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153)

[눈동자]

광풍무(153)

[왔소?]







끼루룩! 끼룩!

주혿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바다는 온통 붉었다. 찰랑이는 물살을 타고 반짝이는 수많은 광채 속에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두 사람, 백산과 주하연이었다.

녹옥불장과 함께 들어 있ㅅ던 요정의 서찰을 몇 번이고 읽었다. 영원한 소림을 만들기 위해 저항하지 않았다고 했다. 소림의 주인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객에 불과하기에 반항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울러 새로운 소림을 세워달라고 했다. 그 소림을 지켜달라고 했다. 녹옥불장을 보낸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불제자라고 하는 것일까. 미래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시하고 내일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더 사랑하는 자신과 사고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찌릿!

섬뜩한 기분에 백산은 흠칫 몸을 떨었다. 주위를 빙빙 돌던 주하연이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엥?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놀란 듯 백산은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 이곳에 나올 때만 해도 석양 무렵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었다.

“하연이 너는 왜 여기 있는데?”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소림사를 생각하느라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두 시진이다, 두 시진! 평소엔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왜 나랑 같이 있을 때만 생각이 많아지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고민하는 거야. 그리고 임산부는 운동을 해야 한 대. 심한 운동은 안 되고, 여기처럼 몸에 무리를 안 주는 곳에서 말이야.”

주하연은 수면에 발을 쿵쿵 굴렀다.

“어째 난 생각도 안 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요즘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 지경이다, 녀석아. 저 많은 인간들을 먹여 살릴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구먼.”

백산은 해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놀랍게도 백산이 가리킨 해변에는 상당수가 모여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구양중과 걸레 일행이 데려온 숭산 천신가 옛터에 있던 이들이었다. 물론 야명주를 판 돈이 아직 남아 있어 여유는 있지만 그보다는 강호로 나갔을 때가 더 걱정이었다. 저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오빠가 왜 먹여 살릴 걱정을 해요? 돈은 넘쳐나게 많은데.”

“우리가 돈이 어딨어? 먹고 죽자고 해도 없는 게 돈인데.”

백산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주하연, 설련, 그리고 자신. 전부 한때 잘 살았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 둘은 가문이 멸문당하고 자신은 구룡전패를 빼앗겼다. 그런데 주하연은 돈이 넘쳐나게 많다고 한다.

“주공, 돈은 저에게 조금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유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고기를 잡다가 나왔는지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기다란 줄에는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줄줄이 꿰어져 있었다.

“돈? 살수 네가 무슨 돈이 있어, 임마!”

“노후 생활을 위해 조금 모아둔 돈하고 제자 녀석들 장가보내려고 꼬불친 돈을 합치면, 그럭저럭 땅 좀 하고 건물 백여 채 정도는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일순 물 위에 앉아 있던 백산의 신형이 아래로 쑥 꺼졌다. 너무 놀라 운용하고 있던 내공이 풀려 버린 탓이었다. 수만 평의 땅과 수백 채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돈이라니.

“잠영루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까? 얼마나 바빴던지 돈을 쓸 시간이 없지 뭡니까.”

“에라!”

쑥!

백산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리자 유몽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돈이 많다고 결코 즐거워할 일은 아니다. 자닌 오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고 청부를 했다는 말이다. 강호 무림은 겉만 평화로웠던 것이다.

“그게 무림입니다, 주공. 앞으로 우린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없애야 합니다. 아마 주공의 손에 죽어 갔던 놈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놀이가 아닌 실제 죽음이 오가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설득해서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해야 하고, 무력을 쓰게 되면 죽음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곳이 무림인 것이다.

“그런데 성과는 있는 것 같냐?”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보며 백산은 물었다.

“말도 마십시오. 큰주모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죽했으면 고기 잡아야 한다며 제가 도망을 쳤겠습니까. 역시 사람은 오래 겪어 봐야 안다니까요.”

유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린 시절 사부로부터 무공을 배웠고, 나름대로 힘들게 배웠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사부로부터 배웠던 무공은 설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를 이루지 못하면 잠을 자지도, 음식을 먹지도 못한다. 무조건 과제를 성취해야만 휴식을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다른 무공도 아니고 광풍무였으니.

“너도 광풍무에서 뭐 좀 얻은 것 같던데?”

조금 전 유몽의 움직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과거에 비해 두 배 이상 빨라진 듯했다.

“뭔지 모르지만 얻은 건 있나 봅니다. 몸이 눈곱만큼 빨라진 걸 보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광풍무 속에서 찾아낸 신법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신법으로 인하여 월영은둔술이 두 배 이상 강해진 듯했다. 그렇게도 얻고 싶어 했던 무상신법이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음이 분명했다.

