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창수면과 남쪽은 지품면 토구리와 북쪽은 영양의 양구를 연접한 고장이다. 화산(火山)의 분화구였던 것으로 보이며 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다. 석보면의 사무소ㆍ파출소와 초ㆍ중등학교가 있고 보건지소와 우체국ㆍ농협 등의 기관들이 있다. 본래 영양현 석보부곡(石保部曲)의 땅으로서 조선조 인조 무렵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을 위하여 서당을 세운 뒤에 원리동이라고 부르게 된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인지동과 답하동의 일부를 따다가 원리리라고 하였다.
원리리에는 이시명(李時明) 선생을 위하여 세운 석계서당과 장씨 부인의 신도비(神道碑), 그리고 당목(堂木)을 들 수 있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에 지역민의 복지를 베풀기 위한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1640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후손들이 모여 들어 재령 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화매천(花梅川) 가에 있는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와 서대, 그리고 낙기대(낙기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다.
한편 장씨부인 유허비(遺墟碑)는 마을의 앞 언덕에 세워져 있다. 조선조 선조 때부터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요리에 관한 서책을 쓴 분이다. 아울러 당목(堂木)을 알아 보자. 가두들 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가 서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서낭당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보름이면 제사를 모신다. 두들 남쪽에는 세심대(洗心臺)가 있는데, 바위 앞면에다 세심대라고 적어 놓았다.
조선 시대 이 곳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두들ㆍ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원리는 1640년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하기 위해서 이 곳으로 들어 와 개척한 마을로 그 후로는 석계선생의 후손들인 재령이씨(載寧李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 왔다. 이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 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남아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 가에 서 있는 암석들에는 석계의 아들인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ㆍ서대ㆍ낙기대ㆍ세심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김기수(51) 제보).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조 고종 무렵에 세운 것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원리의 동쪽으로 흐르는 화매천 옆에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강변 혹은 갱빈이라 하며, 석보중학교가 이 마을에 들어서자 학교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두둘ㆍ주남ㆍ화매로 통하는 삼거리이며 중학교가 생긴 뒤 마을이 커졌다(김기수(51) 제보). 강변을 갱빈으로 소리 냄은 일종의 모음의 소리가 바뀐 것이니 소리의 닮음 현상으로 볼수 있다.
구강변 마을보다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아래강변이라고 하며 바람이 매우 세어서 옛날에는 바람내기라고도 불렀다 한다. 물레방아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헐리고 자취가 없다(박호경(51) 제보).
화매천 언덕 위 둔덕으로 새장터 옆의 산기슭이다. 1965년 장터뫁에서 새장터로 장이 옮겨지자 이 곳에 인가가 들어 서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편에 넓은 평지가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인다(김주락(54) 제보). 언덕에 대한 이 지역말인데 두드러지다ㆍ돋다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이다.
마을의 옆 들판의 모습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맛들에 있는 논의 일부를 메꾸어서 그 자리에 석보초등학교를 세우고 그 주위에 집이 들어 서서 원리(院里)와 연결되고 있다(김진수(63) 제보).
물론 땅의 모양이 누운 소나 말(馬)처럼 생길 수는 있다. 다른 지역의 땅 이름과 비교하여 보면 말-마에서의 걸림을 받아 들인다면 말-마리-머리와 같이 볼 가능성이 있다. 하면 맛들은 머리들이요, 맏이들이라고 풀이할 수 있으니 큰 들이란 말로도 볼 수 있다.
솔밑은 새장터의 서쪽 광여산 줄기가 끝 나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옛날에는 마을의 뒤 언덕에 노송이 울창하게 들어 차 있었기 때문에 솔밑 또는 송하라 부르고 있다(김진수(63) 제보). 송하(松下)는 솔밑을 한자로 뒤친 이름으로 솔밑이 더 오랜 우리식 부름말로 보인다.
이 곳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다. 이들 광산 김씨 중에서 조선 시대에 벼슬을 하여 가재(佳在)라는 당호(堂號)를 받은 이가 있었는데 그의 당호에서 마을 이름을 따서 가두들ㆍ가구하고 불렀다. 또 이 마을의 앞산이 개가 누워서 짖는 형상이라고 하여 개두들이라고도 불리웠다 한다(유응선(62) 제보).
석보면의 옛날 장은 지경동의 옛장터에 섰으나 장소가 알맞지 않아서 집들이 많은 원리로 옮겨서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장 역시 1965년에 새장터로 이전하였다(김진수(63) 제보).
옛날에는 원리동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지경동에 속해 있다. 당초에는 석보장이 이 곳에 섰으나 좀 더 넓은 장소를 찾아 원리의 장터로 옮겨가고 이름만 남아 있다(김수학(69) 제보).
원리의 북쪽, 두들 옆에 있는데 1965년에 석보장이 장터몰에서 이 곳으로 옮겨 오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황석겸(52) 제보).
석보면과 입암면의 사이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자리에 따라서 상지경과 하지경으로 불리워진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전에 진보군과의 경계가 되는 마을이라 하여 옛부터 지경(地境)이라 부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월동 일부를 합하여 그리 불렀는데, 의병대장 이하현(李夏玄) 장군이 태어난 고장이다.
이 마을의 상징적인 것으로는 독굴과 당나무를 들 수 있다. 독굴이라 함은 도둑의 굴이라는 말인데 노달(老達) 마을에 있는 큰 굴로서 약 50여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장소였는데 옛적에는 이 곳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하여 온다. 같은 독굴이란 이름을 구석쪽에 독같이 우묵하게 들어 갔기 때문에 붙인 이름으로도 풀이되는데 여기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당나무는 지경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인데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마을에서 제사를 지낸다. v
고려 시대에 이 곳이 영해부에 속해 있을 때에는 영해부의 제일 끝이라 하여 단계로 불렀다 한다. 그 후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이 곳이 옛 영해부와 진보현의 경계가 되는 땅이라 하여 지경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이 곳이 석보면과 입암면의 경계가 되는 곳인데, 마을의 위치에 따라 웃지경과 아랫지경으로 나눈다(장순조(64) 제보). 방밭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진보현과 영해부의 경계가 되므로 마을 이름을 지경이라고 불렀다. 마을 복판의 도랑을 두고 동편은 석보 지경, 서편은 입암 지경이 되었으나 1986년 이후 석보면으로 편입되었다(김태현(53) 제보).
지경에서 석보로 오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석보장이 이 곳에서 섰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장터가 비좁아지면서 원리의 장터로 옮아가 버리고 장터만 남아 있다(김진학(69) 제보). 옛장터를 한자로 뒤치면 구장기가 된다.
비싯골 동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 위에 이룬 마을이다. 8ㆍ15 광복 후에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마을로 긴 골짜기 위에 이루어져서 햇볕이 들고 따스한 곳이어서 조양동이라 하기도 한다(장동수(54) 제보). 비싯골에서 비시는 빗 곧 빛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또한 진골은 긴골이어서 소리가 바뀌어서 굳어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지경에서 몇 개의 골짜기를 넘어 가야 되는 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산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관계로 주위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 내린 아홉 계곡의 물줄기가 이 곳에서 합해져 냇물을 이룬다고 하여 구수곡이라고 불렀다 한다. 전해 오는 말에는 마을이 들어 않은 골짜기가 마치 소의 구유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싯골이라고도 한다(김수학(69) 제보). 다른 곳의 마을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소의 구유처럼 우묵하게 들어간 생김새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기본형은 굿에서 갈라져 나온 이름이다.
석보면(石保面)의 북쪽 마을로서 예전에는 진성현(眞城縣)에서 영양현과 영해부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이 마을에 역을 두었다고 하여 역두들이라고도 한다. 석보면 북쪽 개울 가에 있었다고 하여 북계리하고 부르게 된다. 1914년 행정구역을 다시 고칠 때에 소계동과 역리, 그리고 원리동의 각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북계리라 하다가 1986년 12월30일부로 다시 옥계리라 고쳐 부르게 된다.
