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8/0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금강산 관광 기념, 1998.11.18 발행
2003 - 현대아산이사회 회장 정몽헌 투신자살
정몽헌 [鄭夢憲, 1948.9.14~2003.8.4]
대북송금 및 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를 받아오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년 8월 4일 새벽 서울 상계동 현대사옥 12층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 자살했다.
정 회장의 사무실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과 부인·자녀 앞으로 남긴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분을 금강산에 뿌려주기 바랍니다. 명예회장님께서 원했던 대로 모든 대북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A4용지 4장짜리 유서가 발견됐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故정주영 회장의 5남으로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1975년 11월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정 회장은 지난 1982년 현대전자를 만들었고, 같은 해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는 사식을 거부해 아버지로부터 “역시 내 아들”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8년 형인 정몽구 회장과 함께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됐고, 금강산 관광을 주도하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9년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정몽헌 회장의 전성기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현대계열사간의 세력다툼이었던 소위 ‘왕자의 난’을 치른 정 회장은 2000년 6월 현대아산 회장에 취임하면서 대북사업에만 전념했다. 당시 현대 비자금 150억원 의혹을 수사해 오던 대검 중수부가 그의 죽음 이틀 전인 8월 2일 정 회장을 검찰에 소환해 12시간 가량 조사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정 회장이 선친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대북사업과 관련, 국민적 평가가 엇갈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 이날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붉어졌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전 정권의 대북비밀송금 사건과 관련해 정경유착의 폐단에 대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 공중전화카드
1998 - 박찬호, 미프로야구 내셔널리그 7월 투수부문 최우수투수로 선정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7월의 최우수투수로 뽑혔다.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98년 8월 4일 박찬호가 `이달의 투수(Pitcher of the month)`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박찬호는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지 2년 만에 메리저리그 특급투수로 공인받게 됐다.
박찬호는 7월중 6게임에 등판, 42와 2/3이닝을 던져 4승 무패, 방어율 1.05를 기록했으며 삼진 34개를 잡고 25개의 안타를 내줬다. 특히 최근 2경기는 각각 8이닝동안 2안타 1실점의 빼어난 호투를 했다. 박찬호는 지금껏 단 한번도 `이달의 선수`는 물론 `이주일의 선수`같은 개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달의 선수`는 메이저리그를 연중 취재하는 전국의 신문-방송 기자들이 투표로 결정한다. 한편 `7월의 최우수타자`엔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블라디미르 게레고가 뽑혔다. /조선
1992 - 영화 <하얀 전쟁>, 도쿄국제영화제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감독상 받음
하얀 전쟁 [White Badge]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참전 병사들의 비극을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영화.
정지영이 감독하고 안성기, 이경영, 심혜진 등이 출연하였다. 안정효(安正孝)의 자전적인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병사들이 겪는 후유증을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되돌아보는 작품으로, 상연시간은 124분이다.
베트남에서 촬영한 최초의 한국영화이다. 당시로서는 국내 영화사상 최고액인 2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 제29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제3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남우주연상, 제31회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조연남우상·각색상, 제13회 청룡영화제 조연상·촬영상을 수상하고,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감독상·도쿄시장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86 - 독립기념관 화재
준공을 불과 11일 앞둔 1986년 8월 4일 밤 10시경 독립기념관 본관건물인 기념당 천장에서 불이나 천장부분을 태우고 5일 새벽1시30분쯤 불길이 잡혔다. 이 불로 독립기념관은 8월15일 개관이 무기한 연기됐다. 불이 번지는 순간을 본 목격자는 5차례의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기념당 중앙의 북서쪽 지붕에서 솟았다고 말했다.
