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각의 바다/장승리-
어떤 추락은 너머가 된다
기억을 염려하는 순간
미리 슬프다는 감각에 몸서리친다 나는
질 수 없는 놀이에는 흥미를 갖기 어려웠다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글씨를 쓰는 것과
hi를 하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힘들었다
한 대도 보이지 않는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을 소외시킨다
짬뽕 국물을 핥고 있는 길고양이의 혓바닥과
측면으로 보이는 남자의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 사이에서 나는
이다와 아니다가 아니다와 이다여도 무관한 문장
나는 널 몰라라는 말도 있는데
너는 날 몰라라는 말을 굳이 해야겠니
잊을 일이 없으니 만날 일도 없는 거라며
중력을 믿지 못해 뛰어내렸니
항상이라는 열린 문 앞에서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접히면 꺼질 거 같아
세상에서 가장 꼴불견인 것은 악마가 절망에 빠져 있는 꼬락서니죠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주제 파악을 하고 있다면
악마는 악마인가
평화롭게 노를 저어 가고 있다
지각의 바다에서
왼쪽으로 넘어간 기역 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나는
보고 있다
-강릉 바다로 떠나면서/김내식-
강물은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강물은 언제나 어디서나
물어봄 없이
염려도 하지 않고 흐름을 계속하여
어김없이 자연스럽게
바다에 이른다
바다도 역시
좋은 물, 나쁜 물 가리지 않고
다 받아 주어 정화시키는
모성의 본향이다
우리네 삶도
물에서 태어나 언젠가는 물이 되어
바다를 찾아가는
인생살이
삶이 아름다우면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위한
죽음 또한
바다를 찾아가는 강물처럼
아름다운 것
죽음이 삶의 연장이라 두렵지 않다면
내가 사는 날 동안
그 무엇이
더 이상 두려울까
나는 강릉 바다를 찾아가며
존재계의 돌고 도는 수고를 끼치지 않고
갈매기의 축복을 받으면서
꽃상여를 타고 노는
꿈을 꾸었다
-그리운 바다/존 메이스필드-
내 다시 바다로 가리
그 외로운 바다와 하늘로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돛대 높은 배 한 척
길을 안내해 주는 별 하나 그리고
물을 밀어내는 키바퀴와 바람의 노래, 펄럭이는 새하얀 돛
해면에 어린 뽀얀 안개와 훤히 트이는 동녘 하늘 뿐
내 다시 바다로 가리
붙잡지 못할 우렁찬 바다물결 소리는
나를 향한 거세고도 분명한 부름
내가 원하는 건 바람세차고 흰 구름 떠 있는 날
튀는 물보라, 날려가는 물거품, 울어대는 갈매기
내 다시 바다로 가리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처럼
바람이 칼날 같은 갈매기의 길로, 고래 헤엄치는 곳으로
내가 원하는 건 껄껄 웃는 친구들의 신나는 얼굴과
그리고 긴 당번시간이 끝난 뒤의 고요한 잠과 달콤한 꿈
-그 자리에 서 있는 바다/최서진-
그리운 것은 벼랑과 긴 벼랑과 먼 벼랑으로 이어진다
레몬을 넣어 주스로 갈아 먹는 밤
절벽을 지워도 레몬 냄새가 가시질 않아
마주보고 다가오는 기차처럼
오랫동안 나는 나를 흔들듯이 흔들 수 있겠다
물집이 잡힌 손으로
노을의 서쪽을 한 참 쓰다듬어 본다
누군가의 추억을 살 듯 다른 곳으로 떠나는
식당의 물컵 같아 세상은
오래 달려도 앉을 곳이 없다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달려도
막다른 거리에 있는 날은 레몬 냄새를 따라
밤새도록 바다 보러 간다
언제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그림자들
어쩌면 우리는 짐을 지고 가기 위해 이상한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곳은 괜찮은지?