역두들을 중심으로 하여 영해와 영양 그리고 진보로 가는 길목이 되며 고추와 담배의 농사가 잘 된다. 역두들은 조선초 영해부의 영양역 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에 속해 있었다. v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이 마을을 처음으로 개척하였다고 하며 석보면의 북쪽 개울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북계(北溪)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다. 조선조에 들어 와서는 진성현에서 영양현과 영해부로 지나는 세 갈래 길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 이곳에 역을 두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김성대(55) 제보). 역(驛)이란 글자도 본뜻은 갈아 타는 곳이다.
이곳은 북계 북동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골짜기가 넓고 질펀하게 펼쳐진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몇 집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김수성(55) 제보). 광곡(廣谷)은 넓으랑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것이다.
이 마을은 조선 중엽에 청송군 안덕 땅에서 살던 조상태(趙相泰) 선생이 피난 삼아 이 곳으로 옮겨 와서 정착하여 개척한 곳인데, 소계동(素溪洞)의 아래 동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계 아래에 있는 큰 동네라고 하여 큰마로 부르기도 하였다(조래경(59) 제보). 소하 마을은 250여년 전에 함안 조씨(咸安趙氏)의 입향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왔으며 그 뒤로 새마을(新里)이 만들어지면서 각 성이 섞여 살게 되었다. 입향조인 조상태(趙相泰) 선생이 지은 계암정(溪岩亭)이 있으며 구슬방우(玉岩 ) 모서리에 성황당이 있는데 정월 보름이면 새마을 사람들이 성황당에 모여 제사를 모신다(조옥재(71) 1996. 11. 제보). 대촌은 큰마를 한자로 뒤친 이름이며 큰마가 보다 더 오래된 이름으로 보인다. 김정호 선생의『대동지지』 문목해(門目解) 부분을 보면 소-계의 땅 이름은 거의 새롭게 개척한 것을 이른다고 하였으매 이 마을도 새로이 개척하였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가령 소계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그러니까 새로 길을 내서 흐르는 냇물의 부름말로 풀면 된다.
1890년 북계 위쪽에 새로운 마을이 생겨 났는데 이를 새마로 불러 오다가 1971년 새마을 사업으로 인하여 좀더 아름답게 가꾸어 새마을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김수성(55) 제보).
바구니 모양으로 생긴 언덕 위에 마을이 있고 뒤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언덕에 숲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들이 여러 집 모여 들어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았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김재동(65) 제보). 바그덤의 덤은 마을 이름의 끝에 많이 나오는 씨끝으로 둥그스레한 곳을 이르는 경우가 많다. 바그는 형태로만 보면 바구니의 줄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바가지라고 할 때 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청계(靑溪)라고도 이른다. 새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청계천의 아래쪽에 있다.
북쪽은 영양읍의 화천리를, 서쪽으로는 입암면의 양항리를, 남쪽은 석보면 옥계리와 경계하여 자리한 산속 마을로서 교통이 불편한 편이며 산채와 약초가 많이 난다. 소박하고 작은 시내가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 구역을 다시 고칠 때에 산막골ㆍ용두골ㆍ마차골을 합하여 소계동이라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이 마을에는 성황당과 은행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성황당에는 뱀의 머리 모양을 한 단지가 나왔다 하여 쇠로 만든 철인과 철마를 모시고 있다 한다. 이는 물론 무덤을 쓸 때 말하는 명당과 깊은 관련을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년 전에 김구흥 선생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들어와 이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하고 횟골이라 불렀다. 그 뒤 200년 후쯤에 김구흥(金九興)의 후손인 김두행(金斗行) 선생이 근처의 금화산 기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김씨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며 동네 이름도 금화촌ㆍ금못이라고 개칭했으나 그 후 굼못으로만 불리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과 함께 소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김두행 선생이 1774년에 자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웠다는 금계서당(金溪書堂)의 유적이 있으며 김 선생의 후손들인 김녕 김씨(金寧金氏)들이 선조인 김두행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뜻으로 1800년에 세운 오류정(五柳亭)이라는 정자도 남아 있다(김성양(68) 제보). 소계의 경우는 앞에서도 풀이한 바와 같이 새로 생긴 냇물이란 뜻으로 새기면 된다. 아울러 횟골의 경우도 쇠금의 쇠에서 소리가 약해져서 '쇳-횟'으로 걸림을 둘 수 있다. 굼못의 금은 쇠금의 금-굼으로 보이며 금의 소리에서 원순모음으로 바뀌어 굼못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옥계와 소계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소계의 제일 마지막 골짜기란 뜻이다.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생활하기에 불편하다(권석이(61) 제보). 마차는 마치다에서 갈라져 나온 형태로 보면 되고 마지막과 같은 뜻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김녕 김씨(金寧金氏)들이 집성촌을 이루어서 이 마을에 거주할 당시 이 곳에서 말을 길렀다고 해서 처음에는 사마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뒤에 말을 기르던 곳에 산막을 지어서 인가가 한 두 집씩 들어 서면서 마을의 이름도 산막골로 바뀌었다(박성준(82) 제보). 산막골 북쪽에 못이 있는데 이 못을 팔 때에 옛 기와와 쌀알ㆍ화살촉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흔히 산막골못으로 불리운다. 사마에서 산막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인에 일반적으로 마을 이름이 붙여지는 과정을 보면 땅의 모양과 걸림을 보이는 게 먼저인 수가 많이 보이므로 이 마을도 산막에다 뒤에 다시 의미 부여를 하여 붙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은행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1300년 무렵에 세워졌다는 이 정자는 1940년쯤에 이 마을 사람들이 땅을 일구어 논을 만들 때에 정자의 주춧돌이 수십 개 발굴되었으나 이 후에 파묻혀 없어져 버렸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정자가 있던 자리 곁에 오래된 은행나무 뿌리에서 새로 어린 나무가 뻗어 나와서 자라 이제는 큰 나무가 되어 있다. 은행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마을이라서 은행정ㆍ으능정ㆍ으능지라고 불리고 있다(김수경(72) 제보). 우리말에서 제일 잘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히읗(ㅎ)이다. 이로 보면 은행-은앵-으냉-으능으로 소리가 바뀌어 굳어진 걸로 보인다.
석보면과 입암면의 경계가 되는 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옛날부터 화전민들이 개척하여 살던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세 집이 살았으나 6ㆍ25 때 모두 타 없어지고 지금은 빈 터만 남아 있다. 재를 넘는 마을이라고 하여 잿마라고 하였다(김화득(72) 제보). 본래 잿이라 함은 사이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의 옛소리에는 터짐소리가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므로 이는 갈림소리로 적어야 하므로 재-새가 되며 새는 옛적에 겹소리였으니가 '새- 사이'로 읽어야 올바른 형태가 나온다.
이 마을의 골짜기에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간 귀 달린 이무기가 살았다는 바위 굴이 있다. 이 이무기는 가끔 굴밖으로 나와서 안개를 뿜었으므로 이 골짜기에는 유난히 안개가 자주 끼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간 뒤로는 날이 맑고 곡식이 잘 되었다고 전한다(박해수(71) 제보). 용우골의 우-는 용골 혹은 용의골에서 우-의로 바뀌어 소리가 굳어진 걸로 보인다. 용의 본질은 물신이라고 할 것인데 이는 용을 숭상하는 용신앙 곧 물신앙과 깊은 걸림을 보인다.
