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시조의 몇 가지 정신과 표정/김종
1. 이영도 문학을 쓰는 이유
작은 창 너머로 개인 하늘 내다보고
긴 긴 봄나절을 외로 앓는 몸이
한 마리의 짐승보다도 의지할 데 없어라.
멀리 안개 속으로 뱃고동이 울어 오네
어느 간절한 꿈이 설레서 돌아오는고
곰곰히 지친 마음엔 등이 도로 외롭다.
―「환일(患日)」
“진정 통곡도 다 못할 세월 속에서 나의 시조는 내 목숨의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청저집』 서문)
이영도(李永道, 호: 丁芸, 1916~1976) 문학에서 시조가 “목숨의 기도”라는 말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무엇이 그에게 시조를 “목숨의 기도”일 수밖에 없게 했을까. 이영도에 기대면 그때를 “인간살이의 애증에 마음 시달릴 때”라 했고 그것은 “가장 진실한 내면의 절규”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영도는 “한 마리의 짐승보다도 의지할 데” 없이 깊은 고독의 수렁을 “등이 도로 외로울” 만큼 헤엄치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는 안개 멀리 뱃고동 우는 소리도 그리워했고 “간절한 꿈이 설레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위의 시조는 그같은 이영도의 인간적 모습이 자연스레 읽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처럼 이영도의 시조에서는 그의 인간적 모습을 내면까지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영도에게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 자신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영도는 시조를 통해서 거창한 그 ‘무엇’을 몸짓 이상으로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한일월(閑日月)의 멋스러움을 즐김의 시간으로 보여주지도 않았다.
어느 의미에서 시조는 형식이든 내용이든 정도를 넘어서 혹사당해 온 장르이다. 실제로 이 장르의 현실적 고독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장르가 철저해지면 그것은 보다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그간 무엇인가를 시조로 드러내겠다는 시조단의 의욕은 현실에서부터 심한 괴리와 함께 깊은 고뇌의 소산이어야 했었다. 가벼운 배설행위에도 못 미치는 작품까지도 저마다 색색의 깃발을 내세우고 요란한 장신구까지 달고 나왔다. 시조가 언급되기로 600년의 장르이지만 우리에게 새롭게 보이는 노력은 근대 이후의 일이 된다. 길다면 긴 이만한 세월로도 현대시조의 연치(年齒)를 논의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다 필요 이상의 수식을 가하면서 그것들은 저마다 멋스러움의 경지를 내세우는 선비시대의 도락 취미의 연장일 뿐이었다.
이영도 시조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그 나름의 빛깔과 울림을 갖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이영도 60년의 천수(天壽)는 가히 ‘문자적 인생’에 다름아니었다. 시인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별나게 혼자만의 인생이 젊은 나이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출가 전의 엄한 훈도(조부로부터)와 “시집간 뒤에도 불빛을 가리고 팔목이 시도록 책을 읽었던” (한춘섭 외 편, 『현대시조 큰사전』, 을지출판사, 1986, p.603) 이영도의 시조적 인생은 여기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거기에 때맞춘 것처럼 남편의 사거(死去)에 이르렀으니(만약 남편과의 단란한 가정이 계속되었더라면 이영도의 문학적 인생은 유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정신의 개화는 예정된 과정을 거쳐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시조와 관련하여 이영도가 조부로부터 엄한 훈도 속에 보낸 유년은 가벼운 의미 이상이라고 본다. 누대에 걸친 불교적 믿음 위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갔지만 이영도의 체질적 순환성은 유교적 조신성(調身性)의 연속이었다.(유치환과 20년의 긴 사랑에서도 한번도 행위하지 못한 것을 직접 돌이키고 있다) 그의 시조는 이같은 조신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좀더 깊은 논의를 요하지만 자유시가 기독교적 성향에 기운다면 시조는 유교적 구조에 더 어울리는 장르로 보인다. 종교적인 기질이 시가(詩歌) 장르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장르의 일반성엔 한번쯤의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그래서 이영도의 시조적 세계관은 기독교적이기보다는 유교적 조신성에 터잡은 것을 상기하게 된다. 또한 이영도 자신이 여러 곳에서 술회하고 있듯 단란한 가정의 행복을 시조 이전에 희구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정서는 그래서인지 닿을 수 없는 인간정신의 갈망이 간절하게 터잡고 있다.
이영도에게 시조는 숙명적임을 감지케 한다. 그는 3권의 시조집(『청저집(靑苧集)』 1954, 『석류(石榴)』 1968, 『언약(言約)』 1976)과 4권의 수필집(『춘근집(春芹集)』 1958, 『비둘기 내리는 뜨락』 1966, 『머나먼 사념의 길목』 1971,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1976)을 남겼다. 바로 이것들로 이영도 시조의 세계관과 그의 창작적 표정을 몇 갈래로 다루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어떻게 해도 한 사람의 시인이나 작가가 전체적으로 투망되는 것은 작가론에서는 하나의 이상일 것이다. 본 논의에서는 이영도 시조의 설화적 세계의 순정성(純正性)과 상실의 비애를 비롯하여, 이상과 현실, 낭만의 푸른 시심이 리얼리티와 어떻게 교직되는가의 문제, 그리고 낱낱의 작품에서 마감(‘여기까지’)과 출발(‘여기부터’)의 매우 결연한 정신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작품에 터잡고 있는 역사의식의 언어, 그리고 구원과 섭리의 세계까지를 다루고자 한다.
2. 설화적 순정성과 상실의 비애
『죽순』(1945. 12)지에 「제야」를 발표하면서 이영도는 시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선연한 물빛, 그 비파강의 흐름”(「비파강의 물빛」)에서부터 그의 시조적 천성은 길러지고 있었다.
밤이 깊은 데도 잠들을 잊은 듯이
집집이 부엌마다 기척이 멎지 않네
아마도 새날 맞이에 이 밤 새우나보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젯상(祭床)에 제물을 두고 밤 새기를 기다리나
벌써 돌아보랴 지나간 그 시절이
떡가래 썰으시며 어지신 할머님의
눈썹 센 전설을 풀어 이 밤 새우시더니,
할머니가 오시고 새해는 돌아오네
새로운 이 산천에 빛이 한결 찬란커라
어떠한 고담을 캐며 이 밤들을 새우노?
―「제야」 (1945. 12)
바로 이 작품에는 이영도 시조의 설화적 순정성이 숨쉬고 있다. 이 무렵 이영도의 시조는 훈련된 감수성으로 씌어지던 때가 아니었다. 많았던 독서량만큼 세련된 표현을 얻을 시간이 확보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빠 이호우의 등단이 1940년(『문장』, 추천작 「달밤」)이고 보면 그의 시조적 지향은 이미 여타의 문제에 구애되지 않을 만큼 일찍부터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생활의 문제만 제하면 다른 것은 자유스러웠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세계에 시조가 부합되었던 것이며 「제야」의 세계는 이전까지의 체험, 즉 유년체험이 설화성에 접맥된 것이었다.