“몽 할아버지, 고기 잡으러 안 가세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주하연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모처람 만에 갖는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자 짜증이 와락 치밀었던 거였다.

“다 쉬었으니까 들어가야지요!”

찔끔한 유몽은 재빨리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그렇다고 사람 무안하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하냐?”

물속에서 나온 백산은 주하연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디, 우리 소령이 녀석 좀 만져 볼까?”

슬쩍 미소를 머금은 백산은 주하연의 배로 슬그머니 손을 밀어 넣었다.

“이제 두 달인데 얼마나 컸다고 그래요?”

“두 달밖에 안 됐어? 그래 가자고 언제 다섯을 채우나?”

“무슨 말이에요? 아이를 셋이나 낳으라고요?”

배를 쓰다듬는 백산의 손길을 음미하던 주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왜 셋이야? 다섯 명이라니까.”

“그러니까 셋이지. 설련 언니가 둘을 낳으면 셋이 남잖아.”

“아냐. 하연이 네가 다섯, 설련이 다섯, 합이 열이야. 나는 열 명의 자식을 낳아야 할 사명을 받은 몸이라고. 만일 녀석들이 죽었다면 마흔 명이 추가되는데....... 그건 좀 무리가 있겠지?

“헥!”

아래로부터 피어오르던 열기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다섯 명 정도야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십 명이라니. 전부 사십 명을 낳겠다는 게 아니고 추가라고 했다. 결국 쉰 명에 달하는 자식을 낳겠다는 말인 것이다.

백산의 품에 안겨 있지 않았더라면 물속으로 빠졌을지도 모르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개돼지가 아닌 바에야 어찌 사람의 몸으로 쉰 명의 자식을 낳는단 말인가. 그런데 더더욱 황당한 노릇은 백산의 말투가 결코 장난말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인 모양이네?”

고개를 돌려 백산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왜 장난말을 하겠냐. 다시 태어난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러니까 쉰 명의 자식을 낳아서 광풍대원의 성을 전부 물려주기 위해 다시 태어난 거라고? 설련 언니와 난 그 일을 위해서 선택된 거고?”

“아! 석두는 승이 있으니까 한 명은 빼도 되겠다. 마흔아홉 명이다. 딸 아들 구별 없이 마흔아홉 명만 낳으면 내가 다시 태어난 사명을 완수하게.......하연아!”

가슴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백산은 화들짝 놀라 주하연을 불렀다.

퍼억!

“끄아악!”

처절한 비명을 남기며 백산의 신형은 허공을 날았다. 고금오천무의 하나인 빙천수라마공이 그의 가슴을 강타해 버렸던 것이었다.

“인간아! 우리가 돼지냐? 어떻게 쉰 명의 자식을 낳아! 새장가를 가고 싶으면 그렇다고 해!”

주하연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해변에서 무공 수련을 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꽂혔다.

“돈도 있다고 했겠다! 이젠 여자를 더 채우고 싶은 거지, 이 빌어먹을 인간아!”

재차 고함을 지른 주하연은 수면을 박차고 날며 백산을 향해 쌍장을 사정없이 밀어냈다.

쩌엉!

엄청난 광경이었다. 그녀의 손을 떠난 백색 광채는 수면을 일직선으로 얼리며 백산을 향해 무섭게 질주했다. 얼음 조각들이 허공으로 솟구치고 날리며 바다는 폭풍을 만난 듯 사방으로 요동쳤다.

“하연아, 그게 아니라니까! 녀석들은....... 크아악!”

가슴을 강타한 백색 광채에 백산은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오 장여를 날던 백산의 신형이 물거품을 남기며 바다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와, 인간아! 물속에 숨으면 못 찾을 것 같아?”

백산이 물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고함을 지른 주하연은 그를 따라 잠수해 들어갔고, 일순 바다는 적요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수많은 물방울을 흩뿌리며 백산이 허공으로 솟아오르자 그 뒤를 주하연의 신형이 따랐다. 마치 고래 두 마리가 노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대장이 임자 만났네요!”

걸레가 광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백산과 주하연의 드잡이로 인하여 일행은 모처람 만에 꿀 같은 휴식 시간을 얻게 되었다.

“임자를 만난 게 아니라 저것들이 사람인지 그것부터 따져 봐야 해.”

허공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를 보며 광치는 중얼거렸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바다는 평지와 다름없었다. 연신 물속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그들의 몸에서는 물 한 방울 묻어나지 않는다. 수화불침(水火不侵)의 괴물 같은 신체들.

백산이야 천하가 인정한 천하제일인이지만 주하연 또한 백산 못지않게 엄청난 내공을 지니고 있다. 아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백산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 그녀가 분명할 터였다.