영양의 주봉인 일원산에서 수비면 뒤편의 우령태령으로 다시 명동산으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 큰 봉우리가 시루봉(甑峰)인데 봉우리의 동남은 영덕군에, 서쪽으로는 청송군에 인접하여 있다. 답곡 마을은 시루봉의 북쪽으로 빠져 자리한 마을이다. 시루봉 우측으로는 작은 시루봉ㆍ성산봉ㆍ투구산과 혈친맥인 발검산이 있다. 좌측은 탕건봉ㆍ독점재ㆍ장수나무산이 답곡마을 앞산이 된다. 서쪽은 시량동(時良洞)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고장이다. 시루봉에서 흘러 내리는 물은 답곡동의 젖줄이 되어 상중하논실에 물을 대어 준다.
이 마을은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논이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답상동ㆍ답중동ㆍ답하동ㆍ건평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답곡동으로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마을의 상징으로는 답곡쑤가 있는데, 혹은 논실쑤라고도 부른다. 쑤는 이 마을의 어구에 있는 숲으로서 두세 아름 되는 소나무 느티나무와 잡목이 숲을 이루고 있다. 동네의 수호신을 위하여 매년 정월에 보름이면 제사를 지낸다. 만지송은 이 마을의 상징이자 영양군의 보호수이다. 두 그루가 한 나무인 양 용트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아주 장관이다. 박씨부인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전설 부분 참조).
아울러 만지송을 들 수 있는데 뒷골 어구에 있는 소나무를 이른다. 소나무 밑에서 가지가 많이 나와 버섯 모양을 이루었으며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된다. 주곡리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쑤 곧 나무를 섬기는 일은 숲을 신의 집 혹은 생명의 뿌리로 생각하는 나무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된다. 따지고 보면 숲속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먹거리이며, 입성이라든가 집의 문제까지도 모두 다 해결되는 곳이다. 그 당시로는 숲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마을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곳으로서 조선시대 영해부 12곡(谷) 가운데의 하나이다. 원이름은 논실마을이다. 약 8백년 전에 마을터가 마련되었다는데 여기서 돌칼.돌창이며 숟가락 등의 유물이 나왔다. 주로 석기 시대의 유물이 나오는 걸로 보아 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논실 뒤에는 시루봉이란 산이 있는데 옛날 하늘 땅이 개벽을 할 때라고 한다. 다른 곳은 다 물에 잠겼는데 유독 이 곳은 봉우리가 실만큼 남았다고 한다.
또 장댓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골짜기의 정기로 말미암아 장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후 중국의 이여송(李如松) 장군이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팔도를 두루 돌아 다니면서 이른바 혈맥을 끊었을 때 장댓골에도 쇠말뚝을 박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논실을 노곡(魯谷)이라고 불렀다(남영호(67) 제보).
조선 시대에 노곡이라 함은 노나라의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儒敎) 지향성이 강하기 때문에 논실과 비슷한 한자이면서도 공자의 나라 노(魯)를 넣어 부르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또 답곡이라는 이름도 논실을 한자로 뒤쳐서 부른 이름이다. 논실은 대구 등의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논실에서 실은 골을 이름이나 '논'의 본질은 무엇일까. 『삼국사기』에서 신라ㆍ고구려 시대의 땅 이름을 보면 땅을 이르는 말로서 노(奴)ㆍ나(奈)ㆍ뇌(惱) 등의 글자들이 쓰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 논도 아이를 낳는다고 할 때의 생산을 뜻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수 있다. 기원적으로 땅은 생산의 어머니요 보금자리이기에 먹거리 마련의 제일이 된다.
논실 마을에서 제일 아래쪽에 있으며 원리동(院里洞)과 이어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마을 터주신이 광산 김씨(光山金氏) 골목이라고 하며 광산 김씨를 위하는 신위목(神位木)과 안(安)씨를 위하는 신위목을 이 마을의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지금도 정월 보름날 저녁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남영호(67) 제보). 전설에 따르면 석기 시대에 이 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다. 돌창ㆍ돌도끼ㆍ돌그릇 등이 마을 앞산에서 발굴되고 마을의 송목과 만지송은 이 마을의 유서 깊음을 드러내고 있다(이현정(62) 1996.10. 제보).
논실 마을의 중간 지점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어서 중논실 혹은 중노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쇠로 만든 철마(鐵馬) 3필(疋)을 성황당의 당신으로 모시고 정월 대보름날에 제사를 지내서 일년 동안 마을의안녕을 빈다(조원기(62) 제보).
하논실에서 약 4킬로 정도 떨어진 마을로서 하논실보다 위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남영호(67) 제보). 옛날에 우 약국ㆍ최 약국이 있었고 양두들ㆍ백가두들이 있다. 그 밖에도 정개골ㆍ매네밭골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씨를 따라서 골의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이현정(62) 제보).
석보면의 중심이 되는 고장이다. 북은 주남동, 남쪽은 요원동, 서쪽은 답곡 마을에 둘러 싸여 있으며 특작물은 담배와 고추ㆍ채소를 들수 있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이다. 1914년에 행정 구역을 다시 고칠 때 점리ㆍ신촌리ㆍ전평리ㆍ답하리의 각 일부를 따다가 합하였는데 신촌(新村)과 건평(乾坪)의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마을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화랑재와 압수골이 있다. 화랑재는 고개의 등성이가 활처럼 굽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압수골은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에 난리를 피하여 이 마을로 들어 와서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의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모습을 하였다 해서 오리 압(鴨)자 압수골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앞에 있는 들이 새로 개척한 들이었지만, 평야가 높고 주위의 내가 낮아서 논에 물을 대기가 몹시 어려웠다 한다. 그래서 마른들 즉 건들ㆍ건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이죽전(50) 제보).
한자로만 보면 마를 건(乾)이나 우리말로 볼 수 있다면 이는 걸다에서 갈라져 나올 가능성이 있다. 물건이 걸려 있으려면 높이 있어야 한다. 들의 자리가 내보다 상당히 높아 물대기의 어려움을 들어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압수골은 김씨 성을 가진 어떤 선비가 약 400년 전에 임진왜란을 피하여 이 곳 깊은 산골짜기에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후에 마을 뒷산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마을터의 형상이 마치 오리가 물 위에 떠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압수골이라 불렀다 한다(김상규(51) 제보). 압록강의 풀이에서도 밝힌 것과 같이 오리 압(鴨)의 오리는 올-위-웃과 같은 걸림으로 보아서 맨 위에 자리한 골짜기란 말이 된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이 마을의 밭둑에 큰 돌배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김상규(51) 제보). 이전곡은 배밭골을 한자로 뒤친 이름이다. 본래 마을의 부름말은 배밭골로 보인다.
신평리 화랑재에서 주남리 남악실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위치한 곳이며 지금은 나무를 심어 산으로 변했으며 신평보다 위쪽에 있다고 하여 웃들이라 불리었다(유연복(68) 제보). 웃들을 한자로 뒤쳐 상평이라고 하였으니 웃들이 본래의 이름으로 보인다.
신평리에서 택전리(宅田里)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위치로 보아서 택전리의 민실보다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석보면 소재지에서 동으로 약6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유연복(68) 재보). 안골을 한자로 뒤쳐서 내곡으로 굳혀 부른다.
이 마을은 화랑재ㆍ안골 그리고 택전리의 민실 등의 세 마을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어서 세거리라고 부른다(유연복(68) 제보). 갈라진 세 갈래의 길이 곧 마을의 이름이 된 것이다.
고개 등성이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 있다고 해서 화랑재라고 고개의 이름을 붙였으며 동시에 이 고개의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유연복(68) 제보). 활처럼 휘어져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고 보면 활-화랑이라 함은 소리나 그 뜻의 이어짐을 중심으로 하여 붙인 마을의 부름말이라고 하겠다.