설화성의 세계는 크든 작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에 기대지만 이호우의 「달밤」에 이영도 또한 「제야」를 제재로 택하고 있다. 이호우의 「달밤」에서도 설화성은 하나의 정경으로 읽힌다. 시조가 어떤 투의 세계에 맞물려 있다고 생각될 때 시적 감수성의 처리를 설화성에 기대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무난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특성적으로 밤에 이루어지는 발화(發話)이며 밤의 시간은 간절한 정서촉발이 가능한 시간이기도 하다. 시조라는 장르의 문제를 떠나서도 이영도의 시조에서는 여러 작품에서 이같은 설화성이 밤을 배경으로 추출되는데 이영도의 시적 향수가 여기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제야」에는 우선 가정적인 온기가 느껴진다. 남편과는 사별 직후이며 그 무렵 이영도는 딸 하나를 둔 청상(靑霜)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새로운 이 산천에 빛이 한결 찬란”키를 기리고 있을 만큼 차분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남편 사후에 이 작품이 씌어졌다면 이같이 포근한 정서가 드러날 수 있을까 싶다. 설사, 사별 후의 시간이었음에도 자신의 의지 이상의 자리에 시댁의 지엄한 법도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작용한 때문일까?
1연에서 화자는 제 3자적이다. 그리고 새날맞이 장만들을 하느라고 밤 깊은 시간에도 집집마다 기척이 멎지 않음을 읽게 한다. 그러다가 이내 화자에게로 돌아온다. 지난날 고향에서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젯상 앞에서 밤새기를 기다렸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밤의 시간이 설화성의 시간이라면 이 등불은 그 설화성의 심지쯤 될 것이다. 그래서 등잔불 아래서 듣던 이야기는 고향정서를 표나게 돋아주기에 충분했다. 고향이 있고, 그 고향 땅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에게나 간절한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영도는 떡가래 썰며, “눈썹 센 전설을 풀듯이” 할머니의 이야기로 옮기어 간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 연의 ‘한결 찬란’한 새해의 소망은 따로 읽을 필요가 없다. 밤을 새울 만큼 재미있었던 이야기의 다음 의도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께가 되면 집안 어른들께 드릴 세찬 준비와 아이들 설빔 마련에 꼬박 겨울밤을 새우다시피 설차림 준비에 바쁜 몇 날을 겪어야 했던 시절! 그것은 오히려 즐거운 피로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야를 밝힐 등을 새로 바르고 초당(草堂)에서 늙은 머슴이 아이들의 연을 만드느라 대나무를 쪼개어 화로불에 굽히고, 할머니께서는 호롱불을 챙겨 심지를 마련하시는 등 온갖 묵은 것을 걷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향한 경건한 분위기로 마음을 여미는 새해 맞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믐날이 되면 집집이 장등하는 호롱불이 은하를 이룬 가운데 안방에서는 떡가래를 썰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머슴들은 대문 밖에 세운 액막이 허수아비를 만드느라 초당이 부산했던 설날 기분은 온 집안에서부터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나라로 온 겨레가 비록 집안 형세는 각기 다를지라도 신춘을 맞이하는 지성스러운 희망에 마음 젖기만 했다.
―「새해가 왔다지만」에서
『부생육기』를 읽으면서 심복 부부가 나눈 부부애를 두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고백할 만큼 혈연적 인간애에 집착했던 이영도였다. 「제야」에서는 이영도가 꿈꾸었던, 전설처럼 먼 행복이라는 세계가 포근하게 숨쉬고 있다. 비록 시간 차이가 나지만 「석간을 보며」(1968)에도 “끼니 챙기며 더불어 앉은 가족”이 희구되어 있다. 이같은 정서는 이영도 시조문학의 일관된 언어적 질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새벽달」 「비」 「봄」 1·2, 「추야(秋夜)」 「단란(團欒)」 「향수」 등은 모두 이같은 데 터잡은 작품들이다. 이들은 『청저집』에서 추출된 정서이기도 했으며 설화 세계의 순정성이 그대로 표출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 무렵, 이영도의 정한(情恨) 또한 감출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 또한 순정한 세계를 가꾸는 시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지어미였다. 『부생육기』를 통해서도 드러낸 바지만, 그때를 그는 “보람도 걷움도 없이” 가버린 세월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떨어진 꽃잎처럼 가슴속 그 무덤”에 “봄풀이 푸를 때마다 앉아 우는” (「그아낙」) 아낙네라고 했다. 그 구체적인 문장을 두 군데만 인용한다.
① 내 안에 그윽했던 여성의 운율(韻律) 역시 깃들일 거문고 줄을 얻지 못함으로 하여 연연한 가락의 울림 한번 갖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듯 진실했던 청춘의 꿈도 그리움도 20대의 어린 나이로서 먹이고 만 자신을 나는 서러워했던 것이다.
―「부생육기를 읽으면서」에서
② 이 쌀로 밥을 지어 누구를 대접하려는 것인가. 누구를 대접할 것이 아닌 바로 내가 먹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싱겁고 귀찮고 맥이 풀리는 것이 없다.
―「쌀을 일면서」에서
① ②는 모두 이영도의 자기 고백적 심경이 드러나 있다. ①에서 “내 안에 그윽했던 여성의 운율”이란 그 자신 여자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거문고 줄을 얻지 못함”은 바로 짝을 맞춘 자리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는 “연연한 울림 한번 갖지 못했다”고 했다. “연연한 울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밥을 지어도 대접할 사람이 없는 공허함의 자리에 놓인다.
이미 그대는 가고 내가 홀로 남았는가
아스라한 하늘가에 별들은 잠이 들고
가슴에 꿈이 어리며 머언 생각 하옵니다.
―「머언 생각」 2연
이 작품의 화자는 과거적인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이미 그대는 가고 내가 홀로” 남았다는 대목에서 상실의 메울 수 없는 단층을 읽을 수 있다. 앞에서도 이영도의 인간적 온기는 바로 가정적인 데 있음을 읽어왔는데 이 작품에서의 회억은 공허와 등가를 이루는 무상의 세계에까지 뻗치어 있다. 이런 시간에 화자는 가슴에 어리는 꿈 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다. 또한 이 시간엔 머언 생각의 대상이 어디에 머무는가도 확연해진다. 이와 비슷한 정서로 읽히는 작품이 「새벽달」이다.
