는 그영광(榮光)도 잠시 그인기(人氣)를
시샘이라도 하듯 28살의 젊은나이에 심장판막증(心臟瓣膜症)에 걸리고 이후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후두암(喉頭癌)까지얻습니다
그 와중(渦中)에 kbs-drama-케이비에스 드라마-“호반(湖畔)에서 그렇게”의 주제가(主題歌)인이보라사 황문평곡 <호반(湖畔)의 bench-벤치>를
강수향과 듀엣으로, 1959년 개봉영화(開封映畵) <동심초(童心草)> 주제가(主題歌), 그리고 박춘석과 손잡고<물새우는 해변(海邊)>를 츄브론디와
함께 부르며 병마(病魔)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병(病)은 완쾌(完快)되지 못하고 거듭 재발(再發)을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유년시절(幼年時節) 대문(大門)을 세번이나 열어야만 집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부유(富有)한 가정(家庭)에서 자라고 좋은직장(職場)을
다니며 부러울 것 없던 그녀에게도 가혹(苛酷)한 운명(運命)의 벽은 높았습니다
곡을 작사한 반야월을 찾아”선생님은 하필 왜 내게 슬픈노래를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人生)을 했느냐” 며 심정(心情)을 토로(吐露)했다는 일화(逸話)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힛트곡<산장(山莊)의 여인(女人)>의 한 구절(句節)처럼”재생의길”을 걷겠다는 의지(意志)로 종교(宗敎)에 귀의하기도 했습니다
본래(本來) 수녀(修女)가되고싶어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후 불자(佛者)가 됩니다
카톨릭에서 불교(佛敎)로 개종(改宗)하면서 도선사의 청담스님으로부터 하루 5000배씩 절을 하라는 권유(勸誘)받고 힘든 고행(苦行)을 자처(自處)하기도 했습니다
평생(平生)을 독신(獨身)으로 지낸 권혜경은 남은인생 전부를 “덤으로사는 인생(人生)”이라 스스로 위로(慰勞)하며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奉事活動)으로 대부분(大部分)의 시간(時間)을 보냈습니다
50여년간 전국교도소(全國矯導所)와 소년원(少年院)을 돌며 사형수(死刑囚), 무기수(無期囚), 10대 범죄자(犯罪者)등 재소자(再訴者)들을 격려(激勵)한 그녀는 수인(囚人)들 사이에서”어머니”라 칭호(稱號)를 얻기도 했습니다
<산장(山莊)의 여인(女人)> 가사(歌詞)처럼 그녀의 삶은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러고보면 권혜경외에도”가사(歌詞)의 굴레”가 시련(試鍊)이되었던 가수(歌手)도 많습니다
<낙엽(落葉)따라 가버린 사랑>의 차중락은 낙엽(落葉)지는 11월 32살의 젊은나이로 생(生)을 마감하고 말았고<0 시(時)의 이별(離別)>을 부른
배호는 안타깝게도 29살에 세상(世上)과 이별(離別)했습니다
애절(哀切)한 선율(旋律)의 “내곁을 떠나가던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追憶)들이 푸르게 바래졌소”<사랑 하기 때문에> 러고
노래했던 유재하는 불과 25살에 교통사고(交通事故)오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이밖에도<이름모를 소녀(少女)>을 남기고간 김정호 돌연사(突然死)한 김성재는”마지막 노래를 들어줘”를 남겼고”하늘에 편지(便紙)를써”<내눈물모아>를
부른 서지원은 20살나이에 하늘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권혜경의 평생지병(平生持病)이었던 결핵(結核)은”글쟁이 들의 직업병(職業病)” 이라고 할마큼 문인(文人)들이 결핵(結核)으로 고생(苦生)을 했습니다
자타(自他) 공인(公認) 최고(最高)천재(天才) 가요인(歌謠人) 이재호씨가 결국은 폐결핵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고 한국가요사(韓國歌謠史)
전무후무(前無後無) 가요황제(歌謠皇帝)로 불리던 남인수(南仁樹)도 결국은 이 병마(病魔)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마산(馬山)에도 결핵(結核)때문에 많은 문인(文人)들이 거쳐갔고 글 자취(紫翠)뿐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요양(療養)하러 마산에 와야했던 문인들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등이 요양소(療養所)에서 치료(治療)를 받았습니다
