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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 고드름(草家氷柱)
江村漁家數茅屋(강촌어가수모옥)-강마을 어촌에 초가집들 처마 밑에는
籬下森森滿銀竹(리하삼삼만은죽)-하얀 죽순(竹筍) 같은 고드름이 가지런하네.
歸來此地足乘興(귀래차지족승흥)-복잡한 세속 떠나 여기 오면 흥이 나서
吟詩擧酒無休息(음시거주무휴식)-시 읊으랴 술잔 들랴 쉴 새가 없도다!
월산대군(月山大君)
망원정(望遠亭)의 고드름(氷柱)
오늘(2011.12.16) 서울 수은주가 영하 9도로 내려가니 합정동 망원정(望遠亭-喜雨亭) 처마에 고드름이 죽순이 거꾸로 솟아 나온 듯하다.
이 망원정(望遠亭)은 세종 형인 효령대군이 지었다고 알려졌다.
당시에는 “비가 내리니 기쁘다”는 의미인 희우정(喜雨亭)이름은, 가뭄에 고통을 겪던 중 세종이 농민들 형편을 살피기 위해 이 부근을 지나다가 마침 비가 내려 기쁜 마음에 직접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이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고치면서 “망원정(望遠亭)‘으로 바꾸었다.
사실 망원정(望遠亭)은 희우정(喜雨亭)이름보다 월산대군의 정회(情懷)가 많이 깃든 정자이다.
위의 시(詩)의 원제목은 “양화도의 눈(雪)을 밟는 다는 양화설(楊花雪)”인데
필자가 계절 분위기에 맞게 제목을 붙인 것이다.
위의 망원정 양화설(楊花雪) 시를 쓴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약설(略說)은--
조선왕조 7대 세조(世祖)는 왕자 2명을 두었는데 장자인 도원군(덕종)은 세자 때에 죽는다.
둘째 왕자 해양대군(海陽大君)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8대 예종이다.
예종도 왕위에 오른지 13개월 만에 죽는다.
후세사람들은 세자들이 이렇게 요절(夭折)한 것을 세조가 죄를
많이 지은 탓이라고 한다.
후일 의경세자(懿敬世子)인 도원군은 성종(成宗)2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追尊)된다.
13개월 만에 죽은 예종에게는 왕자 제안대군(齊安大君)이 있었다.
그리고 덕종(德宗)에게는 왕자 2명을 두었는데 장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과 왕자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다.
다음 왕위순서로서는 당연히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이 왕위를 계승하거나 아니면 덕종의 장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
이 왕위를 계승해야 되는데 생각 밖으로 덕종의 둘째 왕자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전격적으로 왕위를 계승한다.
이 자을산군이 9대 성종(成宗)이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한데는 정치적인 입김의 영향이다.
세조 수양대군의 공신(功臣)인 한명회(韓明澮)는 자기의 딸을
예종의 왕비와 성종의 왕비로 만들었다.
예종이 죽은 후 제안대군은 3살의 어린나이라 왕위계승이
불가능하고 월산대군(者乙山君)은 건강이 안 좋아 불가능하고
영민하게 보이든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전격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전부 한명회(韓明澮)의 정치적 계획에 의한 것이다.
당시의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라는 아무 실권도 없는 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바로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 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라는 유명한 시조로 널리 알려진 월산대군(月山大君)이다.
이로 인하여 월산대군은 세태(世態)를 원망하며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후 그는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하고, 망원정(望遠亭)이라 하여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필자 생각으로는 “망원정(望遠亭)”이라는 뜻은 멀리 대궐을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
마치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비운의 양영대군이 관악산 연주대(戀主臺)에서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王座)를 그리워한 것과 비슷한 의미 일 것 같다.
망원정이 있는 곳은 지금은 천주교 절두산 순교기념관(殉敎記念館)이 있는 곳이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다.
어쩌면 저 망원정의 고드름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흘러내린 눈물인지도
모른다.
☺농월