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작이 임박한 오페라 하우스에서 두 여성이 초조하게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친구가 들어오고 급히 공연표를 꺼내는 그녀의 손에는 래미안(來未安)이 새겨진 키홀더가 반짝거린다. 유난히 돋보이는 키홀더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표정은 경탄과 부러움으로 가득 찬다. 지난 2002년 선보인 삼성물산 아파트 래미안 광고다. 아파트 광고인데도 아파트는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아 무슨 상품을 선전하는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이상한 광고였지만, 이후 래미안은 주거 개념을 뛰어 넘어 가장 가지고 싶은 ‘상품’으로서의 아파트로 떠오르게 됐다.
2000년 이후 건설사 브랜드 도입 박차 브랜드 가치에 따라 가격 천차만별
지난 2000년은 아파트 시장에 획을 그은 해로 꼽힌다. 1998년 아파트 품질의 견인차로 평가되는 분양가 자율화 도입에 이어 아파트에 본격적인 브랜드화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처음 래미안이라는 브랜드가 나왔을 때만 해도 시공사의 이름을 아파트 이름으로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삼성물산에서 삼성아파트가 아닌 래미안이라는 브랜드를 도입한 것은 새로운 시도라는 갈채보다는 동종 업계에서조차 ‘미쳤다’는 부정적인 반응밖에 얻지 못했었다.
하지만 래미안(2000년)에 이은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2000년), 현대산업개발 아이파크(2001년), GS건설의 자이(2002년), 대우건설 푸르지오(2003년) 등의 브랜드가 연이어 출시되며 바야흐로 주택시장의 브랜드 시대가 열리게 됐다. 현재는 80여 개의 브랜드가 나와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건설사가 아파트 이름 짓기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이 이름 하나에 아파트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실례로 2000년 8월 이후 강남구에 입주한 5대 브랜드(래미안, e-편한세상, 아이파크, 자이, 푸르지오) 아파트와 기존 아파트와의 평당 매매가를 보면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8월 5대 브랜드 아파트의 평균 평당 가격은 1,147만 원 선. 그 외 단지의 평당가는 1,013만 원으로 134만 원의 가격 차이를 보인다. 반면 5년이 흐른 2005년 7월 현재 5대 브랜드 아파트와 그 외 아파트와의 가격은 각각 평당 2,848만 원과 2,550만 원으로 그 격차가 289만 원으로 벌어졌다. 브랜드 외 아파트가 대부분 재건축 단지들로 가치에 비해 가격이 높게 형성된 것을 감안할 때 브랜드 아파트의 약진은 더욱 돋보인다.
강남에 비해 가격 상승이 떨어지는 비강남권에서는 브랜드 아파트의 높은 위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5대 브랜드 아파트와 그 외 아파트의 지난 2000년 1월 평균 평당가는 543만 원과 535만 원으로 그 차이는 1.5%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5년 7월의 각각의 가격은 1,182만 원과 924만 원 선으로 나타나 차이가 30%로 커졌음을 알 수 있다. 가격 상승률 역시 5대 브랜드 아파트는 지난 5년간 543만 원에서 1,182만 원으로 118%가 올랐지만 그 외 아파트의 경우 같은 기간 73% 오른 데에 그쳤다.
너도 나도 브랜드 아파트 선호 기존 아파트 개명 열풍
이렇듯 이름에 따라 아파트 가격이 다르게 나타나자 기존 아파트 주민들의 개명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몇 달 차이로 기존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들이 재산가치를 높이기 위해 개명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주택법상 아파트 개명에 필요한 절차를 밝혀 놓은 명문 규정이 따로 없는데다 건설사들도 기존 아파트에 새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에 난색을 표하고 있어 개명 작업이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 7월 집주소가 LG빌리지에서 GS자이로 바뀐 문래동 GS자이. 지난 2001년 12월 입주를 했으나 2002년 8월 자이라는 브랜드가 출시되자 상대적으로 낡은 아파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아파트 명칭 변경을 요청, GS건설의 첫 개명 단지로 기록됐다. 하지만 앞으로 다른 LG아파트나, LG빌리지가 GS자이로 바뀔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래 자이의 경우 입주 직후 새 브랜드가 출시된 것이기에 GS건설에서 개명을 특별히 허락했지만, 건설사 측이 아파트 이름 변경은 원칙적으로 불허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GS건설 박순신 마케팅팀장은 “자이라는 브랜드는 법적으로 하나의 상표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개명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단, LG자이 브랜드를 쓰던 단지에서 GS자이 브랜드로의 변경에는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GS자이로 새롭게 태어난 이 아파트는 개명 직후 35평형의 가격이 4억 7,500만 원에서 5억 3,500만 원으로 한 달 새 무려 5,000만 원이나 상승했다. 특별한 호재가 없었던 6월과 7월이었기에 외견상으로는 개명이 호재로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근 공인 관계자는 “가격이 올랐다기보다는 물건이 갑자기 회수되는 과정에서 호가가 오른 것이다”며 “이름 변경은 입주민들 스스로 만족할 뿐이며 정작 주변 사람들은 바뀐 이름에 별 관심이 없어 실제 개명 효과는 미미하다”고 전했다.