조사결과 직접적인 화인은 전기배선공사의 부실로 인한 과전류였지만 준공을 1년이나 앞당기는 등의 졸속이 빚은 '인재'였다. 온 국민의 성금으로 지어졌던만큼 기념관의 화재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화재사건으로 사무처장 등 관계자가 사퇴하고 화재에 직접 책임이 있는 6명이 구속 기소됐다. 독립기념관은 그 후 1987년 8월 15일 개관했다. /조선
1984 - 오트볼타 국명 부르키나 파소로 변경
서부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 있는 나라로 정식명칭은 부르키나파소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Burkina Faso)이다. 수도는 와가두구이며 공용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동쪽은 니제르와 베냉, 서북쪽은 말리, 남쪽은 코트디부아르·가나·토고와 국경을 접한다. 1946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가 1960년 오트볼타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가 1984년 8월 국호를 부르키나 파소로 변경하였다. /naver
1980 - 국보위, 사회정화책 발표
1980년 8월 4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군경 합동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각종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하고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명분 아래 진행되었다. 검거 대상은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으로서,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이 체포되었다. 피검거자들은 보안사령부 요원, 중앙정보부 요원, 검사, 경찰서장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A·B·C·D의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 3,252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 교육 후 6개월간 노역을 하고 2주 교육 후 훈방조치되었으며,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방되었다.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곳은 군부대 내에 설치된 삼청교육대로, 헌병들이 연병장을 둘러싸고 감시하는 가운데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교육 대상자 가운데는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이 많았으며, 교육 중 가혹행위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8년 정기국회에서 이들 가혹행위에 대한 국정감사가 이루어졌다. /브리태니커
- 경제부흥 우표 (비료 공장)
1977 - 세계최대 단일공장 남해화학 여수공장(7비) 완공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비료 공장은 1930년에 건설된 흥남의 질소 비료 공장이다. 이어 삼척과 순천(평남)에 석회 질소 공장, 인천에 과인산석회 공장, 인천에 과인산석회 공장, 목포에 염화칼륨 공장이 건설되어 국내 수요량을 충당하였다. 광복 후에는 수요량을 수입에 의존하다가 1961년 충주 비료 공장이, 1962년 나주에 호남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 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료 공업의 발달은 1967년 나주에 호남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 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료 공업의 발달은 1967년 울산에 영남 화학과 한국 비료가, 진해에 진해 화학이 건설되어 요소 비료와 복합 비료를 대량 생산 하면서부터 그 외에도 충주와 나주의 비료 공장이 확장되고, 동해(석회질소), 단양(석회질소), 부천(용성인비), 장항(용성인비)에 비료 공장이 건설되어 비료의 자급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 1977년에는 여천에 남해 화학이 건설되면서 우리나라는 비료 수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공장은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최대규모(요소33만톤, 복합비료70만톤)를 가지고 있어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비료의 과잉 생산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비료의 생산량은 1979년 390만톤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1980년에 나주 비료 공장, 1983년에는 충주 비료 공장을 차례로 폐쇄하여 그 생산량을 줄이고 수출 비율을 40%로 늘려 시설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화학 비료의 주원료는 나프타이므로 나프타를 생산하는 울산, 여천등 석유화학 중심지에 대규모의 비료 공장이 입지 하고 있다.
http://leeher.new21.org/korea/IV_4.htm
1964 -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1964년 8월 4일 이른바 월맹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를 이유로 월맹에 보복을 선언하고 대월남전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이보다 훨씬 전인 7월초에 한국에 대해서 월남전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65년 1월초부터 한·미·월 세나라가 한국군을 월남에 증파하는 문제를 협의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1월 8일 국무회의는 공병과 수송부대, 자체방위병력 등 2천명을 월남에 증파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6월 키 월남수상이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1만5천명 규모의 한국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해 주도록 요청했으며 한국정부는 7월 2일 해병1개 연대와 육군2개 연대를 월남에 파견하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결정했다.
이런 정부의 결정에 야당과 학생들은 반대 데모를 벌였고, 민중당 국회의원들은 7월 16일 일괄사퇴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월동의안은 8월 13일 야당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파월육군전투부대(맹호부대)와 파월해병대(청룡부대)는 9월 25일부터 월남전선에 투입됐으며 정부는 10월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3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대대적인 파월장병 환송식을 거행했다. /조선
(정식발행우표가 아닙니다.)
1961 - 제44대 미국 대통령 오바마(Obama, Barack) 출생
오바마 [Obama, Barack (Hussein), 1961.8.4~ ]
미국의 정치가, 제44대 대통령.
1953 - 6·25 전쟁포로 교환
1953년 오늘 판문점! 6.25전쟁 중 잡힌 전쟁포로 교환이 시작된다.
같은 해 6월 8일과 7월 27일 각각 체결된 포로교환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른 후속 조치다.
포로 교환 첫 날 공산군 측이 유엔 측에 인도한 포로는 4백 명! 유엔 측이 공산 측에 인도한 포로는 2천7백53명이었다. 포로교환은 이후 9월 6일까지 33일 동안 계속된다.
