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1910년 8얼 17일 유인석·이범윤·김학만·차석보·김좌두·김치보 등 블라디보스토크의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합병 공작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했다. 단체명은 ‘성피지죄(聲彼之罪)명아지원(明我之寃)’, 즉 일본의 죄악을 성토하고 한국의 억울함을 세상에 밝힌다는 뜻으로 성명회라 하였다.
성명회는 취지서에서 ‘오늘을 일본에 대한 무장 항전을 결행하는 날’로 선포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므로 우선 ‘우리와 수교한 국가들에 일본의 죄악을 성토하고 한국인이 합방에 반대한다는 뜻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8월 22일 일본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한국 합병 방침을 공식으로 통고했다는 소식이 23일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성명회는 결사항전을 촉구하는 격문 1000매를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뿌렸다. 현재 한국의 병력과 경제력으로는 일본을 대적할 수 없지만, 일본에 ‘병합’되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보전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적에 의해 죽을 바엔 싸우다가 스스로 죽는 길을 택하자는 것이었다.
“바라건대 여러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나아가라. 오랑이 새끼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잡는다. 우리는 피를 흘릴 계책이 없이는 결코 우리의 독립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 수백 명은 한인학교에 모여 다음날 새벽 2시까지 회의한 끝에 독립운동의 두 가지 행동 방침을 정했다.
첫째는 러시아주재 일본 영사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영어와 불어로 된 전문을 각국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애국 청년 50여명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과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했다. 이튿날이 되자 결사대 규모는 1000여명으로 불어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사항전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성명회는 또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영어와 불어로 번역하여 각국에 보냈다. 성명회는 일본의 한국 합병은 한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세계 평화를 해치는 행위임을 성토했다.
그리고 한국 국민은 자유를 위해 무장하여 일본과 투쟁할 각오이고, 성명회는 이미 행동을 결의했음을 밝혔다. 그러니 각국 정부는 국제법, 정의, 인간의 본성의 원칙에 따라 일본의 한국 합병을 반대하고 한국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옹호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성명회 선언서는 대한인민총대 유인석 명의로 되어 있었다. 당시 유인석은 13도의군의 도총재직을 겸하고 있었다. 연합의병부대의 대표가 한국인민 전체의 대표가 되어 ‘한일병합’ 불인정과 항일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을 국제사회에 요청했던 것이다.
8월 26일 성명회 지도자 50명이 일본 영사의 한국인 관할 거부 방침을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이범윤의 제안으로 두만강 결빙기에 200명 단위로 국내진공 작전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만명의 병력이 되면 전면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성명회의 독립전쟁 준비 작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일본의 항의를 받은 러시아 당국이 성명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이범윤 등은 체포되었고, 유인석·홍범도 등은 피신했다. 러시아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와해되면서 ‘성명회’는 9월 11일부로 해체되고 말았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