한편, 몇 건의 개명 허가를 해준 대우 푸르지오 브랜드는 가격과 만족도 모두 높아진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해 5월 대우그랜드월드에서 푸르지오로 개명한 강서구 화곡동 화곡푸르지오가 대표적이다. 34평형 4월 매매가는 4억 원이었지만 개명 직후 1,350만 원이 올라 5월에는 4억 1,350만 원을 기록했다. 대형 평수의 오름폭은 더 커 61평형은 6억 4,500만 원에서 6억 7,750만 원으로 3,250만 원이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화곡동 30평대 평균 매매가는 3억 2,200여만 원에서 3억 2,000만 원 선으로 오히려 가격이 떨어졌으며, 60평대는 가격 변동이 없었다. 인근 전원부동산 양동회 대표는 “가격이 강남처럼 눈에 띄게 오르지는 않지만 대우의 대표 브랜드 푸르지오로 개명 됐다는 것에 입주민들의 만족도가 크고, 주변 아파트에 비해 선호도도 높다”고 말했다.
안산 고잔동과 이동의 푸르지오1차와 2차는 개명을 통해 가격 상승보다는 고급화 이미지를 끌어내는데 만족한 경우다. 지난 2001년 4월, 12월에 입주한 두 아파트는 당시 그랜드월드 1차, 2차로 불리던 상태였다. 하지만 2003년 이후 입주한 대우 3차부터는 푸르지오라는 브랜드가 사용된데다 인근 주공 그린빌과 그랜드와의 발음이 비슷해 개명을 신청, 지난해 2월과 8월 나란히 개명에 성공했다. 푸르지오1차 입주민 이모씨는 “고잔신도시는 안산의 대표적인 부촌이자 대우아파트의 텃밭임에도 불구하고 서민 아파트인 주공과 차별화되지 않는 이름이 사용돼 불만이었다”고 말해 가격보다 이름 자체에 대한 불만으로 개명을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개명 이후 가격 변화가 전혀 없었고, 안산 내 대우아파트의 입지를 생각할 때 이름과 가격의 상관 관계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인근 중개업소들의 설명이다.
아파트 브랜드 선호도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래미안의 경우 그 브랜드를 넘보는 단지는 많지만 아직까지 개명된 사례는 없다. 한 달여 전까지 영등포구 당산동 강마을삼성아파트 입주민들이 래미안으로 개명하기 위해 주민 동의를 구했으나, 구청의 승인을 받지 못해 현재는 중도 포기 상태다. 영등포구청에서는 100%의 주민 동의를 요구했으나, 동의율이 이에 못미쳤기 때문이다.
주민 동의가 100% 이뤄진다고 해도 건설사와의 합의가 문제로 남는다. 건설사의 허락이 개명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브랜드가 상표로 등록이 돼 있는 만큼 상표권 침해 문제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 홍보부 관계자는 “아직 개명에 대해 내부적인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지만 래미안이라는 상표 자체가 2000년 이후 품질 향상을 목표로 만들어진 만큼 최소한 그 목표에 부합되는 아파트여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건설사의 기본 입장으로만 보자면 지난 1995년에 입주한 강마을삼성아파트는 100%의 주민 동의를 끌어냈다 하더라도 래미안 브랜드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 이름 변경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즘이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개명 단지들의 대부분은 외벽 도색만을 새 브랜드로 꾸며 놓을 뿐 실제 품질 개선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민들은 낡은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로 새 브랜드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정작 브랜드만 믿고 새로 아파트를 사는 소비자들은 기존 아파트를 높은 가격에 매입하는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 역시 “브랜드는 기존 아파트와의 차별화를 위해 내놓는 것인데 모든 아파트에 브랜드를 달아줄 경우 의미가 퇴색된다”며 “의미가 없어지는 브랜드화로 인해 아파트 가격만 높아지면 결국 피해자는 소비자”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