해방후(解放後)에도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고 그중에서 임화와 지하련은 용양소에서 사랑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지하련은 임화를 온갖정성을 다해 간병(癎病)을 했고 임화는 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感化)되어 결혼(結婚)까지 했습니다
재야(在野)정치인(政治人)이었던 계훈제, 영화인(映畵人) 최백산 등도 한때 마산 요양원에 머물렀읍니다
또한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등 유명문인(有名文人)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다녀갔습니다
소설가(小說家) 나도향(羅稻香)은 가난(家難)과 방랑(放浪)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療養)차 마산(馬山)에와서 3개월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食客)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便紙)형식(型式)의 단편소설(短篇小說) ”피묻은 편지 몇쪽”을 남겼습니다
그해는<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發表)한 나도향 소설(小說)의 절정기(絶頂期)였습니다
다음해 그는 스물넷 너무 아까운 나이로 폐결핵(肺結核)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夭折)합니다
박정희 쿠테타 정권의 마지막 발악 이었던 유신체제(維新體制)에 맞서 독재타도(獨裁打倒)를 외쳤던 김지하도 폐껼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 병원을 거친후 장편(長篇時)<비어(蜚語)>를 발표해 체포(逮捕) 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 결핵병원에 강제연금(强制軟禁) 당합니다
끄때 발표한 시<편지(便紙)>가 있습니다
벗들
병(病)든 나를 찾지마라
나를 찾지마라
펄펄 내리는 눈속에 갇힌
머무러거든
매화(梅花)봉우리
아조아조 향기(香氣)럽게 머물고
피우려가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冬柏)이여
펄펄 내리는 눈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春三月)ㅇ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香氣)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春三月) 그 흔한 바람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 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病)든 나를 찾지마라
펄펄 내리는 눈속에 갇힌
1406—이런 사실(事實)아십니까??
<한많은 피난(避難)살이 설움도 많아--->
보슬비가 소리도없이 이별(離別)슬픈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汽笛)이 운다
한(恨)많은 피난(避難)살이 설움도많아
그래도 잊지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慶尙道)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離別)의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
서울가는 십이(十二列車)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窓)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避難)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못할 순정(純情)때문에
기적(汽笛)도 목이메어 소리높이 우는구나