이 기간에 공산군 측은 만3천4백64명의 포로를 유엔 측에 넘긴 반면 유엔군 측은 이보다 6배 정도가 많은 8만2천4백93명을 공산 측에 인도한다. /YTN
1953 - 덜레스(Dulles, John Foster) 미국 국무장관 내한
한.미상호방위조약 미 국무부는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한국 정부의 북진 정책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면서 정전협정체결 및 수락 이후에도 미국은 미국과 필리핀, 미국과 일본, 앤저스(ANZUS)조약과 같은 상호방위조약 및 동맹조약을 한국과 체결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휴전 이전에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79
- The Korean War 1950 - 낙동강 방어선 구축 (낙동강방어선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6·25전쟁 중 형성된 낙동강방어선 일대에서 아군이 1950년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전개한 방어전투. 그해 6월 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과 제공·제해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격퇴하였으며,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다음날부터 총반격을 시작하였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되었다.
미국이 한국이 요구하고 있는 휴전이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공산군측이 방위조약체결로 휴전협상을 결렬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휴전회담에서 미국이 공산군측에 대하여 유리한 입장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휴전회담의 타결 가능성이 확실시되자, 정부는 종래의 휴전반대 태도를 바꾸어 휴전협정에 동의하되, 그 선행 조건으로 한미방위조약 체결은 물론, 한국군 증강을 위한 지원 및 소련의 침략행위에 대비하여 미 해군의 한국해역 봉쇄, 그리고 공중방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 등을 요구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촉구하기 위한 압력조치의 하나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 과정 이에 당황한 미국 정부는 1953년 6월 25일 미 대통령 특사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급파하여 이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즉, “미국은 전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당국은 구체적인 현안문제는 로버트슨 특사와 토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미간에는 “정전 후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며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되,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라고 합의하였다.
이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3년 8월 4일 조약 체결을 위하여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8명의 미 고위사절을 대동하고 내한, 한국 대표와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초안을 검토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다. 1953년 8월 8일 합의를 이룬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는 중앙청에서 한미상호방위 조약 원안에 대해 가조인했다.
한편,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북한은 권력층 내부에 알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게 되었다. /naver
낙동강방어선전투 [洛東江防禦線戰鬪]
6.25사변 당시 북한공산군의 남진을 막아낸 낙동강일대의 방어전투. 북한 공산군의 남침 1개월이 되는 1950년 7월말, 공산군은 영덕ㆍ안동ㆍ상주ㆍ진주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지연작전을 펴는 가운데 8월초 낙동강선까지 물러나서 '부산교두보(釜山橋頭堡)'라고 불리는 동남부 일원으로 방어선을 축소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은 동서 80㎞,남북 160㎞로, 서북 첨단의 왜관을 기점으로 하여 동해안의 영덕에 이르며, 서쪽은 낙동강 본류를 따라 남강과의 합류지점인 남지읍(南旨邑)에 이르고, 다시 함안 진동리(鎭東里)를 거쳐 진해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 방어선 안의 지역은 연합군의 보급기지인 부산으로부터 마산ㆍ대구 ㆍ영천ㆍ포항 등의 전방지역에 이르는 방사형(放射形)의 병참선이 발달되어 보급과 병력이동에 유리하였고 기동 예비대를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자재로 투입하여 효과적인 역습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최소의 전투력으로 최대의 방어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을 살리기에 적합한 범위였다. 