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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카페
민종식(閔宗植)은 경기도 여주에서 판서 민영상(閔泳商)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청양의 정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21일) 광수장터(예산군 광시면)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바로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의병은 화성의 합천 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패산하였다.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5월 9일(음력,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티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민종식은 의병을 이끌고 서천, 비인, 남포를 거쳐 홍주에 도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이 공주 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의병부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의 명령을 받은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을 포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으며,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3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민종식은 성을 빠져나와 예산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민종식은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민종식은 공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결국 11월 20일에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체포된 후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에 대하여 민종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민종식은 1907년 7월 2일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져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순종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주 26]
이용규(李容珪)는 충남의 부여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에 매부인 민종식이 예산의 광시에서 홍주의병을 일으킬 때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주의병은 다음날 청양의 합천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안병찬 등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용규는 이때 체포를 피해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등 전북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부여의 지티에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였다. 그는 참모사가 되어 의병의 홍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 당하자 탈출하여 다시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수습하여 그해 7월에 청양군 杻峙에서 의병 4백명을 모은 뒤 부여, 노성을 지나 연산 富興里에서 일본군을 만나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훈련 부족과 화력의 열세로 패하였고, 간부들은 피체되거나 순국하고 말았다.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순국하였고, 채경도, 오상준 등의 참모들은 피체된 뒤 공주부에 감금되었으며, 나머지 의병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용규는 그뒤 8월경에는 온양 石岩寺에서, 그리고 9월에는 다시 공주 蘆洞에서 연이어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간헐적인 투쟁을 지속하였던 것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 기인하는 결과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병들은 조직력과 기동력, 투쟁력을 발전시켜 갔다. 그 뒤 이용규는 1906년 10월경 예산군 閒谷(현 대술면 상항리)에 있던 修堂 李南珪(1855~1907)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항전을 재차 도모하였다. 거사 일을 10월 5일로 정하고, 일단 민종식을 성우영(成佑永)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예산 관아를 습격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0월 2일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계획이 드러나 김가진(金嘉鎭)이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되어 이남규 부자, 곽한일(郭漢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907년 2월 평리원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일에 평리원 고등재판소에서 감 1등되어 ‘내란죄’로 종신유배형을 선고받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곽한일(郭漢一)은 1906년 5월 남규진(南圭振)과 더불어 예산에서 기병하고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한 소식을 듣고 홍주의진에 합류하였다. 곽한일은 돌격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홍주성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에 일본군의 대공세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의진은 궤멸하고 말았다. 곽한일은 성을 탈출하여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재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예산의 한곡(閑谷, 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사는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참모의 직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에 밀고로 거사 계획이 일본 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에 적의 기습을 받은 곽한일은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李錫樂)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곽한일은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민종식 등 의병활동에 대해 재판부는 내란율인 『형법대전』 제 195조 政府를 傾覆하거나 其他政事를 變更하기 爲하여 亂을 作한 者는 絞에 處함이라는 규정을 적용하였다.
먼저 피고 민종식은 195조에 의거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 이용규, 박윤식, 김덕진, 곽한일, 정재호, 황영수는 195조를 적용하되 동법 135조 從犯은 首犯의 律에 一等을 減함이라는 규정에 의해 형이 감해져 종신 유배에 처해진 사건이다.
피고 중 한명인 이용규는 특사로 풀려난 후 1911년 10월에는 옥천에서 전 승지 노병직(盧秉稷), 전 참의 장남기(張南基), 송순태(宋舜台)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에 밀고에 의해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같은 해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로 유배되었다.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大義士)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경성지검에서 12월 19일 징역 10월형을 구형받았으나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무죄를 선고하여 풀려났다.[주 27]
곽한일은 종신 유배 후 1912년 풀려난 후 1913년 2월에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하고 온양 일대에서 모금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1913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1914년에 체포되어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였다.
洪州義兵이란 홍성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지역 일대인 洪州文化圈 내에서의 의병을 말하는 것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 전개되었다.[주 35] 1896년 홍주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단발령공포 직후 봉기하여 金福漢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탄압을 받았다. 홍주유생과 민중들은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1906년 의병을 다시 봉기하였으며 일본정규군과의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치렀다.
1906년 봉기 당시 홍주의병의 지휘부 구성[주 36]은 다음과 같다.
대 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 정해두
서 기 : 문석환
운량관 : 성재두, 박제순
향 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직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조병순
참 모 : 안병찬, 박창로,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이 홍주성 전투는 중기의병 중에 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기록된다. 또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폭발할 수 있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주 37]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 투쟁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는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력, 2월 21일)에 이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식은 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의 천장리로 삼고 항전에 돌입하여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을 작성하였다.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쳤다. 다음날 의진은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의병진은 화성의 합천(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듣고 공주 주재 일본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군과 함께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인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오전 5시에 이들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어,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합천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는 친척 민진석(閔晉錫)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곧이어 이용규가 초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용규는 합천 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티로 와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한 것이다. 민종식은 다시 대장에 추대되어 부대를 정비하였다. 민종식은 이때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하였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을 거쳐서 5월 13일(음력, 4월 20일)에 서천읍에 도착하였다. 의병은 남포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여 요새인 남포성을 의지하여 반격하였다. 5일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의병부대는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유회군 33명도 영입하였다. 홍주의병은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가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였다. 5월 21일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5월 27일 대대장의 지휘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과 헌병, 진위대에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 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약 400명)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에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때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밀려들었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왔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재집결하여 부여와 노성 지역을 행군하여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으며, 채경도와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감금되었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는 대장에 민종식,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 이용규, 김덕진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하여 박윤식, 김덕진, 정재호, 황영수, 박두표 등 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전남 신안군)로 귀향갔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로 귀양갔다. 한편 안병찬, 박창로, 최선재, 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를 파악하였다.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에 체포되어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907년 7월 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처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민종식: 본관은 驪興. 자는 允朝, 호는 退樵子. 판서 泳商의 장남이다.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定山(현재의 청양)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鴻山(현재의 부여)에 집결시켰고, 여기서부터 舒川, 庇仁, 板橋, 藍浦, 保寧, 靑陽 등 충청남도 서부 일대를 점령한 뒤, 서부의 중심지인 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이렇듯 왜병과 싸워 크게 이김으로써 을사의병 중 경상북도의 申乭石 진영, 鄭鏞基, 鄭煥直 진영과 3대 전투의병으로 손꼽힌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서울과의 교통로 때문에도 일제 침략군에게는 큰 위협거리였다. 그런 까닭에 서울에 주둔하던 일군이 토벌군으로 파견되어, 5월 31일 홍주성에서 대혈전이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일군에게 잡혔다. 그 가운데 南奎振, 柳濬根, 李侙, 申鉉斗, 李相龜, 文奭煥, 申輔均, 崔相集, 安恒植 등 9명은 對馬島에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몸을 피해 朴昌魯, 郭漢一, 李容珪, 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남규의 집에서 모두 잡혔다. 이후 이남규 부자는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고, 그는 1907년 7월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왕실 척족이라는 신분 탓으로 12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악형의 여독으로 1917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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