“그나저나 큰주모님은 그만 하셔도 될 텐데.”

백산과 주하연의 모습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설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광치는 말했다. 동사군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온통 구릿빛이다. 하루 종일 해변에서 광풍무를 암송해 준 탓에 그렇게 변한 것이다.

“주모,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이제부터는 우리가 교육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중 녀석들도 있고 하니 우리들로도 충분합니다.”

설련 뒤로 다가가며 광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럴게요. 오늘은 저도 정리할 게 좀 있네요.”

광치를 향해 미소를 지은 설련은 해변을 따라 걸었다. 일행에게 광풍무를 암송해 주는 건 비단 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마심공이라 했던 그 무공은 이제 시작점에 와 있을 뿐이다. 광풍무의 내용 이곳저곳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백산의 심득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암송했다.

천마심공의 주인은 추렴 언니의 의부였던 철혈전신 철목승의 무공이라 했다. 무슨 이유로 천마심공이 자신에게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완벽하게 익혀 볼 작정이었다.

해변을 따라 한참 동안 걸으며 열대 숲과 함께 아담한 못이 나타난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그녀가 몸을 씻는 곳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못 앞에 도착한 설련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가 옷을 벗었다.

“모래 천지네.”

우수수 떨어지는 모래를 보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으레 그렇듯이 거의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끝나면 온몸은 모래투성이다. 몇 번이고 옷을 흔들어 모래를 털어낸 설련은 못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일순 몸 곳곳을 타고 오른 차가운 기운이 머리를 식혀 주었다. 물속으로 머리까지 푹 담근 그녀는 광풍무를 구술하면서 얻은 내용들을 정리했다.

천마심공(天魔心功). 인간의 심성 중 어둠의 기운을 극대화시켜 내공을 쌓는 무공이다. 어둠이란 정(正)의 반대 개념도 아니었고 사악함과도 달랐다. 양(陽)이 있어 음(陰)이 있듯이 마는 그저 어둠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설련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아까 하연에게 많이 맞는 것 같더니.”

“당연히 괜찮지. 오십 개의 광천뢰로도 어쩌지 못한 몸뚱이고 머린데.”

싱긋 미소를 지은 백산은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는 못 안으로 들어왔다.

“빨리 넓은 집을 짓도록 해야지, 바람피우는 것도 아니고.”

설련을 품 안으로 잡아끌며 백산은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전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하연이가 그랬어요?”

백산의 손길을 음미하며 설련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 낳는 것 때문이었지, 뭐.”

“아이가 왜요?”

“왜 설련도 알잖아. 광풍대원이 나 빼고 오십 명이었다는 거.”

“그런데요?”

“녀석들 대부분 고아였거든. 그런데 녀석들은 장가도 못 가보고 죽었잖아. 제사를 모셔 줄 자식도 없고.”

“그러니까 백랑은 자식을 낳아서 그들의 성을 물려주겠다고 했던 거예요? 한두 명도 아니고 쉰 명을?”

“쉰 명을 나을 수 없으면 한 녀석에게 광풍대원 두 명씩 맡기면 안 될까? 둘을 의부로 모시게 해서.......”

“훗! 엉뚱해요. 제사 모시는 거야 우리가 해도 되잖아요.”

설련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백산의 말처럼 하려면 적어도 삼십 년간을 줄곧 아이만 낳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연이 화를 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열 명은 낳아야 해. 광견조원들의 성을 이어줘야 한다고.”

“다섯 정도면....... 열심히 낳아야겠네.”

설련은 얼굴을 붉혔다. 아이, 하연이 임신을 하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데 어느새 아이 낳을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맞아, 열심히 낳아야 해.”

등에 묻은 모래를 쓸어내던 백산의 손이 겨드랑이 안쪽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날 닮으면 절대 안 되고, 널 닮은 똑똑한 자식으로.”

“으음! 그래도 백랑 닮은 아이를 낳고 싶은걸요.”

백산의 가슴으로 머리를 기대며 설련은 꿈꾸듯 말했다. 가슴으로부터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왠지 모를 기대감으로 몸이 떨렸다.

“지금 이 얼굴은 가짜라니까 그러네. 진짜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못생겼다고. 왜, 달마동에서 살우 얼굴 봤잖아.”

“얼굴 말고 마음씨를 말하는 거예요. 하아!”

점점 강해지는 열기에 설련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한참 동안 가슴을 만지던 손길이 어느 결에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설련은 저도 모르게 물을 와락 움켜쥐었다. 그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서 열꽃이 피었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 설련은 백산의 손을 와락 움켜쥐어 아래로 이끌었다.

“하악!”