이별(離別)의 부산(釜山停車場)
가기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琉璃窓)에 그려보는 그마음 안타까워라
고향(故鄕)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자(子) 봄소식(消息)을 전해주소서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離別)의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
상기가요(上記歌謠)<이별(離別)의 부산(釜山)정거장(停車場)>은 호동아작사 박시춘작곡으로 가수(歌手) 남인수(南仁樹)씨가 불렀습니다
1954년 9월 universal-record 서 sp음반으로 발매(發賣)했습니다
타면(他面)에는 손로원사 박시춘곡 백설희의<첫사랑의문>이 실려있읍니다
<이별(離別)의 부산(釜山)정거장(停車場)>은 곡을 창작(創作)한 박시춘이 부산에서 직접목격(直接目擊)한 피난민(避難民)들의 이별(離別)장면(長眠)을
실감(實感)나게 표현(表現)한 작품(作品)으로 노래를 부른 가요황제(歌謠皇帝) 남인수의 해방후(解放後) 건재(健在)를 확인(確認)시켜준 가요(歌謠)로도 유명(有名)합니다
곡이 발표(發表)된 1950년대 이곡의 판매량(販賣量)을 넘어서는 가요(歌謠)가 없었을정도로 인기(人氣)를 끌었습니다
육이오민족동란(六二五民族動亂) 터지고 2년 1개월간의 휴전협정(休戰協定)을 거쳐 1953년, 7월27일 드디어 정전협정(停戰協定) 체결(締結) 됩니다
무능(無能)하고 타락(墮落)한 이승만정부는 8월15일 임시수도(臨時首都) 부산(釜山)에서 서울로 수도가 옮겨가고 국회(國會)는 9월16일 뒤따릅니다
200만의 피난민(避難民)들이 고향(故鄕)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던 것은 당연(當然)한 귀결(歸結). 희망(希望)을 품은 전란(戰亂)의
시기(時期)에 작사가(作詞家) 유호는”호동아”라는 또다른 필명(筆名)으로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의 이별(離別)상황(狀況)을 실감(實感)나는 가사(歌詞)로 그려냈습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부터 한국최고(韓國最高) 흥행작곡가-興行作曲家-로 이름을 날리던 박시춘씨와 최고흥행가수(最高興行歌手) 였던 남인수씨
콤비는 전쟁(戰爭)와중(渦中)에도 그기세가 꺾이지않고 또다시 1950년대 최고(最高) hit-曲-힛트곡-을 뽑아냄으로써 건재(健在)함을 세상(世上)에 알리고 있습니다
경부선철도(京釜線鐵道)의 종착역(終着驛)이자 시작(始作)점인 부산역(釜山驛)은 부산항(釜山港)과 더불어 20세기초(世紀初)부터 이른바
경부(京釜)축 발전(發展)의 핵심역할(核心役割)을 해왔습니다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과 임시수도(臨時首都) 시절(時節) 부산역(釜山驛)은 지금의 자리가 아닌 다른곳에 다른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중앙동(中央洞)쪽인 부산세관(釜山稅官) 앞 부산무역회관빌딩-釜山貿易會館) building-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었던 부산역(釜山驛)이 노래속 <이별(離別)의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의 바로 그 부산정거장(釜山停車場) 입니다
1905년 1월1일 서울-부산(釜山) 초량(稍良)간 경부선(京釜線)이 개통되었고 1908년 4월1일 르네상스 양식(樣式)의 부산역건물(釜山驛建物)이 섰습니다
이후 1953년 11월27일 화재(火災)로 건물(建物)이 소실되어 중앙(中央)동(洞) 가건물(假建物)을 부산(釜山)역(驛)으로 운영(運營)1968년에 지금의 자리에 역사(驛舍)를 신축했습니다
2절 가사(歌詞)”서울가는 십이열차(十二列車)”는 짝수열차(列車)의 번호(番號)입니다
당시(當時) 지방(地方)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는 짝수, 서울에서 지방(地方)으로 향하는 열차번호(列車番號)는 홀수였습니다
전쟁(戰爭)의 영향(影響)속에 있던 이시기에는 시창시(始唱時) 남인수가 예정(豫定)되 있었으나 결국 기회(機會)를 뺏기고 취입(吹入)기회(機會)도