이 작품의 주된 정서도 상실에 대한 비애이다. “한 하늘 억만성좌 초롱을 밝혀”든 밤시간에 기약없는 결별(이것은 몌별(袂別)이라 할 것이다)로 고독은 차라리 비수같다고 했다. 「생장」도 여기에 드는 작품일 것이다. 일점 혈육인 딸의 성장 앞에서도 기쁨보다 더한 서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이영도는 “바라던 마음 다시 허전”해지는 것이다. 이는 그가 설화적 순정성의 세계에서 쌓아 올렸던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렀다” (「단란」)라든지, “비록 소채일망정 간 맞춰 끓여놓고”(「석간을 보며」)의 세계와는 건너편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설화적 세계의 건너편엔 이같이 감당할 수 없는 회한(悔恨)으로 상실에 대한 비애의 세계가 작용 뒤의 반작용처럼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3. ‘발’에 붙어 있는 ‘눈’
이영도 시조는 서정의 바탕에서 씌어진 것들이 많다. ‘황진이 이후’라는 단서와 함께 현대시조문학사에서 단시조에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이영도에게 ‘서정의 바탕’과 ‘단시조에의 가능성’은 한번쯤의 음미가 필요한 부분이다.
시조는 몇 갈래의 장르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단시조가 주를 이룬다. 단시조는 현대시의 구조에서는 하나의 연(stanza)만으로 완결한 시형을 말한다. 그리고 시조의 거점적 당위성이라 할 수 있는 정형시적 체질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으로 꼭 이것이다라는 단정 이전에, 언어의 전달 기능이 폭주하는 현대에 있어서 그것에의 보다 수정된 모습은 단시조를 하나의 연으로 한, 연(連)시조의 제시에 있었다. 그래서 단시조의 문전은 한산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현대’라는 조건을 달지 않더라도 시조의 연시조적 풀림은 사상감정의 서사성을 동반한 요구에 이어진 것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시조부흥의 기치 이후에 거의 예외없이 연시조로 창작된 것이 시조단의 현실이다.
여기에는 고시조적 관습에서 ‘현대’라는 시간의 복잡 미묘한 것들이 사실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믿음에 터잡고 있었으니, 시조에서 연시조적 현상은 자연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이는 시조의 산문화, 서사화라는 시대정신의 물결이었다. 한 마디로 시적 표현의 직절(直截)성이 서사적 기질로 풀렸다고나 할까.
이영도의 시조에서 추출된 주된 정서는 인생무상, 회한, 정밀감, 고독, 연민(『주간중앙』(1976. 2. 29)과의 인터뷰에서도 이영도는 ‘수목처럼 동물을 기르지 못한 이유를 불가피한 인연 이외에는 맺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필자는 이것까지를 ‘연민’으로 보고자 한다) 등 인간 성정으로서의 그리움을 결곡하게 짜낸 것들이다. 이들은 그 자체로는 사실성과는 다른 자리에 위치한 주관적 정서일 것이다. 인류의 장르사에서도 정감을 얻은 것들은 그 길이가 짧은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형식과도 관련된다. 결국, 자기 존재의 주관적 표출이 서정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면 이영도의 시조도 여기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정신적 상황이 갈망된 그리움을 다듬었고 이를 담은 그릇이 주로 단시조였기 때문이다.
이 항의 논의는 여기에 초점을 마련한다. 이영도의 생애는 비파강 시절의 성장기에서부터 어느 것 하나 그리움에 무관한 것이 없었다. 적어도 외부적 세계의 객관성은 이영도에게 자신 이상의 자리가 그리 확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이 주관성의 세계를 지향하고 조화 이전에 초월을 보여주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그러나 하나의 가정이다. 주관적으로 낯선 것은 객관성이다. 객관성은 인류정신의 보편성에 비추어 사실성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 구체성으로 장르의 길이는 늘어나고 서사성을 동반한 산문의 세계가 열린다.
표제에 내건 “발에 붙어 있는 ‘눈’ ”은 심정적 세계의 사실화를 의미한다. ‘눈’은 심정적 상태, 즉 행위 이전의 상태이다. 여기에 ‘발’은 체험적 사실에 가름된다. 그렇다면 눈과 발은 작게는 체험 이전과 이후를 일컫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우리가 편의적으로 설정한 낭만성과 사실성으로도 환치시킬 수 있으며 이것을 이영도 시조의 한 단면을 논의하는 명제로 제시한 것이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쓸었나
보리 누름 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보리고개」 1
어느 의미에서 문학은 장르의 선택 이전에 존재한다. 장르의 틀 속에다 문학의 내용을 담는 것은 행위자의 작업일 뿐이다. 우선 위의 작품은 그 형식의 간명함이 돋보이게 읽힌다. 문학이론으로 수다를 떨지 않아도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대작의 느낌을 준다. 유년시절의 보릿고개에 대한 기억은 따뜻한 양지에서도 어질거리기만 했었다. 그만큼 보릿고개라는 어휘에는 아지랑이같은 느슨한 배고픔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보릿고개의 현실이 단시조라는 저 짧은 그릇에 완전하게 담긴 것은 이영도가 보여준 시적 능력의 높이를 의미한다.
닭이 울었다 마음에 어둠이 걷히고
은은히 교회마다 울려오는 종소리
조용한 마음 모두어 별빛 아래 섰다.
―「새벽」
정작 너를 두고 떨쳐 가는 이 길인데
영호(嶺湖) 천리를 구비 마다 겨운 불빛
산천이 뒤져 갈수록 닥아 드는 체온이여!
―「이별」
호젓한 산 모롱에 낡은 비석 하나
잊어 주어도 오히려 한이거니
어찌해 이미 간 그를 부질없는 욕이뇨.
―「열녀비」
순서없이 단형시조만을 고른 것이다. 이영도 시조의 인상적 특질을 위하여 위의 시조들은 부적합한 느낌마저 준다. 씌어진 시기도 「보리고개」 1부터 차례대로 1968, 1954, 1960, 1954년 등이다. 「새벽」은 신앙에의 다짐을 노래한 것이며, 「이별」은 제목 그대로 봄날, 영호천리를 달리는 차중에서 씌어진 연서(戀書)이다. 「열녀비」는 다소간 이영도의 자기 음성이 담긴 작품이다.
흡사 자신의 사후(死後)를 본 듯 했을까. 앞의 두 편은 시인 자신이, 마지막 것은 3자가 화자로 드러나 있다. 화자들의 위치만큼 거리의 차이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즉자적인 것은 분리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주관성에 기우는 것이 사실이며 거리를 둔 3자적인 것은 관찰의 거리를 지닌 객관성의 작품이라고나 할까.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즉자적인 것이든 3자적인 것이든 일정한 거리를 그 시점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용한 마음 모두어 별빛 아래 섰다”나 “정작 너를 두고 떨쳐가는 이 길”, 그리고 “어찌해 이미 간 그를 부질없는 욕이뇨” 등은 모두 유보된 관망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다르게는 서정적 세계와 단시조임에도 주관과 객관의 균형을 함께 지향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정시는 어느 의미에서 감정의 고조이다. (이 경우 「이별」의 느낌표는 그같은 기능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영도 시조에서는 이같은 기질이 분위기로만 예비되어 있다. 이러한 면모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20년의 열애에도 행위하지 못할 만큼의 자기엄격성에서 비롯된다. 자식에게까지 어머니 이전에 선생님으로 보였거나 사후의 문제까지 자기 손으로 지시해 놓을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이같은 이영도의 인간적 조신성이 그대로 시조에 투영된 것이다. 그리고 「비」 「아폴로의 독백」 「어디로 가야 하리」 「수혈」 「흐름 속에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등이 여기에 터잡고 있다.