잘 말린 바닷바람에 레몬 냄새를 갈아 넣는 밤
오래도록 서 있는 바다 앞에 도착해서
-부서진 바다 앞에서/박세현-
부서진 바다 앞에서
전속력으로 튀어오르는 물방울
(튀어오르다와 달아나다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흰 조각들 손으로 받으면 바다는 바다
흰 파도는흰 파도 물방울은 물방울이다
바다에서 돌아서니 물방울은 물방울이 아니고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흰 파도도 흰 파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흰 파도 이전
바다 이전
물방울 직전
흰 파도가 전면적으로 부서지며 등을 때린다
이건 흰 파도가 아니다
파도라는 말 속으로 들어오는 건
파도가 아니라 파도의 흔적
흔적뿐인 그 말
그건 파도가 아니었어
물방울도 아니었어
바다도 바다가 아니었어
내가 내가 아니듯이
내가 나의 흔적이듯이
-모란문 찻사발과 바다/김경성-
속성을 잃어버린 것들도 긴 시간 끝으로 가서 보면 처음의 마음이 남아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입술의 지문은 지워지고
밀물과 썰물의 주름을 타며
인도차이나반도 눈썹 끝에 올라가 있다
뿌리가 없는 그는 바닷속에 노숙할 집을 지으며
가끔 바다의 등지느러미에 올라가서 별이 되고 싶었으나
바닷속 둥근 달로 떠 있다
찻잎을 담고 차향을 머금었던 몸으로 따개비를 끌어안았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날아가는 새들의 부리만큼이나
단호하게 닿을 수 없는 뜨거움이었다
모란꽃에 붙은 따개비의 가계는 꽃잎 번지듯 천천히 몸을 불려가고
닻을 내린 목선(木船)의 휘어진 선미에도 오를 수 없는 아득함
그 누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오직 우물 같은 몸 안에 바다를 담아놓고
수평선의 본선이 되고 싶을 뿐
찻사발 모란꽃에서 날갯짓하는 나비 위에
휘어진 실금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바다 회사/유계자-
회장은 달
회사명은 밀물과 썰물
조금 때만 쉴 수 있는 어머니는 달이 채용한 2교대 근무자
철썩,
백사장이 바다의 육중한 문을 열면
발 도장을 찍고 물컹물컹 갯벌 자판을 두드리며 바지락과 소라를 클릭한다
낌새 빠른 낙지는 이미 뻘 속으로 돌진하고
짱둥어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살피느라 정신없고
농게는 언제나 게구멍으로 줄행랑치기 바쁘다
성깔 있는 갈매기는 과장되게 끼룩 끼끼룩 거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가끔 물풀에 갇힌 새우와 키조개를 불로소득 하지만
실적 없는 날은 녹초가 되어 비린내만 안고 퇴근한다
평생 누구 앞에서 손 비비는거 질색인데
겨울바람에 손 싹싹 비벼대도 승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별하다고 느낀 달의 거리마저 멀어지자
수십년간 충실했던 밀물과 썰물 회사를 정리하였다
파도 같은 박수 소리
근속 훈장 하나 받아보니 구멍 숭숭 뚫린 직업병이었다
-저 바다가 속을 내어줄 때/임동윤-
그대에게로 가서 파도가 된다면
한 사나흘 출렁대는
저 구릿빛 근육의 사내가 된다면
내 속은 온통 잔물결, 해질 무렵의 하늘
해일이 몰려와도 그저 넉넉히 받아줄 뿐
괭이질 부르튼 손마디는 물집 잡혀도
내가 들여다보는 그대의 집은 흔들림이 없네
차라리 생각의 끈을 놓고
확, 기울여버릴까
고뇌의 끝자락을 잡아당겨서, 훌훌…
저 바다가 속을 내어줄 때
비로소 가 닿을 수 있는 바다
푸른 눈물 한 방울, 거기
한 사나흘 머무는 사내가 될 수 있다면
-바다 5/정지용-
바둑돌은
내 손아귀에 만져지는 것이
퍽은 좋은가 보아
그러나 나는
푸른 바다 한복판에 던졌지
바둑돌은
바다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신기한가 보아
당신도 이제는
나를 그만만 만지시고
귀를 들어 팽개치십시오
나라는 나도
바다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퍽은 시원해요
바둑돌의 마음과
이 내 심사는
아아무도 모르지라요
-갈마(羯磨)*의 바다/강영은-
작살이 꽂혀도
달아날 줄 모르는 너는
착한 짐승
나의 입술에
꽃으로 핀다
벌어지지 않는 꽃잎 위에서
너의 침묵은
외마디 비명을 얻을 뿐이지만
붉게 핀 흉터에서
나의 바다가 완성 된다
너는 푸르고 깊은 바다를
장식(裝飾)한다
동물과 구별되고 싶은
나를 빛나게 한다
열한 번째 만난
사람처럼
서로의 얼굴은 모르지만
얼굴이 지나간 뒤 다가오는
신음 소리,
네가 있음으로
나는 영롱한 죽음을
돌려받는다
벼랑 위에 선
나의 비애(悲哀), 철썩이던 몸이
잔잔해진다
*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의 번역어로서 업으로 풀이되나,
통상은 수계(受戒), 참회 등과 같은 언어와 동작, 법식을 말한다.
