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인과적 병치가 관건이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잠재형 복합치환은유에는 이런 결과를 가져올 두 가지 요인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원관념을 잠재시키는 문제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잠재시킬 경우가 훨씬 더 독자의 사고활동을 조장하여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될 것같이 생각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창조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할 때, 원관념을 잠재시키면 그를 추론해내기 위해 보조관념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신경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원관념을 잠재쳔객?것은 좀 더 검토해봐야 할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열한 보조관념끼리 유사성 문제입니다. 유사성이 있는 것을 골라 조직하는 것은 그들끼리 결합하여 화자가 의도하는 풍경을 떠올리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지만, 추론 과정에서 언어가 일상적인 것으로 끌고 가려는 힘 때문에 오히려 일상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인과적이고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을 나열하는 방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휠라이트(P. Wheelright)는 이와 같이 원관념을 숨긴 보조관념들을 비인과적으로 전시하는 어법을 <병치은유>라고 합니다. 좀 더 확실하게 병치은유의 구조가 드러나도록 이제까지 논의한 어법들과 대조하여 그려볼까요?
현시형 단순치환은유 잠재형 복합치환은유 병치은유
(원문자 : 의미가 잠재되어 있는 경우, □ 문자 : 의미를 형성할 수 없는 경우)
위 그림에서 원문자는 의미가 잠재된 경우를, 네모 문자는 뭔가 의미하는 게 있지만 짐작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원관념(T) 자리를 점선으로 그린 것은 잠재된 경우를, 보조관념(V)의 자리를 점선으로 그린 것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어 하나로 수렴되는 경우를, 실선으로 그린 것은 이질적이라서 수렴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와 같은 병치은유와 잠재형 복합치환은유의 차이는 보조관념들끼리 유사성을 지니는가 이질적인가 하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엄청난 차이로 이어집니다. 유사 관계를 지닐 때는 전체가 하나로 묶이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가 <1 : 1>로 바뀌고, 전체 의미를 확정지을 수 있지만, 이질적일 때는 하나로 수렴이 되지 않아 보조관념들이 암시하는 풍경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없고, 독자들이 의미 있는 그 무엇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보조관념으로 제시한 사물들의 의미와 감각이 뒤섞이어 새로운 사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치은유는 병치한 자질들의 성격에 따라 <에피소드 병치>, <이미지 병치>, <리듬 병치>, <어휘 병치(語彙竝置)>, <음운 병치(音韻竝置)>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휘 병치>와 <음운 병치>는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이들만으로는 의미를 형성할 수 없어 실제 창작에는 이용하기 어려운 유형입니다.
그럼 이 가운데 어떤 유형이 유리한 지 6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이 어법으로 [처용단장(處容斷章)]이라는 연작시를 써온 김춘수(金春洙) 시인의 작품을 통해 알아보기로 할까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밤에 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젖어 있다./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눈물]에서
ⓑ태초/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는/발이 없다./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바쿠닌은 입이 크고/크로포트킨은 수염이 아름답다. 가을에는/모과빛이 난다./시베리아 오지에는 일년 내내/눈이 오고/예예족(芮芮族)의 마을은 너무 멀다./죽은 늑대의 목뼈가/부러져 있다./모든 것 다 잊으라고 눈이/쉬지 않고 온다.
- [처용단장] 제3부 31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 [처용단장] 제2부 5
ⓐ는 <남자와 여자의 젖은 아랫도리>, <오갈피나무의 젖은 아랫도리>,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이라는 비인과적인 이미지를 병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바쿠닌과 크로포트킨>, <시베리아 오지와 예예족 마을>, <목뼈가 부러져 죽은 늑대>, <모든 것을 다 잊으라고 내리는 눈>이라는 에피소드를 병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는 좀 다릅니다. "불러 다오"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을 규칙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 어떤 의미나 이미지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리듬이 두드러집니다. 따라서, ⓐ는 <이미지 병치>, ⓑ는 <에피소드 병치>로, <리듬병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와 ⓒ는 그리 적합하지 않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는 너무 의미중심이고, ⓒ는 무의미한 리듬만 제시할 뿐, 창조적인 풍경도 관념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만족스런 유형은 못 됩니다. 완벽한 창조라면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면서도 새로운 풍경이 되어야 할텐데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만들어낸 풍경이 너무 정적(靜的)이며, 이미지를 연결한 부위가 로봇의 움직임이나 쪼가리 그림의 연결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니, 병치은유 유형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고, 독자가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인가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형은 독자가 마음대로 재구(再構)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이라서, 시인은 자기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독자는 자기가 찾아낸 의미를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비인과적인 비유를 자주 채택하는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시의 독자가 산문 쪽으로 옮겨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춘수가 이 기법을 실험한 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회의하고, 자기 작품에서 의미를 추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시를 "무의미시(無意味詩)"라고 명명한 것으로 미뤄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 시론에 따라 실험한 게 아닙니다. 휠라이트가 {은유와 실재(Metaphor and Realty)}를 통해 병치은유 이론을 발표한 것이 1962년이고, 김춘수가 이 어법으로 쓴 [눈물]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9년이므로, 그 스스로 발견해낸 어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하는 시 쓰기 절차와 방법/3
우리 시단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꾸준히 실험해온 이승훈(李昇薰)은 김춘수와 달리 애초부터 무엇인가 창조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자기 시를 <비대상시(非對象詩)>라고 명명한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대상"이란 모방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엇인가 창조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가 펄럭이게 한다.