이영도는 단시조에다 정감적 자기 세계를 서사성으로 펼쳐보인 드문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분명 시조에서 3장 6구의 단시조 형은 가혹하리만치 비좁은 공간이다. 그럼에도 이영도는 대형 경기장만큼 넓게 뛰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영도의 자기존재의 철저성이 시조로 표출된 보다 근원적인 데에 뿌리내린 기질상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시조형에다 삶의 온전성을 그것도 사실성으로 응축시켜 표현한 것은 이영도 시조문학의 한 특질이 되기에 충분하다.
4. ‘여기까지’와 ‘여기부터’의 문제
이영도가 시조를 “내 목숨같은 기도”라고 했을 때 시조는 분명 이영도에게 더없는 생의 반려이면서 구원에 이르는 한 통로였을 것이다. 이영도는 “서러우면 입닫고, 그리우면 가만히 가락을 울렸으며 슬픈 동경이 무슨 병세처럼 앓아질 때 시조를 썼다” (『청저집』 서문)고 했다. 강렬한 울림을 읽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시조창작에 대한 이영도를 설명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확실히 시조는 이영도에게서 생의 견결한 다짐을 보여주는 혈서 이상의 의미에 나아갔던 것이다. 그랬음인가. 그의 시조에는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읽히는 어휘가 ‘목숨’이다.
이영도의 시조는 대체적으로 쉽게 읽기는 어렵다. 단시조에 내리지른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실꾸리같은 이야기가 있나 하면 눈물 질퍽할 만큼의 숙연한 순정적인 것들도 있다. 고독과 절망을 덮어버리지 않아, 그 당혹스러움만을 논의할 만큼 견고한 것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영도 시조의 시적 개성에 연유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들은 또한 이영도의 시조에 두드러진 고비를 만들어 주는 한편으로 ‘결연하게 읽히는 한 이유’가 되고 있다. 이쯤해서 이영도의 시조와 관련하여 ‘여기까지’와 ‘여기부터’의 의미를 잴 자리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목숨’이라는 어휘가 드러난 시행들을 여기 얼마간만 끌어내기로 한다.
『청저집』 아득히 싹트인 목숨 헤아리고 앉았다. ―「빈소리」
이 강토 이 슬픔위에 보람없는 내 목숨 ―「안타까움」
아예 목숨을랑 허공에 앗아지고 ―「구름. 2」
『석류』 인연의 겨운 목숨 달래던 그 자리에 ―「별」
목숨의 설운 원은 설레어 파도인데 ―「석굴암」
그 어느 뜨거운 인연이 내 목숨에 연(連)하는가 ―「수혈」
돌아갈 하늘도 없는가 피도 푸른 목숨이여! ―「애가」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진달래」
너희 젊은 목숨 낙화로 지던 그날 ―「피아골」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황혼에 서서」
영위는 즐거운 목숨인가 가비야운 날음질 ―「귀소」
『언약』 목숨의 아픈 증언 꽃가루로 쌓이는 4월 ―「바위」
거듭난 목숨의 연등 한 하늘을 밝혔네 ―「부활절의 노래」
목숨을 타이르며 천안불(千眼佛) 고우신 웃음 ―「비로전 2」
안으로 사룬 목숨 금빛 열반에 부시네 ―「비익사」
갈(耕)아도 갈아도 목숨은 연자방아 도는 바퀴 ―「설야」
목숨을 바꾼 절개 마디마디 매운 청죽(靑竹) ―「아랑각」
그 창창한 욕망을 누벼 목숨은 허기롭다 ―「아폴로의 독백」
가난은 오직 엄마 아빠만의 것 아, 멀고 귀한 목숨이여 ―「영위」
넘을수록 가파른 목숨 아물대는 회(灰)빛 설계 ―「입춘」
너는 내 목숨의 불씨 여밀수록 맺히는 아픔 ―「진달래」
이 목숨 싹트임도 당신의 뜻이거니 ―「청맹(靑盲)의
푸르디 푸른 강 앞에 목숨의 길을 듣는다. ―「흐름 속에서」
그 짙던 목숨의 애환 바래어(漂白) 선 추명(秋明) 밖을 ―「갈대」
서성이던 계절의 길목 죽지 지친 목숨위엔 ―「길원」
목숨의 크낙한 분만 함께 앓는 이 고비를 ―「고비」
뜨겁게 목숨을 사뤄도 사무침은 돌로 섰네 ―「낙하」
위에 인용된 구절들을 보면서 이영도의 시조가 어떤 상태의 열선(熱線) 위에 노래되어졌는가를 감지하게 된다. 이 ‘목숨’이라는 어휘는 이영도가 자신을 드러낸 부지불식간의 개성적 언어였음에 틀림없다.
『청저집』 속의 ‘목숨’은 공허, 슬픔, 상실감 등 본래성 돌이키는 자리에서 표출된 것들이 많다. 연보를 들출 것도 없이 이같은 정서들은 이 무렵의 이영도의 솔직한 인간적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빈도는 극히 미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석류』에서는 얼마간 『청저집』의 터널에서 벗어나온 느낌을 준다.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도 읽히며 어떤 것은 역사정신에 닿아 있음도 본다. 4·19 등의 힘겨운 고지를 넘었던 이영도의 시선이 여기에 무관하지 않았음의 연유이다.
『언약』의 세계에 오면 그것의 주제는 둘로 나누어진다. 역사와 신앙에의 초점이 그것이다. 물론 무상관, 인연, 그리움 등의 정서들도 드러나지만 이것들은 소괄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 삼라만상은 이 부분의 그의 문학에서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개의 구간에 역사와 신앙의 정신으로 터잡고 있다. 실제 이같은 생각이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 것은 이영도 시조의 시적 의도를 밀어 올리는데 ‘숨결’ ‘빗발처럼’ ‘형벌’ ‘차라리 자학’ ‘살얼음’ ‘몸부림’ ‘역리(逆理)’ ‘피뱉는 소리’ ‘골수’ ‘속죄’ ‘주림도 헐벗음도’ ‘호곡’ ‘검붉은 녹물’ ‘푸른 분노’ ‘포연’ 등의 체언적 어휘나 ‘뜨겁다’ ‘피맺힌’ ‘삼가는 데’ 등의 보다 적극적인 강도의 용언적 어휘들이 ‘목숨’의 감도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목숨’이라는 어휘는 어떻게 의미지워지는가. 한 차원 넘어서서 생각해 볼 과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 과제가 이 자리의 소임이기도 하다.