몸 깊숙이 침범한 그의 손길에 급기야 뜨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전신을 휘몰아쳤다. 설련은 몸을 빙글 돌려 백산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냥 가만히 몸을 내맡기고 있기엔 몸에서 이는 느낌이 너무 컸다. 그를 만지고 그의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곧 하나가 되었다. 부드럽게 시작된 입맞춤은 이내 격렬해졌다. 허리를 쓰다듬던 백산의 손길은 탐진 엉덩이를 타고 흘렀고, 가슴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은 백산의 아랫배를 스쳐 아래로 흘렀다.

쾌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잔뜩 경직된 두 사람의 몸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뒤이어 앓는 듯한 신음이 하나로 합쳐진 입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사랑해요!”

설련은 겨우 말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와 관계를 가질 때면 언제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서리치기 바빠 정작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만다.

“나도.”

“그리고 고마워요.”

몸이 번쩍 들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에 설련은 황망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잊었다. 머릿속이 온통 백산의 영상으로 들어차 버렸다. 밝고 포근한 빛에 점령되어 일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한곳에 닿고자 그의 어깨를 붙잡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었다. 터지는 신음을 삼켜 보려고 그의 어깨를 깨물어 보았다. 하지만 참으려 한다고 해서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한껏 머리를 젖뜨린 채 비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래에서, 가슴에서, 허리에서, 등덜미에서 그리고 엉덩이에서 상상할 수 없는 쾌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속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상관없다. 색을 탐한다고 욕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그를 품었다는 충만함이 좋고, 온몸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좋다. 마음껏 소리치고 마음껏 쾌락에 겨워하리라. 이성은 너무나 멀기만 했다.

설련의 눈이 암고양이처럼 빛났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인 그녀는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몸짓이 빨라질수록 자그마한 연못은 몸살을 앓았다. 일렁이는 파도 사이로 두 사람의 격한 신음이 터졌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두 다리로 백산의 허리를 감싼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볼 때도 있었고, 때로는 달빛 흐르는 바다를 향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엎드린 채 연못을 보며 달을 찾았고, 때로는 똑바로 누워 하늘의 별을 헤아렸다.

그럴 때마디 설련은 격한 신음을 뱉어냈다. 쏟아내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백산의 품에 안겨 늘어지고서야 두 사람의 향연은 끝이 났다.

“힘들지?”

설련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며 백산은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행복해요.”

그 한마디면 족했다. 그를 품었다는 사실이, 그의 품에 안겨 새벽을 맞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이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내가 보기에는 약한 것 같아. 이래 가지고 어떻게 애를 다섯씩이나 낳겠어? 아무래도 보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

가슴에 나 있는 흉터를 만지던 백산은 옷을 벗어 두었던 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이를 낳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은 건강한 몸에서 나온단 말이야.”

빨리듯 손으로 들어온 목갑을 설련 앞으로 내밀었다.

“뭐죠?”

녹옥불장과 함께 들어 있던 대환단이란 사실을 왜 모를까. 그걸 자신에게 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설련 몫으로 달라고 했던 거야. 그런데 녀석들이 잊지 않고 보냈나 봐.”

“무슨 말이에요? 이걸 왜 제가 먹어요? 저보다 무공이 약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 주세요.”

설련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환단(大還丹). 전설의 신약으로 불리는 무가지보다. 대환단을 복용하고 그 약효를 전부 내공으로 만들 수 있다면 무려 이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얻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중요한 약재를 자신이 복용할 수는 없다. 이곳에 영원히 머물러 산다면 몰라도 다시 무림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설련 때문에 주는 게 아냐. 나 때문에 주는 거야.”

재빨리 목갑 뚜껑을 연 백산은 대환단을 그녀의 입 안으로 불쑥 밀어 넣어 버렸다.

“백랑....... 우읍!”

말릴 틈도 없었다. 입 안으로 들어온 대환단은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목을 넘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일순 설련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을 타고 넘어간 대환단으로부터 시원한 뭔가가 느껴지는 듯하더니, 그것들은 사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것이었다.

“어서!”

설련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밀착시키며 백산은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하고.”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설련은 백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련이 왜 미안해. 나이 먹은 내가 더 미안하고 고맙지. 내가 설련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밖에 없어. 나만큼 강해져서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됐으면 좋겠어.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어. 좀 힘들 거야.”

설련을 향해 미소 짓던 백산의 사지에서 광혈지옥비가 뽑혀 나와 수면을 뚫고 연못 바닥 깊숙이 박혔다. 이어 광혈지옥비를 타고 들어온 거력은 백산의 손을 타고 설련의 내부로 봇물처럼 흘러들었다.