-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는가 하면,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린 게 아니라 창조한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김춘수의 에피소드 병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사물로 바꿔 쓰는 방법이 있다.
그 다음, 원관념을 드러내는 방식은 어떨까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원관념을 잠재시킬 경우, 독자들은 그를 찾기 위하여 텍스트를 주목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길어진 만큼 기존 사물들을 지칭하는 언어로 사고를 진행하여 존재의 구각(舊殼)을 강조하고,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요소가 없어 때문에 조각난 그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써봤습니다.
달아 달아/밝은 달아/이태백이 놀던 달아
--달빛은 굵은 동아줄/나는 달빛을 타고
-<중략>-
금도끼로 찍어 내어/옥도끼는 과분하니 대충 무쇠도끼로 다듬어서
굵은 둥치는 기둥 삼고, 잔가지는 처어척 걸쳐 석가래로 삼고/쓰다 남은 달빛은 주렴으로 둘러쳐
<말의 오두막>을 세웠다.
논리만 앞세우던 내 관념이 달빛으로 어떻게 집을 짓느냐고 투덜댔지만 불쑥 내민 주둥이를 다독다독 밀어넣고 뜨락이 너무 허전하여 한림(翰林) 앞 바다 비양도(飛揚島)를 끌어다 놓았다.
-[말의 오두막집에서·15]
이 작품은 전체가 27편으로 이뤄진 연작시(連作詩)입니다. 어때요? 어떤 사람은 장난스럽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재미있다고도 하던데.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병치은유 시와는 확실히 다르잖아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면서도 달빛이 동아줄도 되고 석가래도 되고…
이 시의 발상 과정을 말씀드리면 어느 달 밝은 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보니까 꼭 동아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달빛→동아줄>로 치환했지요. 그리고 아주 굵고 튼튼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다시 나무로 치환하고, 주렴으로 치환하고, 그런 마술적 분위기를 빌어 관념이 내민 "주둥이"를 밀어넣는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비양도"라는 섬을 마치 정원의 작은 돌처럼 끌어다 놨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달빛>이라는 원관념을 그대로 드러내되 보조관념군을 이질적인 것으로 잡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물을 다른 사물로 바꿔 쓰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다음 작품도 이런 방식으로 쓴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앞의 작품과는 또 다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말 속에는 말이 있고/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 가게가 있고/구멍 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깔깔대는 그 소녀들의 웃음은 화살이 되어/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오르기가 있고/이데오르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비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이 작품은 어느 날 무심코 <말 속에 뼈가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뼈" 대신 "말" 바꿔 보았습니다. 그러자 말은 단순한 음성 기호가 아니라 입체적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말 밖에는 말이 있다."라고 하고, 말과 말 사이에 빌딩을 세우고, 구멍 가게도 만들고, 그 가게 밑바닥에 지하실도 만들고, 가게 밖으로 도시와 산과 바다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 뒤에 "명털 뽀얀 소녀들"도 만들고, 깔깔대는 소녀들의 웃음이 "화살이 되어/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리는 세상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의 손등에서 팔락거리는 핏줄을 타고 그녀 속으로 드나들기도 하고, 주물럭주물럭 관념을 주물러 미인으로 만들고, 껴안고 뒹굴기도 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던 저는 한 동안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며 아주 흐뭇해하였습니다. 하느님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를 의사 전달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존재나 에너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며, 단순한 상상력의 놀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논리와 철학을 생각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작품을 쓰는 것도 시들해 하고 있습니다. 매일 똑 같은 작품을 쓰는 것도 그렇구…. 그래서 음향과 문자와 영상을 결합시킨 <멀티-포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길랑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만 줄일까 합니다.
[출처] 창조하는 시 쓰기 절차와 방법 [2. 3]|작성자 성담 임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