여읜 그 세월이 덧없는 살음이매
남은 일월은 비단수로 사기고저
오매로 어리는 꿈에 눈 부시는 무지개
―「무지개」(1954)
이영도는 젊은 나이에 이같이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그리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여읜 그 세월”의 다음에다 “비단수로 사기고저” 했다. 괴롭고 벅찬 인생을 “꿈에 눈 부시는 무지개”처럼 장식하겠다는 다짐이었던 것이다. 그같은 생각은 세월의 흐름 위에서도 바꿔지지 않았다. 위 작품의 표면적 의도만 읽어도 이영도는 견결한 다짐의 여인이었다. 이영도의 이같은 세계가 이승을 마감하는 시간까지 이어진 점이 더욱 그렇다.
너무 많으면서도 정작 하나를 택하기 어려운 원(願)은 오직 죽음의 문제 그것뿐이다. 나의 어머님께서 타계하신 다음, 그 분의 49재를 거룩하게 마친 밤에 내가 죽을 수 있었으면 싶다.
―「유성」에서
죽어 백골이 되는 날엔 그렇게 아래 위, 이빨을 흉스럽게 악물고 오랜 세월을 땅밑에 묻혀 있어야만 할 것인가.
―「먹는다는 것」에서
국화꽃을 한아름 뿌린듯 옷자락 전면을 장식한, 길고 하얀 너울위에 장미꽃으로 엮어 만든 화관을 쓰고 거울앞에 서 본다. 스스로 보기에도 눈부시도록 정결한 모습! ……마지막 날에 나는 이 옷을 입고 나의 하느님께서 예비해 주신 그 나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겠는가?
―「수의(壽衣)」 에서
엄마 죽은 뒤에 울음을 삼가하고…… 엄마의 마지막 영혼을 축복해 다오……
일체의 세속적인 형식을 떠나서… 관을 향그러운 꽃으로 묻어 보내다고.
―1971년 11월 7일 새벽 1시에 쓴 ‘유서’』에」서
이영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 부분들의 인용이다. 여기에는 다소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 같다. 이영도는 ‘유성’을 두고 “자신의 간절한 향수인지 모른다”고 했다. 바로 그 ‘유성’이 지는 순간의 경건함을 아픈 기원에 견주어 쓴 것이 수필 「유성」이다. 평소 이영도는 “우러르면 내 어머니/ 눈물 괴신 눈매 // 얼굴을 묻고/ 아, 우주이던 가슴” (「달무리」)이라고까지 모정(母情)을 노래했다. 이영도에게 어머니는 “더 크고 높은 것보다 더 영원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로 “더욱 정결하고 진실한 것으로써 그의 멀어져가는 시력과 청각과 또 식어가는 체온을 밝히고 덥혀 드려야”겠다고 다짐한 내용을 「유성」에 담고 있다.
「먹는…」은 버릇처럼 반복하던 육신의 화장(火葬)으로 지상에서 소멸한 뒤 “하루 아침 크낙한 음성이 있어 내가 부활하는 그날!”을 염원한 글이다. 「수의」는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을 염려하여, 유학간 딸의 송금(送金)을 “어떻게 쓰는 것이 보람스럽겠는가를 백 가지로 견주어 보다가 결국 수의를 마련하기로 했다”는 사연을 담고 있다. 이영도는 자신의 부실한 건강으로 “너무 슬픈 애정을 감당하며 견뎌온 여인”이었다. 수의 또한 아무리 화려해도 “인생 한평생의 마지막 차림으로는 지극히 초라”하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더욱 가까이 불러 위로해 주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던 그는 「유서」를 쓰기에 이른다. 유서를 쓰기까지의 동기는 유치환, 이호우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황혼에 서서」는 1968년에 씌어진 작품으로 그같은 이영도의 심경이 읽힌다.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물” 때 “바다를 굽어보는 머언 침묵”은 “한결같은 나의 정”이라고 읊었다. “그 달래임같은 물결소리 내소리”에서는 상실 뒤의 아픈 견딤의 시간도 드러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거부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죽음은 시기의 조만(早晩)만 다를 뿐 어느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임에도 거기에 다가서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영원이라고 하는 시간의 설정은 유한성에 대한 심리 보상의 가정일 뿐이다. 하루의 태양에서도 4계절의 순환에서도 세상을 돌고 도는 이치에 놓여 있다. 인간의 수명은 그러나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죽음이란 어휘만큼 인간의 완강한 어둠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영도는 여기서 벗어나 바로 그같은 죽음이 거부되고 있지 않다. 단 그가 거부한 것은 ‘추한 죽음’이었다. 영생과 부활을 신앙하던 그는 이 세상에서 추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의 거부대신 초라하고 추한 죽음의 거부로 하여 이영도의 ‘여기까지’와 ‘여기부터’의 의도가 선명해지리라 본다. 추한 현실에 대비한 이영도에게 ‘수의’의 제작과 ‘유서’의 작성은 그래서 실제 의미 이상에 나아가 있다. 『청저집』에서부터 “남은 일월을 비단실로 사기고”싶다고 한 이영도였다. ‘추한 죽음’에의 거부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부질없는 값싼 생각으로 수의나 유서만 남기면 추한 죽음이 거부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크든 작든 역사와 신앙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이영도의 의도된 음성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삶의 자세와도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이영도의 이 ‘목숨’의 어휘는 그래서 단순한 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죽음’의 거부대신 ‘추한 죽음’을 거부한 이영도 문학의 한 정신의 본질을 캐는 일이라고 믿어진다.
5. 역사 의식이 남긴 언어
이영도에게 ‘목숨’이라는 어휘는 초기의 그것들에 비해 두드러진 후기적 현상임을 보아왔다. 이는 이영도의 역사정신과도 관련을 갖는 동시에 한국 현대시조문학사의 현재성을 재는 의미와도 관련을 갖는다.
그는 일상적으로는 여자로서의 행복에 등(燈)심지를 돋았던 사람이다. 조국애를 표나게 내건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부분에서 이영도의 역사정신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은 그의 언어가 역사의식의 파고를 나름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도는 피폐한 조국산천을 보면서 “자연애의 반역”(「메마른 국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지적했었다. 편리주의의 부산물인 “공장의 폐수와 합성세제의 독소가 식수와 농작물을 망친다”는 걱정도 했었다. 또한 그는 “겹겹으로 골이 패인 이마의 우울이 원색으로 입힌 스레트 지붕밑을 부우옇게 감기는 농가”(「8월이 오면」)의 가난도 걱정하고 있다.
이같은 것들은 더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로 그의 역사정신이 다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영도 자신의 회고대로, 동경대학이나 북경대학에의 진학을 좌절당하고 만 사실을 두고 “구구한 목숨을 오늘까지 부지 못하고 일제의 독수리에 주륙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 그 시절의 젊음으로서는 통곡으로 다 못할 애석이 아닐 수 없다.”(조현경, 『이영도 평전』, 영학출판사. 1984, p.195)는 가정법적 사실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유관순이처럼 집안을 적지로 만들 아이”로 자랐을지도 모를 이영도가 작품으로 드러내 보인 역사정신의 언어는 『청저집』에서부터 끊임없이 드러난다.