그러나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에 대비하여 그 후방에 또 하나의 예비 방어선을 마련하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명령에 따라서 미 8군 공병참모인 데이비드슨이 경상남북도 경계를 이루는 산맥과 밀양 북쪽의 유천(楡川)과 그 서쪽의 무안리(務安里)를 거쳐 마산 동쪽의 고지들로 이어지는 총길이 90㎞의 '데이비드선'을 구상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뒤, 8월 4일 새벽 낙동강 방어선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때부터 국군과 미군은 작전책임 구역을 분담, 국군은 왜관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낙동강방어선의 북쪽을 맡고,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진해만에 이르는 서쪽을 맡아 전쟁 발발 이래 처음으로 어깨를 잇댄 연결전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북한 공산군은 8월초까지 1개 전차사단과 9개 보병사단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했으며, 또 다른 3개 보병사단이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낙동강전선의 공방전은 8월초에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는데, 국군과 유엔군은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방어병력을 적시 적소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8월중 마산 방면에서는 북한 공산군 제 6사단의 공세를 미 제 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선제 역습으로 저지하였고 창녕에서 남지사이에 형성된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미 제24사단이 북한공산군 제 4사단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대구 서남으로부터 동북쪽에 이르는 외곽전선에서는 국군 제 1사단과 미 제 1기병사단이 북한 공산군 수 개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였다. 포항-기계(杞溪)-안강(安康)을 잇는 동부전선에서는 국군 제 1군단 예하의 제 3사단ㆍ수도사단이 일진일퇴의 격전을 치르며 북한공산군의 전선 돌파를 분쇄하였다. 또한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는 국군 제 1사단이 북한공산군의3개 사단을 저지하는 '다부동전투'를 벌였다. 특히 미공군은 8월 16일 B-29폭격기 98대로 왜관 전면의 공산군 지역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9월에 들어서서도 북한공산군은 낙동강의 모든 전선에 걸쳐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으며, 특히 영천일대에서는 북한공산군 제15사단이 국군의 전선을 뚫고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국군 제 8사단은 제 2군단 예하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를 섬멸함으로써 개전이래 가장 큰 전승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북한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사변 발발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6.25 당시 낙동강방어전투 중의 하나. 1950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북한 공산군의 낙동강 전선에서의 공격은 대구를 주목표로 하여 2개 사단의 병력으로 대구 서남쪽과 서북쪽을 위협하는한편, 왜관 북쪽에서 낙동강을 넘어온 1사단ㆍ13사단ㆍ45사단의 3개 사단은 8월 14일부터 대구 분지의 북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수암산(秀巖山)ㆍ유학산(遊鶴山)ㆍ가산(架山)등의 고지를 공격하였다. 이지역의 방어를 맡고 있던 국군 제1사단은 험한 지세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전선을 고수하였다. 이때 다부동일대의 협곡에서는 일곱 차례의 공방전을 벌인 끝에 북한 공산군의 주력부대에 타격을 가하였다. 8월 24일을 넘어서면서 북한공산군의 공세는 누그러지기 시직하였으며,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대구의 북쪽과 서쪽에서 철통 같은 방어태세를 유지하였다. 1981년 정부는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에 전적비를 세워 국군 제 1사단의 전공을 길이 증언하게 하였다.
박 태 영
http://bgs.hs.kr/dapsa/kyungbook/5-nakdongkang.htm
1944 -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 가족 독일군에 체포
1944년 8월 4일 이른 아침 네덜란드 암스텔담시 프리센가 263번지,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차가 멈춰섰다. 밀고자의 정보에 따라 책장의 숨겨진 문 뒤에 방이 있는 것이 발각돼 오토 프랑크 등 유태인 두 가족 8명과 은신 생할을 도와줬던 네덜란드인 두명이 연행됐다.
프랑크 일가 4명은 9월 6일 다른 유태인 1015명과 함께 화물차에 실려 독일 점령하의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즉각 선별 작업이 벌어져 15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등 549명이 당일 가스실에서 학살됐고, 나머지는 남녀별로 수용됐다. 아버지 오토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남았고, 안네와 언니 마고 등은 인근 인종절멸수용소를 거쳐 독일의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 베르겐 벨젠은 극히 불결한 상태여서 티푸스가 만연해 있었다. 언니 마고가 영양부족에다 티푸스까지 겹쳐 1945년 3월 먼저 죽었고, 몇일 후 안네도 뒤따랐다. 혹독한 추위였지만 티프스에 따른 전신 발진과 고열로 옷을 모두 벗은 채 죽었다고 한다.