면 소재지 남쪽으로 5키로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잇다. 옛날에 집을 지을 만큼의 터가 많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담배와 고추의 농사가 잘 된다. 본래 진보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뙈기 밭이 많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땍밭골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화매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택전리라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이 마을에는 옛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오는데 검소바위와 턱걸바위가 그 것이다. 택전의 남쪽에 있는 바위가 검소바위이다. 검소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검소와 함께 바위를 신령한 것으로 섬겼다. 어느 해인가 하루는 여름 낮인데도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천둥과 벼락이 치고 바위가 없어져 버렸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고 믿게 되었으며 신령한 바위하는 뜻으로 검소 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말에 검은 신(神)이니 신령한 바위가 될 수밖에 없다. 한자로는 검소바위를 현암(玄岩)이라고 하는데 검은 것은 신의 빛깔이며 북쪽이요, 거북을 드러낼 때도 있다. 턱걸방우의 사연은 턱걸바위 마을의 내용으로 대신한다.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5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진성현(眞城縣)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석보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돌이 많고 밭이 넓지 못하여 작은 면적의 뙈기밭이 많았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마을 이름도 땍밭골ㆍ땍박골로 불렀으나 석보면에 편입하면서 택전으로 개칭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곳의 전답들이 오랜 옛날에는 모두 못터였다고 해서 택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이다(김병의(62) 제보).
짐작하건대 이 마을이 못터라고 함이 사실이라면 못터 혹은 못밭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택전 혹은 땍밭골로 소리가 바뀌어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소리의 관계로 본다면 못터의 '터'와 택전의 '택'이 같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터-택으로 이어지는바 못터가 중심을 이룬다.
택전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검소라는 큰 소가 있었는데, 그 소 옆에는 검소바우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검소와 함께 이 검소바우도 몹시 신령스럽게 여겨서 소중히 다루었으나, 어느 해 여름에 낮인데도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그 바위가 없어져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신(神)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말했고 이 마을 이름을 그 신령스런 바위에서 따 와서 검소바우라고 불렀다 한다(김병의(62) 제보). 검소에서 검이라 함은 신(神)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검소는 신령할 수밖에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현암(玄岩)의 '현'으로서 뜻으로 보아 현-검의 걸림이 가능하기에 그러하다. 방위로 보면 거의가 북쪽 지향성이 강하다.
오래 전에는 이 마을을 노개나무골이라 불렀다 한다. 조선 명종 때 재령 이씨(載寧李氏)들이 이 곳에 묘를 쓰면서 이 곳을 민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평평한 땅이라고 해서 민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심승락 (62) 제보). 민곡은 민실을 한자로 뒤친 꼴이며 민실은 골짜기의 모습이 평평하다는 뜻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이 마을 주위의 경치가 아름답고 나무가 많아 수려한데, 특히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고 하여 솔두들 즉 소나무 언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심승락(62) 제보). 솔두들을 한자로 뒤치면 송구가 되는데 이런 곳에는 솟대를 세우는 일이 종종 있다.
솔두들 북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논이 적고 밭이 많아서 밭농사로 수수를 많이 재배하여 수구내미라고 한다(심승락(62) 제보). 옥수수를 옥수구로 말하는 고장이 있듯이 수수도 수구로 말하는 지역이 있다. 이로 보아 수수 고장으로 봄은 그럴 듯하다.
솔두들 남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운수내미라는 고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한 피난민이 고개 마루에서 남으로 살러 갈 것이가, 북으로 살러 갈 것인가를 나뭇가지로 던져 점쳐 보았으므르 이 고개 마루를 운수내미로 불렀다 한다(권갑술(60) 제보).
민실 남쪽의 마을로 옛날에는 한때 이 곳에서 아편을 재배했던 적이 있어서, 아편재ㆍ압평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심승락(62) 제보). 그러니까 아편에서 압평으로 바뀌어 굳어진 마을의 이름으로 보인다.
택굴방우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의 지붕들은 볏짚으로 이은 것이 아니라 억새나 갈대 등으로 이은 초막이 많았다고 한다(심승락(62) 제보).
옛날 이 마을 뒷산에 호랑이가 턱을 걸고 죽은 바위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뒷산에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호랑이가 아주 심술궂어서 마을에 내려와 농작물을 마구 망쳐 놓곤 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이 호랑이는 매일 아침 해가 뜰 무렵 밭을 한 바퀴 돌고는 밭 가운데를 이리저리 뛰어 다녀서 농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마을 사람들은 참다 못하여 이름난 포수를 사서 호랑이를 잡기로 했다. 그래서 포수는 해가 뜰무렵에 밭둑에 있는 커다란 밤나무 뒤에 숨어서 호랑이를 기다렸다 잠시 뒤에 호랑이가 나타나 밭을 돌기 시작했는데 포수는 그 때 단 한 발로 호랑이를 쏘아 맞혔으나 총을 맞고 도망친 호랑이의 뒤를 밟아 가도 호랑이를 찾을 수는 없엇다. 몇 날을 헤매던 포수는 며칠 뒤 마을 뒤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호랑이가 턱을 걸고 앞 발을 짚고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쁨에 넘친 포수와 주민들은 이 바위를 턱걸바위ㆍ택굴방우라 하고 마을 이름도 이렇게 불렀다 한다(심승락(62) 제보). 옛말에는 거센소리가 아직까지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므로 턱걸-덕걸로 볼 가능성이 높다. 미루어 보건대 덕거리 바위가 줄어 들어 덕걸바위로, 덕걸바위가 다시 턱걸바위로 된게 아닌가 한다.
석보면 소재지에서 약4킬로쯤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탓으로 주위에서 흐르는 물들이 이 곳에서 합하여 흐른다. 해서 이 내를 화매천(花梅川)이라고 하며 이로 인하여 붙여진 마을의 이름이다. 소계천(小溪川)에 진귀한 돌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주워 갔다고 한다. 30여년 전에는 붉은 빛의 소나무가 울창하여 아주 좋은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진보군 동명의 지역으로서 여러 냇물이 흘러 들어 한 때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로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처매(處梅)가 화매(花梅)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석보면에 들게 된다.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 매화 매(梅)는 상당 부분이 물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가량 매일이 감내와 걸림을 보이는 경우를 보기로 들 수 있으며 한자는 다르지만 수원-매홀에서 매(梅,買)는 물이란 뜻으로 쓰인 경우가 왕왕 있다(『삼국사기』 참고).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용소(龍沼)와 느티나무, 그리고 절골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홀뭇골 동쪽에 있는 소가 용소인데 위는 절벽이고 그 아래로는 두 길이나 넘는 바위가 있다. 이 곳에 김수영 선생이 정자를 세웠다. 용소는 흔히 용못이라고 한다. 느티나무는 꽃매 마을 어구에 있는 두 아름 정도의 큰 나무인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 해마다 정월 열나흘 밤이면 제사를 모신다. 절골은 사동(寺洞)으로 뒤쳐 쓰기도 하는데 뱀과 걸림을 보이는 땅 이름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 사연은 절골 마을의 이야기로 가름한다. 한자의 소리로 볼 때, 뱀 사(蛇)자나 절 사(寺)자나 같은 소리로서 겹치기 효과를 드러낸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석보에서 남동쪽으로 4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진성현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석보면으로 편입되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 때문에 주위의 계곡에서 흘러내려 온 산골 물들이 이 곳에서 합류하여 화매천(花梅川)을 이루어서 흘러간다. 이 물이 흘러서 주위의 황무지를 적셔 준다. 황무지 위에 여러 가지 풀꽃들만 무성하여서 꽃매ㆍ곳매ㆍ골매 또는 화매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마을이 생길 때에는 이 마을에 최(崔)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현재는 일백 집 정도의 크기가 되는 마을이며 여러 성씨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황일암(71) 제보).
화매는 꽃매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으로 보인다. 꽃매는 옛말로 곶매이니 곶은 툭 튀어 나온 모양을 한 지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매는 물이니 물이 돌아 드는 곳을 일러 곶매로 한게 아닌가 한다.