이영도의 역사정신은 주로 두 가지 면에서 다룰 수 있다.
먼저 남북분단의 미망(迷妄)을 그는 이같이 노래했다.
조국의 솟은 분노 저 타는 화염 속을
차라리 백설처럼 그대는 지는 것을
이 강토 이 슬픔 위에 보람없는 내 목숨
―「안타까움」 2연
6·25를 겪으면서 위 시조가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제목부터가 「안타까움」이다. 민족이 하나 되지 못하고 피의 전쟁으로 맞서야 하는 시간에 이영도는 “보람없는 내 목숨”을 자탄하고 있다. 조국은 무엇 때문에 저 화염같은 분노로 불타고 있는 것일까.
이 시에서는 그러나 “이 강토 이 슬픔위에”라고만 되어 있어 더이상은 헤아릴 길이 없다. 조국의 의미는 이영도에게만 심각한 것은 아니다. 백설처럼 지는 ‘그대’는 조국의 미망 위에 소멸되어 간 젊음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조국에 대해 ‘보람없다’고 한 것은 민족 모두의 딜레마가 아니었을까.
그때 그는 “정든 고향과의 인연 피멍처럼 애석(愛惜)하며” “빗발치는 총알속” 어딘가로 쫓기고 있었다(「피난길」) 그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자탄하는가가 조금 보이는 듯도 하다. 피난길에서 포연이 진동하고 그것을 피하기라도 하는양 엎드린 집들을 보고 그가 느낀 절망은 너무도 컸었다. 그러나 조국은 어느 한쪽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기에 이영도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도 편향된 연대감을 보인 일이 없다. 또한 민족 상잔의 역사를 피에 젖은 치욕이라고만 적시하며 젊은 목숨들이 낙화로 져 간 사실을 슬퍼한다. 그의 역사정신의 남다른 곳은 바로 이 부분이다.
지친 능선 위에 하늘은 푸르른데
깊은 골 칠칠한 숲은 아무런 말이 없고
뻐꾸기 너만 우느냐 혼자 애를 타느냐.
―「피아골」 2연
이영도에게 이 자리의 조국은 ‘지친 능선’으로 누워 있다. 거기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을 것이나 피어린 역사를 간직한 “칠칠한 숲”은 더이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뻐꾸기만 애를 타는 듯 울어댄다는 대목에서 이영도의 역사정신은 유난히 돋보인다. 그 표현 또한 그의 재능과 결부되어 있다.
작품을 쓰는 시인에게 역사정신의 균형은 그 무엇에도 우선할 것이다. 민족문제를 노래한 어느 작품에서도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경사를 드러내지 않았음이 이영도의 언어가 가진 역사정신의 균형을 의미한다. 이영도의 이같은 정신은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유치환과 몇 년간의 세월(1946~1952)을 두고 서로의 일기를 교환했다고 한다. 그때 이영도는 어느 만큼의 유치환의 일기를 불태워 버린 일이 있었다. 유치환의 그 일기가 우익에 가담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이영도 평전』, p.150 참조) 이것은 한때의 해프닝 이상의 것으로서, 그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진 적도 있었던 것이다. 이영도의 민족에 대한 균형 감각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처럼 난처할 때에도 이같이 편향된 연대감을 보인 일이 없다. 극에 달한 불행으로 “혼자 애를” 태웠을 뿐 기울어지지 않았던 역사정신의 균형은 유치환과의 관계에서처럼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은 분단의 문제와 함께 역사의 내적 상황에서 그의 응전력이 어떠했던가를 보는 일이다. 그의 이같은 정신의 유입은 「애가(愛歌)」(1960. 4)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친 능선” 위의 하늘을 푸르다고 했을망정 한쪽의 불온성(不穩性)만은 드러내지 않았던 이영도의 4월에의 절규는 사뭇 장엄하다.
눈에 포탄을 박고 머리는 맷자국에 찢겨
남루히 버림 받은 조국의 어린 넋이
그 모습 슬픈 호소인양 겨레 앞에 보였도다
행악이 사직을 흔들어도 말 없이 견뎌온 백성
가슴 가슴 터지는 분노 천동하는 우뢰인데
돌아 갈 하늘도 없는가 피도 푸른 목숨이여!
너는 차라리 의(義)의 제단에 애띤 속죄양
자국 자국 피 맺힌 역사의 깃발 위에
그 이름 뜨거운 숨결일레 퍼득이는 창천에…….
―「애가」
이 시조는 “고 김주열 군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자리에서 이영도가 절규한 것은 “눈에 포탄을 박고 머리는 매자국에 찢겨/ 남루히 버림받은 조국의 어린 넋”에 대해서다. 조국 현실에서 “돌아갈 하늘도 없는가”를 거의 핏덩이처럼 쏟아내면서도 그는 “피도 푸른 목숨”이라며 하늘을 믿었다. 여기서는 어떤 수사학적 논의도 무의미하다. 상황과 현실에 잠들거나 비켜서지 않고 어떻게 언어를 펼쳐냈는가만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태평성대에도 도락취미에 기여하는 소일거리일 수 없다. 그만큼 문학은 치열한 정신을 필요로 한다. 바로 역사의 어둠으로 좌초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하늘을 이영도는 어떠한 장식도 없이 “가슴 터지는 분노”라고만 했다.
이영도의 역사정신은 때로 열혈적 언어가 되어 굽이쳐 갔다. 4·19는 해를 거듭하여 이어졌고 이영도의 정신 또한 이같이 흘러갔으니 한국적 미의식만을 거의 배설적으로 되풀이하던 시조창작의 현실과는 사뭇 현격한 것이기도 했다. 「진달래」(1968) 또한 이같은 자리에서 씌어진 것이다. 이영도는 눈부시게 피어 있는 진달래를 “그날 쓰러져 간 젊음의 꽃사태”로 노래하며 자신은 “욕처럼 남은 목숨”이라고 했다. 「진달래」(1976)는 이어서 씌어졌다. 그는 조국을 “내 목숨의 불씨 여밀수록 맺히는 아픔”으로 되새기고 “세월이 어두울수록 밝혀 뜨는 언약”을 희구했다. 바로 진달래를 “석문 밖 북녘하늘”에다 연등처럼 밝히고 “인연의 짙은 혈맥”으로 묶어 한 무더기의 칠성으로 향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희방사 계곡」에서도 4·19의 감격은 드러난다. 눈이 내릴 때도 “갈라선 겨레의 금(線)”을 위해 손을 모았고(「제야」1976) “눈, 입, 귀 멀거니 뜨고 막힌 피도 굳은 등신불”(「수혈」)의 처지를 자탄하기도 했었다.