-만금은 바다 학교다/신형주-
다큐 프로그램에서
고파도 갯벌이 나온다
경운기 끌고 온 사내
바지락 망태와 할머니들 태우고 사라지고
상공에서 드론이 촬영한 갯벌에
삐뚤빼뚤 자음과 모음이 씌어져 있다
목포댁은 ㄱ자로
순천댁은 ㄹ자로
무안댁은 ㅑ자로
평생 일 공부만 하다 호미처럼 허리 꼬부라진
그녀들이 몇 시간 동안 몸으로 쓴 글씨
배움이 고프고 고픈 고파도 늙은 학생들
내일 또 와서
복습하라고
친절한 파도 선생님
갯벌 공책 깨끗하게 지워놓는다
만금은 바다 학교다
-바다/ 백 석-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여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개지꽃 : 갯메꽃
-바다의 책/김현주-
어둠 속 울돌목, 노란 안전선의 점자를 읽는다
천 개의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하얀 지팡이
똑똑, 하얀 지팡이가 천천히 바다를 더듬을 때마다
한자 한자 물위로 떠오르는 바다의 낱말들
어둠은 빛으로 나아가는 울돌목이다
아득한 빛과 어둠의 경계,
믿음으로 바다를 움켜쥐자 손바닥 안에 물의 지도가 생긴다
점과 점으로 색인된
그 방대한 바다의 내용을 천천히 읽는다
여기는 넙치의 길, 여기는 문어의 길, 여기는 생명의 길, 여기는 짐승의 길, 여기는 사망의 길,
어미 다랑어가 새끼다랑어를 끼고 젖을 물리며 유유히 학습하는 난바다
물살 센 사거리 울돌목을 지나
사슴같이 바다를 건너는
하얀 영혼의 발끝이 눈부시다.
-병 속의 바다/강인한-
캄캄한 아가리 벌리고 가시만 남은
유령상어들이 덤벼든다.
왁자한 웃음소리 덜렁거리며 모자 쓴 유령들이
달려온다.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도망치다 혼자 남은 잭 스패로우
텅 빈 술병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투명한 유리병 속 바다가 출렁인다.
한 송이 꽃처럼 활짝
바다 위에 범선이 떠있다.
평생 쫓겨 다니는 사내 발바닥에
눌어붙은 그림자,
지긋지긋한 건달의 껍데기를 벗어나려
그림자는 몸부림친다.