화매에서 서쪽으로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열두어 집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 주위의 산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한 쪽 산은 청룡, 다른쪽 산은 백호의 형을 이루고 있어 이 두 산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마을 사람들이 자주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풍수가 이것을 보고 골짜기의 이름을 관곡(寬谷)이라고 이름 붙인 뒤에는 서로 싸움도 멈추고 너그럽고 친절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이 골짜기가 구불구불하게 어그러져 있어서 어그랫골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김춘웅(70) 제보). 얼굴의 구멍새가 널쩍한 모양을 일러서 어글어글하다고 한다. 여기 어그랫골은 바로 어글어글 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산골짜기의 모양이 널쩍하게 생긴 것을 이른 경우다. 어글어글이란 말은 서글서글에서 비롯한 것이다. 관곡은 어그랫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 사기그릇을 구웠던 곳이라고 전한다. 흙의 질이 매우 좋다고 하며 타지의 도공들이 자주 와 흙을 파 간다고 한다. 평지 마을에서 동쪽으로 2킬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열 집 정도가 농사를 짓고 있다(김순원(68) 제보).
옛날에는 이 마을 뒷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절에 있던 탑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커다란 뱀 두 마리가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뱀은 스님을 보자 스님에게 자기들의 탑을 하나 쌓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절에 돌아 와서 열심히 탑을 쌓아 보름만에 완성하였다. 스님이 탑의 마지막 돌을 올릴 때 뱀이 나타나서 "이 탑은 우리들과 스님의 혼령이 담긴 탑이니 잘 보살펴 주십시오."하고는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이 세상을 뜨자, 탑과 절이 점점 파손되고 지금은 절과 탑의 터만이 남아 있다(박성락(70) 제보). 사동(寺洞)은 절골을 한자로 뒤쳐 쓴 이름이다.
어그랫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관곡에서 나오는 하천 어귀 위쪽에 위치한 훌무골과 화매를 합쳐 옷몰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에 위치한 절골ㆍ평지마ㆍ사기점을 합쳐 아랫몰이라 부르고 있다(김성규(62) 제보).
어그랫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그랫골을 사이에 두고 위쪽에 있는 마을은 웃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몰이라 한다(신근환(62) 제보).
처음의 이름은 본 마을과 같이 꽃매라고 불렀지만,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돌은 적고 흙으로만 되어 있는 골짜기란 까닭으로 흘무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옛날 이 못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 가면서 꼬리로 옆에 있는 바위에 현(玄)자를 쓰고 올라 갔다고 하여 현무골(玄武一)이라고 하기도 했다(박춘엽(50) 제보). 흙을 이 지역에서는 '흘'이라고 하는 바 흙이 많이 모여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풀이할수 있다. '뭇'은 많다 혹은 모여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니 흙살이 좋은 마을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토곡은 흘뭇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림이다. 현무는 거북이를 가리킨다. 거북이는 물신을 섬기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용도 따지고 보면 물신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신(神)의 우리말은 '검'(『新字典』)이니 검은 현(玄)의 검 또한 물신을 떠 올림에 족하다고 하겠다.
이 곳 역시 옛날 이름은 화마(花馬)라고 했는데, 이 고장에 가뭄이 심하여 논에 물을 대기가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보를 만들고 보의 물이 잘 흘러 들어 가도록 벌판을 깍아 내려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 이름도 평평한 마을, 즉 평지마라고 고쳐 불렀다 한다(김의웅(51) 제보). 화마(花馬)를 본래 우리말로 보고 풀이를 하면 '곶마'이니 '곶'은 두드러져 튀어 나온 곳을 이름이요, '마'는 마을이라 함을 고려하면 화마는 결국 두드러져 다소 높은 마을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자의 적기로 볼 때 꽃 화(花)는 글자의 뜻을 따온 것이며, 마(馬)는 한자의 소리를 따 온 것으로 풀이된다.
석보면 소재지에서 약4킬로쯤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탓으로 주위에서 흐르는 물들이 이 곳에서 합하여 흐른다. 해서 이 내를 화매천(花梅川)이라고 하며 이로 인하여 붙여진 마을의 이름이다. 소계천(小溪川)에 진귀한 돌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주워 갔다고 한다. 30여년 전에는 붉은 빛의 소나무가 울창하여 아주 좋은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진보군 동명의 지역으로서 여러 냇물이 흘러 들어 한 때 잡초만 우거진 황무지로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처매(處梅)가 화매(花梅)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석보면에 들게 된다. 땅 이름의 분포로 보아 매화 매(梅)는 상당 부분이 물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다. 가량 매일이 감내와 걸림을 보이는 경우를 보기로 들 수 있으며 한자는 다르지만 수원-매홀에서 매(梅,買)는 물이란 뜻으로 쓰인 경우가 왕왕 있다(『삼국사기』 참고).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용소(龍沼)와 느티나무, 그리고 절골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홀뭇골 동쪽에 있는 소가 용소인데 위는 절벽이고 그 아래로는 두 길이나 넘는 바위가 있다. 이 곳에 김수영 선생이 정자를 세웠다. 용소는 흔히 용못이라고 한다. 느티나무는 꽃매 마을 어구에 있는 두 아름 정도의 큰 나무인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다. 해마다 정월 열나흘 밤이면 제사를 모신다. 절골은 사동(寺洞)으로 뒤쳐 쓰기도 하는데 뱀과 걸림을 보이는 땅 이름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그 사연은 절골 마을의 이야기로 가름한다. 한자의 소리로 볼 때, 뱀 사(蛇)자나 절 사(寺)자나 같은 소리로서 겹치기 효과를 드러낸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석보에서 남동쪽으로 4킬로 떨어진 곳에 있으며 원래는 진성현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석보면으로 편입되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 때문에 주위의 계곡에서 흘러내려 온 산골 물들이 이 곳에서 합류하여 화매천(花梅川)을 이루어서 흘러간다. 이 물이 흘러서 주위의 황무지를 적셔 준다. 황무지 위에 여러 가지 풀꽃들만 무성하여서 꽃매ㆍ곳매ㆍ골매 또는 화매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마을이 생길 때에는 이 마을에 최(崔)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현재는 일백 집 정도의 크기가 되는 마을이며 여러 성씨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황일암(71) 제보). 화매는 꽃매를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름으로 보인다. 꽃매는 옛말로 곶매이니 곶은 툭 튀어 나온 모양을 한 지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매는 물이니 물이 돌아 드는 곳을 일러 곶매로 한게 아닌가 한다.
화매에서 서쪽으로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열두어 집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이 위치한 골짜기 주위의 산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한 쪽 산은 청룡, 다른쪽 산은 백호의 형을 이루고 있어 이 두 산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마을 사람들이 자주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풍수가 이것을 보고 골짜기의 이름을 관곡(寬谷)이라고 이름 붙인 뒤에는 서로 싸움도 멈추고 너그럽고 친절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이 골짜기가 구불구불하게 어그러져 있어서 어그랫골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김춘웅(70) 제보). 얼굴의 구멍새가 널쩍한 모양을 일러서 어글어글하다고 한다. 여기 어그랫골은 바로 어글어글 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산골짜기의 모양이 널쩍하게 생긴 것을 이른 경우다. 어글어글이란 말은 서글서글에서 비롯한 것이다. 관곡은 어그랫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 사기그릇을 구웠던 곳이라고 전한다. 흙의 질이 매우 좋다고 하며 타지의 도공들이 자주 와 흙을 파 간다고 한다. 평지 마을에서 동쪽으로 2킬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열 집 정도가 농사를 짓고 있다(김순원(68) 제보).