4월은 이영도의 시정신을 개화시킨 계절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그같은 의미를 재는 관문적인 작품으로 생각된다. 조국은 바랠 수 없는 녹물같은 얼룩으로 덮여 있었다. 그때, 4월에의 체험이 한 고비를 넘어서는 크낙한 분만의 계절 (「고비」)이 되었다는 “산하도 끓이던 청혈” 또한 그러한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이들 모두는 역사정신의 믿음에 근거한 이영도의 문학이 혈서의 자리에 나아간 것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4월이 이영도에게서 어떤 질서와 파고로 솟구친 가치정신의 소산이었던가는 조잡한 대로라도 살펴왔다. 분명 4월은 이영도가 쌓아올린 역사 정신의 높이였다. 그리고 4월은 그의 존재가치에 값하는 계절이기도 했었지만 우리의 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신 벗고, 탑 앞에 서면 한 걸음 다가서는 조국
그 절규 사무친 골엔 솔바람도 설레어 운다
푸르게 눈매를 태우며, 너희 지켜 선 하얀 천계(天啓)
―「천계」(1976)
“4월탑 앞에서” 그것도 “너희 지켜 선 하얀 천계”를 이영도는 읽고 있다. 산화해 간 4월의 넋들의 부활을 그는 읽고 있는 것이다. 산화는 한순간의 소멸이다. 그 소멸로 하여 “목숨의 아픈 증언/ 꽃가루로 쌓이는 사월”(「바위」)은 “솔바람도 설레어” 울었던 “천계”의 계절이 되었다.
이영도는 부활의 세계를 신앙하고 있었다. 세속적으로 부활은 현실세계의 재현을 의미하지만 이영도의 부활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바로 이 4월은 이영도가 “그 절규 사무치게” 산화해 간 넋들에게 “신 벗고” 설 때 다가오던 조국을 체험시켰다. 현실세계에서 4월의 소멸은 또다른 4월의 부활을 분명한 믿음의 세계에 세워두게 했던 것이다. 바로 “4월의 들녘에 서면 다시 사는 당신의 말씀”(「부활의 노래」)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제야 우리는 이영도가 의도한 4월의 전체성에 도달하였다. 그의 역사정신에 표출된 4월은 산화해 간 넋들로 하여 일시적으로 소멸한 듯했지만 부활이 기약된 천계를 거치면서 신앙의 세계에 올라선다. 문학과 역사가 어느 지점에서 하나이듯 역사정신과 신앙의 계시 또한 같은 것임을, 그리하여 이영도의 4월에서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6. 황홀한 기약과 섭리의 세계
이영도에게는 몇 가지의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인간 이영도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었다. 인간애, 남녀간의 사랑, 어머니, 신앙 등의 믿음이 그것이었다. 한 가정의 지어미로서의 소망이 연리지(連理枝,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나뭇가지가 하나로 이어진 것, 즉 애정이 지극한 부부를 의미함)의 세계를 희구했건만 그것은 한정된 시간에 무산되어 버렸다.
실로 인간세계의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일점 혈육에게까지도 “비판적인 사랑이 외롭지 않느냐”(「딸에게」)고 반문하던 이영도였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영도의 심증에는 두 가지의 세계로 충만해 있었다. ‘어머니’와 ‘절대자’의 세계가 그것이었다.
이영도에게 ‘어머니’와 ‘신앙’은 하나의 의미로 이어진 정신세계의 우주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세계가 희생에 대한 노심초사의 의미였다면 ‘신앙’은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간 구원과 섭리의 세계였다.
이영도는 기독교를 신앙했다.(이 부분은 『이영도 평전』, pp.46~56 참조) 불교적인 질서와 유교적인 가정법도의 세계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간 것이다. 그 개종은 결함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었다. 1946년 5월 폐침윤으로 마산결핵요양원에 입원한 것이 그것이다. 조부를 따라 불공을 다니면서 “인간에게보다 신과 자연에 친근한 성품”(「조부님」)이 길러졌다고 회고했던 이영도였다. 그러던 그가 요양원에서 40대 중반의 가정부의 감화로 개종했던 것이니 기독교에의 믿음의 단초는 철저히 인간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이얀 마스크로 얼굴은 가리워도
만나는 그 눈마다 그리움이 어려있고
말없는 몸짓 하나도 정이 절로 느껴라
앓는 소리도 마주 보고 근심하고
먼 병실 기침소리 내 가슴이 조여 들고
그립던 임의 사랑을 여기 와서 보도다.
―「입원」
“요양원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예의 가정부가 소재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하이얀 마스크로 얼굴은 가리워도/ 앓는 소리도 마주 보고 근심하고” “만나는 그 눈마다 그리움이 어려있던” 그 가정부는 이영도에게 하늘의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이영도는 거기에서 “말없는 몸짓 하나”마다 “그립던 임의 사랑”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당시로서 이영도에게 ‘임’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앙의 초입에서 설정된 ‘임’이기에 절대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이 감동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것이 믿음의 이치이다. 개종을 결심할 만큼 헌신적이었던 그 가정부의 기도와 찬송이 곧 하늘의 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구한 세계가 섭리의 세계였다.
섭리의 세계는 신의 의지로 다스려지는 세계이다. 이영도는 섭리를 통해 궁극적인 사랑의 세계에 나아가고자 하였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는 “이 산천 허물도 없이 한 품안에 안겼다”거나 “왼세상 백설 이대로 깊이 고이 하소서”(「눈」1954) 정도의 소박한 것이었다. 순수무구한 것만이 “그의 가슴처럼 넓고 고운 사랑”이라 여기던 단계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보다 적극적인 자리로 나아간다. “골고다로 젖는 놀”을 보면서 “회한은 어진 깨달음”으로, 인간세계에서 “뜨겁던 임의 그 피”를 느끼기도 했던 것이다 (「저녁놀」). 또한 내리는 눈을 보면서 “그날 그 사랑을 타이르는”(「눈」, 1954) 당부의 말씀으로 듣기도 했었다.
못 여는 것입니까? 안 열리는 문입니까?
당신 숨결은 내 핏줄에 느끼는데
흔들고 두드려도 한결 돌아앉은 뜻입니까?
―「절벽」(1968)
위의 작품에서도 이영도는 “당신 숨결은 내 핏줄에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못여는 것”이냐 “안 열리는 문”이냐 “흔들고 두드려도 한결 돌아앉은 뜻”이냐고 강한 의문을 반복해서 던지고 있다. 신의 숨결이 핏줄에 느껴진다던 그에게 신의 세계에의 진입은 아직 이른 단계였던 것이다. 그것의 구체성은 “우러르던 첨탑들도 허울로만 남아선”(「추청(秋晴)을 간(磨)다」) 세상에서 “주여! 이젠 그 못자국 만지게” 해 달라고 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 때의 기도는 간청만으로 맴돌 뿐 공허한 것임이 느껴진다.