날려버린<전우(戰友)야 잘자라> 작곡가(作曲家) 손목인의 swing-調)-스윙조- rhythm-리듬-가요(歌謠)의 작곡력(作曲力)이 돋보이는<shoeshine-boy-슈사인보이>,
흥남철수(興南撤收) 상황(狀況)을 실감(實感)나게 그려낸 가요(歌謠) <굳세어라 금순아> 남인수(南仁樹)씨가 또한곡 취입기회(吹入機會)를 잃어버린
가요(歌謠)<전선야곡(戰線夜曲)> 등 전쟁(戰爭)의 상처(傷處)와 관련된 노래들이 유행(流行)했습니다
이노래역시 작곡가(作曲家) 박시춘 본인(本人) 창작(創作)한 <굳세어라 금순아>처럼 피난민(避難民)들의 애환(哀歡)을 그리고 있다는 글이 보입니다
가사내용(歌詞內容)은 처절(凄切)했던 피난(避難)살이를 마치고 피난지(避難地)에서의 추억(追憶)을 간직한채 환도열차(還都列車)를 타고
부산(釜山)을 떠나면서 부산(釜山)정거장(停車場), 즉 부산역(釜山驛)에서 이별(離別)을 해야하는 순간(瞬間)을 애절(哀切)하게 묘사(描寫)하고 있습니다
몸부림치며 이별(離別)해야 하고 기적(汽笛)소리 마져 목이메어 우는 가사내용(歌詞內容)과는 달리 노래가락은 빠르고 경쾌(輕快)하여
희망적(希望的)인 분위기(雰圍氣)를 연출(演出)하고 있는 흥행가요(興行歌謠)의 대가(大家) 박시춘의 작곡(作曲力)의 별미(別味)입니다
특히 열차(列車)의 바퀴소리를 음표화(音標化)낸 기발(奇拔)한 이이디는 같은 음악(音樂專攻家)들 조차도 혀를 내두를수밖에 없게 만드는--- 천재적(天才的) 입니다
1950년 육이오동란(六二五動亂)이 발발(勃發)하자 아예 탄생(誕生)조차 하지말아야 했던 이승만정부는 대전(大田)과 대구(大邱)를 거쳐
8월18일 부산(釜山)으로 수도(首都)를 옮겨야 했읍니다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으로 전세(戰勢)를 역전(逆轉)시키면서 1차 임시수도(臨時首都)로서 부산(釜山)의 역할(役割)은 70일만에 끝나는듯 했습니다
하지만 붉은 이리떼 중공군(中共軍)의 전쟁개입(戰爭介入)으로 다시 서울을 빼아긴 1.4후퇴(後退)하루전부터 휴전협정(休戰協定) 체결(締結)로
환도(還都)할떄까지 부산은 1차때보다 훨씬길게 2차 임시수도(臨時首都)로서의 역할을 감당(勘當)해야 했습니다
전쟁발발후(戰爭勃發後) 8월18일에 정부(政府)기관(機關)들이 부산(釜山)으로 이전(移轉)되었습니다
부산시(釜山市) 서구(西區) 부민동의 경남도청(慶南道廳)을 임시(臨時) 중앙청(中央廳)으로 정해야 했습니다
부산시청사(釜山市廳舍)에는 사회부와 심계원, 고시위원회, 문교부를 두고 남전(南電) 경남지부에 상공부를 두었습니다
국회(國會)는 부산극장(釜山劇場)에 사법기관(司法機關)은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 검찰기관(檢察機關)은 부산지방 검찰청(釜山地方檢察廳)에 두었습니다
미국대사관(美國大使館)은 부산(釜山) 미국(美國文化院)에 자리잡았습니다
1,2차를 하쳐 통상 “ 임시수도(臨時首都) 1000일”로 일컬어지는 이시기 항구도시(港口都市) 부산(釜山)은 피난민(避難民)들의 물결에 북새(北塞)통이었습니다
인구 40만의도시 부산이 단숨에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大都市)로 변해버렸습니다
당시(當時)는 하루도 조용한날이 없었던 정치적(政治的) 격동(激動)과 경제사회적(經濟社會的) 혼란(混亂)의 시기(時期) 일수밖예 없었읍니다
타의(他意)에 의한 해방(解放)으로 갓 태어난 한국정치(韓國政治)는 부산(釜山) 임시수도(臨時首都) 시절(時節)부터 독재(獨裁)로 치달았습니다
전시경제(戰時經濟)는 엉망이었으며 사람들은 꿀꿀이죽을 먹으며 아사직전(餓死直前)을 헤매었습니다
부산(釜山)은 그야말로 침몰직전(沈沒直前)의 구명정(救命艇) 같았습니다
그러나 되레 그것들이 현대사(現代史)의 아픔과 상처(傷處)를 온전(穩全)히 간직(間直)한 부산(釜山)을 만들었다는 글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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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많은 자료를 정리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 미처 다 읽어 보지는 못했으나 훌륭한 자료로 기록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요산님!!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