옛날에는 이 마을 뒷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절에 있던 탑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이 탑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커다란 뱀 두 마리가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뱀은 스님을 보자 스님에게 자기들의 탑을 하나 쌓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절에 돌아 와서 열심히 탑을 쌓아 보름만에 완성하였다. 스님이 탑의 마지막 돌을 올릴 때 뱀이 나타나서 "이 탑은 우리들과 스님의 혼령이 담긴 탑이니 잘 보살펴 주십시오."하고는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이 세상을 뜨자, 탑과 절이 점점 파손되고 지금은 절과 탑의 터만이 남아 있다(박성락(70) 제보). 사동(寺洞)은 절골을 한자로 뒤쳐 쓴 이름이다.
어그랫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관곡에서 나오는 하천 어귀 위쪽에 위치한 훌무골과 화매를 합쳐 옷몰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에 위치한 절골ㆍ평지마ㆍ사기점을 합쳐 아랫몰이라 부르고 있다(김성규(62) 제보).
어그랫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그랫골을 사이에 두고 위쪽에 있는 마을은 웃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몰이라 한다(신근환(62) 제보).
처음의 이름은 본 마을과 같이 꽃매라고 불렀지만,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돌은 적고 흙으로만 되어 있는 골짜기란 까닭으로 흘무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옛날 이 못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 가면서 꼬리로 옆에 있는 바위에 현(玄)자를 쓰고 올라 갔다고 하여 현무골(玄武一)이라고 하기도 했다(박춘엽(50) 제보). 흙을 이 지역에서는 '흘'이라고 하는 바 흙이 많이 모여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풀이할수 있다. '뭇'은 많다 혹은 모여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니 흙살이 좋은 마을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토곡은 흘뭇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림이다. 현무는 거북이를 가리킨다. 거북이는 물신을 섬기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용도 따지고 보면 물신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신(神)의 우리말은 '검'(『新字典』)이니 검은 현(玄)의 검 또한 물신을 떠 올림에 족하다고 하겠다.
이 곳 역시 옛날 이름은 화마(花馬)라고 했는데, 이 고장에 가뭄이 심하여 논에 물을 대기가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보를 만들고 보의 물이 잘 흘러 들어 가도록 벌판을 깍아 내려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 이름도 평평한 마을, 즉 평지마라고 고쳐 불렀다 한다(김의웅(51) 제보). 화마(花馬)를 본래 우리말로 보고 풀이를 하면 '곶마'이니 '곶'은 두드러져 튀어 나온 곳을 이름이요, '마'는 마을이라 함을 고려하면 화마는 결국 두드러져 다소 높은 마을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자의 적기로 볼 때 꽃 화(花)는 글자의 뜻을 따온 것이며, 마(馬)는 한자의 소리를 따 온 것으로 풀이된다.
마을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을 때에 산에는 산머루- 이지역 말로는 구머리라 하는데 산머루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논과 밭이 있기는 하나 물을 댈 수 가 없기 때문에 논농사가 짓기가 어려웠다. 본래는 진보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 화매동(花梅洞)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포산리라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이 마을에는 원님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마디로 하여 이 마을에 옛적 원님이 앉았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사연은 원터 마을에서 풀이한 이야기로 가름한다.
1914년의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진성현에서 석보면으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 곳은 산골짜기 깊은 곳에 개척한 마을로서 주위의 산에 구머리(머루)가 매우 흔해서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조현만(62) 제보). 머루산을 한자로 뒤쳐서 포산으로 한 것이다. 구머리는 머루에 대한 이 고장의 말이다.
복골은 화전민이 개척한 마을로 논밭을 일구어 농토를 마련할 때 논을 만들기는 했으나 워낙 산간 지방이어서 논에 물을 댈 만한 저수지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보를 많이 만들어서 논에 물을 대었다. 이로 인해서 봇골ㆍ복골로 불리우고 있다(조현만(62) 제보). 장구매기 북쪽에 있다. 물을 가두어 논밭에 대기 위하여 만든 간이 못을 이르러 보(洑)라한다. 보가 있는 골짜기가 바뀌어 봇골 혹은 복골이 되었으니 결국 소리가 닮아서 그리 굳어져 쓰인 것이다.
포산동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는 마을로 조선조에는 이 곳에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 곳이 원터라 하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이 근처 고을의 원님이, 부인이 있는 영해의 속실로 가는 도중에 앞이 훤히 트인 이 곳에 앉아서 잠시 다리를 쉬고 있었다. 그 때 고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서 온 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원님은 이 곳에 앉아 들을 바라보면서 가뭄을 걱정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결에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나서 "어르신네 내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몇 달 전의 큰 비로 원님이 앉아 계신 뒷산에 산 사태가 났는데, 그 때 내 뼈들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묻혔습니다. 흩어진 내 뼈를 찾아 한 곳에 묻어 주시면 비를 내려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원님은 여우가 가리킨 곳에서 그 뼈를 찾아 거두어 양지 바른 곳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 그 후에 가뭄은 걷히고 비가 내려서 풍년이 들게 되자 주민들은 원님이 앉아 있던 곳을 원터라고 불렀다 한다(신현부(51) 제보). 여기 원터는 광제원(廣濟院)을 가리킨다.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려고 세운 것인 만큼 병 치료뿐만 아니라 가뭄을 함께 걱정한 계기가 되었으니 사람들로서는 기억할 만한 장소가 된 것이다.
구머리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을 작은 구머리라고 하는데, 이 마을은 지형이 장구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구매기라고도 부른다(우상술(66) 제보). 구머리의 구머-구매는 소리의 비슷함으로 생겨난 마을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어그랫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관곡에서 나오는 하천 어귀 위쪽에 위치한 훌무골과 화매를 합쳐 옷몰이라고 하고, 그 아래쪽에 위치한 절골ㆍ평지마ㆍ사기점을 합쳐 아랫몰이라 부르고 있다(김성규(62) 제보).
어그랫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그랫골을 사이에 두고 위쪽에 있는 마을은 웃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몰이라 한다(신근환(62) 제보).
처음의 이름은 본 마을과 같이 꽃매라고 불렀지만,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돌은 적고 흙으로만 되어 있는 골짜기란 까닭으로 흘무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옛날 이 못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 가면서 꼬리로 옆에 있는 바위에 현(玄)자를 쓰고 올라 갔다고 하여 현무골(玄武一)이라고 하기도 했다(박춘엽(50) 제보).
흙을 이 지역에서는 '흘'이라고 하는 바 흙이 많이 모여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풀이할수 있다. '뭇'은 많다 혹은 모여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니 흙살이 좋은 마을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토곡은 흘뭇골을 한자로 뒤쳐서 적은 이림이다. 현무는 거북이를 가리킨다. 거북이는 물신을 섬기는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용도 따지고 보면 물신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신(神)의 우리말은 '검'(『新字典』)이니 검은 현(玄)의 검 또한 물신을 떠 올림에 족하다고 하겠다.
이 곳 역시 옛날 이름은 화마(花馬)라고 했는데, 이 고장에 가뭄이 심하여 논에 물을 대기가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보를 만들고 보의 물이 잘 흘러 들어 가도록 벌판을 깍아 내려 평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마을 이름도 평평한 마을, 즉 평지마라고 고쳐 불렀다 한다(김의웅(51) 제보). 화마(花馬)를 본래 우리말로 보고 풀이를 하면 '곶마'이니 '곶'은 두드러져 튀어 나온 곳을 이름이요, '마'는 마을이라 함을 고려하면 화마는 결국 두드러져 다소 높은 마을이라는 지형적인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한자의 적기로 볼 때 꽃 화(花)는 글자의 뜻을 따온 것이며, 마(馬)는 한자의 소리를 따 온 것으로 풀이된다.