이같은 의문은 몇 곳에서 더 보인다. 그러나 “거듭난 목숨의 연등”으로 “한 하늘을 밝”히고자 간구하기에 이른다. 이영도는 “묻혀 간 밀알의 눈매가 청즙(靑汁)으로 어리는” 세계가 “다시 사는 당신의 말씀”이 “이랑마다 소곤대는” 세계라고 했다. 바로 “죽지 지친 목숨”의 현실 위에서 그는 거듭난 것이다. 세상이 곤고할 때 이영도는 “갈퀴손 어루만지며 언약인듯 오실”(「설야」) “당신의 말씀에 흥건히 적심을 입”었으며 “심령의 덩굴”마다 거듭나는 시간에 들었다.
위에서 읽어온 이영도의 섭리의 언어는 어디에 터잡고 있는가. “닫힌 절벽” 앞에서 이영도는 “이 목숨 싹트임도 당신의 뜻”이라 했다. “제 눈에 티도 못 비친” 청맹(靑盲)의 창을 닦고 또 닦았다. 이것들은 모두 그의 섭리의 언어가 터잡고 있는 구원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영도 자신의 부정과 회의라는 강한 의문이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구원에 도달한 섭리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빛부신 그 음성”과 “높고 먼 뜻”(「청맹의 창」)의 세계에서 “화관을 이고” “황홀한 기약”(「화관」)을 맞이하는 세계에 들고자 한다.
이영도가 요량한 “황홀한 기약”은 그가 위치한 현실세계의 건너편의 세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번민과 회의를 거듭하던 이영도였다. 여기에다 자기 갱신과 구원을 신앙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회구하기도 했었다. 자기 갱신과 구원에의 희구는 조국현실에도 이어졌던 것으로 “이 터전 상잔의 호국위에 인자 다시 보내”(「갈원」)달라고 간절한 언어를 빌어 기도하기도 했었다.
“또 하나 나를 겨루어 등이 굽은 예순 해”(「흐름속에서」)를 살았던 이영도는 “쟁쟁히 말씀을 밝히며” 섭리의 세계로 갔다. 그의 예순 해는 분명 “뜨겁게 생애(生涯)할 씨와 날을 감는 꾸리”(「기도」)의 세월이었다. 그 씨와 날로 짜올린 “내 목숨같은 기도”로서의 시조는 “죽지 지친 목숨위에” 피어난 시정신의 절정이었다. 검(劒)을 받은 삼엄한 신앙의 세계에서 연정으로도, 모정으로도, 조국애의 강렬한 언어로도, 고향 산마루 열고 가는 비파강의 강물로도 이영도의 그 예순해의 씨와 날은 오직 시조로만 짜여졌던 것이다.
7. 마무리, 대형 경기장같은 단시조의 장인
30년간을 “내 목숨의 기도”로 시조를 창작한 이영도는 ‘황진이 이후’의 시인으로 평가되었다. 이들이 같은 자리에서 견주어지는 것은 우선 ‘여자로서 시조를 썼던’ 사실에 기인한다. 두 사람은 또한 그리움의 간절한 세계를 나름의 자리에서 같은 방식인 단시조로 펼쳤던 장인(匠人).
이영도 문학에서 ‘그리움’은 이영도 자체의 정서이기도 했다. 남편의 상실 뒤에 “고향도 인연도 잃고” “설한(雪寒)의 저 거리를” “고달픈 나래 겹치고” “하염없이 앉았다”(「어디로 가야 하리」)고 할 만큼 현실의 곤고한 시간도 거쳐왔다. 그러나 그리움의 정서는 이내 회복된다. 바로 이 ‘그리움’의 정서에 비파강의 물결이 흘러들고 ‘부엉덤’의 산 기슭이 뻗어든 것이다.
못잊을 인정이매 아껴 떨쳐 나온 고향
2수 3산(二水三山)을 안고 그림같은 그 마을은
눈이나 내리는 밤엔 이리 삼삼 그립소
모두가 정답고도 황홀하던 꿈이어라
하늘에 별이라도 따고 싶던 그 시절을
오붓이 버려둔 고향 무덤 같이 그립소
부녀 삼종(三從)의 도를 진리인 양 당부하여
알지도 못한 곳에 선행길 날 보내신
청기와 늙은 대문도 두견 같이 그립네
젊음도 슬픈 꿈도 속절없던 내 고향은
손 잡고 반겨줄 벗 하나 없건마는
물소리 고운 산천이 두견 같이 그립소.
―「향수」
‘그리움’은 고향 정서의 원형질이다. 위의 작품이 『청저집』의 소산인 데도 우리의 결론에 오른 것은 그리움의 초점인 고향이 여러 개의 빛깔로 형상되었기 때문이다.
「향수」는 이영도의 유년시절을 담고 있다. 그의 유년시절은 “모두가 정겹고 황홀하던 꿈”의 세월이었고 “하늘에 별이라도 따고 싶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이작품을 쓴 시간) 고향은 “손잡고 반겨줄 벗 하나”없이 공허한 곳이다. 그럼에도 그 고향은 “눈이나 내리는 밤엔” 더욱 깊은 정겨움에 사무친다. “부녀 삼종의 도를 진리인양 당부하여/ 알지도 못한 곳에 선행길 당부하던” 고향이건만 “물소리 고운 산천이 두견같이” 그립기만 한 것이다.
이영도 문학을 우리는 다섯 갈래로 살펴 보았다. 그것들은 설화적 세계의 순정성에서부터 섭리의 세계에 이르는 상당히 장황한 것이었다.
이영도는 단시조의 모습으로 우뚝한 시인이다. 단시조는 3장 6구라는 매우 협소한 공간의 구조임에도 이영도는 대형 경기장처럼 자신의 우주를 펼쳐 보였다. 그 우주에는 설화성의 따뜻한 온기와 상실의 비애도 노래되었고, 이영도의 방법적 특장인 서정 속의 서사적 질서가 숨쉬기도 했었다. 그가 문학을 통해 드러내 보인, 그의 인간적 조신성인 ‘마감’과 ‘시작’의 질서 또한 확실한 정신 위에 자리잡았던 것이며, 그것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정신에도 섭리의 세계에도 이어져 있었다.
이영도의 역사정신에는 두 가지의 모습을 지닌 남다른 인식에 터잡은 것이었다. 민족분단이 그 하나로 그가 드러낸 분단비극의 정신세계는 이데올로기의 편향된 경사가 신념으로 극복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4·19에 잇댄 역사정신의 높이로 소멸과 생성이라는 변증법적 구도가 산화(散華)와 부활을 우리에게 체험시켰다. 이것이 그의 가치정신의 세계를 지키는 섭리에 근거한 것이었으니, 이영도의 신앙과 같은 노래에서 4월의 정신이 새롭게 살아난 것이다.
======================================================================* 김 종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조선대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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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시조시학 2000 하반기호] [새로쓰는 시인론/이영도론]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