안네의 아버지 오토는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자,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사업을 재개했다. 오토는 끈질긴 조사 끝에 베르겐 벨젠에 있었다는 간호사에게서 아내와 딸 자매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미프 히스 부인은 살아돌아온 오토에게 안네의 일기를 전해주었다. 안네의 일기는 50여개국에서 번역돼 5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조선
1914 - 영국, 대 독일 선전포고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4년 8월 4일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이에 대항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1914~18년 유럽 국가 대부분과 러시아·미국 등이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뉘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되었다. 1910년까지 3국동맹, 3국협상 등의 동맹 형식으로 세력이 나뉘어 있던 유럽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조건부 최후 통첩을 보냈으며 7월 28일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다. 뒤를 이어 러시아가 7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해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독일이 러시아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유럽을 주도하던 강대국들이 속속 전쟁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8월 3~4일 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도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은 세르비아나 러시아·프랑스 등과 특별한 우호관계가 있지는 않았지만 벨기에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유럽 내에서 시작된 전쟁은 세계 각국이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고,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이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브리태니커
1912 - 제2차대전 때 수만명의 유대인 생명을 구한 스웨덴의 외교관 발렌베리(Wallenberg, Raoul) 출생
발렌베리 [Wallenberg, Raoul, 1912.8.4~ 1947.7.17]
라울 발렌베리(Raoul Wallenberg, 1912년 8월 4일 ~ 1947년 7월 17일?)는 스톡홀름 태생의 스웨덴의 외교관이며 스웨덴에서 영향력 있는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주 부다페스트 스웨덴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외교관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수의 헝가리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했다.
유대인들을 위해 임시 '보호 여권'을 발급하여 주면서 보호 여권 소지자는 귀국을 기다리고 있는 스웨덴 국민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당원들과 지혜롭게 협상하여 이들이 전쟁범죄에 따른 대가를 치르는데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 많은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추방하는 것을 철회하게 하였다. 발렌베리는 이렇게 하여 2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의 유대인들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 대학살을 직접 맞싸운 사람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1945년 1월 17일 소련의 군대에 체포되었는데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그 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공식 입장은 그가 1947년 7월 17일 수감중 사망했다는 것이나 늦게는 1960년대까지도 그를 러시아나 시베리아의 형무소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있다.
1981년에는 미국의 명예 시민, 1985년과 1986년에는 각각 캐나다와 이스라엘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위키백과
1901 - 재즈의 선구자인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출생
암스트롱 [Armstrong, Louis (Daniel), 1901.8.4(1900.7.4)~1971.7.6]
뉴올리언즈 출생. 재즈초기의 뉴올리언즈 스타일을 오늘날까지 전한 재즈의 선구자이다.
가난한 흑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 소년원에서 코넷을 배우고 1922년 시카고에서 킹 올리버악단에 들어가 주목을 끌었다. 그후 악기를 트럼펫으로 바꾸어 점차 인기가 높아졌으며, 1925∼1928년 자신의 악단인 '핫 파이브(Hot Five)' 및 '핫 세븐(Hot Seven)'의 이름으로 취입한 그의 레코드들은 재즈 역사상 불후의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1931년에는 대악단을 조직,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유럽여행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1947년에는 악단 '올스타즈'를 결성하여 죽기 전까지 활약하였다.
전성기의 그는 음색·기교·감정 등 모든 점에서 가장 뛰어났고, 재즈의 여러 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가 재즈 연주에 있어 독주의 중요성을 확립한 것과, 또 가수로서 스캣창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점 등은 간과할 수 없는 일들이다. /naver
(일부 자료에는 생일이 1900년 7월 4일로 되어 있습니다. ^.@)
1900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Elizabeth, The Queen Mother) 출생
엘리자베스 [Elizabeth, The Queen Mother, 1900.8.4~2002.3.30]
영국 왕 조지 6세의 아내(1936~52). 스트래스모어 킹혼 백작 14세인 클로드 조지 보스 라이언(1944 죽음)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보스 라이언가(家)는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이다. 그녀는 1923년 4월 26일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앨버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영국의 왕자를 외국의 왕녀와 결혼시키는, 오랫동안의 관례에서 벗어난 범속한 출발이었다. 1936년 12월 11일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하고 남편이 조지 6세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조지에게 적절한 예고나 준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8세(퇴위 후 윈저 공이 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딸을 2명 낳았는데, 큰딸은 나중에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1926 태어남)이고, 작은딸(1930. 8. 21 태어남)은 스노든 백작부인이 된 마거릿 로즈 공주이다. 1952년 남편이 죽고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자 공식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왕후 폐하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왕가 일원으로서 국민의 큰 인기를 얻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5 -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Andersen, Hans Christian) 사망
1859 - 노르웨이의 작가 함순(Hamsun, Knut) 출생
1805 - 아일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해밀턴(Hamilton, William Rowan)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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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