영덕군 창수면 지품면을 경계로 하여 높은 산이 가로 막혀 바다 바람이 불어 오다가 삼의산과 노루산에 걸려서 영양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활엽수가 많으나 강한 바람 때문에 우산과 같이 위가 벌어져서 자라는 관목의 모양을 한 나무가 많다. 산하곡(山下谷) 혹은 삼의곡은 본래 진보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높은 산 밑이 되기 때문에 산밑골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화매동의 일부와 석보면이 요원동 일부를 합하여 삼의골이라고 불렀으며 석보면에 들게 된다. 그러니까 산밑골이란 소리를 바꾸어 한자로 뒤쳤을 때 삼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옛부터 나무 바가지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0년대부터는 고지의 바가지보다는 소나무 바가지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농가에서 널리 애용하였다. 이르자면 소여물 바가지 등은 눈에 잘 띄는 그릇들이다. 아울러 이 마을에는 농짝 두 개를 포개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이름이 생긴 농바위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주령(株嶺)의 상징으로 보호하고 있다.
본래는 산밑골로 불렀으나 뒤에 한자로 써서 삼의골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마을 이름이 바뀐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옛날 이 곳에는 아주 잘 사는 김 부자가 있었다. 4대 독자였는데 참한 규수를 맞아 들여서 이어 아들 삼형제를 얻었다. 김 주자는 너무나도 기뻐서 그의 아들을 의남(宜男)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아들 세 형제를 모두 귀하게 여겨서 삼의라 불렀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후 각자는 살림을 났는데 맏이를 상삼의(上三宜), 가운데를 중삼의(中三宜), 막내를 하삼의(下三宜)라 하였으니 이들이 사는 마을을 통틀어서 삼의라 불렀다는 것이다(정창수(64) 제보).
삼의골의 가장 위쪽, 산 위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이동우(64) 제보). 마을 서쪽에 있는 산이 칠성봉인데 말처럼 그대로 일곱 봉우리로 되어 있다.
상삼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의 중간쯤에 마을이 펼처져 있다(김종수(60) 제보).
삼의골 제일 아래쪽에 있어서 하삼의라 한다. 이 곳은 주민들이 옛부터 나무 바가지를 많이 다듬어서 팔았다고 하여서 바가지점 즉 박점이라고도 불렀다 한다(신수산(61) 제보). 옥계동의 바드덤과 바로 이어지는 이름으로 보이는 바, 모두가 나무 바가지를 만들어 팔았던 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잣골 골짜기에 자리잡았으며, 마을 뒷산이 맹동산이다. 맹동산은 주위의 다른 산보다 높고 특히 바람이 세어서 나무들은 잘 자라지 못하고 풀들만 자란다고 하여 맹동산(민둥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산 아랫마을 역시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최상문(51) 제보). 그러니까 민둥-맨둥으로 소리가 바뀌었다가 마침내 맹동산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 마을에는 농바위가 널리 알려져 있다. 농바위는 마치 농을 포개 놓은 것같이 두 개의 바위가 겹쳐 있다. 예부터 석보에서는 큰 산 주령(珠嶺)의 상징으로 잘 보호하여 온 바위이다.
벙이골 위에 있는 마을이다. 벙이골은 금박골 남쪽에 있는 골짝기인데 벙이(부엉이)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영해에서 넘어 오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였으며 고추ㆍ담배 농사가 잘 되어 농가의 소득이 비교적으로 좋은 편이다. 영해의 고기 장수들이 요원의 큰재를 넘어서 농산물과 해산물을 바꾸려고 찾아 들던 곳이다. 본래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왕조 때 길 가던 이들을 돕던 집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남곡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허리 요(腰)자를 썼는데 허리는 가운데를 뜻하는 말로서 서리-허리의 걸림을 찾을 수 있으며 서리는 설-사이라는 대응을 찾을 수 있다.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라고 풀이함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새텃골과 배남정이다. 새텃골은 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흙빛이 붉고 굴곡이 많다. 주남초등학교 요원분교가 있다가 없어졌다. 아울러 배남정은 이 마을의 어구에 있는 마을인데 옛적에 이 마을에는 배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오래 된 배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는데,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이 나무에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요원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행인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시설이 있었다. 이 원(院)에서 고을의 원(員)이 정사를 살피려고 고을을 지나는 길에 잠시 허리를 쉬다 간 곳이라 하여 이 곳을 요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손영식(58) 제보).
석보에서 영해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있는 마을로, 이 고개 마루에는 일 년 내내 항상 바람이 세게 불어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가버려서 고개 마루가 흡사 불탄 뒷자리 같이 붉다고 해서 붉은데기라 부른다. 또 이 마을 뒷산에 범굴 같은 긴 굴들이 많이 있어서 굴펀지라고도 부른다(정윤능(55) 제보). 바람이 많으니 자연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다. 숲이 없으매 민둥산이 될 수도 있거니와 흙살 자체가 화산흙인 관계로 붉은 색깔이어서 그리 부른 것으로 보인다.
요원리 전체로 보아서 중앙이 되는 곳에 위치한 곳이며 이 곳에서 뒷두들과 새텃골로 갈라지는 길목이 되는데 이 길목에는 항상 바람이 심하게 불어 오므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최봉진(74) 제보).
바람내기의 뒤쪽 언덕받이에 있는 마을이어서 뒷두들이라고 한다(이종만(59) 제보).
바람내기 마을의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인데 숲이 울창하였으나 벌채하여 아주 좋은 개간지가 되었다. 개울에서는 맑은 물이 끊임 없이 흘러 내려 농사짓기에 좋고 마을이 새로 생겼으나 인심이 후하다(이종만(59) 제보). 신기는 새터를 한자로 뒤쳐서 이른 부름말이다.
옛날 영해에서 요원으로 넘어오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두 개의 고개가 있었는데, 큰 고개가 울팃재이고 그 다음 고개가 바로 이 작은 재이다. 울팃재는 산이 험하고 짐승과 도둑의 출몰이 심하여 행인들이 울며 넘는 고개인 데 비하여, 이 작은재는 길이 순하고 인가가 있어서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재 아래 쪽에 있는 마을 역시 작은재이다(최봉진(74) 제보). 소령은 작은재를 한자로 뒤쳐서 이른 부름말이다.
홍두들의 뒤쪽에 있는 마을인데 장(張)씨들이 개척한 마을이어서 장가의 터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으나, 장씨들은 그 뒤 한 두 집씩 모두 떠나고 지금은 다른 설씨(薛氏)들이 살고 있다(최봉진(74) 제보).
새텃골에서 칠성봉으로 올라가는 긴 등성이 위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리어카가 다닐 만큼의 길이 있는 윗 둔덕에 위치 하였으므로 질등이 되었다. 고추ㆍ담배를 많이 경작한다(장호장(59) 제보). 길과 걸림이 있는 말이라면 길-질이 된 것이니 '길'의 소리가 약해지면 질이 되기에 그리 풀이할 수 있다.
이 마을 뒤쪽에 봉우리가 일곱 개 있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칠성봉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칠성봉의 정기를 받아서 수명이 길고 인심이 순후하다고 하는데, 뒷산의 이름을 받아서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장호장(59) 제보). 칠성신앙은 민간 신앙 가운데에서 아주 뿌리 깊은 신앙 형태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 바로 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점도 치고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르자면 일월산(日月山)의 일월도 가장 큰 별 이상의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칠성신앙은 더욱 뜻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원리 입구 마을인 배남정 북쪽 뒷 언덕에 새로 만들어진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흥구들이다.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염소를 많이 먹일 정도로 좋은 풀이 있으며 농가 소득이 높아서 살림이 윤택하다(최봉진(74) 제보).