설련의 몸속으로 주입하는 기운 대부분은 사천비(死天匕)를 통해 들어오는 어둠의 기운이었다. 설련의 몸이 꿈틀 움직이자 수면에 잔잔한 파랑이 일었다. 점점이 일던 파랑은 어느 순간 거센 물결로 변했다.

설련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명문혈을 타고 들어온 힘과 내부에서 이는 두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온몸의 혈도를 타고 돌았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엄청난 힘이었다. 이러다 몸이 터져 버리지나 않을지 와락 겁이 났다. 그 참에 머릿속으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길까지만 끌어주면 돼. 그런 다음 맡기는 거야! 날 믿어.]

설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은 알아서 제 길을 찾아간다고 했다. 일부러 이끌 필요도 없고, 억지로 데려갈 필요도 없다. 가는 대로, 바름이 이는 대로 맡겨 두면 될 터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설련은 몸 내부를 관조했다.

수많은 뭔가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기저기서 조그마한 덩어리들이 튀어나오고, 그것들은 대환단괴 백산이 밀어 넣은 기운과 합쳐진다. 그것들은 몸을 타고 움직이고 있다. 뜨겁고 시원하고, 급하고 약하고, 강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온몸을 휘젓고 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백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철목승이 체득한 천마심공의 심득이었다. 그 당시 백산은 암기가 불가능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러나 철목승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구결을 읊었다.

수백 번을 더 들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천마심공의 구결이 하나둘 머릿속으로 박혀 들었고, 전혀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술술 흘러나오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가 주고 난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자살을 못하게 하고자 천마심공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적당한 아이를 골라 천마심공을 전해 주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 소령의 몸으로 빙의하여 다시 태어나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사장되었을 것이다.

그랬던 무공이 광풍무 속으로 녹아들었고, 천마심공을 얻은 사람은 설련이 되었다. 문득 장인어른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천마심공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추렴의 성격과 비슷한 그녀가 아닌가.

‘다시는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내 곁에서 떨어뜨려 놓지도 않을 거다. 설련과 하연은 언제나 나와 같이할 거야.’

설련의 몸속으로 사천비의 기운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백산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설련은 어느 순간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안개처럼 모호했던 개념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천마파천수라무(天魔破天修羅武)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마지옥폭풍무(天魔地獄暴風舞)라는 또 다른 무공이 있었다.

백산의 도움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움직이는 마신상이 바로 천마지옥폭풍무였다. 좌우를 향해 빠르게 손을 휘젓던 마신상이 쏟아내는 건 천력이었다.

깨달음은 곧 폭풍을 불렀다. 백산이 주입해 준 사천비의 기운을 솜처럼 빨아들였다. 설련의 몸에서 검은 운무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검은 운무는 어느덧 거대한 마신상을 형성했다.

가부좌를 한 채 운기행공 자세를 취하던 삼 장 크기의 거대한 마신상이 떠올랐다. 내공이 어떤 경지를 뛰어넘을 때 몸이 저절로 떠오른다는 부공삼매(浮空三昧) 현상이었다. 또 한 명의 초인(超人)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단지 며칠에 불과할지라도 머물렀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일행이 배에 식량과 물을 싣는 동안 백산은 집 앞에 있는 조그마한 봉분을 찾았다. 과거 광살조의 조장이었던 여풍기의 무덤이다.

녀석은 무공을 잃은 채 팔이 잘린 석두를 데리고 동사군도까지 헤엄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석두가 재기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했다. 석두의 무공인 구천광살무도 여풍기가 지은 이름이다. 구천에 가 있는 광살조의 춤이란 의미다.

석두는 여풍기의 무덤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중원에서 쫓기다 죽어간 다른 광살조원들처럼 그도 그렇게 죽고 싶다고 했단다. 그런데 동사군도에 도착해서 보니 허물어진 오두막 앞에 조그마한 봉분이 만들어져 있었다. 평지처럼 변한 그것은 아마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풍기야, 나....... 간다. 이번엔 복수가 아니라 중원을 접수하기 위해서 간다. 형수 봤지? 이제 열일곱 살밖에 안 됐는데 광풍성을 만들자고 하더라. 광풍성을 만들어서 그곳에 광살각을 만들고, 광혈각을 만들고, 광마각을 만들고, 광견각을 만들자고. 나보다 낫다고?”

손 틈으로 흐르는 모래흙으로 여풍기위 봉분을 쌓아 올리며 백산은 중얼거렸다.

“맞아. 하연이도 설련도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야. 머리도 좋고.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걱정 마라, 임마. 이번엔 절대 잃지 않을 테니까.”

