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고승 20선 <50> 광덕 대선사(하)-일화와 끼친 영향
반야행원 사상 정립한 ‘보현보살’
광덕의 일생은 그대로 빛이었고, 참 진리의 상징이었으며, 세간의 등불이라 할 만했다. 이 땅에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를 구현하고, 생활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했으니, 그가 보여주고 간 삶의 궤적은 곧 한국불교가 나아 가야할 미래의 진로이자 방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가 평생을 바쳐 전개해온 전법 운동은 곧 불교포교를 연구하는 나침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번 할을 하는 소리에 하늘 문이 열리니
해와 달과 별들이 고금에 빛이 나도다
一喝一聲 天門開
日月星宿 輝古今
당시 총무원장 고산 스님도 영결사를 통해 광덕이 남기고 간 많은 업적과 남긴 유덕을 다음과 같이 기렸다.
“스님의 세연이 다함을 보고 산새도 슬퍼하고 산천 또한 흐느끼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스님이 일생 동안 밝혀 놓으신 정진과 수도와 포교의 불빛은 오늘도 파랗게 타올라 성불의 그 길을 환히 밝히고 있는데, 스님 떠나신 그 자리엔 오열만이 가득 남아, 보낼 수 없는 슬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중생을 향한 큰 서원으로 스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젊어서, 스님의 수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백척간두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또한 교학에도 밝아 후학들의 양성에도 힘쓰셨습니다. 수행의 빛이 스님의 가슴에 차고도 넘칠 때, 스님은 중생들 곁으로 참된 깨달음을 안고 오셨습니다.”
광덕이 처음으로 사랑방 법회를 연 것은 1954년 부산 좌천동 한 가정집에서부터이다. 동족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살상을 저지른 한국전쟁 직후인 터라 전쟁의 공포와 궁핍으로 시달리는 저자거리의 민초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고 함이었다. 또 뚝섬 봉은사 대학생 수도원에서 미래의 동량들을 단련시켰고, 종로 대각사 골방에서 월간 〈불광〉의 짙푸른 녹색 신호등을 밝혀 순수불교의 첫 새벽을 열고, 불광법회(佛光法會)를 개설하여 밀물처럼 모여드는 민중들에게 반야바라밀의 법등을 높이 들어 광명찬란한 인간본연의 진실생명을 깨우쳤다. 잠실 흙구덩이 속에 불광사를 세워 잠실벌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한껏 비추게 한 것이다.
일생동안 30여 권의 불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해 금강반야와 보현행원의 진수를 선양했고, 각종 의례의식을 한글화해 대중들이 편하게 부처님의 품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0여 편의 찬불가를 작시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과 ‘부모은중송(父母恩重頌)’을 대강당에 올려 불교음악에도 큰 물줄기를 열었다.
마하반야바라밀
내 생명 부처님 생명 무량공덕생명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감사찬탄 헌신전법으로 바라밀국토 성취하리-
그가 지은 ‘보현행원송’의 가사들은 그가 펼친 사상의 요체를 드러내는 반야활구(般若活句) 그 자체였다.
광덕이 이뤄낸 가장 큰 업적은 반야행원사상의 확립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반야와 행원의 두 기둥으로 순수불교의 기틀을 세우고
부처님 본연의 근본불교를 우리 시대 우리에게 친근한 모습으로 여실히 열어 보인 것이다.
1927년부터 1999년까지 광덕이 일구고 간 70여 평생은 실로 보현행원(普賢行願)의 실천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완벽하고 철두철미하게 부처님의 대각사상을 현실적으로 대중화해낸 선지식중의 선지식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용성, 동산, 소천 선사의 선(禪)과 각(覺) 운동의 결실이 그에 의해 비로소 정착되었으니 한국불교는 비로소 새 천년을 맞이할 자기혁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광덕은 오매불망 반야바라밀을 생각하고 설했으며, 보현행원을 노래하고 보현행자의 서원을 다짐했다. 생각하고 설하고 노래하고 다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45년여의 기나긴 세월을 병약한 몸을 내던지며 살아갔으니 광덕의 생애야말로 법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爲法忘軀)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말년 병석에 누웠던 광덕은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사람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계를 주고 법명을 주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대중이 찾아오면 단정히 가사장삼을 갖춰 입고는 만개한 연꽃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나 죽는 거 아니야. 생명은 죽는 거 아니야….”
임종을 앞두고도 광덕은 외려 눈물을 짓는 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런 그를 평생 도반이었던 일타는 이렇게 찬탄했다.
“들어올 때(入門) 문수보살의 지혜를 갖추었고(文殊智), 나갈 적(出門)에 보현보살의 행을 구족했도다(普賢行). 세세생생 나는 곳(歲歲生生處)마다 법대로 오고 법대로 가는도다(如是來 如是去).”