요원리의 제일 첫 어귀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배나무쟁이라 불렀다. 지금도 오래된 아주 큰 배나무 한 그루가 동네에 남아 있는데, 해마다 정월에 동민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최봉진(74) 제보). 여기 배나무는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걸로 보아 동신목(洞神木)이다. 일종의 숲을 생명의 고향으로 하는 신화의 뿌리와도 같은 보기이다. 숲은 실용성으로 보아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집거리 모두를 만들어 주는 공간이기에 그러하다.
석보에서 가장 놓은 산이 솟아 있으며, 북쪽으로 약 1.3킬로쯤에 있는 마을이다. 새마을 사업을 하는 바람에 마을 길이 넓어졌고 협동이 잘 되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서 두 내가 합하여 홈이 나 있으므로 하여 홈거랑ㆍ홈거리ㆍ흥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양구동과 다외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홍계리로 하여 석보면에 들게 했다.
석보면에서 가장 높은 주산(主山,681m)이 있으며 산의 맑고 깨끗한 경관은 가히 일품이다. 못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긴 홈을 이용하여 수로(水路)로 삼았음은 다른 마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못을 낀 논배미가 많이 있다. 일찍부터 수리시설에 대한 유비무환의 대비가 철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홍계 주위를 흘러오는 두 줄기의 물이 있다. 하나는 다외쪽에서, 또 하나는 주산동 못배미쪽에서 흘러 내리다가 합쳐져서 긴 홈을 이루는데 이 홈을 이용하여 논에 물을 대는 수로로 썼다 한다. 이 홈이 있다고 하여 홈거랑 거리라 부르다가 홍계라고 불리게 되었다(최익휴(52) 제보). 홍계는 홈거랑을 한자로 뒤쳐서 이르는 부름말이다. 내를 거랑이라 하는데 중세어로는 가람에 걸림을 둘 수 있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동래 정씨들이 이 곳에 피난해 와서 개척하여 정착한 마을인데, 당시 이 곳 산에 다래가 많아서 다우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초에 마을을 개척했던 정(鄭)씨들은 그 뒤 한두 집씩 다 떠나고 그 후손들은 남아 있지 않다(남종수(50) 제보). 다우와 다래의 소리가 비슷하다고 하여 이런 풀이를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달외-다외에서 달의 끝소리가 떨어진 셈이 된다.
다외마을 중 위쪽에 있기 때문에 웃다외이며 홈거리에서 북동쪽으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田)씨들이 많이 살며, 새마을 사업을 잘 하여 마을 길이 많이 넓어졌으며, 협동이 잘 되는 마을이다(남종수(50) 제보).
다외 마을 중 아래쪽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햇볕이 잘 들고 양지바른 마을이어서 양지마라고 한다(김대근(57) 제보).
홈거리의 한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 못을 낀 논배미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못배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이성태(52) 제보). 본래 못이란 여러 갈래의 물이 모여 드는 곳을 이른다. 못에 물이 넉넉하면 농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못배미골 남쪽에 삼밭골이라고 하는 산삼이 많이 나는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 북쪽에 있는 마을이 바로 주산골인데 이 마을에는 석보면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681미터의 주산(主山)이 있으며 주산의 수려한 정기를 받아서 공기가 맑고 바람이 시원하며 물이 맑고 깨끗하기가 그지 없다고 한다(최제숙(50) 제보).
주산 바로 앞 산 중허리에 수만 평이나 되는 산림이 울창한 평원이 있었는데 이 곳을 벌채하고 나니 아주 좋은 개간지가 되었다. 이웃 마을의 사람들이 옮겨 와서 이 곳에 정착해서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여 한두 집씩 모여 들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정지터라고 했다(김덕년(45) 제보). 본래 정리라 함은 이바지 먹거리를 만드는 곳이다. 미루어 보건대 농토를 일구던 시절 한곳에다 먹거리 만드는 곳을 삼아서 일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새텃골에서 칠성봉으로 올라가는 긴 등성이 위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리어카가 다닐 만큼의 길이 있는 윗 둔덕에 위치 하였으므로 질등이 되었다. 고추ㆍ담배를 많이 경작한다(장호장(59) 제보). 길과 걸림이 있는 말이라면 길-질이 된 것이니 '길'의 소리가 약해지면 질이 되기에 그리 풀이할 수 있다.
이 마을 뒤쪽에 봉우리가 일곱 개 있는 산이 있는데 그 산이 칠성봉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칠성봉의 정기를 받아서 수명이 길고 인심이 순후하다고 하는데, 뒷산의 이름을 받아서 마을의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장호장(59) 제보).
칠성신앙은 민간 신앙 가운데에서 아주 뿌리 깊은 신앙 형태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 바로 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걸로 알고 점도 치고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이르자면 일월산(日月山)의 일월도 가장 큰 별 이상의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칠성신앙은 더욱 뜻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원리 입구 마을인 배남정 북쪽 뒷 언덕에 새로 만들어진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흥구들이다. 약초를 많이 재배하고 염소를 많이 먹일 정도로 좋은 풀이 있으며 농가 소득이 높아서 살림이 윤택하다(최봉진(74) 제보).
요원리의 제일 첫 어귀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는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배나무쟁이라 불렀다. 지금도 오래된 아주 큰 배나무 한 그루가 동네에 남아 있는데, 해마다 정월에 동민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최봉진(74) 제보). 여기 배나무는 동네 사람들이 섬기는 걸로 보아 동신목(洞神木)이다. 일종의 숲을 생명의 고향으로 하는 신화의 뿌리와도 같은 보기이다. 숲은 실용성으로 보아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집거리 모두를 만들어 주는 공간이기에 그러하다.
주남의 삼거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주남초등학교가 이 곳에 있다. 전형적인 산촌 마을로서 담배와 고추가 주로 재배된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주사동ㆍ남곡동ㆍ인지동ㆍ원리동ㆍ다인동의 각 일부를 따다가 합하여 주남동이 된다. 주사(做士)와 남곡(南谷)의 글자를 따서 만든 부름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선생이 공부하던 정자와 주사곡의 쑤와 흰방구를 들 수 있다. 정자는 남악실과 양지촌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사곡의 쑤는 주사곡 아래쪽에 있다. 큰 느티나무 무시나무 소나무 등으로 숲을 이루었는데 마을에서 서낭당으로 모셔서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제사를 모신다. 흰 바위는 삼거리 위에 있는데 넓이다 약1정보 가량이나 된다.
주남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조선 숙종 때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종제인 주곡 이도(李櫂)와 주계 이용(李榕) 선생이 영해로부터 이 곳으로 입향하여서 마을을 개척했는데 이 두 선비의 호에서 이름을 따서 주사동ㆍ주삿골이라 불렀다(이수희(67) 제보).
주삿골에 남종쪽 가래골 못 미친 곳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1948년 무렵부터 새로이 한두집씩 집을 짓고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새마ㆍ새모치라 한다(이상희(60) 제보). 신촌은 새마를 한자로 뒤쳐 적은 형태이다.
주삿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었서 가래골ㆍ가라골이라 했으며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가 따스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라서 가곡이라고도 했다(이성희(60) 제보). 추곡(楸谷)은 가래골을 한자로 뒤쳐 적은 형으로서 널리 분포를 보인다. 물론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인 이름일 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땅 이름의 다른 보기를 통하여 볼 때 냇물이나 아니면 마을이 갈라지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불리워진 것이 아닌가 한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이 세운 정자인 남악정(南嶽亭)이 있던 마을이어서 남악실ㆍ나막실이라 부르며, 또 한편으로는 마을의 위치가 따뜻한 곳이라 하여 남곡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이규형(72) 제보). 글자대로라면 남악에서 마을 이름의 뿌리를 캐어 볼 수도 있겠으나 나막을 보아서는 다른 풀이를 할 수도 있다. 나막은 나무를 이르는 말로서 나무골 그러니까 숲이 우거진 골 혹은 남쪽에 있는 골짜기란 뜻을 중심으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