‘성공해서 돌아오셔야 하오. 반드시 성공해서 역사를 바꾸어 주시오. 혈광마겁을 제천마겁으로 바꾸고 귀마겁은 천붕귀환으로 바꾸시오. 황실을 구한 광풍대원의 역할을 세상에 알리시오. 마을 듣지 않으면 협박해서라도 바꾸시오. 과거를 바로잡는 게 형님이 해야 할 일이오.’

“알았다. 반드시 기억하마. 우리 광풍대가 했던 일을 세상에 알리마. 내가 그렇게 하마.”

확신하듯 말을 내뱉은 백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절할래요.”

기다렸다는 듯 주하연과 설련이 다가와 봉분에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친 일행은 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출발한다!”

선두에 있는 배에 오른 백산은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이백여 명을 태운 네 척의 배가 물살을 가르며 북으로 뱡향을 잡았다. 해풍을 맞으며 북으로 이동하던 배가 처음 멈춰 선 곳은 강소성으로 향하는 해로에서였다.

“가능할까요, 작은 주모?”

“국고로 환수되었겠지만 약간의 뇌물만 쓴다면 구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정 안 되면 힘을 동원하세요. 뒤통소 몇 번만 까 주면 금방 넘길 거예요.”

주하연은 어색한 미소를 물었다. 그녀가 광풍성을 지을 장소로 택한 곳은 과거 자신의 집터였던 남경왕부 자리였다. 팔아넘긴 적도 없는 집을 다시 사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했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클! 작은 주모도 건달이 다 됐습니다. 뒤통수를 까서 일을 성사시키는 걸 보면. 알겠습니다. 여기 있는 그대로 짓도록 하겠습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광치가 일행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여기 있는 진(陣) 이름이 뭡니까?”

광치는 제가 들고 있는 종이 뭉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광풍군림대진(狂風君臨大陣)!”

주하연은 짤막하게 말했다. 광풍성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할 진식의 이름이었다. 알고 있는 진에 백산이 전해 준 환영미로진을 합쳐 새롭게 구성한 진이다.

“광풍군림대진이라........ 아주 좋습니다. 그럼!”

싱긋 미소를 머금은 광치는 구양중과 함께 다른 배로 몸을 날렸다.

“가자! 우린 산동성을 경유하여 소림사로 간다! 광자는 속도를 높여라!”

“알겠습니다, 방장사조님!”

선저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노를 젓고 있는 이들은 광자를 비롯한 십팔나한이었다. 십팔나한승의 팔뚝에 힘줄이 불끈 튀어나오자 배는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섯다야, 어젯밤 나 좋은 꿈 꿨는데.”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아침부터 모사는 싱글벙글했다. 두 사람의 일과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정이면 어김없이 개울에서 정안수를 떠다가 부서진 탑으로 만들었던 단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집으로 내려와 잠을 자고 아침이면 화정과 유화와 함께 삼천 배를 시작한다.

“무슨 꿈?”

“형님을 봤다.”

“형님? 그 인간을 보는 게 무슨 대단한 꿈이라고 그래, 임마. 꿈에 나타날까 무섭구먼.”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는 놈이 왜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새꺄? 좌우간 기분 째지는 날이다. 형님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 아니냐.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이지.”

어깨를 으쓱하며 모사는 달마도 아래를 향해 걸었다.

“말 안해줄 거야? 형님 뭐 하고 있더냐고!”

모사를 따라붙으며 섯다는 빽 고함을 질렀다.

“궁금하면 너도 꿈꾸면 될 것 아냐, 임마. 부정 타게 아침부터 소릴 지르고 지랄이야. 경건한 마음으로 삼천 배를 올려야 한다는 것 몰라?”

“궁금하잖아, 임마.”

급기야 섯다는 모사의 팔을 확 잡아챘다. 말을 하지 않으면 보내 주지 않을 그런 얼굴이었다.

“놔, 임마. 유화는 벌써 시작했단 말이야.”

“말해 주기 전에는 못 가!”

“남의 꿈을 들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 알지?”

“에라!”

“싫음 관두고. 룰루!”

“치사한 새끼! 여기 돈 가져가, 임마.”

왈칵 고함을 지른 섯다는 은자 한 닢을 꺼내 모사 앞으로 던졌다.

“진작 그럴 것이지. 형님이........ 여길 왔더라. 소령일 데리고.”

간밤의 꿈을 떠올리듯 모사의 눈이 아련히 깊어졌다.
몇 명이 같이 온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면 형님과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소녀의 얼굴. 그 아이는 분명 소령이었다. 묘하게도 둘의 얼굴은 꿈이 깨서도 생생하기만 했다.

“아마 저 불상이 영험한가 봐. 생전 나타나지 않던 형님이 꿈속에 다 나타나고.”

고개를 돌린 모사는 정안수 앞에 놓은 불상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건 불상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다. 검게 그을린 불상은 양팔과 연화대가 없었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부서진 채였다.