광덕은 1974년 11월 종로 대각사 골방에서 월간 〈불광(佛光)〉을 창간했다. 1975년에 불광법회가 창립되었으니, 사실상 불광운동의 점화는 월간 〈불광〉 창간과 더불어 발화된 셈이다. 매월 초하루 월간
〈불광〉이 발간되는 날이면 대각사는 물론이요, 병영, 학교, 공장, 교도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법회를 봉행했다. 전국도처에서 수천 개의 불광법회가 열렸고, 대각사의 경우 법당이 비좁아 노천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불광의 언어를 통해 불교의 진수를 맛본 대중들의 에너지는 용암처럼 분출했다. 이 에너지는 잠실 흙구덩이 속에 불광사를 건립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불광사에 모인 대중들을 중심으로 법등 조직을 결성했고, 이 조직은 마을로 아파트로 확산되어 갔다.
광덕은 후학들에게 “금강경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반야경에서 지혜를 터득해서 보현보살의 10대 행원으로 살아가라”고 강조했다. 용성 화상의 대각사상이 소천의 각 사상으로 이어졌다가 광덕에 이르러 반야바라밀 사상으로 개화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매우 자애롭고 부드러워서, 제자들이 아프거나 대중들 중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다정다감하게 위로해주고 걱정해주기가 친어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광덕은 시주은혜로 살아가는 수행자가 검약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어떤 것이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다음은 그의 철저한 무소유적 삶을 지켜봤던 송석구 동국대 총장의 말.
“스님이 보현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였는데, 방이 너무 작고 불편해 수리를 해드리겠다고 하면 이를 극구 거절했지요. 얼마든지 넓고 편리하게 고쳐 드리려고 했지만 완강히 반대를 하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종이 한 장 새 것을 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당신을 위해서는 단 한 가지도 편리를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흔히 광덕이 오직 불광 운동에만 전념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시대적 아픔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유독 아픔을 많이 간직했던 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할 리는 만무했다.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그의 일생은 중생이 아프니 보살도 아프다는 대승적 보살행 그 자체였다.
그의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고민은 월간 〈불광〉 창간사 ‘순수불교 선언’에도 나타나 있다.
“〈불광〉은 감히 우리의 역사와 생활 속에 부처님의 위광을 전달하는 사명을 자담하고 나선다. 이로써 조국의 발전에 기여할 정신적 기반과 동력을 공여하기를 기도하며, 전진하는 민족사의 방향과 저력을 부여함에 보탬이 되기를 기약한다. 오늘을 사는 불자로서 조국과 형제 앞에 진실을 바치고자 함에서다.”
찰나도 한 눈을 팔 틈도 없이 살아온 광덕,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는 책을 쓰고자 작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상, 부처님의 광명을 보다 많은 중생들에게 전하고자 함의 일환이었다.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1981), 〈삶의 빛을 찾아〉(1987), 〈빛의 목소리〉(1987), 〈반야심경 강의〉(1987), 〈보현행원품 강의〉(1989), 〈행복의 법칙〉(1990), 〈광덕스님 명상언어집〉(1996) 등 저서 10여권과 〈벽암록〉(1959), 〈선문촬요〉(1959) 〈부모은중경〉(1978) 등 역서 및 편저 15권을 남겼으니, 법상에 오르거나 좌선에 들어 있지 않은 시간은 모두 저술을 위한 시간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창작국악교성곡인 ‘보현행원송’, ‘부모은중송’ 등 수십 편의 찬불가 가사를 작사하기도 했으니, 불국토 건설을 위해 촌음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도 그에게 있어서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24살의 젊은 나이로 범어사에서 출가했던 광덕은 1999년 2월 27일 다시 금정산 범어사로 돌아가 금정산과 하나가 되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라. 다시 출발하라. 불광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마지막 떠나가던 날, 광덕은 문도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생전 그의 가르침을 늘 따르고 실천했던 종실(대전 연화사 주지)은 그의 49재를 맞아 불광에 발표한 글을 통해 그의 위덕을 간절히 기렸으니, 그 글의 일부는 이렇다.
“광덕 큰스님께선 그 맑고 수려한 수행처 다 멀리 하시고 연못처럼 탁한 도심 한복판에서 긴긴 세월을 하루같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한 떨기 연꽃처럼, 푸른 소나무 위의 흰 학처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처럼 고고히 유유자적 아름답게 살다 가셨습니다. 그러나 병약한 육신의 허물 아랑곳 않으시고 설법하시는 모습은 용맹스럽기 사자와 같으셨고 부처님 말씀을 글로 전하실 땐 바닷물을 토해내 듯 거침없으셨으며, 보살행을 실천하심은 이 세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큰스님! 스님을 떠올릴 때면 스님의 중생을 향한 그 자비하신 미소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늘 때묻지 않은 천진한 모습에 미소를 잃지 않으시던 고귀하던 스님을 뵈올 수 있었던 인연공덕에 저희들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큰스님! 부디 이 땅에 큰 빛으로 다시 오시옵소서. 금강불괴의 육신으로 흔연히 다시 오시옵소서. 사바의 어두운 곳 환히 비출 큰 등불이 되시어 다시 오시옵소서. 어리석은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할 큰배가 되시어 다시 오시옵소서.”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2000-04-19/557호>
입력일 : 200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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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