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자료명 | 발행년도 | 책수 | 종류 | 비고 |
1 | 신창노씨세보(新昌盧氏世譜) | 倭政 24(1934년) | 3권 | 한적본 | 복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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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노씨(新昌盧氏)
신창노씨는 충청남도 신창군(新昌郡, 현 아산시 신창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창은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대에 기량현(祁梁縣)으로 온정군(溫井郡)에 속했다가 태종대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되었다. 신창노씨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노수(盧穗)의 차남 노오(盧塢)가 통일신라에 귀화하여 교하백(交何伯)에 봉해진 데에서 연원 되었다.교하백 노오의 후손인 태자태사(太子太師) 삼한공(三韓公) 노강필(盧康弼)의 증손이며, 문하시중 평장사(平章事) 의정공(懿貞公) 노영순(盧永醇)의 차남인 노지유(盧智儒)는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공적공훈(功績功勳)에 의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신창(新昌)으로 봉득관(封得貫)하여 교하노씨(交何盧氏)에서 분관(分貫)되어 신창노씨의 득관조(得貫祖)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문무(文武)의 인재(人材)를 배출시켜 명문(名門)으로 되었으며, 노지유의 육세손(六世孫)으로 어모 장군(禦侮將軍)에 제수된 노규부((盧赳夫)는 성종 때 지방관아로 옮겨와 후손들이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에 오백삼십여 년을 살아왔으며, 칠세손(七世孫) 건공장군(建功將軍) 노미수(盧眉壽)는 용장(勇將)이었으며, 팔세손(八世孫) 부장공(部將公) 노식(盧軾)은 문무에 현달(顯達)하였고, 단성현감 낙헌공(樂軒公) 노집(盧輯)은 청렴하였으며 후손들이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도 세거하고 있다.
이처럼 역대의 역사가 담긴 뿌리 깊은 삶의 터전을 근대사의 정책에 의한 대덕연구단지 조성으로 인하여 1988년도에 주민 전체가 이주하여 후예(後裔)들은 충효(忠孝)의 정신(精神)으로 대전과 삼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노씨(盧氏)유래
본관은 문헌상으로 137개가 전하고 있으나 광산·교하·풍천·장연·안동·안강·연일·평양·곡산 등 9개의 본관이 대표적이다. 노씨 성은 주(周)나라 건국 공신인 강태공의 후손이 노현에 봉해짐으로써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노씨의 도시조는 수이다. 그는 중국 범양 사람으로 당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냈는데 안록산의 난을 피해 9명의 아들을 데리고 신라로 건너와서 우리나라 노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홉은 모두 국가에 공을 세워 고려 초기에 각각 봉군되어 득관조가 되었다. 아들 해(垓)는 광산노씨의 득관조이다.
그가 광산백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득관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때 정승을 지내고 광주군에 봉해진 만(蔓)을 중시조로 하는 계통과 대호군 서(恕)를 중시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해의 후손인 시헌이 조선시대에 해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를 중시조로 하여 해주노씨가 분리되었다. 아들 오(塢)는 교하백에 봉해졌으므로 교하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오의 후손인 강필이 본관을 장산으로 했다가 고려의 개국 공신이 되어 선성부원군에 봉해져 다시 교하로 복관했다. 이에 따라 강필을 중시조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강필의 후손인 지유를 중시조로 하여 신창노씨가 분리되었다. 아들 지(址)는 풍천백으로 봉해졌으므로 풍천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때 국자진사를 지내고 풍천에 세거한 유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구(坵)는 장연백에 봉해졌으므로 장연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아들 만은 안동백에 봉해졌으므로 안동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이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고려 시기에 이부 상서를 지내고 평장사에 오른 우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곤(坤)은 안강백에 봉해졌으므로 안강(경주)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첨정을 지낸 종선과 목사를 지낸 희선을 중시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내려오고 있다.
아들 증은 연일백에 봉해져 연일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의 이어짐이 확실하지 않아 경령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판은 평양백에 봉해졌으므로 평양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극청이 고려 때 만경군에 봉해졌으므로 만경노씨가 분리되었다. 아들 원은 곡산백에 봉해졌으므로 곡산노씨의 득관조가 되었다. 그리고 고려 때 관직을 역임한 조(兆)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이중 광주·교하·풍천 3개 본관이 전체 노씨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6만 8,776호와 인구수 22만 354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33위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