불상 파편을 발겨한 사람은 화정과 유화였다. 소림 폐허를 거닐다 흙 속에 묻힌 불상 조각을 발견해 냈고, 이리저리 흩어져 묻힌 그것들을 파내서 붙였다. 불상의 팔다리는 가루로 흩어져 버렸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지금 상태가 된 것이었다.

“저 얼굴 봐라. 형님하고 닮았잖아.”

파면으로 뭉개진 불상의 얼굴을 가리키며 모사가 말했다. 풀썩 내려앉은 코와 눈썹조차 없는 눈, 그리고 빠져나간 이 때문에 볼이 움푹 들어가 버렸던 백산의 얼굴은, 통통하던 볼이 떨어져 나간 눈앞의 부랑과 비슷했다.

어쩌면 눈앞의 불상을 태워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자신들 같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팔이 없는 것은 살우와 석두 형님을 닮았고 다리가 없는 건 일휘 형님을 닮았다. 그리고 검게 타버린 외형은 독인이 되어야 했던 자신들의 모습이다. 아울러 소림의 현재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 닮았지. 우리들하고 아주 닮았지.”

불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화정 곁으로 다가갔다. 벌서 수차례 절을 했는지 그녀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송 맺혀 있다. 안쓰러운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던 섯다는 묵묵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열 번 정도 절을 올렸을까. 산문 입구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들입니다!”

“오늘 내 차례 맞지?”

절을 올리던 모사가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림에 온 지 사 일째 되던 날부터 나타났던 놈들. 북황련 소속 무인이라고 했다. 지금껏 소림에 들렀던 자들이 이십여 명 되었고, 전부 단전을 파훼하여 살려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 온 것이다.

“죽일 놈들! 감히 북황련 무인의 무공을 파훼하고도 살아남기를 바랐더냐?”

탐색하듯 상대를 쳐다보던 전죽은 진득한 살기를 흘렸다. 이십 명의 부하가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고, 상부에는 보고조차 올리지 못했다. 만일 두 사람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전 조장처럼 파문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놈아, 우린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가만있는 우리를 공격한 잡것들도 너희들이고, 내 발 앞으로 단전을 들이민 잡것들도 너희들이란 말이다. 시비 그만 걸고 내려가라, 앙!”

“어림없는 소리. 부하 이십 명이 당했는데 너 같으면 돌아갈 수 있겠느냐?”

“이십 명? 딴엔 그렇기도 하겠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덤벼!”

고개를 끄덕인 모사는 전죽 일행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개자식! 쳐라!”

진득한 욕설과 함께 전죽은 고함을 내질렀다. 손을 까닥이며 오른 다리를 덜덜 떠는 모습은 흡사 시전의 건달을 연상케 했다. 그런 놈에게 이십 명의 부하가 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치욕이었다.

“절반은 저 위로 올라간다!”

“안 돼! 나만 공격해야 해. 나를 피해 가는 놈은 죽는다!”

모사를 위회하여 돌아가려던 북황련 무인들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목소리에 실려 있는 엄청난 살기는 몸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몸을 부르르 떨던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전죽을 쳐다보았다.


“우린 팔십 명이다. 놈들은 둘이란 말이다. 공격해!”

하지만 수적인 우세를 믿고 지른 전죽의 과함은 죽음을 향한 전주곡이었다.

“크아악!”
“아악!”

멈춰 섰던 자들이 산문을 넘어 소림경내로 들어가려는 순간,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은 광채가 번쩍 하는 순간, 선두에서 달려가던 대여섯 명이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시작에 불과했다. 주춤거리는 무인들을 향해 검은 동체가 뛰어들었고, 그들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픽픽 쓰러졌다. 어떤 이는 몸이 녹아들었고, 어떤 자는 찢긴 단전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뒤에서 쳐라! 죽이란 말이다!”

쓰러진 부하들을 보며 전죽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고함은 부하들의 죽음을 더욱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동시에 달려들었던 부하 열 명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광경을 전죽은 지켜보아야 했다.

“독공 고수였단 말이냐?”

전죽은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빌어먹을....... 후퇴하라!”

결국 전죽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 목숨을 보전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전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황련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렸다.

“돌아오겠다, 놈!”

“얼마든지 환영하마. 다음에 오더라도 소림사 산문은 절대 넘지 말거라! 응?”

몸을 돌리려던 모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북황련 무인들이 도망치는 곳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던 거였다. 그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사는 소름이 돋는 듯 팔을 쓰다듬었다.

“너도 느꼈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모사가 섯다를 보며 물었다.