오욕으로 찌든 사내의 몸을
발바닥에서부터 힘껏 벗어버리고
병 속의 바다를 향해
출렁출렁, 그림자 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메이드 인 바다/홍계숙-
바다는 거대한 통조림이다
낚싯대를 드리워 바다의 캔 뚜껑을 따는 오후,
잠시 통조림 속 진공이 흔들린다
진공포장 안쪽 푸른 물결의 싱싱한 살들은
수면 밖으로 나오면 산화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원터치 뚜껑을 닫고 바다는 또다시 밀봉된다
갯벌과 항구, 통조림 속 짙은 향기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 식탁 위에 풍성하다
이따금 뒤집어지는 태풍의 선순환으로
재 입고되는 신선한 생선살,
침몰된 유조선이 두른 기름띠에 바코드가 엉기면
순식간에 재고가 쌓이지만
바다의 깊은 안쪽은 늘 유통기한이 넉넉하다
정어리 통조림 속에 들어간 헤밍웨이
노인이 조각배를 띄워 뚜껑을 따던 바다
어부들은 그 물결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꺼내 먹으면 또 새롭게 채워지는 신선한 바다의 육질
커다란 저 통조림 용기에는
억척스런 어부들의 일생이 새겨져 있다
파도가 그려 넣는 바다의 바코드는
날마다 새로운 가격을 찍는다
-반지하 바다/박신규-
빗소리는 늘 비릿했고
축축한 햇빛은 짧지만 아늑했다
밤늦게까지 함께 일하고 함께 가난해도 좋았다
한밤 인쇄소 소음과 두통을 벗어놓고
'파주상회' 지나 '헌책'과 '철물점' 지나
비탈진 '물망초' 홍등 건너
숨차는 목련주택 반지하층
각시고둥 같은 여자와 살았다
맑은 가을날 소나기 듣는다고 쪽창을 닫을 때
까치발이 예뻤던 여자, 함박눈 내리는 밤엔
파도가 멀다고 썰물 때라고 했다
귀울음이 터질 때마다 라디오 백색소음을 높이고
사랑을 나누면 마른 가슴께에서
해조음이 흘렀다, 돌아가야 해 아무래도
바다를 버려서 고장난 거야, 쥐어뜯을 때마다
파리한 귓불에 맺히는 핏방울
목련에 닿는 달빛 주파수가 너무 높다는 밤
우는 소리를 밀쳐내고 잠들면
수평선에 베인 꽃잎들 피를 뿌렸고
썰물에 떠가는 귀를 줍다가 깼을 때는
이미 사라진 그 여자, 들리지 않았다
맥주 양주 소주처럼 오래된 골목을 지나
한없이 절망이던 잉크통 냄새를 지나
소음도 침묵도 다 파본 난 스물아홉
수색역 지나 경의선에서 조금 더 밀려난 곳
거기 반지하 바닷가 빈 방
그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이 있었다
고막이 터질 만큼 커지는 적막,
검게 무른 목련꽃 귓바퀴에선
바다 냄새가 낭자했다
-오팔지 바다 바깥 마을들/조 율-
이런 뢴트겐 사진은 어때요?
자꾸 까먹지 말고 기억하는 것은. 깜박이는 속눈썹, 그게 빗물이 다 새는 제각각의 슬레이트를 얹
고 사는 것이라고. 그 안으로 고였던 새파랗게 질린 수평선을 잠시 잊는 것은.
*어쩌지, 밑창이 접지력을 아는 듯 영영 이어지고 이어질 때. 잔물결 물빛이 물무늬를 덮어 펼쳐
진 *오팔지. 전조등과 순간 반짝 눈을 맞추고 사라지는 바리케이드 여럿과는 또 다른. 아주 살살
일렁이는 구김 없는 물살. 멀찌감치 뒷걸음질 치다 걷어 구겨서 바스락, 소리도 한번 내보고 싶은
바다 어때요? 오래전, 단내를 닮은 그 풍경.
확 뒤집어엎고 싶을 때 그런데도 전이 잘 부쳐질 때, 빨갛지도 않으면서 달궈진 프라이팬이 종일
따귀 맞은 우체통이라고 생각할 때. 흘러가 괜찮던 가요를 틀어막아 집어치우고, 가끔 남몰래 태업
중인 의자 굴리는 소리와 태엽소리가 들리는 때요.
그 물길, 나 없는 기억력이 돌아온대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이 거리를 걸어요.
* 1978년에 발매된 윤수일 3집 수록곡
* 오팔이나, 빛의 간섭현상을 연상시키는 사탕 포장지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