“드디어 무림이 미쳤나보다. 우리 정도 되는 자가 나타난 걸 보면 말이다.”

섯다는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악!”
“커억!”
“으악!”

“적이 아닌가 보네?”

멀리서 짤막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섯다는 의아한 얼굴로 모사를 쳐다보았다. 방금 도망쳤던 북황련 무임들의 비명 소리가 분명했다.

“글쎄........ 빌어먹을 인간!”

전면에서 나타나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모사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검은 승복을 걸친 이십여 명의 중에 둘러싸여 있는 자. 검은 가사를 걸치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과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저 얼굴을 어찌 잊을 것인가.

그였다. 묵안혈마이자 자신들의 형님. 십 년 만에 그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백산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살아........ 있었냐?”

“살아왔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승천무극대혼진에서 살아왔다는 말인지, 아니면 백산에게 살아왔냐고 묻는 말인지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서로를 노려보듯 쳐다보던 세 사람 중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백산이었다.

“살.......우는........?”

“걱정 마시오. 뒤따라오고 있으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져 섯다는 사정없이 눈을 비볐다. 자살이 아닌 삶을 선택한 백산이 고마웠다. 두 명의 여자가 따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고 봐야 했다. 더구나 만다라를 성취하여 광혈지안을 얻었다. 과거의 묵안혈마로 완벽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참! 인사해라. 여긴 주하연이고 이쪽은 설련이다. 앞으로 형수님이라 불러라.”

“형수님, 절 받으십시오. 전 모사라 불리는 전영입니다.”

“전 섯다 장대근입니다.”

넙죽 무릎을 꿇어 버린 두 사람의 행동에 설련과 주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저기, 도련님. 이러시면.......”

주하연은 당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비록 얼굴이 젊어졌다고는 하지만 증조부뻘 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이들의 절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닙니다, 작은 형수님. 저 인간을 살려 주신 것만 해도 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제가 오히려 죄송합니다. 백랑을 힘들게 했으니까요. 여기 소림도 그렇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조금만 빨리 돌아왔더라면, 이들이 있었다면 강호는 달라졌을 것이다. 백산은 반역자가 되지 않았을 터이고 무림공적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천붕십일천마를 상대로 도박을 감행할 자들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에.

“참! 그 말을 안 했군요. 주홍 그 자식, 아니 사돈어른은 북경에 들어와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도련님?”

주하연은 뾰족 고함을 질렀다.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아버지다. 그런데 이들과 같이 북경에 들어왔다고 한다. 아니, 하후장설과 천태진을 두 사람이 없앴음에 분명하다.

“큰절은 제가 올려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하연은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저기 있는 분들은 인사 안 시켜 줄 거냐?”

대충 인사가 끝나자 백산은 달마동 아래에서 이편을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을 가리켰다.

“당연히 소개시켜 드려야지요. 이쪽으로 내려오시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섯다는 화정과 유화를 불렀다.

일순 아래쪽을 쳐다보고 잇던 화정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평소의 반말이 아닌 존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부인을 부르는 것처럼. 의아함도 잠시 두 여인은 서둘러 산문으로 향했다.

“여기는 소제의 내자인 화정입니다. 본명은 일남이고요. 앞으로 제수씨라 부르쇼.”

“여긴 소제의 내자인 유화입니다.”

섯다와 모사의 소개에 화정과 유화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내자라니, 물론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섯다와 모사가 직접 내자라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소개시킨 상대는 두 사람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형님 아닌가.

인사할 생각도 잊고 망연한 얼굴로 섯다를 쳐다보는 화정의 귓전에 낮은 전음이 흘러들었다.

[일남아, 정신 차려라! 형님 될 사람이 주홍의 딸이라고 절대 기죽으면 안 된다.]

“고맙습니다, 제수씨. 저 등신 같은 것들을 구제해 주어서. 혹시 저 자식들이 밥을 하지 않는다거나 빨래를 하지 않으면 바로 말을 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인성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원래 배운 게 없는 녀석들이라 좀 거칠기는 합니다만 인간성은 그런대로 쓸 만합니다.”

“훗!”

화정과 유화는 나직하니 웃음을 토해냈다. 투박한 그의 말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세한 얘기는 집에 가서 나누도록 하고 일단 집으로 들어갑시다. 야, 땡중들! 감상에 젖을 시간 있으면 어떻게 놈들을 없앨까나 생각해! 넋 놓고 쳐다본다고 살아 돌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사조님!”

섯다를 향해 고개를 숙였으나 십팔나한은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광자야!”

그 참에 백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명하십시오, 방장님!”

“달마동 아래 있는 불상....... 저 아래에 있는 마차에 실어 두어라. 세상 사람들이 전부 볼 수 있도록 실어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방장사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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